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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2. 금강산기(이만부)

회기로 2010. 1. 24. 19:57
 

22. 金剛山記(李萬敷)


[地行錄六]

1. 關東


  계묘년, 8월에 상주를 떠나서 창랑(충북 중원군 앙암면 천포)의 창랑노인을 방문하여 함께 봉래에 들어가기로 하였다.(봉래는 금강산의 이명)

  시전에 이르기를,

  드높은 저 하늘 밝거든

  그대와 함께 길을 떠나세

  드높은 저 하늘 아침이 되면

  그대와 함께 노닐며 즐기세

라고 하였으니 어찌 이에 힘쓰지 않으랴.

  省台陽에서 남쪽으로 멀리 미륵산을 바라보았다.

  이 산은 신라의 경순왕이 개성에서 경주로 돌아가다가 이곳에 이르러 그의 왕후와 하안거(불교에서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좌선수도하는 일)를 하였는데, 암자의 벽에 두 미륵상을 새겨놓고 3년 후에 이 산을 떠났기에 그로 인연하여 미륵산이라 이름짓게 되었다 한다. 예전에는 황산사라는 절이 있어 경순왕의 초상화를 모셨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한다.

  산 아래에는 한 구비 개울이 흘러 술잔을 띄울 만하였다.

  省台陽의 동쪽은 修峽인데 30리가 무인절경이며 그 협곡 위로 두 개의 큰 고갯마루가 있어 동쪽으로는 치악산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백운산을 바라보게 된다.

  이 두 산은 모두 地誌에 실려 있으며 두 산에 따른 여러 輔山들은 마치 뭇 별이 북극성을 향하여 국궁하듯 함이 마치 비단이 얽힌 듯 아름답기 그지없다.

  치악산은 鶴城의 진산이며 관동 첫머리의 큰 산이다. 고려 때 陳補闕이 늙은 스님을 만나 이곳에서 시를 주고 받은 고사가 지지에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 안쪽으로 각림사란 절이 있는데, 이조 강헌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독서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 곳에서 서쪽 구렁에 문수사가 있고 남쪽에는 원성 고을을 관할하던 옛 성터가 있으며 그 最頂을 상지봉이라 하는데 창랑노인은 예전에 상원봉의 상지암에 올라 며칠을 묵었는데 조망이 멀리 탁 트인 것이 싫증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내가 丁愚潭 선생을 뵈었을 때에도 역시 그런 말씀을 하셨다.

  학성은 신라북원의 중심지이다.

  府西一帶의 기슭은 가파른 절벽이 평야 끝에 솟아 府中을 위압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치악산을 바라보게 된다. 동주옹(참판 이민구)이 관동의 안렴사가 되어 왔을 때 이곳을 『秋月臺』라 이름지었는데 8월 보름날을 맞아 그곳에서 달맞이를 하였다.

  처음 그곳에 오르면 큰 평야가 아득히 펼쳐져 노을과 안개가 자욱한 것이 마치 태초에 우주가 혼돈하여 아직 열리지 아니하였을 때와 흡사하다가 이윽고 사람의 그림자가 땅에 드리워지면서 맑고 탁한 경계가 비로소 분명하여지고, 달은 상원봉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것이다. 눈깜짝할 사이 어둑컴컴한 관문이 활짝 열리어 온갖 妖靈들이 모조리 움추려들고 대 위에는 털끝까지 가려낼 만큼 밝아지는 것이다.

  花田은 산협 속의 작은 현이며 두 갈래 시냇물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南川은 원천이 치악산에서 비롯되었고 北川은 원천이 덕고산에서 비롯되었다. 덕고산은 현의 동쪽 80리에 있는데 임둔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두 시냇물은 현서에 이르러 한 줄기로 합쳐져 섬강으로 흘러든다.

  화전의 북쪽 창봉을 지나 麻岾羽嶺을 넘으면 綠驍縣(녹효현)에 이른다. 이곳은 북으로 높은 산을 업고 있는데 석화산이라 일컫는다. 또 남쪽으로는 긴 시냇물이 휘돌고 있는데 그 원천은 공작봉에서 비롯되어 소양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시냇물 위쪽으로 범파정이 있으며 질펀한 모래사장이 10리에 뻗어 있어 지세가 맑고 그윽한 것이 산협 속의 별세계라고 말한다.

  녹효의 북쪽으로는 원창을 지나면 수춘에 이른다. 이곳은 본래 맥국(고대 동해안 삼척을 중심으로 있던 나라)에 속하여 관동의 일대 도회지였다.

  만산에 둘러싸인 가운데 만만하게 펼쳐진 평야와 겹겹이 구비도는 강물이 좁은 협곡으로 쏟아져 산세가 사방으로 좁게 막힌 가운데 중간은 광활하게 사방으로 터지면서 험한 산맥에 기대고 있기에 수춘(지금은 춘천)의 경관이 뛰어나다는 말은 헛되이 전해진 말이 아니었다.

  동에서 서로 뻗은 산은 끊어졌다가 다시 치솟고, 평야의 한가운데 하늘 높이 우뚝한 것이 바로 봉산이다. 그 양지 쪽에 객관을 마련하여 손님을 묵게 하고 있는데 『聞韶閣』이라 부른다.

  산의 그늘진 곳에는 높은 강둑이 있고 그 둑 위에 웅장한 집이 있으니 이것을 『소양정』이라 부른다. 지지에는 이 이름이 예전 순임금 때의 『鳳凰來儀, 簫韶九成』의 고사에 나오는 두 악명(악보의 이름)에서 따와 고친 이름이라 기록하고 있다.(陽春白雪曲의 陽자와 簫韶의 韶자)

  소양정은 현감이 있는 곳과는 조금 떨어져 있고, 완전히 산 밖에 온 모습을 다 드러내고 있어 유람객들이 반드시 한 번은 기대보는 곳이기도 하다. 두 줄기의 강물이 10리 밖에서 구비쳐 오다 느닷없이 꺾이면서 달려오는데, 그 원천이 동쪽에서 오는 물은 서화에서 시작되었고 북쪽에서 오는 물은 용연에서 시작되고 있다 한다.

  이 두 강물은 양양하게 백여 리를 흘러와 넓은 여울을 이루면서 바위와 부딪히어 급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정자의 북쪽에 이르러 비로소 소양강에 합류된다.

  소양강 위로는 강창이 있어 몇 곳 현의 세곡을 거두어서 배로 서울로 보내고 있다 한다.

  정자의 난간 밖에는 돛대를 단 배가 오르내리고 갈매기와 해오라비들이 날아와 모여 들며, 먼 산봉우리들은 푸른 산빛으로 어우러져 햇빛을 머금고 있어 신비한 영기가 감돌고 합치면서 홀연히 천만 색깔로 변화하는 것이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모두가 훌륭한 경관이라 날이 저물도록 돌아가는 일을 잊고 있었다.

