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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00리 길, `회니시비`의 현장을 가다

회기로 2010. 1. 24. 19:21

 

100리 길, '회니시비'의 현장을 가다
노론과 소론의 영수, 송시열과 윤증
09.09.13 16:32 ㅣ최종 업데이트 09.09.13 16:32 서부원 (ernesto)

회니시비(懷尼是非). 조선 중기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 그의 제자 윤증 사이에 벌어진 사상적 갈등을 일컫는 말이다. 이른바 조선 후기 사색당파로 분열되고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 역사적 사건이지만, 실은 두 학자의 감정적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리학이 생활규범으로서 서슬 퍼렇던 시절, 완고한 원칙주의자였던 송시열과 변화된 국제 정세에 유연하게 대처하고자 했던 현실주의자 윤증은 어쩌면 스승과 제자로서 만나서는 안 될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스승을 드러내놓고 비판한 20여 년 터울의 윤증의 태도는 성리학적 사회 질서 속에서 배사(背師)했다는 꼬리표를 뗄 수 없었다.

 

노론의 송시열과 소론의 윤증

 

그러나 역사가 알려주는 '야사' 같은 이야기는 두 사람의 사람됨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송시열은 예송논쟁 과정에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였는데, 송시열의 친구이자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는 당시 윤휴의 주장을 옹호했다. 윤선거가 죽자 아들 윤증은 스승에게 찾아가 묘갈명을 부탁했지만, 송시열은 성의 없는 글로 윤선거에 대한 인간적인 서운함을 드러냈다.

 

송시열에게는 친구도, 제자도, 자신의 원칙과 주장에 반하면 가차 없이 내칠 수 있는 그런 존재였던 셈이다. 끝내 윤증도 스승과 대립하며 사제지간이라는 굴레를 벗어버렸고, 정치적, 학문적으로 성장해 일가를 이룬 붕당의 영수로 발돋움했다.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은 이때 스승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과, 제자 윤증의 주장에 동조하는 '소론'으로 갈리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끊임없이 줄서야 했고, 권력의 부침에 따라 권세와 목숨을 맞바꿔야 했던 조선 후기의 이른바 '환국의 시대'도 여기서 비롯됐다. 정조의 급서 직후 세도가문을 중심으로 한 노론이 득세할 때까지 이 두 세력의 갈등은 곧 조선왕조 지배계층의 역사였다.

 

이처럼 두 사람의 견해차는 극과 극이지만, 그들의 삶을 더듬어볼 수 있는 자취는 채 100리도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송시열이 말년에 내려와 후진을 양성했던 '남간정사'와, 온갖 벼슬을 물리치고 낙향해 머물렀던 백의정승 윤증의 고향집, '명재고택'이 자동차로 40여 분 남짓한 거리에 남아있다. '회니시비'라는 말도 송시열이 머물렀던 회덕(현재 대전광역시 대덕구)과 명재고택이 자리한 니성(현재 논산시 노성면)의 논쟁이라는 데서 붙여진 것이다.

 

   
▲ 남간정사 연못과 숲에 에워싸인 남간정사의 모습. 우리나라 양반 정원 건축의 백미로 손꼽히는 곳이지만, 찾는 발길이 뜸해 을씨년스럽다.
ⓒ 서부원
회니시비

 

송시열의 남간정사

 

남간정사는 경부고속국도 대전 나들목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현재 송시열의 호를 딴 '우암사적공원'으로 잘 정비돼 있어 찾기도 쉽고, 별도의 입장료도 없어 인근 주민들의 휴식 공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송시열의 사당인 맨 위 남간사를 중심으로 서원 배치를 따라 계단식으로 꾸며놓았는데, 규모는 크지만 대개 10년 남짓한 새 건물들이라 예스러운 맛은 느낄 수 없다.

 

특히 이곳의 주인공이라 할 남간정사는 공원 입구의 왼쪽 구석에 숨듯 가려져 있어 잔뜩 주눅이 든 퇴락한 모습이다. 자물쇠가 녹슨 채 잠겨 있어 건물 안으로는 들어가 볼 수 없고, 개구리풀이 못을 덮은 소담한 초록빛 정원만이 친구가 되어주고 있을 뿐이다.

 

   
▲ 남간정사의 대청마루 대청마루 아래 물길을 내어 계곡물이 흐르도록 했다. 제법 운치있는 발상인데, 안에 들어가 밖을 내다볼 수 없도록 문이 굳게 잠겨있다.
ⓒ 서부원
회니시비

기실 이곳은 조선 후기 한 때 지배계층은 물론, 사회 전체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권력의 심장부였다. 송시열이 벼슬에서 물러난 말년에도 정사를 논하고 자문을 얻기 위해 수없는 정치가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곳이었다.

 

찾는 발길조차 뜸한 지금의 남간정사에서 대학자의 여유로움은 찾을 수 있을지언정 막후에서 조선 사회를 경영하려 했던 노쇠한 정객의 모습은 느낄 수 없다. 뒷산의 샘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대청마루 밑을 지나도록 한 독특한 조경과 건물 주변 아름드리나무를 쓰다듬는 가을바람 소리에서 옛 주인의 완고함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 양반 건축 조경의 백미로 손꼽히는 곳이지만, 외려 모함을 받아 유배 온 가엾은 선비의 모습처럼 스산하고 처연하다.

