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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35)재야 학자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上

회기로 2010. 1. 24. 19:20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35)재야 학자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上
입력: 2008년 05월 30일 17:50:24
ㆍ실학을 세워 변화의 논리를 개척하다

“이러다가는 망하겠다”는 세상

‘시대가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답하기가 어렵다. 독특한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환경이 위대한 인간을 배출해내기도 하지만, 뛰어난 학식과 탁월한 능력을 지닌 한 인간의 역할 때문에 새로운 물꼬가 터지면서 시대와 사회는 변혁의 기틀을 이루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성호선생의 사당인 첨성사. 오른쪽 위는 성호 선생 문집. <사진작가 황헌만>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누구도 이론을 제기할 수 없는 실학의 비조는 당연히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73)이다. 반계의 체계적인 실학사상에 큰 영향을 받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실학사상을 정립하고 새로운 변화의 논리를 개척했던 학자이자 사상가였던 분은 바로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이었다. 성호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아 광대무변한 실학의 집대성자는 다름 아닌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었기에, 위당 정인보는 오래 전에 조선 후기의 3대 학자로 반계·성호·다산을 꼽고, 일조(一祖)는 반계, 이조(二祖)는 성호, 삼조(三祖)는 다산이라 하여 실학사상의 계승과 발전에 관한 주장을 폈었다.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은 40여년의 사이를 두고 일어난 조선 최대의 병란이자 국가와 민족의 참혹한 비극의 역사였다. 어떻게 보면 나라가 망한 정도의 생지옥 속에서 인민들은 죽지 못해 살아가야 했던 고난의 연속이자 질곡의 세월이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몸소 병자호란의 참상을 목격하며 어려운 삶을 이어온 반계는 오래지 않아 세상을 등지고 저 멀고 먼 전라도 땅, 부안(扶安)에 은거하면서 ‘이러하고는 나라가 망하겠다’라는 생각으로, 나라와 백성을 건질 계책에 온 생애를 바치며 ‘반계수록’이라는 대저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나라나 세상은 ‘반계수록’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갈수록 세상은 더욱 부패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말았다.

반계가 세상을 떠난 8년 뒤에 태어난 성호, 자신의 당내(堂內)집안의 외손이어서 척의까지 있던 때문에 일찍부터 반계의 학문에 주목하며 도탄에 빠진 백성과, 침몰해가는 나라를 구제할 우국충정에 불탔었다. 그는 반계학문을 해석하며 자신의 논리를 세웠다. 그러나 역시 성호도 ‘이러다가는 망하겠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던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지 못했다. 성호의 학문과 사상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환경에서 배태된다. 성호는 ‘반계수록’에 서문을 짓고, ‘반계선생유집’에도 서문을 썼으며, ‘반계선생전(磻溪先生傳)’을 지어 반계의 학문과 사상을 높게 평가하고 그의 삶에 대한 전모를 밝히는 대단한 업적을 이룩해놓기도 했다.

반계의 시대 못지않게 성호의 시대도 망국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으며, 성호가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에 태어난 다산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겠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해석한 분이 바로 위당 정인보였다. 그러한 시대와 사회적 환경 아래서 반계·성호·다산의 학문이 이룩되었다는 것이다.

찾을 길 없는 유적지

성호는 여흥 이씨 명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이상의(李尙毅)는 의정부좌찬성의 고관을 지낸 학자였고, 조부 이지안(李志安)도 지평(持平)의 벼슬에 학자로 이름이 컸으며, 아버지 매산 이하진(梅山 李夏鎭)은 대사헌(大司憲)의 고관에 명성이 높은 남인으로 당쟁에 연루되어 평안북도 운산(雲山)으로 귀양 갔으며, 귀양 간 다음 해에 성호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오래지 않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성호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으나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벼슬할 생각은 버리고 재야에 숨어서 큰 학문적인 업적을 이룩하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뒤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83세의 장수를 누리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뒤이어 성호의 중형(仲兄) 이잠(李潛) 또한 당쟁의 여파로 젊은 시절에 장살(杖殺)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으니 가정적으로는 매우 비참하였다. 외동아들이자 뛰어난 경세가(經世家)이던 이맹휴(李孟休)가 일찍 세상을 뜨고 며느리까지 성호 앞에서 세상을 떠나 만년은 참으로 곤궁함과 슬픔을 견디며 살아야 했던 불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불운에도 좌절하지 않고 천수를 다 누리고 큰 학파를 이루는 학자로 자리했다.

본디 성호 집안은 정릉 이씨라는 호칭을 들었듯이, 지금의 서울 정동(貞洞)에서 세거하였다. 그러나 성호는 그곳을 뒷날에도 가끔 찾아다니기는 했어도 거주한 적은 없다. 아버지를 이별한 뒤에 어머니 권씨(權氏)를 따라 선산 아래인 경기 광주(廣州)에 속했던, 지금의 안산시 개발지역의 어디쯤에 있는 첨성리의 성호장(星湖莊)에서 일생을 보냈다. 여행이나 친척을 방문하는 때가 아니고는 그곳을 뜨지 않고 80 평생을 살았던 곳이 가장 분명한 성호의 유적지다. 순암 안정복, 소남 윤동규, 하빈 신후담, 녹암 권철신 등 제제다사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학문과 의리를 논했던 곳이 바로 거기다. 자신의 학문을 계승한 아들 이맹휴, 손자 이구환은 물론 조카 이병휴·이용휴, 종손들인 이가환·이삼환 등 가학을 이은 학자들이 항상 모여 글을 배우고 실학의 논리를 익혔던 곳이 또 거기다. 그러나 이제 그곳은 개발되어 흔적도 없고 찾을 길도 없다.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이런 것을 일러 상전벽해라고 하는가보다. 조선 후기 남인계 학파로는 가장 큰 학단이자, 사상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진보적 실학사상이 싹터서 성립된 ‘성호장’의 옛터를 찾을 수 없는 것은 민족의 불행이다.