  청평산은 수춘의 서쪽 40리 밖에 있는데, 이 산이 곧 예전에 경운산이라 부르던 곳이다. 지지에 이르기를 도가 높은 어느 선승이 玄旨를 이어받고 당나라에서 신라로 건너와 이 산에 들어 白嚴禪院을 창건하고 살았는데 고려 때에 춘주(지금은 춘천) 道․監倉使였던 李頭라는 사람이 백엄선원의 옛터에 普賢院이란 절을 다시 세웠고 고려말에 이두의 아들인 이자현이 그곳에서 은거하니 근방에 도둑이 없어지고 호랑이, 늑대 등의 발자취가 끊겨 산의 이름을 『청평산』이라 고치고 절 이름을 『文殊院』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자현의 자는 문수이며 호는 희이자라고 하였는데, 선설을 몹시 좋아하여 무릎을 서리고 앉아 말없이 좌선하며 30여 년을 산문 밖에 나가지 않았다 한다.

  퇴계 이선생도 일찍이 청평을 지나며 시를 지어 그의 풍절을 영탄하였다. 이 산에는 담이 있는데 너무 맑아 바위산의 모습이나 사원, 숲의 나무 등이 모두 거꾸로 비치며 밝고 맑고 투명한 것이 그 하나하나를 헤아릴 수 있어 이 못을 映池라고 부른다.

  이세경이 일찍이 그의 청평록에서 그 빼어난 경관을 극구 칭찬한 바 있는데 창랑노인은 『그 이름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였다.

  일찍이 地誌를 읽어보니 寒溪에 絶勝으로 이름난 곳이 있는데, 烏斯川이 구비돌아 동쪽으로 50리에 있다고 한다. 그곳의 절경은 영서에서 으뜸이라고 한다.

  일행이 壽春에 지체하고 있는데, 상인(스님) 至性이라는 사람이 한계에서 찾아와 시를 한 수 지어달라 간청하며 그곳 산중의 일을 말하기를,

  『그 산에는 돌빛이 모두 희고 멀리서 보면 마치 눈에 덮인 듯하며, 산 위에는 옛 城이 있는데 성벽은 허물어지고 폭포가 몇백 척 상공에서 떨어져 내려 마치 무지개가 걸려 있는 듯하고 폭포 밑에는 百曲潭이 있으며 백곡담 위로 尋源寺란 절이 있다 한다. 또 산의 정상에는 五世庵, 鳳頂庵 등 두 庵子가 있는데 우람한 암석 몇 개가 차곡차곡 싸여 있고, 높고 낮은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 있어 그 기괴한 경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한다.』

  楊麓 북쪽으로 40리를 가면 『方山店』이라는 곳이 있고 그곳에 頭陀山이 있다. 거기서부터 산은 더욱 깊어지고 골짜기를 따라 10여 리 들어가면 예전에는 두타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한다.

  이 절터의 좌우로 두 개의 폭포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곧 바로 쏟아져 내리면서 깊은 沼를 이루었는데 이 소를 龍淵이라 부르며, 소 위에는 盤石이 많아 백여 명이 앉을 수 있고 반석 위에는 거인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수춘에서 북으로 가면 母津을 지나 楊麓, 牲山에 이르는데 생산 위에는 옛 성이 있으며 생산고을은 큰 山峽 가운데 주위가 石川의 급류로 둘러싸인 산중의 작은 문이다.

  여기서 북으로 가면 瑞雲의 赤山을 지나게 되는데 이 산 안에 月峰寺라는 절이 있고 거기에서 다시 道寧고을 慶圯(?)山下에 이르게 되어 그곳을 흐르는 시냇물을 上里川이라 한다.

  昭陽江은 한강의 一大源流이며 소양강 또한 두 갈래의 源泉이 있다. 그 한 갈래는 所冬羅와 所波嶺의 물이 瑞雲과 麟縣 등의 여러 물과 합쳐져서 彌勒川을 이루고, 이 미륵천이 오사회를 지나면 舟淵津이 되며 다시 양록을 지나서 草沙灘이 되고 수춘에 이르게 되면 靑淵, 舟淵, 秋巖灘 등을 이룬다.

  다른 한 갈래는 湫池川과 鎖嶺川이 합쳐져서 龍淵을 이루고 이 물이 다시 鐵嶺以南의 물과 합쳐져서 德津川이 되며, 이 덕진천이 다시 天磨山 동쪽의 물과 금강산 서쪽의 물과 합류하여 麥遷江을 이루니 이 모두가 交州 땅이다. 이 강이 道寧에 이르러 미륵천 동쪽의 물과 합류하여 보리진을 이루며 다시 嵐谷川과 합류하여 馬灘을 이루어 생산에 이르게 되면 大利川이 되고 수춘에 이르러 모진, 湫巖灘 등을 이루면서 소양정의 북쪽에 모여 소양강이 된다.

  도령의 북쪽으로 50리를 가서 多慶津을 지나면 通溝縣이라는 곳이 있는데, 예전에는 수입이라고도 하였고 혹은 買伊라고도 불렀는데 지금은 도령의 속현이며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이곳은 사방이 산협으로 둘러싸였는데 때로 그 골짜기가 서로 합쳐지면 아름다운 산봉이 되고 맑은 시냇물이 그 가운데를 관류하며 흰 돌이 눈부시게 반짝거려 인가는 단풍에 싸인 바위며, 비단같은 숲 사이로 통나무집과 싸리 삽작문을 달고 있었는데 山田을 일구어도 금하는 사람이 없어 옥수수․콩 등이 집에 가득하였고 마을 풍속이 아주 소박하여 꾸밈새가 없고 나무꾼의 노래소리, 소치는 아이들의 노래가 골짜기에 메아리 쳐 서로 주고받으니 무릉도원이 과연 여기서 얼마나 더 아름다우랴 싶은 마음이 들었다.


2. 金剛山記


  통구에서 동쪽으로 골짜기를 따라 들어서니 가파른 길에 돌이 많아 인마가 다니기 어려웠다.

  이 길을 따라 30리를 가니 한 잿마루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 재에 단발령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고 그 산을 天磨山이라 하였다. 산은 웅장하고 높이는 하늘을 찌르듯 치솟아 있어 금강산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산맥 가운데에서 서편의 산이 곧 이 산이라 하였다.

  동쪽을 향해 금강산을 바라보니 눈길 머무는 곳마다 구슬같은, 은같은, 눈같은, 얼음알같은 봉우리가 층층이 쌓이고 겹겹이 치솟아 하늘에 닿은 듯하였고 그 하늘의 저쪽에는 더 바라볼 동천이 없었다.

