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은 당대의 뛰어난 학자요 촉망받던 관료였지만, 자신의 영화를 뒤로하고 의리와 충절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만고의 충신이었다. 한 임금에 대한 그의 충성심과 흔들림 없는 정신은 세조(世祖)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추모되었으며, 결국 충신의 표본으로 인정되었다.
성삼문(成三問)은 부당한 권력을 거부하고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한 권력찬탈의 원상회복을 주도하여 자신이 배운 학문과 신념을 실천하려 하였다. 자신을 던져서라도 바른 길을 찾아가려 했던 그의 꺾이지 않는 기개와 지조는 개인의 이익과 편리만을 추구하는 세태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영원이 살아있는 참된 지식인의 표상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죽음으로 인해 아까운 재능을 사장시키는 것은 역사에 기여하지 못하는 행위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짧은 생애로 인하여 당대에 실질적인 기여는 하지 못했다 해도 영원히 변치 않는 정신을 역사에 남겨 놓았기 때문에 그러한 지적은 타당치 않다. 오히려 성삼문의 죽음은 우리에게 인간이 가야 할 길을 깨닫게 해 주고 바른 길을 가지 못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의 과정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하는 등 찾아보면 그의 업적은 상당히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념과 행동이 일치된 삶과 곧은 지조 때문에 우리는 아직까지 성삼문을 기억하는 것이다.
● 집현전 학사가 되다.
성삼문은 조선조 태종(太宗) 재위 18년(서기 1418년)에 홍주에 있던 외가에서 무관(武官)인 성승(成昇)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418년은 세종(世宗)이 태종의 양위를 받아 등극한 해이기도 하여 성삼문은 태어날 때부터 세종과 특별한 인연을 갖게 된 셈이다.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가 하늘에서부터 "낳았느냐?" 하고 묻는 환청을 세번이나 들었다고 해서 이름을 삼문(三問)이라고 지었다. 성격은 쾌활하고 명랑했다. 익살스러운 면이 있어 실없는 말도 곧잘 하면서 맺힌 데가 없이 담백한 성품이었다. 그러나 속마음은 견실하고 범할 수 없는 기상이 가득하여,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그였지만 주위에서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열여덟살 때인 세종 재위 17년(서기 1435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후, 3년 뒤인 스물한살에 훗날 거사(擧事) 동지로서 생사를 같이한 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합격하였다. 이후 집현전(集賢殿) 학사로 선발되어 스물다섯살에 신숙주(申叔舟), 박팽년(朴彭年), 하위지, 이석형 등과 함께 삼각산에 있던 진관사에 들어가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집현전 학사로 선발된 것으로도 이미 출세가 보장된 것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의 수재로 인정받았으니 그의 앞날은 탄탄하게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집현전은 고려 때부터 궁중에 설치한 학문 연구기관으로서 세종에 의해 실질적 연구기관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또한 세종(世宗)대에 이루어진 수많은 업적 중에 상당수가 집현전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의미가 자못 중요했다. 집현전은 영전사와 대제학이 최고 관리자들이었지만 실제 직무는 녹관(錄官)이 담당하였다. 이 녹관을 일명 학사(學士)라고 불렀는데, 학사 20명 중 10명이 경연(經筵)을, 10명이 서연(書筵)을 담당했다.
그 밖에도 집현전은 관리들의 임명장을 작성하거나 중국의 옛 제도에 대한 연구, 역사서를 비롯한 기타 서적 편찬 임무를 맡았다. 근무 체제는 매우 엄격하여 다른 관청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였으며, 차례를 정해 들어가며 숙직을 하였기 때문에 수시로 국왕과 세자가 찾아와 자문을 구하였다.
집현전 최대의 연구 성과는 역시 훈민정음 창제이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를 위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성삼문, 정인지(鄭麟趾), 신숙주, 최항(崔恒) 등에게 우리 글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하 다방면으로 연구를 거듭하던 그들은 때마침 명나라의 학자인 황찬이 요동으로 귀양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성삼문과 신숙주가 무려 13차례나 왕래한 끝에 그를 통해 음운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마침내 세종 재위 28년(서기 1446년) 9월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으며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 성삼문은 1447년에 중시(重試)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음운과 교육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명(明)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하여 음운에 관한 책인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하는데 동참하기도 했다. 1449년에는 명나라에서 예겸이라는 사신이 왔었는데, 그는 시(詩)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예겸을 접대할 마땅한 사람이 없자 성삼문, 신숙주 등이 한자의 음운도 물을 겸 만나게 되었는데, 이렇게 하여 만나게 된 세사람은 서로의 재능과 학문에 심취하여 형제의 의를 맺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예겸은 이때 조선 유학자들과 교류하여 받은 시를 모아서 요해편(遼海篇)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는데 성삼문이 발문을 짓고 신숙주가 후기를 쓰기도 하였다.
