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선생의 묘소와 사당 전경. 왼쪽 아래는 성호사설. <사진작가 | 황헌만>
조선후기 18세기의 대표적 실학자는 성호 이익이다. 반계 유형원이 17세기의 학자라면 다산 정약용은 19세기 최고 학자 가운데 한 분이다. 성호가 일생 동안 반계의 학문을 천착하고 정리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완성했듯이, 다산은 일생 동안 성호의 학문을 천착하고 연구하면서 조선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한우근 교수는 성호학문을 가장 넓고 깊게 연구한 학자였다.
“평생을 두문분출하며 학문에만 몰두하였던 성호의 식견은 넓고 깊었다. 천문·지리에서부터 일반 민속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의 학문과 덕망은 널리 알려져서 따라서 배우는 사람이 늘어나 하나의 ‘학해(學海)’를 이루었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모든 강물이 흐르고 흘러서 큰 바다로 들어오듯이, 성호의 넓고 깊은 학문 때문에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학자들이 ‘성호장’으로 모여들어서 학문의 바다를 이룬 곳이 성호학파였다는 뜻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평생 국학연구에 몸 바치고 계시는 이우성 교수도 “실학의 개척자로서 실학의 가치를 확고하게 정립시킨 학자”라고 성호의 학문을 찬양하고 있다.
성호의 학문에 대한 평가는 근래의 학자들에게서만 나오지 않았다. 성호장에서 함께 생활하며 제자로서 성호의 학문을 익힌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학문적 업적과 덕행에 대하여 공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40년 가까이 성호를 모시고 학문을 닦은 조카 정산 이병휴(貞山 李秉休)는 성호의 가장(家狀)과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성호의 삶과 사상, 학문적 업적까지 유감없이 서술하여 성호에 대한 기본적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병휴가 내린 성호학문의 결론은 이렇다.
진부(陳腐)한 선비들과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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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대요(大要)를 거론해보면, 경학(經學)은 주자의 집주(集註)를 경유하여 육경(六經)의 본뜻에 거슬러 올라갔는데 옛날의 유자들이 논하지 못했던 것을 주장한 바가 많다. 예(禮)에 대한 이론으로는, 반드시 사치는 버리고 검소함만 따랐으며, 경제정책을 논함에는 지위 높은 고관의 재산은 덜어내고 지위 낮은 서민들에게는 이익이 되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했다”라는 평가다.
다시 부연하여 설명하면, 경전에 대한 연구는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여 선진시대의 고경(古經)을 두루 연구했는데 주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미처 밝히지 못한 새로운 논리를 개발해냈다는 것이다. 주자학에 매몰되었던 당시의 일반 유자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새 이론을 개발하여 새로운 학설을 첨가한 경학연구라는 것이다. 이른바 ‘번문욕례’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의 예학은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웠다. 예대로 지키고 실천하다가는 딱 망하기 십상인 세상이었다. 그런 이유로 성호는 모든 예를 간소하고 절약하게 지켜야 한다면서 가능한 한 검소한 것만 따르고 사치스럽거나 호화로운 예는 모두 삭제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실용적이고 실사구시적인 논리가 제대로 실행되는 부면이다. 경제정책의 기본도 매우 진보적이다. 빈익빈·부익부의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기본 목표 아래, 가진 자의 것을 덜어다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보태주는 정책, ‘손상익하(損上益下)’의 탁월한 경제논리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래서 성호의 학문이나 사상은 일반 세상의 유자들의 진부하고 무용(無用)의 공언(空言), 즉 실현 불가능한 논리들과는 분명하게 달랐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성호의 학문이 다산 정약용의 ‘다산학’의 원류이자 바탕이라는 주장이 증명되는 것이다. 성호가 옛날의 유자들이 주장하지 못한 새로운 경학논리를 주장하여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던 점이, 곧 다산학이 성호학문과 주자학을 뛰어넘어 다산경학이라는 독창적인 실학적 경학사상이 정립되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가진 자의 부는 가능한 덜어내고 없는 사람에게는 보태주려는 ‘손상익하’의 경제정책이야말로 다산 경제학의 기본 요소였다. 다산의 유명한 토지제도론인 ‘전론(田論)’이나 ‘정전의(井田議)’ 등은 바로 성호의 경제정책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진부하고 무용한 공언이나 일삼던 성리학자들의 관념적인 유희와는 다르게 실질·실용·실사구시적 실학사상을 정립했다는 주장이 여기에서 부합되고 있다.
문인 윤동규의 행장
소남 윤동규는 성호 문하의 큰 학자로 성호의 행장을 기술했다. 성호의 일생을 차례대로 서술하고 그의 학문적 업적과 공업에 대하여도 빠짐없이 자상하게 기록했다. 자신의 말대로 이병휴의 가장에서 8~9할을 인용하여 기술했노라면서 이병휴를 포함한 많은 제자들의 선생에 대한 주장을 종합하여 적었노라고 했다. 그러나 윤동규는 성호의 죽음에 한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슬픔이 조선 인민의 슬픔임을 토로하였다. “한 차례 시행해보지도 못하고 뜻만 품은 채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라고 애통한 말을 남겼다. 이것은 성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학자들의 사상과 철학이 부와 권력에만 집착했던 집권층이나 벼슬아치들에 의하여 천대받고 말았던가. 반계·성호·다산의 그 높은 사상과 철학이 현실을 개혁하고 백성들이 편하게 살아갈 정책으로 전혀 구현되지 못했음은 역사의 비운이자 조선인민의 불행이었다.