  스님 慧密이 손으로 하나하나 『저것은 무슨 봉이며 저것은 무슨 령이며 저것은 무슨 岾이고 저곳은 무슨 洞이라』설명하기에 나는 滄浪老人을 보고 말하기를,

  『曾點, 漆雕開1)같은 사람이다. 이미 대체의 뜻은 다 보았다.』라고 하였더니 창랑노인도 『그렇다』라고 하였다.(이 증점, 칠조개는 실로 교묘한 複語임. 즉, 증점과 칠조개는 이미 공자의 도에 그 大意는 다 보았다는 뜻이 있고 동시에 전에는 옷칠을 한 듯한 까맣게 모르던 세계가 열렸다는 뜻을 겸하고 있음. 雕는 조각물)

  이에 혜밀이 말하기를,

  『이곳은 늘 구름이 높은 산을 감싸안고 있어 이곳에 와서 금강산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것을 몹시 아쉬워하였는데, 지금은 하늘과 땅이 맑게 개여 모두가 상투같고 쪽지머리같은 산꼭대기2)가 남김없이 다 나타났으니 참으로 공들이 이 산과 인연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단발령 위에는 世祖大王이 가마를 멈추었다는 壇과 섬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단의 네 모서리에는 늙은 檜나무가 말라 죽어 있었는데 내가 전에 옛사람의 기록을 보니 신라가 부처를 지극히 숭상하던 때에 한 왕자가 이곳에 와서 금강산을 바라보고는 서원을 세워 불문에 들었다고 하였는데 지금 어리석은 속설이 사실을 와전해서 감히 세조대왕의 聖德에 累를 끼치고 있으니 한탄할 일이었다.

  단발령을 내려오는 길은 마치 땅이 꺼져내린 듯 가파르고 풀더미와 넝쿨에 가린 그늘로 도무지 햇빛을 볼 수 없었다. 단발령 밑에는 新院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곧 交州의 長楊땅이었다.

  新院에서 큰 내(川)를 건너고 鐵耳嶺을 넘어 동쪽으로 10여 리를 가 다섯 번 내를 건너면 長延寺의 옛터가 있었는데 삼나무, 회나무, 소나무, 잣나무 등이 길 양쪽으로 날개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여기에서 다시 두 번 개울을 건너서니 長安寺에 들게 되었다.

  장안사는 큰 사찰이며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었고 그 후 원나라의 奇皇后가 工人과 布施를 보내어 增修하였는데 李穀이 그 사실을 기록하여 놓았다.

  절 앞에는 산영루가 버티고 있고 장경봉, 관음봉, 지장봉, 석가봉 등 수많은 봉우리들이 개울 건너 장안사에 조회하고 있었으며, 큰 계곡의 물이 힘차게 부딪혀 돌을 밀어내며 서쪽으로 쏟아져내려 은은한 우레소리가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예전에는 石橋가 있었는데 그 높이가 50척이고 넓이가 13척이나 되었으며, 양쪽 둑을 가로질러 산영루에 닿게 되어 그 다리 이름을 萬川橋, 혹은 問仙橋라 하였으나 지금은 장마비에 떠내려 가고, 큰 돌로 돌다리를 놓아 왕래하는 사람을 통하게 하고 있었다.

  산영루에서 내려와 서쪽으로 몇십 발자국 걷지 않아 범종루가 있었는데, 이 누 밑에 있는 문을 相隨門이라 하였으며 석가래 처마밑 길로 이어져 있었다.

  이 처마밑 길은 다시 문으로 이어지니 이것이 眞如門이며, 계단을 통해 2층에 오르면 큰 전각이 있었는데 이곳이 大雄殿이었다.

  대웅전 동쪽에는 명부전이 있었고 명부전의 동쪽에 나한전이 있었으며, 또 고승 宏辨의 부도도 있었다.

  秋江記에 이르기를, 『원나라 황제가 만든 無盡燈과 木刻經函 및 福成이 만든 53불, 5중불 등은 그 기법이 극히 정교하다.』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다 없어지고 오직 중국에서 가져왔다는 鐵爐와 珠燈이 남아 있었는데 매우 기이하였다.

  舍弟가 수춘에서 試士하고 우리 일행을 뒤따라와서 산에 들어왔기에 함께 탐승하게 되었다. 무릇 금강산을 유람하는 사람은 누구나 장안사에서 안장을 내려놓고 말을 그곳에 머물게 하며, 여기서 비로소 藍輿(가마)나 짚신, 혹은 지팡이를 가지고 길을 나서게 된다 하였다.

  社主(住持)가 우리들이 길을 떠나려 하자 나막신과 지팡이를 가져다 주었다. 동쪽으로는 내를 건너서 백천동에 드니 관음봉과 석가봉이 양편에서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서로 어루만지듯 닿아 있었다. 그 틈을 엿보아 지장봉의 험로를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 몇번 길을 꺾어 도니 지장봉을 등에 업고 한 암자가 있었는데 그곳이 지장암이었다. 거기에서 다시 한번 돌아들어 지장봉을 등뒤로 하고 서면 돌층계가 끊어진 곳에 마치 반석을 엎어 놓은 듯한 곳이 있었으며 사방이 열자 가량 되었는데 이 반석을 『業鏡臺』라 부른다 하며, 그 옆으로 꽹하게 맑은 못이 있고 그 못의 동편으로 돌병풍이 가로쳐져 동구를 막고 있었다.

  그 돌병풍은 색깔이 약간 노르스름한데 매끄럽고 光澤이 났으며, 앞뒤가 깎고 간듯하며 네 끝이 아무 곳에도 기댄 곳이 없었으니 이름하여 『玉鏡臺』라고 하였다.

  이 대에서 내려와 돌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한바퀴 구비돌면 동쪽으로 석문이 있는데 거기에 있는 못을 『黃泉潭』이라 불렀으며 문은 『地獄門』이라 불렀는데 후세 사람들이 각각 『玉鏡潭』『極樂門』으로 고쳤다 한다. 석문이 이어진 곳에 옛 성이 있었고, 문을 들어서니 금사굴과 옛 궁터가 있었다. 전해지건대 신라의 말왕(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나라를 물려줄 때 왕자(마의태자)가 간했으나 듣지 아니하자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금강산으로 들어와 세상을 마쳤다 하는데 이곳이 아마도 그곳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크고 작은 흰 돌이 수북히 쌓여 물을 가로막고 있어 물은 돌틈으로 구비치고 쏟아져 어지럽게 흐르고, 가파른 봉우리는 사나운 이빨처럼 삐쭉삐쭉 솟아올라 서로의 틈을 매워 眺望을 가로막고 있어 한발도 내디딜 곳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번개같이 몸을 피해 가며 앞으로 나아가니 골짜기는 갈수록 깊어만 갔다.