자기 나라로 돌아간 예겸은 주변 사람들에게 성삼문에 대해 온갖 말로 칭찬하였고, 4년 뒤에는 그의 제자인 장영이 사신으로 조선에 왔다가 스승이 그토록 높이 평가했던 성삼문을 만나보고자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성삼문이 죽고 없어 몹시 애석해했다고 한다.
● 운명의 계유정난(癸酉靖難)
세종(世宗)과 문종(文宗)은 성삼문(成三問)을 특히 총애했다. 세종은 지병을 치료하러 온양 온천에 갈 때도 반드시 그와 함께 갈 정도였고, 문종도 어릴 때부터 각별히 그를 가까이했다. 문종은 학문을 즐겼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도 부왕 못지 않게 선정을 베풀었으나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한 것이 탈이었다. 결국 문종은 자신의 높은 학문과 덕을 제대로 펴 보지도 못하고, 재위한지 2년 3개월만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문종은 죽기 얼마 전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이때 문종은 어린 세자 홍위(弘暐)를 무릎에 앉히고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훗날을 간곡히 당부했다. 당시에 이미 문종은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어린 아들의 앞날을 걱정했던 것이다.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어린 세자를 안전하게 보필하기로 다짐했는데, 그 중에서 신숙주(申叔舟)만이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세종 또한 맏손자인 홍위를 무척 사랑하여 홍위를 세손에 책봉하고는 성삼문 등을 불러 어린 손자의 앞날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이렇듯 세종과 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장래를 부탁한 홍위가 바로 비운의 군주인 단종(端宗)이다. 문종은 운명하기 전에도 황보인(皇甫仁), 정분(鄭苯), 김종서(金宗瑞)를 따로 불러 세자를 잘 보호해 달라고 신신당부하고 눈을 감을 정도로 어린 아들의 앞날을 염려했다.
문종이 죽자 세자 홍위가 열두살의 어린 나이로 보위를 이었는데, 그의 앞에는 태산 같은 숙부들이 10명도 넘게 버티고 있었다. 어린 임금이 장성할 때까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해줄 왕실 직계 어른이 없었던 것도 그의 불행이었다.
세종은 왕비 심씨에게서 낳은 8명의 아들이 있었고 후궁에게서도 10명의 왕자를 두었다. 그 중 정비 소생 왕자들은 맏아들 문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강성하였으며, 특히 둘째인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셋째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가장 걸출했다. 국왕이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다 보니 세상은 이들 유력한 대군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학문에 조예가 깊은 안평대군 주위에는 문인과 관료들이 몰려들었고, 수양대군에게는 주로 무사들과 소외계층이 모여들었다.
당시 모든 정사(政事)는 문종(文宗)대부터 국왕을 모셔 온 황보인, 김종서 등이 처리하고 어린 임금은 형식적인 사후 승인을 하는데 그쳤는데, 자연히 의정부(議政府) 수장인 황보인과 김종서 등에게 권력이 집중되었고 왕실 측근 세력들과 중간 관료층은 이것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에 따른 사은사(謝恩使)로 자기가 직접 명(明)에 가겠다고 청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지만, 무엇보다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수양은 평소에 눈여겨보아 두었던 신숙주를 서장관(書將官)으로 선발하여 동행하는데, 그 인연으로 신숙주는 집현전 동료들과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사은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이 사람들을 모으고 몰래 무기를 한성으로 반입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챈 수양은 거사를 서둘렀다. 결국 수양대군은 정권의 축이며 실권자인 김종서를 제거한 다음, 왕명을 빙자하여 중신들을 입궐하게 했다. 그리고 반대파와 방해가 될 만한 인물들을 모조리 죽이고는 안평대군을 강화로 유배시킨 후에 사사하는 것으로 정권 장악 계획을 마무리지었다. 수양은 이 정변에 대하여 안평이 김종서와 모의하여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게 됐으나, 사태가 급박하여 왕명을 얻지 못하고 자신이 나서서 이들을 토벌할 수밖에 없었다며 정변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이후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영경연서운관사(領經筵書雲觀事), 겸판이병조사(兼判吏兵曹事)를 겸직하여 인사행정에서 병권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거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공을 찬양하는 글을 집현전에서 작성하여 발표하게 하고, 정변에 참가한 동조자들은 정난공신(靖難功臣)에 봉하여 친위세력을 공고히 하였다.
