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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43) 조선 최후의 문장가 이건창의 삶과 사상 上

회기로 2010. 1. 24. 19:17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43) 조선 최후의 문장가 이건창의 삶과 사상 上

 

ㆍ논객들이 첫손 꼽은 강화학파 효장

강화도에서 피어난 문장과 의리


조선의 팔도강산, 그 땅 어디에 역사의 흔적이 없는 곳이 있으며 그 땅 어디에 조선의 사상과 혼이 서려 있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모든 곳 중에서도 강화도는 특별하다. 고려시대에는 몇 대에 걸쳐 왕도(王都)로서 역사의 한복판이기도 했으나 고려인의 넋을 지키고 국가를 지켜내려던 항몽정신의 본거지였고 삼별초의 피나는 항쟁정신이 그대로 간직된 역사의 땅이다.

영재 이건창의 생가. | 사진작가 황헌만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서세동점의 외세가 물밀듯 몰려들어올 때에는 민족혼이 거세게 고동치기도 했지만 병자호란의 국가적 비극에는 얼마나 많은 충신열사들이 몸을 던지고 목숨을 끊으며 조선의 혼을 발휘했던 곳이던가. 의기가 펄펄 넘치던 투쟁의 혼만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정통의 유학사상에서는 크게 대접받지 못하던 소수파의 학문이면서도, 끝내는 크게 학문적 성과를 이룩해낸 ‘양명학’이라는 큰 학맥이 생성, 발전돼 우리 학술사에 얼마나 큰 빛을 발해주었던 곳인가. 포은 정몽주의 후손이자 정승 정유성의 손자로 효종의 부마 정제현(鄭齋賢)의 아우였던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1649~1736)가 강화도의 하일리에 숨어살면서 제자들을 모아 강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이유로 양명학, 즉 ‘강화학파’라는 독특한 학파가 이룩되기에 이르렀다.

강화도 출신으로는 최후의 강화학파의 효장이 다름 아닌 이건창(李建昌:1852~1898)이다. 대대로 이름난 벼슬아치나 학자들을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난 영재(寧齋) 이건창은 자가 봉조(鳳藻:鳳朝)요, 당호는 명미당(明美堂)이었다. 영재의 할아버지 사기 이시원(沙磯 李是遠:1790~1866)은 그의 아우 이지원(李止遠)과 함께 외국의 군대에 함락된 병인양요의 억울함을 참지 못해 형제가 나란히 목숨을 끊어 자결했던 당대의 의인이다.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른 고관대작으로 나라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버린 할아버지의 의혼을 이어서 영재도 나라를 위해서는 의로운 벼슬아치로 살았지만 끝내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명성을 얻어 의리와 문장이 함께 빛나는 역사의 땅으로 강화도를 자리매김해주었다.

이건창의 가계

조선 제2대 임금은 정종(定宗)이다. 정종의 별자(別子)에 후생(厚生)이라는 분이 덕천군(德泉君)에 봉해졌는데 그 후손들은 왕통을 이은 집안을 제외한 전주이씨 집안에서는 크게 현달한 사람이 많은 유명한 집안이었다. 인조 때의 판서에 오른 석문 이경직(石門 李景稷), 영의정에 오른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 형제가 대표적으로 유명한 분들인데 석문의 후손에는 높은 벼슬의 후손도 많았지만 특별히 뛰어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해 학술사에 큰 공헌을 남긴 분들이 많았다. 이광사·이광여·이광명 등이 학자로 이름이 높았고 실학자로서 크게 알려진 이긍익·이충익·이영익 등도 모두 그 집안 출신들이다. 연려실 이긍익은 이광사의 아들로 ‘연려실기술’이라는 대저를 남긴 분이었고, 이충익-이면백-이시원-이상학-이건창-이건승(李建升:1858~1924)으로 이어지는 학자들의 계통은 바로 이건창의 집안이 어떤 가문인가를 그냥 짐작하게 해준다.

영재의 문집인 ‘명미당집’.

강화도 초봉산(椒峯山) 아래에 살면서 초원(椒園)이라는 호로 불리던 이충익은 벼슬보다는 학자로 높은 이름을 얻었고, 그 아들 대연 이면백(垈淵 李勉伯)은 진사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고 다산 정약용 등과 교류가 있었던 당대의 학자였다. 그 아들이 이시원 판서, 판서의 아들이 이상학(李象學)으로 양산군수를 지냈고 그 아들이 이건창·이건승이고 그의 당질이 난곡 이건방(蘭谷 李建芳)으로 위당 정인보의 스승이었다. 모두 양명학을 계승한 강화학파의 주요 멤버들이었다.

이건창·이건승·이건방의 세 학자만으로도 강화도는 학문의 고장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가장 어렸던 이건방은 1861년생으로 1939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렇게 세월이 많이 흐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찾은 강화도의 의리와 학문은 크게 보이지 않고 매우 쓸쓸하기만 했다.

