척약재집 서문
予少也遊於牧隱先生之門。坐客有若圃隱鄭先生,惕若齋金先生,陶隱李先生者。視其容儀。聽其談論。▓其爲一代之人物也。
내 어렸을 적에 목은선생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제자 중에는 포은 정(몽주)선생, 척약재 김(구용)선생, 도은 이(숭인)선생 같은 이가 있었다. 그 용모를 보고 그 말씀을 들으니 당대의 인물이 될만하였다.
自是心竊景慕焉。與之遊從者二十餘年。相許之分誠不淺矣。金先生將奉使遼東。予勸以一言。先生重違朝命。不敢請而去。卒有大理之行。不克復命。嗚呼惜哉。
이때부터 마음속으로 우러러 함께 왕래한지가 20여년이니, 서로 나눈 정분이 참으로 얕지 않다. 김(구용)선생이 요동에 사신으로 가고자할 때 내가 한 마디 권하였으나, 선생이 거듭 조정의 명을 어김에 감히 청하지 못하고 떠나 보냈다. 마침내 형관의 처형으로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아! 슬프다.
厥後十餘年間。圃隱,陶隱相繼淪沒。而牧隱先生亦已乘化矣。每念平生之好。不能不涕泗交頤也。今予謁告來鄕。拜掃先塋。留止旬日。府判君乃惕若齋之仲子。以予爲父。執待以厚。
그 뒤 10여년사이 포은, 도은이 연이어 돌아가고 목은선생 역시 벌써 돌아가셨다. 매양 평소의 우정을 생각함에 눈물이 턱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내가 고향으로 낙향하기를 고하여 선영을 돌보며 머문 지 열흘인데, 부판군 곧 척약재의 둘째아들이 나를 아버지로 여겨 대접하기를 후하게 하였다.
一日。奉其遺稿來示之曰。吾先子所著詩與文不爲不多。然以不滿其意。隨作而棄。幸此若干篇僅存。竊欲鋟梓而傳後。知吾先子者莫如子。請子幸題一言于卷端。
하루는 아비의 유고를 가져와 보이며 말하였다. “아버지께서 지으신 시와 문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뜻에 차지 못하여 짓는 대로 버리셨습니다. 다행히 약간의 작품이 겨우 보존되었으니, 그윽이 책자로 내어 후손에게 전승하고자 합니다. 아버지께 선생님만한 분이 없는 줄을 알기에, 선생님께 책머리에 한 말씀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予感其言。受而讀之。恍然若聆音聲而接辭氣矣。
내가 그 말에 감격하여 받아 읽음에, 황홀하여 (김구용선생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접하는 듯 하였다.
嗚呼。詩之道亦難矣哉。魏晉而上。作者去古未遠。然其不違於三百篇之意者鮮矣。詩止於唐。而唐人之音亦有始正變之異。其入於正音者亦不爲多矣。
아! 시의 도리가 어렵구나. 위진 이전에는 시인들이 옛날과 멀지 않았음에도 시경의 뜻을 어기지 않는 이가 적었다. 시는 당에서 정점에 올랐음에도 당인들의 음률 또한 좋고 나쁜 차이가 있으니, 그 바른 소리에 들어간 이가 역시 많지 않다.
況吾東方。地與中國相遠。風氣不同。言語亦異。苟非天之賦與高出於衆人者。安能變其固滯而近於正音哉。牧隱先生學於中國。卓爾有高明之見。其於東人之詩。少有許可者。獨於先生之作。有所嘆賞曰。平澹精深。絶類及菴 。詩而至於平澹精深。亦豈易哉。
더욱이 우리나라는 땅이 중국과 멀어 풍토와 기운이 다르고 말 또한 다르니, 진실로 천부적으로 무리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딱딱하게 막힌 것을 변화시켜 바른 소리에 근접할 수 있겠는가? 목은선생은 중국에서 공부하셔서 탁월하게 고명한 견해가 있으셨으니, 그 우리 나라 시인 중에 좋다고 인정하신 것이 적은데, 유독 선생의 작품에는 찬탄하고 칭찬하여, “평탄하고 고요하며 정밀하고 깊어, 무리보다 뛰어난 경지에 올랐다.”고 하셨으니, 시로서 그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又於衆作之中。嘗擧先生一句曰。可謂頂門上一針。信乎先生之詩格高出於一時。非他作者所能髣髴也。則此若干篇宜亟刊行。使夫學者有所矜式也。故不以文拙辭。
또한 어러 작품 가운데, 선생의 한 구절을 감상하여 말씀하기를, “정문 일침이라 할 만하다.”고 하셨으니, 선생의 시격이 당대에 우뚝 솟아서, 다른 작자들이 미칠 수 없는 것을 믿을 수 있으니, 이 약간의 작품이나마 마땅히 빨리 간행하여 배우는 이들이 모범으로 삼게하여야겠기에 내 조잡한 솜씨로 서문을 사양하지 못하노라.
建文元年九月旣望。奮忠仗義定社功臣,資憲大夫,政堂文學兼判都評議使司事,修文殿大學士,提點書雲觀事,晉山君浩亭河崙。序
건문 원년 9월 16일. 분충장의정사공신, 자헌대부, 정당문학겸판도평의사사사, 수문전태학사, 제점서운관사, 진산군 호정 하륜이 쓰다.
김구용 (金九容 1338∼1384 (충숙왕복위 7∼우왕 10))
고려시대의 문인. |
설명
帆急(범급) - 金九容
돛단배 빠르다
帆急山如走 범급산여주
舟行岸自移 주행안자이
산이 달려가는 듯 배는 빠르고,
배가 지나가니 언덕이 옮아간다.
異鄕頻問俗 이향빈문속
佳處强題詩 가처강제시
타향이라 풍속을 자주 묻고,
절경을 만나면 억지로라도 시를 짓는다.
吳楚千年地 오초천년지
江湖五月時 강호오월시
오나라와 촉나라의 천년 땅에,
강과 호수는 오월의 계절이로다.
莫嫌無一物 막혐무일물
風月也相隨 풍월야상수
볼거리 하나 없다 실어 말어라,
풍월이야 항상 서로 따르는 법이라네.
*金九容 1338(충숙왕 복위 7)~1384(우왕 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若齋).
첨의중찬 방경(方慶)의 현손이며,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이다.
16세에 진사가 되고, 18세에 등제하여 덕령부주부
를 지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이 중건되고
나서 민부의랑(民部議郞) 겸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어,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
崇仁) 등과 함께 성리학을 일으키고 척불숭유(斥佛
崇儒)에 앞장섰다.
시가와 문장에 뛰어났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
가 피어나온다"고 했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
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저서에 〈척약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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