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기사 입니다.
[이덕일 사랑] 史官과 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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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본기(本紀)는 사마천이 속했던 한(漢)나라의 개국(開國) 시조 고조(高祖)의 본기보다 그와 싸웠던 항우(項羽) 본기를 앞 순서에
두었다. 그리고 자신을 궁형에 처한 무제를 미신이나 좋아하는 용렬한 군주로 그렸다. 무제는 크게 화를 냈지만 그것으로 죄를 주지는 않았다. 역사
기술은 사관의 몫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사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김일손(金馹孫)이다. 연산군 4년(1498)에 발생한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사화(史禍)라고도 하는
이유는 김일손·권경유(權景裕)·권오복(權五福) 등의 사관들이 사지가 찢겨 죽는 능지처참을 당했기 때문이다. 경상도 청도군(淸道郡)에서 지병인
풍병(風病)을 치유하던 김일손은 의금부에서 내려오자 “내가 잡혀가는 것이 사초(史草·실록의 기초기록) 때문이라면 반드시 큰 옥사(獄事)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해 사화를 예견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이미 죽은 스승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에 실으려다가
화를 당했다. 이는 단종을 의제(義帝)에, 세조를 항우(項羽)에 비유해 “신하가 임금을 찬시(簒弑·자리를 빼앗고 죽임)했다”고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조의제문’에 “충분(忠憤)이 깃들어 있다”고 덧붙인 것이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같은 훈구(勳舊) 공신들의 촉수에 걸리면서
옥사(獄事)가 발생했던 것이다.
조선의 임금은 ‘실록(實錄)’을 볼 수 없었다. 사고(史庫)를 지키는 고지기는 임금이라도 실록을 보려고 하면 제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번에 일본으로부터 일부가 반환되는 ‘조선왕조실록’은 이런 체제적 강점과 목숨 걸고 절대권력을 비판했던 김일손 같은 이들의 사관(史官) 정신이 녹아 들어 있는 민족사의 보고이다. 혼돈한 이 시대에 역사가 무엇인가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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