이때 공신록에 오른 인물들은 수양대군을 포함해서 36명이었는데, 성삼문도 정변 당일 집현전에서 숙직하며 근무한 공로가 있다 하여 3등 공신에 올랐다. 당시 공신녹권을 받은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축하연을 열었지만, 성삼문만은 끝까지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세운 공도 없이 공신 대열에 끼였다고 하며 공신록에서 빼 줄 것을 자청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성삼문이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변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는 증거다.
● 단종(端宗) 복위의거(復位義擧)의 실패
성삼문은 단종(端宗) 재위 2년(1454년)에 집현전 부제학이 되었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승진했다. 그 다음 해에는 명나라의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의주에 파견되었다가 공교롭게도 단종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윤 6월에 예방승지로 임명되었다.
가시방석 같은 보위에 앉아 있던 단종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자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해야 했다. 이때 예방승지의 직무상 성삼문이 수양대군에게 옥새(玉璽)를 갖다 바쳐야 했다. 옥새를 품에 안고 수양대군에게 전달하던 성삼문은 그만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목놓아 통곡하고 말았다. 하지만 양위는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근정전(勤政殿)에서 수양대군의 등극식이 처러졌다.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이 바로 조선왕조 제7대 임금인 세조(世祖)다. 세조는 영의정에 정인지(鄭麟趾), 좌의정에 한확(韓確)을 임명한 후, 내정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우선 모든 행정 업무는 의정부(議政府)를 거치지 않고 육조(六曹)에서 직접 국왕에게 보고하게 하였으며,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기능도 약화시켜 버렸다. 또한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좌익공신(佐翼功臣)에 봉하여 충성을 유도하고, 지방 관리들도 자신의 심복들로 교체하는 한편 그것도 못미더워 어사까지 파견해서 감시하였다.
비록 세조가 양위 형식을 거쳐 왕위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그 행위는 유교 윤리관에 비추어 볼 때 명백히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문종의 유지(遺志)를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성삼문을 비롯한 문신(文臣)들은 이를 결코 묵과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단종 복위의 때를 노리던 차에 마침내 기회가 왔다. 1456년에 새 왕이 등극한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명나라로부터 사절이 왔는데, 이들에 대한 환송연이 6월 2일에 창덕궁(昌德宮)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이때 마침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과 유응부(柳應孚)가 별운검(別雲劍)으로 내정되어 그날 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연회석상에서 국왕의 호위 무사로서 유일하게 도검(刀劍)을 소지하게 된 두 사람이 세조와 세자 장(暲)을 처단하는 것을 신호로, 일시에 각자 정한 소임에 따라 한자리에 모인 공신 세력들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계획은 처음부터 무산되고 말았다. 세조가 한명회(韓明澮)의 건의에 따라 별운검을 폐지하고, 몸이 약한 세자도 연회석상에 참석하지 않도록 조처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성승과 유응부가 무장한 채 행사장에 입장하려고 하자,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명회가 별운검이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들의 입장을 제지했다. 이에 화가 난 성승과 유응부는 그 자리에서 한명회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옆에 있던 성삼문과 박팽년이 황급히 그들을 말렸다. 세자가 빠지고 별운검도 폐지된 마당에 한명회만 죽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관(武官)이었던 유응부는 완강했다. 세자가 없다 하더라도 세조와 그의 추종 세력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이들을 모두 처단한 후에, 세자는 상왕(上王)의 명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체포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만류하여 유응부도 어쩔 수 없이 거사를 연기하는데 동의하였는데, 여기에서 거사 모의가 누설되는 결정적인 틈이 생기고 만다. 거사가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자 불안해진 성균관 사예 김질(金瓆)이 집현전 대제학 정창손(鄭昌孫)에게 밀고하여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만 것이다.
정창손은 사위인 김질로부터 단종 복위 계획의 전모를 전해 듣고, 곧바로 대궐에 들어가서 이 사실을 세조에게 알렸다. 그날로 성삼문을 비롯한 모의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명나라 사신이 돌아간 다음 날 세조가 직접 국문(鞠問)에 나섰다.
● 신하에게 임금은 둘일 수 없다.
먼저 성삼문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세조(世祖)가 역모를 추궁하자 성삼문은 증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김질을 불러 대질시키자 그제야 그의 밀고로 계획이 발각된 사실을 알게 된 성삼문은 김질의 배신을 통렬하게 꾸짖은 뒤 태연히 역모 사실을 인정하였다. 화가 난 세조가 역모를 꾸미게 된 연유를 추궁하자 성삼문은 이렇게 답변했다.
