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26)영남 최후의 성리학자 한주 이진상(下)
경북 성주 대포리 유서깊은 한개마을에 위치한 이진상의 종택. 세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3대(한주·대계·삼주)의 호를 판각한 현판이 걸린 사랑채가 있고, 별채로 한주정사라는 정자가 있다. |사진 작가 황헌만 |
-한주학단(寒洲學團)-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유명종 교수) 한말 영남 일대에 한주의 학문은 크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후산 허유(后山 許愈), 물천 김진호(勿川 金鎭祜), 회당 장석영(晦堂 張錫英), 대계 이승희, 홍와 이두훈(弘窩 李斗勳), 자동 이정모(紫東 李正模), 면우 곽종석등 당대의 학자들이 학단을 이루어 한주의 학문을 계승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몇몇 제자들은 망국의 의리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사람도 있었으나 아들 이승희나 제자 장석영 등은 스승의 학문과 사상의 실천에 앞장 서서 북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서슴지 않기도 했다.
특히 ‘한주학단’의 학자들과 호남의 노사 기정진의 문하인 ‘노사학파’와의 연결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되었다. 한주학파와는 다르게 호남에 기반을 둔 노사학파는 그 제자들이 호남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남 우도인 경남지역에도 많은 학자들이 노사문하를 출입했다. 월고 조성가(趙性家), 계남 최숙민(溪南 崔淑民), 노백헌 정재규(老栢軒 鄭載圭:1843~1911) 등이 대표적인 영남의 노사학파이다. 그중에서도 노백헌 정재규가 노사문하의 고족(高足)인데, 그는 한주의 제자 후산 허유와 가까운 벗으로 일생 동안 학문논쟁과 토론을 그치지 않아 노사학문과 한주학문이 결합되는 높은 수준의 성리학이 이룩되었다.
허유와 함께 사칠설(四七說)을 논하고 이기설을 논했던 정재규는 한주 이진상과도 어울리면서 많은 학문적 토론을 거듭했다. 주리설(主理說)에서 유리론(唯理論)을 주장한 노사의 학문과 이발일로설(理發一路說)의 한주 사상에는 일맥상통하는 점을 서로 인정하여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이후 몇 백 년 만에 영남과 호남의 학문적 교류와 학자들의 접촉이 성대하게 이루어졌던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호남의 학문 교류-
삼가(三嘉)의 물계리(勿溪里)에 살던 정재규의 집에는 호남에서 노사의 손자 송사 기우만이나 노사의 제자 일신재 정의림(日新齋 鄭義林)이 찾아오고, 한주학파의 대계 이승희가 찾아오면서 영남학과 호남학이 격의 없이 토론하는 아름다운 학문 활동이 전개되었으니 얼마나 부러운 일이고 보기 좋은 일인가. 허유나 이승희 이외에 한주의 제자인 자동 이정모(李正模) 등과도 함께 도의를 강마하고 성리설을 논했던 점은 주리학파의 시대적 요구에 응한 아름답고 훌륭한 지역 타파의 본보기였기에 두고 두고 찬양해야 할 멋진 일임에 분명하다. 이 점은 오늘의 이 나라 지역갈등의 해결을 위한 문제로 여겨 심도 있는 학술적 연구가 계속되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더구나 한주가 직접 노사의 학설을 읽고 그에 대한 해석을 했던 점으로 보아 이들의 학문적 견해와 사상이 어떻게 일치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밝히는 점도 한번쯤 연구의 대상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한주학단의 간재학파 비판-
한주의 제자로 가장 높은 성망의 학자는 역시 면우 곽종석(郭鍾錫:1846~1919)이었다. 한주학설을 계승하고 부연하여 179권의 방대한 문집을 남긴 면우는 학문적 명성에 의하여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이라는 고관에 올랐다. 을사늑약이 이룩되자 조약을 폐지하고 5적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한 적도 있으나 경술(1910)년 망국의 무렵에는 몸을 사려 주변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기미독립운동 무렵에는 마침 제자 김창숙 등과 함께 파리장서사건을 일으켜 투옥되는 등 만절(晩節)을 지켜 한주의 제자임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렵 간재 전우(艮齋 田愚)라는 학자는 곽종석에게 내리지 않는 학자로서의 성망을 얻었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재야 학자였으나 임금의 은혜로 산림(山林)의 대접으로 감역(監役), 장령(掌令),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라는 높은 지위를 받았으나, 나라의 일에는 재야학자가 간여해서는 안 된다고 서해의 섬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지냈다. 그때가 어떤 때인가. 나라는 전복되고 백성들은 어육(魚肉)이 되는 도탄에 빠지고 온 나라가 요동치던 때여서 어리석은 여자로서도 안방에서 눈물을 금하기 어려운 때였다. 그러던 때에 사류(士類)로서 도만 지키고 살면 된다고 일체의 나랏일에 관여 안했던 사람이 간재 전우였다. 대계 이승희, 심산 김창숙 등은 그런 점에서 간재학파의 색은행괴(索隱行怪)의 행위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실천적 행위에 힘쓰지 않는 공리공언(空理空言)의 관념적 성리학이라고 비판했었다. 이 점은 현상윤(玄相允)의 ‘유학사’(儒學史)에서도 자세히 논했으니 참고할 일이다.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의 한주 방문-