  平陵縣監인 閔珽이라는 사람은 나의 아우인 「持國」3)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가 겁도 나고 무서워 돌아가 버렸다. 우리들의 앞에서 창랑노인이 가는데 그 걸음걸이가 날 듯 빨랐다. 나와 지국은 그 뒤를 따랐지만, 동에서 서로 다시 서에서 동으로 몇 구비를 돌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국이가 白足(스님)을 시켜 산 과일을 따오게 하여 먹었고, 從子(하인)는 물밑에서 한 알의 해송 열매를 주워 쪼개니 알맹이가 나왔는데 물에 담가 보니 마치 玉鐘乳와 같았다.

  영원동은 석문에서 시작하여 미륵봉 아래에서 끝나며 미륵봉 밑에는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이름하여 『영원암』이라 하였다. 이 암자의 동편으로 백마봉과 차일봉의 두 봉우리가 솟아 있었고 우두봉, 마면봉 등 두 봉우리는 兀然히 서쪽을 지키고 있다.

  또, 남쪽에는 한 무더기의 봉우리들이 있는데 이 봉들은 시왕봉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으며, 그 중 작은 봉우리 네다섯 개가 마치 줄지어 큰 봉우리들을 받들고 있는 듯한 것들이 있었는데, 이 봉우리들에는 각각 동자봉, 사자봉, 판관봉, 장군봉 등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이 초록빛 봉우리들은 마치 여인의 머릿단처럼 다듬어져 숙연하도록 노란 금빛 절벽이 현란하게 눈이 부셔 오래오래 보고 있어도 도무지 싫지가 않았다. 이곳 지세는 깊고 아득하여 까마귀가 시끄럽게 우짖거나 날짐승이 날아 다니는 일도 끊겨 버려 적막한 곳이어서 굽어 우리가 지나온 곳을 되돌아보니 푸르른 초록의 나무들만 자욱할 뿐 길은 끊긴 듯 보이지 아니하여 다시 되돌아가 인간세계의 사람이 되지 못할까 염려스럽기조차 하였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10여 보를 올라가니 玉焦臺가 있었는데, 세 그루의 적송과 높은 돌무덤이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그곳에서 떠날 생각이 없었다. 깃털같은 구름이 몽롱하게 덮여 있는 봉우리가 물에 비치어 거꾸로 선 경관들이 서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사방의 봉우리들이 모여들어서는 한 곳에 합쳐져 느닷없는 하나의 자줏빛, 초록빛 세계를 이루었으며, 또 서편으로 난 갈림길을 들어서니 작은 동구가 있었는데 이곳을 現佛洞이라 불렀으며 칡, 담쟁이덩굴 사이로 현불암이 있었다.

  이 암자보다 더 서편에 백탑동이 있었으며, 洞 안에 矗巖이 있었는데 바위들이 스스로 층계를 이루었기 때문에 백탑동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장안사의 북쪽 산에는 극락암이 있었다. 그곳을 나와 서쪽으로 약 백 발자국 올라가니 만폭동의 물이 百川의 물과 합류되었는데 이곳에 예전에는 깊은 못이 있어 그 깊이를 잴 수가 없었다고 하나 홍수로 다 묻히고 지금은 급류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바위층계를 지나려면 나무로 잔교를 만들어 길을 이었는데 여기서 다시 수십 보를 가면 산끝머리가 구비돌며 장안사 쪽을 가로막고 있으며 그곳에 큰 바위 6, 7개가 개울가에 띄엄띄엄 떨어져 서 있었으며 또 질펀히 펼쳐진 바위가 산기슭을 이루고 있었다. 이 산의 끝은 툭 불거져 나와 물 속에 꽂혀 있어 물의 끝까지 뻗었고, 이로 인하여 물이 곤두서서 구비치는 곳마다 朗朗한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아래로는 큰 물 웅덩이가 이루어져 물이 소용돌이치며 새파랗게 뒤엉켜 있었는데 이곳을 『鳴淵』이라고 부른다 하며 이 높은 전면에 마치 채 피지 않은 부용꽃과 같은 작은 봉우리와 마주 보고 있어 그 봉우리의 그림자가 물속에 거꾸로 비치고 있었다.

  이곳에서 곧 바로 올라가 미륵암, 안양암 등 두 암자를 지나니 『金同寺』라는 옛 절터가 있었다. 거기서 다시 돌아 동쪽으로 가서 청련암, 신림암, 천친암, 선정암 등 네 암자를 지나면 협로와 마주 선 입암이 있는데 그 표면은 대패로 깎은 듯 매끄럽고 끝은 날카롭게 솟아 있었으며, 전면에 삼불이 새겨져 있었고 옆으로 또 한 부처가 조각되어 있었으며 후면에는 53불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 바위를 이름하여 『三佛巖』이라고 하였다.

  산중고사에 이르기를,

  김동이라는 사람은 신라 때 사람인데, 재산이 수만 석이나 되는 큰 부자였으며 또한 인연, 업계의 교(불교)를 좋아하였는데 인도의 승 指空이라는 사람이 김동이를 소승이라고 물리치자 김동이 이에 불복하였더니, 이윽고 큰 우레와 함께 비가 쏟아져 내려 김동과 김동의 절과 김동의 재물이 함께 깊은 못 속으로 들어가 버렸으며 그 못을 『鬱淵』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삼불은 지공이 새긴 것인데 53불이 나타나 하루밤 사이에 동시에 부처상을 새겨서 일을 마치자 그 우열을 가려보려 했으나, 지공이 이긴 까닭에 『삼불암』이라고 이름짓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 삼불암을 지나서 소나무, 회나무 사이로 『白華庵』이 있었는데 뒤로는 뭇 봉우리가 화살촉처럼 삐죽삐죽 솟아났으며 어떤 것은 온 산이 다 알몸으로 나타나 보이고, 어떤 것은 반만 나타나 보이기도 하면서 서로 삼키고 토해 내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아양떨 듯하여 교묘하고 기이한 조망을 취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이제 『漸入佳境』이라 할 만하였다.

  무릇 무슨 일이든 중도에 그만두는 사람은 보는 것이 없다. 본 바가 없으면 맛이 없고 맛이 없으면 게을러진다.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그 본 바가 나날이 새로워진다면 비록 그만두려고 한들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이곳은 서편으로 배점(절고개)과 마주보고 있다.

  예전 기록에 이르기를,

  『산에 들어온 사람이 이 고개에 올라 봉우리의 모습이 빼어난 것을 보면 저도 모르게 이마를 조아려 절을 하게 되는 까닭에 배점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무릇 금강산에 들어오는 길은 두 길이 있다. 하나는 道寧에서 단발령을 경유하여 철이로 들어오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교주에서 화천으로 다시 배점을 경유해서 들어오는 길이라고 한다.