"어찌하여 우리가 하려고 한 일이 역모입니까? 신하가 제 임금을 모시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거늘, 세상이 다 아는 이치를 왜 나으리만 반역이라고 하십니까? 나으리께서는 평소 주나라의 주공(周公)에 자신을 견주어 말씀하셨는데, 대체 주공이 언제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탐하였단 말입니까? 하늘에 있는 태양이 둘이 아니듯이 신하에게도 임금이 둘이 있을 수는 없소이다."
세조에게 '주상(主上) 전하(殿下)' 대신 대군(大君)을 가리키는 '나으리'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정색을 하고 대답하자, 세조는 더욱 노기충천하여 추궁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내가 양위받을 당시에는 막지 않았다가 지금에 와서 배반하는 거냐?"
성삼문이 대답했다.
"대세를 어찌할 수 없었을 뿐이오. 반역을 막지 못했으니 물러가 죽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으나, 죽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므로 뒷날을 도모하기 위해 참아 왔던 것이오."
세조가 다시 물었다.
"네가 그동안 나에게 신하로 칭해 놓고 이제 와서 나를 나으리라고 부르니 참으로 가증스럽기 짝이 없구나. 그동안 내가 주는 녹을 먹어 놓고 이제 와서 모반이 아니라고 잡아떼느냐? 명색은 상왕을 복위시킨다고 하면서 실상은 자기 잇속만 차리려는 것이 아니냐?"
성삼문이 대답했다.
"상왕이 엄연히 계시거늘 나으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로 삼는단 말이오? 나는 나으리의 녹을 한톨도 먹은 적이 없소. 나으리가 준 것은 집에 그대로 쌓아 놓았으니 내 집을 뒤져 보면 알 것 아니오."
세조는 분노로 몸이 떨려서 더 이상 국문하지 못하고 형리를 시켜 불에 달군 쇠로 성삼문의 맨살을 지질 것을 명했다. 달군 쇠가 성삼문의 살을 태우고 뼈를 뚫었지만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나으리의 형벌은 독하기도 하구려."
이어서 성삼문은 세조 옆에 서 있던 신숙주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네 이놈, 예전에 영릉(英陵)께서 원손(元孫)을 안고 산책하시면서 곁에 있던 우리에게 상왕의 후일을 당부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데, 네 놈만이 그 일을 잊어 버렸단 말이냐? 네 놈이 이렇게 극악할 줄은 차마 몰랐구나."
이 말을 들은 신숙주가 새파랗게 질려 버리자 세조는 신숙주를 국문장에서 나가게 한 후 박팽년을 취조하기 시작했다. 박팽년은 성삼문보다 한술 더 떠서 세조를 아예 '진사(進士)'라고 불렀다.
"진사 어른, 상왕 전하를 모시려는 것을 어찌 반역이라고 하시오. 그 자리는 진사 어른의 자리가 아닌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이오?"
세조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네놈은 이제까지 나에게 신하라고 칭하며 내가 주는 녹까지 받아먹고서는 이제 와서 나를 진사라고 부를 수 있느냐?"
박팽년이 지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진사 어른께 신하라고 칭한 적이 없소이다. 나는 충청감사로 있을 때 장계(壯啓)에도 '신(臣)'자 대신 '거(巨)'자를 써 온 사람이외다. 의심나면 한번 확인해 보시구려."
이에 세조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성삼문과 같은 형벌에 처하도록 명령했다. 국문장은 뼈와 살이 타는 냄새로 진동했다. 그러나 세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응부를 국문했다. 유응부는 무관답게 더욱 거친 언사로 세조의 심사를 찔렀다.
"그때 족하(足下)를 죽이고 상왕 전하를 복위시키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될 뿐이오. 쳐 죽일 놈의 배신으로 일이 틀어져 버렸으니 어서 빨리 죽이기나 하시오."
이어서 유응부는 극형으로 반죽음이 된 성삼문과 박팽년을 바라보고 이렇게 한마디를 던지고는, 죽을 때까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책상물림들과 큰일을 함께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내가 미련하였다. 너희들이 말리지만 않았던들 수괴를 처단할 수 있었던 것을 거꾸로 이 모양이 되었구나."
하위지도 끌려나와 취조를 받았지만 거칠게 항거할 뿐이었다.
"나를 반역자라고 잡아들였으니 죽이면 될 것이지 구태여 무엇을 묻겠다는 것인가?"