제자 안정복의 『동사강목』
성호학파에는 우파와 좌파로 나뉜다는 학설이 있다. 이우성 교수의 주장이다. 다산 정약용은 오래 전에 성호 가문의 찬란한 학문역량에 대한 찬탄을 발한 적이 있다. “성호선생은 하늘에서 솟아나고 사람 중에서 빼어나며 도덕과 학문이 고금에 초월했던 분이라 자제들 중에서 직접 학문을 배우고 익힌 사람들이 모두 대유(大儒)로 성장했다. 조카 이병휴는 역학(易學)과 예학(禮學)에, 아들 맹휴는 경제와 실용학문에, 조카 이용휴는 문장학에, 족손 철환은 박식으로, 종손 삼환은 예학으로 뛰어나고, 손자 구환(九煥)도 할아버지를 이어 명성을 날렸다”라고 했던 것처럼 집안 전체가 ‘학해’를 이루기도 했지만, 제자 중에서도 가장 크게 성호의 학문을 이은 분은 순암 안정복이었다.
안정복이 40대에 완성한 역사책인 ‘동사강목’은 성호의 의견을 대체로 반영한 안정복의 저서다. 성호와 순암이 주고받은 많은 편지를 분석해보면, 동사강목을 저술하는 과정에서 많은 질문서를 순암이 성호에게 보냈으며, 성호의 답변에 따라 내용에 많은 보충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성호가 가장 믿고 사랑했던 제자 안정복. 성호라는 스승을 가장 존숭하면서 광주의 경안에서 안산의 성호장까지 100여리의 먼 길을 네 차례나 직접 찾아가 학문을 물었고, 이후 수없이 많은 편지로 학문을 논했던 제자가 안정복이었다.
안정복은 성호의 우파 제자다. 그가 성호의 뜻에 따라 ‘동사강목’을 저술하고, 성호의 대표적 저서인 ‘성호사설’을 수정가필하고 요령 있게 정선한 ‘성호사설유선’이라는 대작을 편찬하였다. 순암 문하에서도 제제다사들이 배출되었다.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도 그 문하에 출입했던 기록이 있다. 대표자는 하려 황덕길이고 하려의 제자가 성재 허전(許傳)으로 조선 최후의 성호학파의 큰 학통을 이었다.
성호문하의 좌파 권철신
성호는 일찍부터 서양 학문과 사상을 접했다. 특히 서양의 과학사상에는 전적으로 크게 찬성하면서 서양인들의 우수성에 대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서양 사상으로 천주교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성호문하의 좌우파는 여기서 갈리고 있다. 서양의 과학사상에는 그런대로 수긍하지만 곧 난리를 당하고 파멸될 것이 분명한 천주교사상에는 절대로 승복할 수 없다는 부류가 우파에 속한다. 좌파의 효장은 성호문하에서 가장 젊은 층에 속하던 녹암 권철신이다.
성호의 비판적 주자학을 넘어 새로 경학논리를 수립한 학파다. 서양의 과학사상은 물론, 천주교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부정적인 태도를 밝히지 못했던 학자들이 권철신과 함께 했던 좌파다. 정약전·정약용도 애초에는 그 일파였으나 가장 철저한 좌파는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순암의 사위)이나 이벽이 그 학파의 효장이었다. 물론 그들은 순암 안정복의 예언대로 1801년 신유옥사에 의해 철저하게 파멸하고 말았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불꽃으로 변하듯이, 천주교로 파멸한 성호의 좌파들은 다산 정약용을 통해 실학사상으로는 큰 공업을 이룩했으나, 성호의 학통을 지키고 학문을 전파한 계승자들은 우파에 속하는 안정복 문하의 학자들이었다. 건전한 보수 우파는 그런데서 학문 계승의 큰 역할도 해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전통시대의 평가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성호의 큰 학파는 다산 정약용으로 집결된다. 16세에 성호의 유저를 읽어보고 학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던 다산. 평소에 “내 학문의 큰 틀은 성호를 따라 사숙(私淑)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 많다”라고 했던 대로 성호가 뿌린 실학사상은 다산을 통해 제대로 집대성되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중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스스로 생각해보면, 우리들이 천지의 웅대함과 해와 달의 광명함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성호선생의 힘이었습니다”라고 갈파했듯이, 조선의 가장 진보적 논리이자 대표적 사유의 한 체계인 실학사상은 성호를 거쳐 다산에 이르러서야 구체적 논리로서 민족의 지혜로 자리잡게 되었다. 반계·성호·다산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진보성이, 언제쯤 활짝 꽃을 피우고 제대로 열매를 맺을 것인지. 역사와 사회의 겉에 우파만이 판치는 지금 우울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