  암자를 돌아나오면 뒤에 淸虛, 虛白, 楓潭, 鞭羊 등 네 스님의 부도와 碑記가 있는데 네 선사는 모두 불교의 종사들이다.

  백화암에서 돈도암을 지나 백여 보를 가니 표훈사가 있었다.

  이 절이 창건된 연대는 장안사와 동시대라 하며 신라 때 승 能仁, 神林, 表訓 등이 募緣해서 지었다고 한다.

  절의 양편 산록은 동서에서 절을 안고 있었는데 동편의 산은 석산이고 서편의 산은 토산이며 절은 그 중앙에 있고 이곳이 만폭동의 동구에 해당되었다.

  만폭동의 동구는 징검다리와 교량으로 사람의 통행을 가능케 하고 있었는데 그 다리는 『含映橋』라 부르며 다리머리에 한 樓閣이 있어 곧 『凌波樓』라고 불렀다. 누각의 문을 들어서면 반야당이 있고 그 뒤에 四聖殿이 있었으며, 그 안에 『曇無竭佛』을 세워 놓았다. 이 담무갈불은 금강산의 주불이라고 하였다.

  사성전 뒤편에 다시 慈陰殿이 있고 또 서편에는 海藏殿이 있어 경을 소장하고 있었다.

  古記에 이르기를,

  『이곳에 석각이 있었는데 원나라 사람 梁載가 지은 글이며, 절의 재산과 나누어오는 糧穀(도조)을 기록하였으며, 고려의 시중이었던 權漢功이 쓴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磨滅되어 알 수가 없었다.

  이곳 주지가 나에게 나옹스님4)의 鉢盂와 袈裟를 보여 주었는데 바리는 청동바리였고 얇기가 종잇장과 같았으며, 가볍기는 깃털같은 것이 맑고 빛이 나서 조그마한 흠집도 없었다. 가사는 한 벌은 굵은 올의 검은색 무명가사였고, 다른 한 벌은 금실로 옷깃을 수놓은 비단가사였다.5)

  사성전 뒤에는 쌀 열 섬은 밥을 할 만한 큰 놋시루와 흰 맷돌이 있었는데 모두 예전 물건들이었다.

  창랑노인이 말하기를,

  『이 산은 하늘과 땅이 처음 갈라졌을 때는 아마도 흙이 있었으리라 생각되는데, 몇 만년을 비가 씻어내려 이렇게 큰 뼈다귀가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천지조화의 淸秀한 기운은 갈무리하려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저 백이, 숙제의 청백함을 보지 아니하였습니까?』라고 하였다.

  표훈사를 나와서 북으로 높고 웅장한 산을 올라 삼장암, 기기암 등 두 암자를 지나면 채 10리를 못 가서 정양사가 있다. 이 절은 서북쪽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정동남으로 면해 있기에 『正陽寺』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 절은 험하고 구불구불하며 英明하고도 겹겹이 싸인 산에 자리잡아 멀리 높고 우뚝하게 하늘에 치솟아 있었으며, 절 앞에는 헐성루가 자리잡고 그 밑 까마득한 곳은 노을이 감싸서 타는 듯 아름답고 무릎 밑이 훤하게 탁 터진 것이 새로운 별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절 뒤편에는 작은 전각이 있었는데 역시 담무갈불을 모셔 놓았고, 또 육면각이 따로 있었는데 기둥이 여덟 개이며 석가래도 여덟 개로 그 건축의 제도가 매우 기묘하였다. 이곳에는 약사불의 석불을 모시고 있었다. 뜰에는 석탑과 석화대가 있었고 서편으로 옛 헐성루의 터전이 있었으며 그 위에 진헐대가 있었다. 몇 발 위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서너 개의 누가 보였다.

  다시 서쪽으로 천일대에 오르니 열 길이 넘는 높이였으며 굽어보니 이미 진헐대는 우뚝한 산 그림자에 숨어버리고 이 천일대만이 홀로 솟아 있었다.

  앞을 바라보니 만이천봉과 마주하여 산맥은 아득하고 구불구불 이어졌는데 날카롭게 치솟고 돌올히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하여 무섭고 놀랍고 기쁘고 사랑스러우며 공경할 만하고 두려워할 만하여 내장까지 상쾌하게 물에 잠긴 듯하였다.

  그 가운데 분벽한 듯 동북쪽을 막고 서서 하늘을 찌를 듯 정교하게 깎아세운 듯한 봉우리 위에는 많고 작은 바위들이 놓여 있어 자잘하게 부서질 듯하면서도 교묘하게 사물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중향성이었다.

  이 중향성의 동쪽 위로는 큰 산마루가 웅장하게 버티고 특출하게 빼어나서 엄숙하고도 신이하고 살아있는 듯 생생한 기운을 업고 있는 것이 비로봉이었다.

  그 동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두 갈래로 갈라진 곳에 깎아 만든 듯 날카롭게 솟아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것이 일출봉과 월출봉이었다.

  남쪽으로 멀리 달려 빼어나게 솟아올라 단아하면서 곧아 교만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이 혈망봉이었다.

  그 앞으로 문득 날개치듯 아름답고 장건한 모습을 한 것은 망고대였다.

  이 언저리에 흩어져 있는 봉우리로는 미륵봉, 달마봉, 백마봉, 차일봉, 시왕제봉, 우두봉, 마면봉, 지장봉, 관음봉, 석가봉, 장경봉 등이 밖을 에워 맴돌았고 윤필봉, 사자봉, 승상봉, 석응봉, 돈도봉, 오현봉 등이 가운데에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가섭봉, 청학대, 금강대, 대향로봉, 소향로봉이 안으로 불쑥불쑥 솟아올랐고 나머지 다른 봉우리들도 힘겨운 거북처럼 엎드려 있어 이루 다 가려낼 수조차 없었다.

  오직 보이는 것은 奮然히 성난 듯 달려가 높이높이 솟구치다가 형세가 합치면서 웅대한 세력을 펼치고 위태롭게 높이 솟은 바위들의 장엄하고도 괴이한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비로봉의 허리 아래는 단풍으로 속옷을 입고 돌 벽은 흠뻑 서리에 젖어 담뿍 붉은 연지를 바른 듯하였는데, 그 사이사이로 고송이 솟아나 울룩불룩 응어리지고 구렁이처럼 굽어 푸른 송침이 수북히 엉켰으며 오래된 등넝쿨이 무더기 채 튀어올라 서로 얽히고 설켜 자주빛, 노란빛이 찬연히 어리어 마치 오색 비단이 엉킨 듯하였고 그 위에는 하얀 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엎드려 맑고 희게 빛나는 것이 마치 눈이 햇빛에 비친 듯 눈이 부셨다.