이제 세조는 더 이상 취조를 계속할 의사를 버리고 모두 능지처참(陵遲處斬)할 것을 명하였다. 박팽년은 형장에 가기도 전에 옥중에서 죽었고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는 처형되었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체포되기 전에 가족과 함께 자결한 유성원을 포함하여 이들을 '사육신(死六臣)'이라고 부르며 충절의 표본으로 삼았다.
성삼문과 그의 동지들이 처형된 후 관련자들도 모두 검거되어 죽임을 당했다. 특히 성삼문의 가문은 삼족을 몰살시키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 아버지 성승도 주모자 중 한사람이었기 때문에 세 동생과 아들 오형제에 이르기까지 남자는 젖먹이라도 살려 두지 않았다. 가산은 몰수되고 여자들은 모두 관비로 끌려갔다. 가산을 몰수할 때 창고를 뒤져 보니 과연 세조에게서 받은 녹봉이 월별로 표시되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대대적인 숙청에도 안심하지 못한 세조는 상왕인 단종도 복위운동(復位運動)에 책임이 있다 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낮춘 후 영월로 귀양 보내는 비도덕적인 파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 후 또 다시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복위 계획을 도모했다고 하여, 이 비운의 어린 임금은 폐서인되었다가 1457년 10월에 겨우 열일곱살의 나이로 사사되고 만다. 세조는 그때도 관련자 모두를 처형하고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도 관련이 있다 하여 그의 소생인 자신의 이복 동생들과 함께 죽였다. 그리고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까지 자행하였다.
● 사육신(死六臣)으로 역사에 남다.
어린 임금 단종의 비참한 죽음과 세조의 권력 유지를 위한 잔혹한 조치들은 당시 유신들과 민심에 큰 충격을 주었다. '생육신(生六臣)'처럼 폐인을 자처하고 세상을 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고, 두차례에 걸쳐 반란도 일어났다. 신숙주의 동생 신말주도 세상을 비관하여 은퇴하기까지 하였으니, 당시의 인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한편 처형된 사람들의 시신은 사지가 절단되어 형장에 그대로 버려졌고, 잘려진 목은 전국에 돌려져 효수되었다. 다행히 그들의 의기와 순절에 감복한 이름 모를 사람에 의해 신체의 일부가 거두어져 노량진 강변 야산에 묻혀질 수 있었고, 전국에 효수되던 머리도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해 곳곳에 묻혔다. 은진에 있는 성삼문의 무덤과 홍성에 있는 성승의 무덤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노량진 야산의 무덤들은 그 내용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여자의 무덤처럼 성(姓)만 표시하여 두었다.
사육신이라는 말은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서 비롯되었다. 사육신은 당시에는 역적으로 취급되었지만, 사림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절개와 의리가 중요시되자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성종(成宗)대에는 김종직(金宗直)이 용감하게도 성삼문은 충신이라고 말하고, 또 다시 변란이 생긴다면 자신은 성삼문처럼 하겠노라고 말하기도 했다. 성종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할아버지를 비난한 것인데도 이를 묵인한 것으로 보아, 성군으로서 성종의 인물됨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것은 선조(宣祖)대에 한 관리가 성삼문의 충절을 논하자 선조가 격노했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렇게 역대 왕조에서 사육신에 대하여 논란을 거듭하다가, 공식적으로 그들의 충절을 인정한 것은 200여년이 지난 숙종(肅宗)대에 이르러서다. 이때 사육신의 관작이 회복되고 민절(愍節)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져 노량진 묘소 아래 민절서원을 세워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원래 노량진에는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응부(柳應孚)만 묻혀 있었으나, 1970년 사육신 묘역 정화 사업 때에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김문기(金文起)의 가묘를 추가하여 무덤은 7기로 늘었다. 사육신에 김문기가 추가된 것은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는데, 김문기는 거사 당시 궁궐 밖에서 군사를 동원하는 역할을 맡아 모의 과정에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를 인정한 것이었다.
만고의 충신으로 추모되는 사육신은 비참한 죽음을 당하면서 그들의 마지막 한을 한 수의 시조로 남기기도 했다. 청구영언(靑丘永言)과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통해 하위지를 제외한 5명의 시조가 전해진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성삼문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박팽년
청안에 혔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관대
겉으로 눈물 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고
저 촛불 날과 같아야 속 타는 줄 모르는구나
이개
간밤에 부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메라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유응부
초당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려 했더니
문전의 수성어적이 잠든 나를 깨와라
유성원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년
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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