1882년 임오(壬午)년은 한주의 나이 65세가 되어 노학자로 한창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해에 당대의 문장가이자 학자이던 교리(校理) 이건창(1852~1898)이 한주를 찾아 한개마을을 방문했다. 한주의 높은 성망을 듣고 방문한 영재 이건창은 학문적 토론을 쉬지 않았다. 영재가 한주에게 학문하는 대도(大道)를 물었다. 한주의 답변이 바로 그의 실천철학이자 몸으로 실천하는 성리학의 논리였다. “학문을 연구함에는 반드시 실심(實心)을 지녀야 합니다. 온 세상의 모든 사물(事物)에는 모두 실리(實理)가 있는데, 실심을 지닌 뒤에야 실견(實見)이 있게 되고 실견이 있는 뒤에야 실행(實行)을 하게 됩니다. 실(實)이란 정성(誠)일 뿐입니다”(爲學必須實心 天下事事物物 皆有實理 有實心而後有實見 有實見而後有實行 實者誠而已)라는 명답을 해주었다고 한주연보(寒洲年譜)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 실심·실리·실견·실행, 즉 그런 실이라는 성(誠)이 없는 학문이나 성리학은 공소한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실행, 실천, 실견의 행실과 행위가 없는 성리철학은 관념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행동이 없는 어떤 논리도 실익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한주 학문의 요체였다. 이런 학문의 실체 때문에 실천과 실행에서 벗어난 간재학파의 논리는 한주학파로부터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유서 깊은 한개마을-
오랫동안 이름만 들었던 한개마을, 대포리(大浦里)는 멀리 큰 들을 건너 낙동강의 한 가닥이 보이고 높지 않은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형국이어서 인물의 보고임을 그냥 짐작할 수 있었다. 민속관광마을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마을 입구에는 큰 간판이 마을의 내력을 설명해주고 크고 넓은 와가들이 즐비해 있어, 이름 있는 마을임을 보아서도 알게 해준다. 판서댁, 진사댁, 한주댁 등의 입간판이 있어서 문화재로 지정된 주택을 찾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초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에 우리가 찾은 한주종택에는 다음 날이 종택의 시제(時祭)를 지내는 날이어서 주부 한 분이 열심히 제수를 장만하느라 바쁜 이유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지도 않았다.
한주의 증조부 이민검(李敏儉)이 짓고 한주가 개수(改修)했으니 150년이 넘은 고택이다. 몸체 곁에 세가(世家)라는 이름에 걸맞게 3대(한주·대계·삼주)의 호를 판각한 현판이 걸린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를 지나 별채로 한주정사(寒洲精舍)라는 정자가 오래된 나무에 가려 고즈넉이 서 있었다. 이곳 사랑과 정자에 얼마나 많은 한주학단의 문제자들이 출입했을까. 당대의 학자 영재 이건창이나 노백헌 정재규도 출입했다. 심성철학이 논해지고 이기사칠(理氣四七)의 높은 학문이 논해졌으리라. 또 이 종가를 중심으로 일제하 가장 큰 유림단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사건도 이곳을 중심으로 해서 모의되고 실천되었다.
종손마저 출타하고 없는 집안의 모든 건물은 아무런 말이 없다. 역사가 침묵하고 있는 것인가. 망국을 당해 독립운동이나 의병활동에 동참하지 않는 나약한 성리학자들을 질타하던 대계 이승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주자(朱子)를 조술(祖述)하고 퇴계를 본받자던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의 현판이 뚜렷하여 주자와 퇴계의 혼까지 이 종택의 주변을 맴도는가 여겨졌다. 독창적이고 실천적인 성리학 체계를 새롭게 세워, 기호의 이항로, 호남의 기정진과 함께 영남을 대표했던 당대의 철학자 한주 이진상의 혼도 이 종택에 맴돌고 있겠지만, 그는 지금 한개마을에서 멀지 않은 뒷산에 다소곳이 누워계신다.
한주이선생지묘(寒洲李先生之墓)라는 소박한 비 하나가 묘소 앞에 세워져 있을 뿐, 초라하기 그지없는 묘소다. 1886년 10월15일 대학자 한주선생은 눈을 감았고 그 다음해인 1887년 2월20일 2000여 명의 사림(士林) 등이 애도하는 가운데 장례가 치러졌다. 1895년 25책의 문집이 간행되었고 22편 10책의 ‘이학종요’라는 한주의 주저는 그 2년 뒤인 1897년에야 간행되었다.
문인 장석영의 저술인 ‘묘지명’은 1908년 구워서 묘소에 묻었으며 아들 이승희가 지은 묘표(墓表)가 묘소 앞의 빗돌에 새겨져 전해지고 있다. 문인 곽종석이 지은 장문의 행장과 묘지명은 모두 문집에 수록되어 그의 일생을 소상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묘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5세에 모든 경전을 꿰뚫어 이해하였고, 18세에 중부(仲父) 이원조공으로부터 인심과 도심, 정일(精一)의 뜻을 강론받자 그로부터 뭇 성인들의 학설을 널리 구하고 주리(主理)의 뜻을 얻어내 독실하게 믿고 실천하였다”(十五淹貫經籍 十八講人道精一之旨于仲父定憲公 因慨然博求群聖之說 得主理之訣 篤信而實踐之)라고 설명하여 그의 실천철학을 높이 평가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있음을 한개의 양반 마을은 보여주고 있었다. 화서·노사·한주의 제자들인 유린석·정재규·이승희의 만남에서 한말의 성리학이 이 마을에서 만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박석무|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출처 : 기산인의 발자취
글쓴이 : 기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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