  그 바위들은 모두 살을 도려내고 가죽을 벗겨 맑고 투명한 뼈만 서 있었다. 갑자기 떠돌던 구름이 크게 회오리쳐 돌면서 바위에 부딪혀 하늘로 날려 올랐다가 다시 바위를 덮어 씌우니 비로봉의 정수리 쪽으로 갑자기 서풍이 세차게 일어나며 은은한 소리가 생겨났다.

  이때 구름 속에 가렸던 햇빛이 구름을 밀며 찬란하게 서쪽으로 기울면서 산정을 되비치자 멀리 가까이 줄이어 선 산봉우리들이 영롱한 한 덩어리의 옥이 되는 듯하였다.

  이 장엄한 광경을 보고 지국은 기뻐 말하기를,

  『예전 형산에 구름이 열리던 광경이 이와 같았을까?』라고 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북으로 올라가니 그 위에 웅호봉이 있었는데 이 산만이 홀로 토산이었다. 그러나 산은 雄然하고 장중하게 솟았으며 그 아래 개심암, 안심암, 양심암, 돈도암 등 네 암자가 있었는데 어떤 것은 형태가 남아 있었고 어떤 것은 폐허가 되었다.

  古事記에 이르기를, 이곳은 신라 법흥왕의 세 아들인 개심태자, 안심태자, 양심태자와 딸인 돈도부인이 이 산에 들어와 네 암자에서 수련한 곳이라고 한다.

  표훈사로 돌아와서 동쪽으로 올라가 외나무다리를 지나니 솔, 잣나무 숲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두 개의 돌로 다듬은 곱추가 서로 목을 비비 꼬고 있어 길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길은 그 공간을 뚫고 나 있어 허리를 구부려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이곳을 금강문이라 이름하였다.

  문을 들어가 얼마 가지 아니하여 홀연히 눈앞이 환하게 밝아지고 발놀림이 가벼워지며 가슴이 더욱 상쾌해지더니 나도 모르게 만폭동에 들어서 있었다. 활촉처럼 생긴 무리지은 봉우리들로 에워싸인 영롱한 세계 안에 넓고 긴 반석들이 면면히 이어져 기이하고 깨끗하고 윤기있는 매끄러운 물은 바위들의 이지러진 틈 사이로 굽이치며 쏟아지다가 하늘로 치솟고, 웅덩이를 이루며 갈라졌다가는 합쳐지고 합쳐졌다가 또 갈라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진동하며 무더기로 콸콸 쏟아지는 것이 마치 그 세력을 뽐내는 듯하였고 서로 장엄함을 다투는 듯하였다.

  이곳에서 조금 더 북으로 가니 바위에 봉래 양사언이 큰 글자로 『蓬萊楓嶽元化洞天』이란 여덟 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필치가 몹시 怪偉하였으며 혹은 누워 있고 혹은 서 있는 돌의 앞, 뒤, 아래 할 것 없이 사람의 이름을 써서 새겨놓거나 아직 새기지 않고 쓰기만 한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왕왕 아첨하고 사악하고 흉악한 역적의 이름도 대인군자의 이름과 더불어 가지런히 함께 새겨져 있어 이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말하기를,

  『아무 손상될 것이 없다. 선악을 다 함께 쓰는 것은 춘추필법의 가르침이다.』라고 하였다.

  나의 족증조이신 대사간공과 부윤공 등 두 분과 나의 선자(돌아가신 아버지)께서도 그 동편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창랑노인은 부윤공의 손자이기에 부윤공의 휘자 아래 이름을 제서코자 하였으나 쓸만한 틈이 없어 끝내 쓰지 못하였다.

  바위의 둘레에도 여덟 자의 글자가 있는 누워있는 바위가 있었는데, 우리들은 지팡이를 멈추고 바람을 마주하여 쉬었다. 그 바위의 맞은 편에 또 한 바위가 있었는데 창랑노인이 말하기를,

  『저 바위에는 새길 수 있다.』라고 하고 돌 사이를 뛰어넘어 그곳으로 가 세 사람의 이름을 써놓았다.

  나는 고문체로 『萬瀑洞』이라 써서 함께 새겨 놓았다. 거기에서 위를 우러러보니 바로 청학대였다. 그러나 학의 둥지는 없었다.

  선배, 老宿6)은 말하기를,

  『예전에는 큰 새가 있어서 저 대위로부터 날아 나와 구름 속에 들어갔다가 돌아오곤 하였는데 지금은 그 새가 다시 오지 않는 지가 오래 되었다.』라고 하였다.

  추강 남효온도 일찍이 검은 새가 이곳에 둥지를 치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학이 아님을 가려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누가 아랴! 그 검은 새(玄鳥)가 학인지 아닌지를…….

  八字石에서 동구는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왼편 골짜기가 곧 원통동이다. 여기서 진불암, 능인암을 지나면 원통암이 있고 암자를 나서면 사자봉 아래 사자암이 있었다. 또 서쪽으로 들어서면 수미동이 있으며 이곳에 수미암과 수미탑이 있었다.

  또 북쪽으로 나서면 능호봉의 아래인데, 이 길은 영랑점에서 막혀 버렸다. 이곳까지가 아마 30리는 될 것이다. 八字岩 오른편은 곧 만폭동으로 오르게 되고 만폭동에는 여덟 개의 못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청룡담이며 반석 위에 움푹 패인 쟁반 모양의 홈이 있었다.

  그곳을 세두분이라 하였으며 거기에는 물건을 놓았던 흔적이 있는데 이 바위를 『拭巾巖』이라 부른다.

  두 번째 못은 흑룡담이라 하는데, 반석 위에 눌림돌이 있었으며 못 입구는 모가 나고 가느다란 흰 실모양의 선을 두른 갓 모양의 붉은 무늬가 둥그렇게 그 테두리를 이루고 있어 이곳을 『綵雲臺』라 불렀다.

  셋째번 못은 『琵琶潭』이라 하여 오현봉에 의해 곧바로 눌려 덮인 칼로 벤 듯한 절벽이 서 있었다. 절벽 위는 조금 편편해져 마치 애기를 밴 여인의 배처럼 된 곳에 굴이 있었는데 이곳을 『普德窟』이라 하였다.

  절벽 밑에는 하나의 구리기둥이 서 있었고, 이 기둥에는 열아홉 개의 마디를 만들어서 굴과 높이를 같이 하였으며 벽에 바싹 붙여서 지은 작은 오막집이 굴 앞을 덮어 내리고 있었다.

  구리기둥을 타고 쇠사슬로 이 오막집에 갈퀴를 매어 바위에 놓고 대들보 석가래 위에는 돌비늘을 포개놓은 덮개를 한 작은 절에 선방을 꾸며놓고 있었는데 이곳을 『普德窟』이라 불렀다.