사기리(沙磯里)의 옛터를 찾아서

추석이 가까워오는 9월12일, 청랑한 가을 날씨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코스모스 길이 시원하게 뚫린 오후, 우리는 강화도로 건너가 이건창의 고향 마을 사기리를 찾았다. 그곳이 어떤 곳인가. 대대로 양명학을 배워서 가르치던 곳이요, 충정공 이시원이 과거에 급제해 이조판서에 오르고 나라가 위급해지자 아우와 함께 자결했던 의향이 아닌가. 이시원의 손자 이건창 형제들이 태어나 문장으로 천하에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조선의 당쟁사를 가장 정직하고 바르게 정리했다는 이건창의 저서 ‘당의통략’이라는 명저가 저술된 곳이다. 다행히 강화군 당국의 배려로 터만 남았던 그곳에 초가집으로 새롭게 복원해 영재 이건창이 살았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지금이야 모두 농토로 변한 곳이지만 당시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해변가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곳 어디에 영기(靈氣)가 서렸기에 그만한 인물들이 태어났을까. 영재의 생가는 마을의 입구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 입구에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가 영재의 생가를 살피려 왔다는 것을 알아챈 탓인지 묻지 않은 말을 했다. “이 집의 앞길은 아무나 그냥 지나는 곳이 아니여. 대감님 집이기에 말이나 가마는 타고 지나가지도 못하고 반드시 내려서 걸어가서도 안 되고 기어가야만 되었어. 우리 어머님이 시집오시며 가마를 타고 오시다가 이 집 앞에서는 내려 그냥 기어서 오셨다고 들었어!” 70이 넘은 어떤 노인의 말씀이었다. 이 한마디 말에 그때 그 시절 집안의 영화가 어느 정도였나를 금방 짐작하게 해준다. 이시원이 이조판서, 아들 이상학이 양산군수, 손자 이건창이 15세에 문과에 급제해 암행어사를 지내고 황해도 관찰사와 공조참판에 이른 집안이니 어떻게 홀대할 방법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다. 후손이 거처하지 않고 빈집으로 외형만 초가집이지 혼과 삶이 없는 집이어서 너무나 쓸쓸했다. 그 집에서 멀지 않은 건평리(乾坪里)의 영재 선생의 묘소를 들렀을 때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말문이 막혔다. 강화학파의 학맥을 잇고, 판서 이경직의 핏줄을 이어 할아버지 이조판서의 무릎에서 자랐고, 자신이 공조참판에 올라 조선후기 최고의 문장가이자 ‘당의통략’의 저자로 그만한 명성을 얻은 위인의 묘소가 이렇게 버려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인가. 아무리 도가 무너지고 인심이 변했다 해도 이렇게 돼도 되는 것인가. 생전에 사람 구실을 못하고 거지로 살다가 죽어간 사람의 묘소라고 해도 이렇게는 버려두지 못했을 것이다. 문화재 당국이나 행정 당국은 무엇을 하는가. 아니, 영재 이건창의 묘소가 어떤 민간인의 집 뒤꼍의 풀에 가려서 묘소인 것도 알 수 없게 버려져 있어야 되느냐는 것이다.

이건창의 친구들

망해가던 조선왕조의 끝자락, 대단한 위인들이 셀 수 없이 태어나 활동했건만 끝내 망국의 비운을 막지 못하고 나라는 망해버렸다. 의혼으로, 학문과 문장으로, 꺼져가던 조국의 빛을 회복하려 노력했던 대단한 인물들이 영재 곁에 모여 있었다. 해학 이기, 창강 김택영, 매천 황현은 영재와 함께 나라를 걱정했던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그리고 영재가 강화도에서 이웃에 살던 고관 출신 두 친구를 함께 거명했다. 이계 홍양호의 후손인 홍승헌, 하곡 정제두의 6대종손인 정원하는 두 분 모두 참판의 지위에 오른 분인데 이들은 세 사람이 연명해 상소를 올리며 나라를 제대로 바로잡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 일 때문에 모두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런 가까운 친구들이 있었기에 사후의 영재는 외롭지 않았다. 아우 이건승의 노력으로 영재의 문집인 ‘명미당집’ 20권이 중국에서 활자로 간행될 수 있었고, 김택영은 문집의 서문을 지어 영재의 인품과 문장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내렸고, 매천 황현은 영재의 죽음에 제문과 만사를 지어 슬픔도 표했지만 인물에 대한 평도 올바르게 내렸다. 이건승은 죽은 형의 행장을 지어 일생을 소상하게 밝혔고, 친구 이조참판을 지낸 홍승헌은 영재의 묘갈명을 지어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의 일생을 대체로 바르게 평하고 있다.

해학 이기(1848~1909)는 김택영의 문집인 ‘소호당고’의 서문에서, 조선 500년간 당·송나라의 문장을 이은 조선인으로는 월사 이정귀·계곡 장유·농암 김창협·연암 박지원·연천 홍석주·대산 김매순 등 5~6명뿐인데 이들을 이을 수 있는 사람은 이건창과 김택영 두 사람이라고 했다. 김택영도 영재의 문집 서문에서 조선 후기의 문장가로는 홍석주와 김매순인데 이들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이건창으로 조선 후기 3대가라고 지목했다. 조선 500년을 대표하고 조선의 끝자락을 상징할 수 있는 문장가가 바로 이건창이라는 것을 당대에 함께 글을 짓고 세상을 논했던 친구들이 사심없이 내린 평가였다면 그 이상의 어떤 평가가 필요하겠는가.

이건창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아우인 경재(耕齋) 이건승이다. 나라가 망하자 친구들과 함께 자결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죽기가 쉬운 일인가. 마침내 형의 친구이자 자신의 친구들인 홍승헌·정원하 등과 함께 가족을 이끌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풍찬노숙으로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나, 이제는 종적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너무나 슬픈 일이다.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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