 

수많은 정적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 또한 정적에 의해 사약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는 외롭지 않았다. 살아생전 그는 '우암'이었지만 후학들에 의해 '송자(宋子)'로 추앙되었기 때문이다. 공구가 공자가 되고 주희가 주자로 불렸듯, 송시열의 위상은 대학자를 넘어 군자의 반열이라고 여긴 것이다. 대의명분을 중시한 대학자이자 타협을 모르는 편벽된 정치가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그의 파란만장했던 생애가 이 아름다우면서도 을씨년스러운 연못에 그림자 되어 담겨있다.

 

   
▲ 명재고택 전경 사랑채 왼쪽이 중문이며 그 뒤로 현재 명재의 13대손이 살고 있는 안채이다. 아름답고 모범적인 고택이다.
ⓒ 서부원
회니시비

 

   
▲ 명재고택의 사랑채 높은 석축 때문에 위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처마선 짧은 지붕과 주변 경관은 충분히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 서부원
회니시비

 

윤증의 명재고택

 

송시열의 남간정사와는 달리 그와 척을 진 제자 윤증의 옛집은 보란 듯 화려하지는 않지만, 전혀 꿀릴 것 없다는 듯 당찬 모습이다. 그건 아마도 집이 지어진 이후 지금껏 후손들이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대개 고택들은 오랫동안 방치돼 쇠락했거나, 사람이 떠난 채 관리만 되어 박제화된 느낌이지만, 이곳은 전혀 그렇지 않다. 고택이 어떻게 유지되고 관리되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 와보기 전 사실 윤증을 '미워했었다'. 스승을 버리고 죽인 패륜아라는 인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쨌든 스승의 가르침을 배신과 복수로 갚았다는 건 시공간을 떠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명재고택 주변을 서성이며 윤증의 선택에 수긍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살림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준다고 하질 않는가.

 

   
▲ 사랑채 앞 석축 위의 조경 사랑채 대청마루 바로 아래에도 조그맣게 관상용 정원을 가꿔놓았다. 앙증맞고도 섬세한 명재고택의 백미 중의 백미다.
ⓒ 서부원
회니시비

스승에 맞설 만큼 반골적 기질을 지닌 강골은 아닌 듯 싶었다. 후손들이 가꾼 것일 테지만, 고택 옆에 꽃밭처럼 잘 가꿔놓은 장독대의 살가운 모습과 배롱나무가 우산처럼 연못을 덮고 선 참 예쁜 정원은 여성스러움이 가득하다. 심지어 사랑채 툇마루 앞 석축위에조차 분재마냥 미니 정원을 가꿔둔 윤증가의 마음 씀씀이가 참 곱게 다가온다.

 

여느 종가집의 사랑채라면 지붕의 처마선을 길게 늘여 빼고 멋을 부렸을 텐데, 마치 갓이 아닌 패랭이를 쓴 평민의 모습을 하고 있어 정겨움마저 든다. 권위의 상징인 기둥조차 자투리 나무를 활용하려한 뜻이었는지 사다리꼴로 홈을 파 끼워 맞춘 공력이 놀랍다.

 

여성의 공간인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주변에는 모과나무가 탐스럽다. 중문을 들어서려니 '쓸모없는' 벽이 덧대어져 앞을 막고 있다. 안채로 가려면 돌아가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중문에 여닫이문이 없으니 이 벽이 없다면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게 될 것이다. 결국 여성의 공간을 살짝 가려 배려하려는 의도가 담긴 '어엿한' 건축물인 셈이다.

 

명재고택은 지어진 지 올해로 꼭 300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스러지고 다시 세워지는 굴곡을 겪었겠지만, 그때마다 흐트러짐 없는 야무진 모습과 특유의 여성스러움을 잃지 않은 듯하다. 마치 고택 주변의 분위기는 뿌리 깊은 가훈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 명재고택의 장독대 박제화된 여느 고택과는 달리 살갑게 느껴지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기업형(?)' 장독대이다. 그 입구에 수문장처럼 지키고 선 돌솟대가 이채롭다.
ⓒ 서부원
회니시비

 

회니시비의 두 노학자를 다시 떠올리다

 

윤증이 머물렀던 사랑채의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송시열을 다시 떠올렸다. 그를 이 집을 지은 사람인 양 대입시켜 보았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송시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선 굵은 삶을 받아들이기에는 고택 주변이 너무 여리고 예쁘다. 붉은 백일홍과 장난감 같은 정원석들, 그리고 장독대. 무엇 하나도 역사 속 그의 이미지와 들어맞는 게 없다.

 

동시대를 불꽃처럼 살다 간 두 사람은 역사의 평가뿐만 아니라 그들이 남긴 자취를 통해서도 사뭇 달랐을 삶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주로 학자들의 연구 실적을 통해, 남아 전하는 기록을 통해 역사적 인물을 만나고 평가하며,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영웅이 되었다가 이내 역적으로 몰리기도 한다.

 

사제지간이자 정적인 송시열과 윤증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문자'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배웠다. 적어도 책과 수업을 통해 '읽고 들어서' 알게 된 지식은 답사를 통해 '보고 느끼면서' 모자란 부분이 채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물며 먼저 배운 것이 '편견'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출처 : 우리문화탐사회
글쓴이 : 선운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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