  이 암자 북쪽으로는 사방이 한 자 가량의 돌층계가 있었는데 그곳을 보덕대라 불렀다. 이 돌 사다리를 따라 엉금엉금 기어올라가니 머리카락 하나가 들어갈만한 사이를 두고 그 밖은 천 길이나 되는 낭떨어지가 되어 설 땅이 없었으며 눈이 어지럽고 혼이 떨려 차마 되돌아볼 수가 없었다.


  절 안에 들어가 문을 열어보니 入定(마음을 냉정히 통일시켜 삼매에 들어감)한 스님이 겨우 막 입정에서 깨어나고 있었으며 구름이 실오리처럼 난간과 살창 사이를 날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쇠사슬을 잡고 기어올라 굴집에 들어가니 굴집이 흔들흔들하고 삐거덕 퉁탕하는 소리가 울렸다.

  발길을 돌려 내려오니 옷과 망건이 축축히 안개에 젖어 있었다.

  네 번째 못은 『碧霞潭』이라 하였다.

  이곳의 물은 더욱 검푸르게 깊어지고 소용돌이치며 솟구쳐 올라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중국의 사신인 鄭同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유람왔다가 이 못에 이르니 그의 수하인 한 사람이 맹세하기를 “이곳이야말로 진정 부처님의 경계다. 원컨대 죽어서 조선 사람이 되어 길이 부처님의 세계를 보련다.”라고 하고 마침내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하며 근년에도 당시 이곳의 군수였던 李某가 이곳에서 발에 돌이 걸려 넘어지면서 못 속에 빠진 것을 따라온 사람들과 스님들에 의해서 구출되었다고 하였다.』

  다섯 번째 못은 眞珠潭이라고 하였다.

  이곳에 있는 반석은 네모 반듯하고 분칠을 한 듯 티끌 만한 흠집 하나 없었으며 열 사람은 족히 그 위에 앉을 만하였는데 이 바위를 『白雲臺』라 불렀다.

  이 바위 맞은 편에는 층층이 쌓인 바위 위로 폭포가 떨어져 물방울이 날아올라 돌을 치고 다시 떨어져 흐르는 모습이 마치 깨끗한 몇만 알의 구슬을 한꺼번에 내려붓는 듯한 것이 많은 못 가운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의 못은 각각 『龜潭』과 『船潭』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각기 그 생긴 모양을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 하였다.

  여덟 번째의 못은 『臥龍潭』이라고 하였으며 사자봉이 바로 그 위편에 솟아 있었다. 사자봉 아래에는 石獅子가 있었는데 마치 목털이 사납게 곤두서 있는 성난 모습처럼 보였다. 이 사자석 북쪽이 곧 圓通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사자봉을 지나니 풀서리가 자욱하였다. 몇 리를 더 가니 마하연이 있었는데 이곳은 신라의 의상대사가 처음 창건한 곳이며 불경 속의 말을 따서 암자의 이름을 지었다 한다. 『大論』에 이르기를 『摩訶』란 말은 『크다․많다․훌륭하다』라는 뜻이며 『衍』은 大乘 즉 수레를 뜻하기에 마하연은 곧 『大乘』이란 뜻이며 세간이건 세간을 벗어난 탈속의 세계이건 모든 법을 포섭하여 이 대승심에 귀의케 하려는 것이다.

  암자는 12폭의 금빛 비단으로 天井의 판자를 덮었으며 양봉래(양사언)가 소나무를 태워 그 숯거멍으로 글씨를 써 놓았다고 하였다.

  암자의 마루 앞은 혈망봉인데 그 구멍이 노출되어 있고 양어깨에는 돌로 새긴 담무갈 부처가 마치 가부좌한 것처럼 앉아 있었다. 이곳을 行脚하는 스님은 반드시 손을 모아 이 부처에게 절하며 축원을 하고 이곳을 지난다고 하였다.

  암자 뒤에는 가섭봉이 있고 그곳에 나란히 중향성이 있어 마치 옥으로 만든 병풍이 둘러쳐진 것과 흡사하였다.

  서북으로 들어서면 가섭동으로 들어가는데 큰 구렁 사이를 외나무다리로 연결해 놓았다. 이 다리를 건너 중백운암에 도달하게 되는데, 예전 기록에 의하면 암자의 뜰에는 『指空草』와 계수나무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었다.

  여기서 동쪽으로 오르면 『石波淪』과 石鼎이 있다. 개울 옆 돌층계 길로 단풍이 짙어 길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마치 붉은 비단막을 친 것처럼 화려하여 옆에서 걷는 사람을 보니 얼굴 가득 붉은 물이 든 것이 마치 술에 취한 사람 같았다.

  지나는 길마다 淸絶한 기운이 뼈속까지 사무치고 한번 단풍 숲속에 들어오니 영문모를 화사한 기상이 생겨나니 이 모두 한 때의 현상일 뿐…….

  이렇게 얼마를 더 가니 큰 절벽이 깎아세운 듯 서 있고 그곳에 『彌勒像』이 새겨져 있었다. 절벽이 끝난 곳에는 『彌勒臺』라 새겨져 있었다. 그곳에서 조금 동쪽으로 큰 반석이 있어 이씨대, 허씨대라 하는 두 대를 이루고 있었고 푸서리가 수북하고 아름답게 쌓인 곳에 『妙吉祥庵』의 옛 터라는 곳이 있어 주춧돌과 섬돌이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다. 吉祥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이른바 吉祥勝德의 모습을 일컫는 것이라 한다.

  馬背巖을 지나서 內水岾 고개에 올랐다. 이 고개는 내금강과 외금강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었다.

  이 고개에 서면 서쪽으로 총총히 푸른 봉우리와 삐죽삐죽한 석봉 사이로 입을 딱 벌린 듯 훤하게 트인 만폭동이 굽어보이고 북으로는 눈덮인 비로봉이 하늘을 감싸안은 듯한 모습이 보이고 동으로는 수많은 산봉우리가 빽빽히 서 있는 곳에 자주빛 기운이 알맞게 섞인 편편한 골짜기를 내려다 보게 되었다.

  고개를 내려와서 동쪽으로 가니 산은 더욱 깊어지고 골은 더욱 길어져서 높은 언덕과 우거진 숲이 많고 담쟁이 넝쿨의 두터운 그늘이 음습한 기운에 싸여 있고, 측백나무의 빽빽한 골짜기가 마치 한 뿌리에서 아름답게 자란 듯한 나무와 둘레가 두 아름이나 되었고 어떤 것은 저절로 가로누워 산길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표피와 잎이 모두 벗겨지고 떨어져 나간 것이 마치 한 마리의 말이 달려가는 듯 보였다.

  몸을 굽혀 그 나무 밑을 빠져나와 다시 10여 리를 가 길을 돌려 동쪽으로 올라서니 산세는 더욱 가팔라져 마치 절벽 끝을 걷는 듯하였다. 封禪記에 이르기를 『뒤따라오는 사람은 앞에 가는 사람의 짚신 바닥을 보고 앞에 가는 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본다.』고 묘사하였으니 그 말이 참으로 맞는 말이었다.

