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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42)번암 채제공의 경륜과 충성심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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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42)번암 채제공의 경륜과 충성심 下
입력: 2008년 08월 29일 17:43:26
ㆍ독과점 철폐 경제 살린 명재상

신서파의 수난과 벽파의 득세

번암 채제공의 묘소 앞에 서있는 어사뇌문비(御賜 文碑). 정조가 직접 애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 사진작가 황헌만
영조에서 정조로 이어지던 조선후기, 이른바 문예부흥기라는 밝은 역사의 시대를 이끌었던 노재상 번암대감이 세상을 뜨고 정조가 승하하자 밝고 찬란했던 역사는 큰 서리를 맞으면서 반동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오랫동안 궁중의 안방에 묻혀지내던 영조의 계비 정순대비가 11세의 어린 순조를 수렴청정하면서 모든 실권이 그에게 돌아가자 바야흐로 벽파의 시대가 왔다. 1762년 사도세자를 모함하여 뒤주에 갇혀 죽게 했던 주동자들이 대체로 벽파에 속한다.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할 일을 한 적이 없고 영조의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다고 여겼던 채제공 일파가 다름 아닌 시파였다. 시벽의 싸움은 대단한 당쟁이었다. 벽파의 방해로 천신만고의 어려움을 겪고 겨우 왕위에 오른 세손 정조는 자연스럽게 시파를 선호하지 않을 수 없었고, 채제공·이가환·정약용 등 시파의 유능한 신하들이 정조를 보필하면서 정조의 치세가 왔다. 그러나 정조의 승하는 이런 정치판도를 바꿔놓았다. 어린 순조를 대신한 정순대비의 집권으로 시파는 신서파, 즉 서양의 과학사상이나 종교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파와 공서파, 즉 서양의 모든 것은 ‘사(邪)’라고 규명하며 사를 물리치기 위해 신서파를 공격해야 한다는 정파로 갈리게 되었다.

정조의 장례를 마친 1800년 11월이 지나 1801년 신유년이 되자, 그 해 벽두부터 정순대비의 ‘척사윤음’이 내려 천주교와 관계되는 모든 사람은 역적으로 몰아 코를 베어 죽여야 한다는 법령이 반포되기에 이른다. ‘신유옥사’라는 전대미문의 대학살이 진행되었다. 어떤 기록에는 죽은 사람만 300여 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이가환·권철신·이승훈·정약종 등이 옥사하거나 참수 당했고 정약용 형제 등 수많은 사람이 귀양가는 핍박을 받아야 했다. 1801년 가을의 황사영백서사건으로 심지어 채제공까지도 관직을 추탈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그러나 역사의 반동은 또 다른 힘에 의하여 그 세력이 약화되는 과정이 있게 마련이다. 그 신유옥사 이후 18년째에 다산 정약용은 귀양지에서 돌아왔고, 23년째인 1823년에 채제공은 영남 선비 1만여 명의 상소에 의하여 다시 모든 관작이 복권되고 신원될 수 있었다. 그 때에야 ‘번암집’도 간행되어 빛을 보게 된다.


직신으로, 경륜 높던 영의정

1788년 69세 노령의 나이에 우의정에 올라 1798년 79세로 모든 벼슬에 물러나던 10년 사이, 번암은 정승의 지위에 번갈아 오르며 최고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1791년 신해년에는 조선왕조 상업사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진다. 바로 채제공이 도고법(都고法)의 폐지를 주장한다. 독점적인 매점(買占)행위가 ‘도고’인데 정부에서 인정해준 ‘육의전’ 이외의 ‘시민도고법’이라는 독점행위가 난무하여 상거래의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고, 힘없고 약한 일반 백성들에게는 상거래가 매우 힘들고 어려웠다. 채제공은 이런 악폐의 철폐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임금이 이것을 받아들이자 마침내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는 획기적인 조치가 이루어져 조선후기 상업사에 큰 변혁을 가져오기에 이른다. 모두 채제공의 정치적 경륜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18세기 후반 중국을 통해서 서양의 문물이 급속하게 조선으로 밀려들어왔다. 특히 연암 박지원 일파인 북학파에서도 중국으로부터 서양의 과학사상이나 이용후생법을 배워오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던 때가 그 무렵이다. 박제가의 ‘북학의’ 저술이 있던 시절이다.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남인계열에서도 서양의 과학사상은 반드시 수입하여 이용후생의 방도가 강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른바 ‘신서파’가 그들인데 매우 진보적인 그룹이었다. 이가환·정약용·이기양·권철신 등이 그들이고, 이들의 후원세력이자 지지세력의 중심이 채제공이었다. 뒷날 이가환이나 정약용도 그랬듯이 채제공은 서양사상인 천주교를 신앙으로 믿는 문제에는 절대로 반대입장에 있었다. 서양의 과학사상이나 이용후생의 논리가 그 무렵 그 정도로 도입되어 발전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채제공의 힘이 가장 크게 적용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떤 불의나 부정직에도 절대로 굽힐 줄 모르던 채제공, 특히 홍국영의 세도에 억울하게 당한 곧고 바른 사람은 모두 신원하여 명예를 회복케 했던 것도 채제공의 노력에서 왔고, 유능한 인재들을 강력히 추천하고 발탁하여 제대로 행정과 통치가 이룩되도록 임금을 설득하는 경륜을 지닌 사람도 채제공이었다.