묘소의 묘비명을 읽으며

조선후기 명정승의 한 분인 번암 채제공은 단 한 차례 성호장으로 성호선생을 찾아 뵈운 적이 있다. 경기도관찰사라는 고관을 역임하여 지역을 순방하다가 첨성리로 성호를 방문했노라는 기록이 있다.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던 돌아가시기 몇 해 전의 성호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한 부분도 있다. 성호 사후이지만 다산도 22세에 그곳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희대의 유적지는 더욱 빛날 곳인데 찾지 못하는 아쉬움에, 우리는 성호의 혼이라도 뵈우려고 성호의 묘소를 찾았다. 생전에 선공감 가감역(假監役)이라는 학자에게 내리는 벼슬이 내려졌건만 성호는 벼슬에 응하지 않았다. 세상 뜨기 바로 전에 나이 많은 노인에게 내리는 중추부사에 제수되나 나가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일생을 포의(布衣)로 마친 재야학자였다. 그래서인지 묘소는 정말로 검소하고 아담했다. 묘소 앞에는 당대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던 영의정 채제공이 지은 ‘묘갈명’이 새겨진 비 하나가 초라하게 서 있었다. 그걸 어떻게 초라하다고 하겠는가. 겉이야 초라해도 그 글 속에 담긴 내용은 아무리 훌륭하게 치장한 화려한 신도비라도 당해낼 수 없는 천고의 멋진 내용이 담겨있었다.

도(道)를 안고서도 혜택을 끼치지 못했으니 한세대의 불행이로다(抱道而莫能致澤 一世之不幸) / 책을 저술해 아름다운 혜택이 넉넉했으니 백세의 다행이로다 (著書而亦足嘉惠 百世之幸) / 하늘의 뜻은 아마도 거기에 있었지 않을까 한 세대야 짧지만 백세는 길도다(天之意無乃在是歟 一世短而百世永) / 선생의 명문을 지으며 우리 후학들에게 권면하노니 왜 선생의 저서를 읽지 않으려 하나(銘先生而勉吾黨 與讀先生書) / 학통을 전해가는 일 자기가 해야지 남이 해줄 것인가(傳統由己而由人乎)

이런 명문의 명(銘)을 읽어가다가 아쉽고 서운함은 싹 가셨다. 묘소가 아무리 초라해도, 생전에 그렇게 오래도록 거주하면서 연구와 사색에 잠기고, 그 많은 제자들을 양성해낸 옛집이야 흔적도 없지만, 저서를 통한 성호의 혜택은 백세토록 영원하리라는 그 글 속에 모든 유적이 살아나 있기 때문이었다. 성호의 혜택이 크고 넓어서인지, 왕조가 망한 왜정 때에야 ‘성호문집’이 간행되었고, 이제는 ‘성호전서’가 완간되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성호의 위대한 학문을 접할 수 있으니, 역시 혜택은 백세토록 영원하리라는 채제공의 높은 식견은 옳게만 여겨진다.

성호기념관을 돌아보며

근래에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명인달사들의 유물관이나 기념관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지고 있다. 성호의 묘소 앞에 도로가 있고 도로 곁에는 ‘성호기념관’이 덩실하게 서 있다. 성호를 만나는 기분으로 기념관으로 들어갔더니, 우선 성호의 초상이 눈에 들어온다. 생전의 모습은 아니고 뒷세상에서 상상해 그린 유상이겠지만, 우선 학자이자 선비이던 성호의 모습의 역력했다. 벼슬이라고는 전혀 해보지 않은 재야학자, 그런 꼿꼿하고 총명한 모습이 성호를 회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이외의 성호 유품이나 수택(手澤)이 완연한 친필 글씨나 저술 및 서한들이 그런대로 유품으로서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저 날림공사로 체면치레의 보통 기념관이나 유물관과는 다르게 매우 정성과 뜻이 담긴 유물관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만한 기념관을 만들고 유지도 제대로 해주는 안산시 당국은 칭찬받기에 마땅했다.

기념관 밖의 넓은 공간의 조경도 그럴싸하고, 정리 정돈된 모습이 매우 좋았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성호의 초상화에 찬사를 바친 글을 지었다. 그 글을 읊으며 기념관을 나오는 우리의 발길은 그런대로 가벼웠다.

…저 덕성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윤기 흐르고 함치르함이여
도가 저 몸속에 가득 쌓여 있는 데다
가장 뛰어나고 아름다움으로만 흠뻑 적셔 있구료
…누가 이 분을 다시 일으켜 세워
억센 물결 물리치고 공자의 학문으로 돌이킬까. 슬프지고.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출처 : 기산인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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