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29)천재 실학자 존재 위백규의 학문세계上 | ||
입력: 2008년 03월 07일 17:31:23 | ||
“뜻을 세우고 학문을 밝히라” 누구에 의하여 호칭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오래 전부터 조선왕조 중엽 이전에는 호남에 3걸(傑)이 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3천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기묘사화(1519)에 연루되어 높은 벼슬에도 오르지 못하고, 문학이나 학문에 큰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 불행하게 생을 마쳤던 사람들이 3걸로 호칭된다. 화순의 동복에 살았던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 : 1483~1536), 해남의 유성춘(柳成春 : 유희춘의 형), 고산 윤선도의 선조인 귤정(橘亭) 윤구(尹衢 : 1495~1542)가 바로 그들인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옥당 벼슬에 호당에 들어간 명사들이었으나, 사화(士禍)에 좌절하고 말았기 때문에 세 걸물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존재의 아버지와 존재가 살았던 영이재 <사진작가 황헌만>
신경준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에 올라 세상에 큰 이름을 날렸으나, 황윤석과 위백규는 과거에도 급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오로지 학문적 업적 때문에 임금의 은혜로 시골의 재야학자로서는 그래도 낮은 벼슬이나마 역임할 수 있던 행운을 얻기도 했었다. 위백규와 황윤석은 비슷한 연배로 서로 교류까지 하면서 학문을 논하였고, 기호학계 성리학의 대가들의 제자이기도 했다. 위백규는 병계 윤봉구(尹鳳九 : 1683 ~ 1767)의 문인으로 성리학에도 밝았지만, 시대적 진운에 눈감지 않고 실학에 전념했던 학자였다. 이재 황윤석은 미호 김원행(金元行)이라는 노론계 성리학자의 제자로 실학에 큰 업적을 남겨 이채로운 학자였음이 분명하다. 10세 이후에는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여 천문(天文)·지리(地理)·복서(卜筮), 율력(律曆)·선불(仙佛)·병법(兵法)·의약·관상학·배와 수레·공장(工匠) 등 온갖 기술에까지 꿰뚫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모두가 높은 수준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천재였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25세에 병계 윤봉구 선생에게 집지(執贄)한 제자가 되어 잡다한 예전의 학문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성리학에 침잠했다”고 하여 벼슬할 생각보다는 자신의 수양에 더 치중하는 학문에 힘썼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침내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건질 방책까지 강구하여 체용(體用)이 구비된 학문에 통달했으니 대표적인 저서가 ‘정현신보’(政絃新譜)라는 책이라고 설명했다.
위백규의 저서 ‘환영지’( 瀛誌)는 실학자의 독창적인 책이었다. 높은 학문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지방관들이 위백규를 등용할 것을 임금에게 상주하자 69세 때부터 벼슬이 내리기 시작했다. 부사용(副司勇)의 낮은 벼슬이 내려지면서 저서인 ‘환영지’를 나라 임금에게 올리라는 명이 내려졌다. 70세에는 나라로부터 ‘환영지’ 이외의 모든 문집을 올리라는 명이 내려졌고, 지은 글을 모두 올렸더니 선공감(繕工監) 부봉사(副奉事)라는 벼슬이 내려졌고, 오래지 않아 학행으로 천거받아 옥과현감(玉果縣監)에 제수되었으니 70고령의 노년기에 임금의 알아줌을 입었었다. 지금이야 담양군 옥과면이지만, 당시에는 당당한 고을인 옥과현이었으니, 시골의 선비에게 수령의 벼슬이 내리는 일은 역시 대단한 학자가 아니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위백규가 세상을 떠난 그해에는 장흥에서 멀지 않은 순창에서 노사 기정진이 태어났고, 위백규가 세상을 뜨고 3년 뒤인 순조 1년 1801년 겨울에는 장흥에서 멀지 않은 강진에 40세의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로 도착했다. 실학자 위백규의 학풍이 장흥·강진 일대에 퍼져 있을 때에 다산 정약용의 유배살이가 시작되었던 것은, 구체적 교류는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어떤 영향이 있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그가 살아가던 조선 후기는 탐관오리들이 날뛰고 전정(田政)이 문란하여 서민들은 가난과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나라 안에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평소에 율곡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존중했던 그는 임금에게 올린 ‘만언봉사’(萬言封事)나 ‘봉사’ 등에는 제도를 개혁하고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뜨거운 애국심과 애민정신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만언봉사’에서 위백규는 여섯 조항의 정책을 건의했다. 첫째 성지(聖志)를 세우고 성학(聖學)을 밝힐 것, 둘째 보필할 신하를 제대로 고르고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를 발탁하라고 했다. 셋째 염치를 장려하고 국가의 기강을 떨쳐야 한다고 했다. 넷째 선비들의 습관을 바르게 하고 지나친 경쟁심을 억제토록 했다. 다섯째 탐관오리들을 의법처리하고 사치풍조를 금해야 함을 논했다. 여섯째 옛날의 옳은 제도를 살려내고 폐단 많은 법제는 뜯어고치자고 주장했다. 마지막 법제개혁의 주장은 200년 전 율곡 이이가 주장했다면서 그런 정신을 이어받아야만 나라가 제대로 통치된다는 경세논리를 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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