  절벽을 다 오르자 길은 막히고 단으로 묶어 놓은 듯한 바위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손으로 바위를 잡고 기어올라가니 그 위에 사방이 몇 자씩 되는 바위들이 사면에 깔려 있어 마치 대들보 위에서 아래 세계를 굽어 내려다보는 듯하였으며 바위에 기대어 멀리까지도 바라볼 수 있었다. 이곳을 이름하여 『隱仙臺』라고 하는데, 남쪽으로 만경대와 대치하고 있으며 북쪽을 돌아보니 열두 개의 폭포가 흰 비단이 흩어지며 드리운 듯하였으며 동쪽은 오직 겹겹의 물이 하늘에 닿아 밥솥에 뜸들 듯 뭉개뭉개 서리고 막히고 그늘진 곳은 귀신이 사는 듯 커다란 그림자를 이루어 나도 모르게 정수리가 쭈삣하였다.

  이 대에서 내려와 옛 길을 따라 상견성암, 하견성암 등 두 암자를 지나니 땅이 제법 넓게 트였는데 이곳에 유점사가 있었다.

  지나온 길을 헤아려보니 표훈사에서 수점 고개를 오르는 데까지 족히 30리는 되었을 것이며 수점에서 유점사에 이르기까지가 10여 리는 되었을 터이었다.

  黙軒 閔漬는 記錄하기를,

  『시날 南軒王 원년에 쇠로 만든 종이 바다에 떠내려와서 고성 경계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종 안에 53불이 갈무리되어 있었다 한다. 縣官인 盧偆이라는 사람이 백성들을 불러 가마에 싣고 산중으로 모셔와 마침내 유점사를 창건하여 이 53불을 숭봉하게 되었다.』고 한다.

  민지는 고려 때 사람으로 글에 능하였으며 허탄한 것을 좋아하여 귀신과 相姦한 이상한 사적 등을 많이 서술하여 이미 선배들로부터 그의 거짓이 판명된 사람이었다.

  이조의 고사에 이르기를,

  『세조대왕 때에 이 유점사를 중건하여 그 모습이 더욱 웅장하고 아름다워졌으며 큰 종을 주조하여 거기에 효령대군이 도움준 사실과 아울러 의정부의 여러 대신들이 도운 사실을 새겼는데 종에 새긴 글은 金守溫이 지었고 글씨는 鄭蘭宗이 썼다.』고 한다.

  그 후 세 번 災難을 겪는 동안 종은 반은 불에 녹았으며 예전 古蹟도 湮滅된 것이 많다고 한다.

  이 절의 제일 큰 집을 능인보전이라 부르는데 명나라의 戶給事였던 商周祚란 사람의 글씨라고 한다.

  불전 안에는 檀木 나무로 假山을 만들고 가산 안에 53개의 窟을 만들어서 53불을 그 안에 안치하였는데 모두가 담무갈불이며 金身이다.

  이 능인보전의 동편에 應眞殿(羅漢殿)이 있고, 다시 龍般殿이 모셔져 있어서 여기가 國福을 비는 곳이라 한다. 그 아래 작은 閣이 있었는데 노춘의 초상이 안치되어 있었고, 또 육면각에는 약사불상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남향이었다.

  불전의 서편에도 서산대사, 靑蓮大師, 普雲대사 등 3대사의 사찰탑이 안장되어 있었고 남쪽으로 진여문을 나서면 그 밑으로 몇 개의 층계가 있었으며 그곳에서 활로 한번 쏘면 닿을 만한 곳에 큰 시냇물이 있었으며 그 시냇물 위에 山影樓(山映樓)라는 누각이 세워져 있었는데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로 절과 이어져 있었으며 그 밑으로 온 골짜기의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누는 극히 그윽하고 화창하여 고금의 시인들의 제영이 많고 누 앞 남산에는 손가락으로 가리켜 줄 만한 지점에 明寂庵, 成淪庵, 得道庵 등 세 암자가 있었다.

  그 절에는 지공대사의 金字經과 貝葉經을 金匣에 저장하고 있었으며, 인목왕후 및 정명공주가 손수 그리고 수놓아 장식한 경 一套와 앵무배, 호박잔, 水晶壺, 琉璃缸, 琉璃盤 등이 보관되고 있었는데 모두가 기이한 보물들이며 쇠로 만든 화로는 그 모양이 지극히 고풍스러웠고 유기로 만든 징은 크기가 표훈사의 것보다 더 컸으며 예전부터 유전되어 절에서 갈무리하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 산에 사는 사람과 산을 이야기하여 보니 무릇 이곳 금강산은 내금강은 모두가 가파른 봉우리가 천 길이나 땅에서 치솟아올라 그 암석들이 기괴하여 온갖 모습이 다 갖추어졌고 외산은 산의 기세가 힘차게 달리며 하늘로 치솟아 겹겹이 겹쳐지고 뭉치고 쌓여서 웅장한 것이 특징이라고 하니 이것이 내금강과 외금강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고 하였다.

  멀리서 바라보는 데는 비로봉․망고봉․천일대의 모습이 장쾌하고 수석으로는 만폭동, 구룡폭포가 가장 절승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로봉은 오르는 길이 끊어졌고, 오르는 데 위험이 뒤따라 아주 건각이 아니고는 오르기 어려웠으며 구룡폭포는 더욱 깊고 험하여 遊脚하는 승려들도 그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한스럽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 내가 금강을 유람함에 젊고 기운찰 때를 놓치고 저 嶺表(嶺南)에 流落하여 질병과 근심, 걱정에 쌓여 홀홀히 세월을 보내고 나이 많고 病衰하여 村野에 엎드려 묻혀 지내니 그 마음 속의 불만의 덩어리를 풀 길이 없다가 지금에야 마침내 천리길을 안개와 이슬을 뚫고 새벽의 찬이슬에 목욕하며 나의 정취를 물 흐르고 산이 솟아 있는 이곳에 내쳐 천하의 장관을 마음껏 다 누리게 되니 神氣는 淸旺하고 가슴 속이 확 트일 것 같구나. 이것이 이른바

  『하늘이 나에게 내려주신 복이 적은 것이 아니며 이는 사람의 힘으로 미치는 바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금강산을 끝까지 구석구석 다 探窮하지 못한 한에 이르러서는 옛 사람도 이미 나보다 앞서 이런 한을 얻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초가집에 누으니 꿈 속에서도 내 혼이 날아 금강동천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였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산과 물을 보는 데에 나름대로 하나의 도가 있으니 즉 산수를 보는 것은 다 좋으나 그 산수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출처 : 금강산문학
글쓴이 : 금강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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