채제공의 묘소와 영정

생가나 종가가 유지되지 못한 선현들의 유적지를 찾기는 어렵다. 그만한 일세의 정치가 채제공의 유적지를 찾기 어렵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다행히 근래에 6대 후손인 채호석(蔡虎錫)씨와 그의 부인 김양식(金良植) 시인이 어렵게 보관해오던 유물과 유품을 모두 수원시의 화성사업소에 기증했기 때문에 국보급 유물들을 접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가장 덥다는 금년 8월8일은 말복날이었다. 우리 일행은 화성사업소의 김준혁 박사 안내로 번암의 유적지를 찾아나섰다. 정조는 자신의 영정을 그리게 한 후, 어명으로 채제공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궁중에 보관하고 여본은 본가에서 보관토록 하였다. 당대의 화가 이명기가 어진을 그린 솜씨로 73세의 노재상 채제공의 초상화를 그렸다. 살아서 천하를 호령이라도 하는 듯한 품위 있고 유순한 모습이 너무나 너그럽게 보인다. 어떻게 이렇게 새것처럼 온전하게 보관될 수 있었는지, 후손들의 지극한 정성에 감복할 뿐이다.

이런 화상에 바친 정약용의 찬양시는 채제공의 일생을 넉넉하게 설명해준다.



바라보면 근엄해 무섭게도 보이지만

대면해보면 유화하여 뜻이 잘도 통하네

고요히 계실 때야 쌓아둔 옥이나 물에 잠긴 구슬 같으나

움직였다면 산이 울리고 바다가 진동하도다

거센 파도 휘몰아쳐도 부서지지 않고

돌 무더기 짓눌러도 닳지를 않네

아무리 짧고 길며 작고 큰 창날이 겨누어도

정승으로 발탁됨을 막지 못했네

그 웅위하고도 걸특한 기개는

천 길 높이 깎아지른 절벽의 기상이었지만

남을 해롭게 하거나 사물을 해치려는 생각은

조금도 마음속에 두질 않았네

군자답도다 이 어른이여

정약용의 ‘번옹화상찬(樊翁화像贊)’



이런 분 아니면 백성들이 그 누구를 믿겠는가. 평생에 아들처럼 귀여움을 받았던 정약용은 평생의 은혜를 이 화상찬으로 갚았다. 42세 연상이던 번암, 정약용은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10세 연상인 번암을 가장 경륜 높은 정치가로 여기며 아버지나 스승처럼 따르며 많은 것을 배웠다. 정약용의 꿈은 채제공 같은 국가 원로이자 대신이던 재상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뜻과 같지 않아, 재상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희대의 학자로 남고 말았다.

1월18일에 운명하고 아직 상중이던 한 달 뒤인 2월19일자로 임금의 교지가 내렸다. 의정부 영의정, 경연·홍문관·춘추관·관상감의 영사(領事)를 지냈고 규장각 검교제학을 지낸 채제공에게 문숙공(文肅公)이라는 시호를 증한다는 내용이다. 영의정에 문숙공, 그만하면 최고 정치인·문신에 맞는 시호임에 분명하다


용인의 묘소를 찾아

화성사업소에서 유품과 유물을 살펴본 뒤 우리는 또 용인시 처인구 역북리에 있는 묘소를 찾았다. 참으로 더운 복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꼭 한번 찾아보고 싶었던 번암대감의 묘소에 올랐다. 그만한 학식·국량·인품으로 조선 500년의 대표적 재상의 묘소에 참배하는 일은 오래 전부터 바라던 소망이었다. 그래도 볼품 있고 소박하게 꾸며진 묘역이나 묘소, 그렇게 서운한 생각은 없었다. 입구에 비각으로 단청된 건물 앞에 ‘어사뇌문(御賜뢰文)’이라는 제목 아래, 480여 글자에 이르는 장문의 애도문이 있었다. 장례일에 정조가 직접 글을 짓고 써서 매장하기 전에 낭독하고 뒤에 묘소 앞에 비로 세우도록 명령하였기에 지금은 ‘뇌문비(뢰文碑)’라고 알려진 세상에 드문 빗돌이다. 번암의 죽음이 얼마나 애통했기에 일국의 제왕이 직접 애도문을 짓고 글씨까지 썼다는 것인가. 대단한 일이다. 그만큼 채제공은 크고 높았다.

묘비로 세워져 있고 ‘번암집’에도 실려 있지만,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도 ‘문숙공 채제공의 장례일에 치제한 글’이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의정부영의정 규장각제학 화성부유수 장용외사 사시(賜諡) 문숙공 채제공의 장례일에 규장각 신하를 보내어 그 영전에 대신 영결을 고하게 하노라”라고 풀어쓰고는 네 자로 된 120줄의 애도시이니 480자로, 500여 글자에 이른다는 정조의 말에 부합하고 있다. 세손시절부터 재위 24년 동안 가장 가깝게 믿고 의지하며 함께 30년의 정치역정을 그대로 묘사하고, 우뚝 홀로 서서 어떤 세속의 일에도 흔들림 없던 군자(君子)라고 추앙하는 글을 썼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완역한 ‘홍재전서’에 온전하게 실려 있으니 채제공의 일생은 뛰어난 학자군주 정조의 글솜씨에서 그대로 살아있게 되었다.

“사람과 함께 없어지지 않는 것은/서가에 가득한 문고(文稿)이니/인쇄에 부쳐/장차 오래 전하게 하려네/친히 뇌문(뢰文)을 지으니/오백여 말일세/평소의 일을 두루 서술하니/나의 글에 부끄러움은 없네/아들 홍원(弘遠)에게 이르노니/선친 욕되게 말고 그대로 따르라.”

이렇게 글을 마쳐 자신의 애도의 정을 토로하였다. 신도비도 웅장한 꾸밈도 없는 단조롭고 아담한 번암의 묘소, 정조대왕의 뇌문 속에 그의 일생이 살아있고, 문집과 왕조실록, 홍재전서에 시와 문이 전해지고 있는 한, 그는 조선의 탁월하고 뛰어난 명재상으로 길이 빛나리라.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출처 : 기산인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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