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자료

[스크랩] 정구 의 문파--윤천근//김숙영 자료 옮김

회기로 2010. 1. 24. 20:13

[정구의 문파 ]

앞에서도 말하였다시피, 정구 문파는 이황의 학단에 속하는 사람들을 규정하는 문파적 개념 중의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안동지역과의 학술적 연계는 다른 문파들에 비해서 약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구는 성주 출신이고, 조식 문파로 분류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구(1543~1620)는 자가 도가이고 호가 한강이다. 그는 김굉필외증손으로 판서 정사중의 아들이다.

본관이 청주인 정구의 조상들은 대대로 서울에 거주하였다. 그러다가 그의 할아버지가 동방5현의 한 사람인

김굉필의 사위가 되고, 그의 아버지가 현풍 외가에 와 있으면서 성주이씨와 혼인을 하게 되어서 성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정구 가문의 영남 입향은 이렇게 저가 쪽, 또는 외가 쪽 인연을 따른 것이라고 하겠다.

 

정구는 7세에 󰡔논어󰡕와 󰡔대학󰡕의 대의를 깨쳤다고 말하여질 정도로 총명함이 어릴 적부터 발현되었던

사람이다. 그는 12세 때에 오건에게 가서 배운다. 오건은 그의 종이모부이며, 남명 조식의 고제자였다.

그런 오건이 성주향교 교수로 부임하게 되어서, 김우옹 정구와 학문적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다.

오건에게서 그는 󰡔주역󰡕 등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21세 때 당시 63세의 대 학자로 당대 조선 학술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던 퇴계 이황을 찾아가 문답함으로써 퇴계학파의 일인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며, 그로부터 3년 뒤,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에는 당시 66세의 나이로

지리산 기슭을 차지하고 앉아 강학에 열중하고 있던 조식을 찾아가 배알한다.

 

이렇게 정구의 학통에는 오건-조식으로부터 오는 남명학의 측면과 이황으로부터 연유하는 퇴계학의 측면이 공존하는 것이다. 외견상 정구의 학문은 남명학 쪽으로부터 이어받고 있는 부분이 더 많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남명 조식에게 직접 학문을 전수받은 것은 퇴계를 만나 질의 응답하였던 것보다 시기가 늦으니 그

렇다치고, 어린 나이로부터 남명 조식의 제자인 오건에게 학습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정구는 남명학파의 일원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정구가 남명학파 속에서 갖는 위치는 그가 퇴계학파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보다 어쩌면 훨씬 높고 크다고 할 수도 있다. 정구는 남명 조식 이후 남명학파를 이끌어 갔던 정인홍과 갈등하기는 하였지만, 정인홍이 몰락 한 뒤에는 정인홍으로 인하여 중대한 타격을

받았던 남명학파를 이끌고 나가는 책임을 부여받기까지 하였음이 이 점을 증거하여 준다.

 

그러나 남명학파가 정구에 의하여 이끌리게 된 것은 남명학의 생존에는 긍정적 기능을 하였다고 하기 어렵다. 정구는 스스로 남명의 학문을 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조 13년의 일을 통하여

우리는 정구가 스스로의 학문적 의식반경을 어디에 가설하여 놓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선조 13년, 1580년에 정구가 왕을 뵈었을 때, 선조는 정구에게 조식의 문인인가를 묻는다. 그 때 정구는 ‘조식의 문하에 출입하기는 하였으나 학문을 전수받지는 못하였다’고 대답하고, 대신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음’을 밝힌다. 이것은 정구가 스스로 이황의 학통 속에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여 놓고 있다는 증거라고 하겠다.

 

왕은 계속하여 정구에게 이황과 조식의 학문이 어떠한가를 묻는다. 정구는 ‘이황은 학문을 하는 것이 평이하면서도 알차고, 그 배움의 단계가 분명한 것이, 학자들이 배우고자 하는 뜻만 분명하다면 진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조식은 타고난 기질이 고매하고 조예가 고원하여 자득한 공이 있으나, 만약 배우는 사람이 잘 배우지 못하면 그 경지에 이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이황의 학문을 ‘착실하게 하나씩 익혀나갈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조식의 학문을 ‘깨달음이 뒷받침을 하여 주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 결과라고 하겠다. 이것은 아마도 이황이 조식의 학문을 ‘노장에 근접하여 있다’고 진단한 것과 같은 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어쨌든 정구의 의식은 이렇게 퇴계 이황 쪽으로 경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정인홍이 주도하여 나가던

북인정권 시절에 남명학파가 퇴계 이황에 대한 비판을 거듭 제출하였던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고, 그가

남명학의 적전으로 부상하였을 때에는, 퇴계학과의 대립적 관계를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정구의 남명학파 중심 장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영남학맥의 두 주류인 퇴계학과 남명학 사이의 대립적 분위기를 해소하여 양 학맥의 연계적 발전을 위한 지평을 높여 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남명학의 퇴계학에 대한 무장해제의 성격을 띄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남명학의 학파적 발전에는 정구의 등장이 긍정적인 기제로 작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구는 특히 예학에 밝았다고 한다. 그는 예를 ‘가깝고 먼 것을 정하고, 믿고 못 믿는 것을 정하고,

같고 다른 것을 구별하고, 옳고 그른 것을 밝하는 기준’이라고 이해하였다.

정구의 예학은 조선조 예학발전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정구의 학통을 잇는 사람으로는 허목이 대표적이다.

허목은 1595년에 나아서 1682년에 죽었는데, 1617년에 아버지 정교가 거창현감에 임명되자

문위에게 배웠고, 문위의 소개로 정구를 찾아가 스승으로 모셨다.

 

정구의 학통이 허목으로 이어짐으로써, 기호 남인의 학맥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채재공이 이익의 묘갈명에서 쓰고 있는 바와 같이, ‘한강 정구-미수 허목-성호 이익’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학통이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학통을 이 계열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황에게서 발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정구의 의식과도 부합되는 것이며, 이 계열에 속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좌표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계열은 남인의 한 갈래로써, 기호 남인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기호의 남인은 영남의 남인과 초기에는 사상적 입각점을 같이하지만, 점차적으로 다른 입장과 태도를 구축하여 나가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이 계열에서 근대 유학의 새로운 변용이라고 할 수 있는 실학이 잉태되어 나오는 것이다. 근기지방의 남인들에게서 실학사상이 조형되었던 것은 영남지방의 남인들과는 달랐던 경제적 조건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설명된다.


“당시 경제적 기반 없이 관직을 유일한 생계의 수단으로 여겨왔던 근기지방의 남인들은 벌열정치의 일당전제 하에 밀려 나와 있어 실제 생활에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이며, 현실에 대한 불만과 고민이 심각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영남지방의 남인들은 비록 정권에서는 물러나 있었지만, 향촌사회에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채

지주계층으로서의 공고한 경제적 기반과 안정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처지의 차이에서 전자에 있어서는 실학이란 새로운 학문이 나올 수 있었지만, 후자에서는 그러한 반성과 자각 없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으니, 실학이 발생할 리 없었다.”


이수건 교수의 말이다.

허목을 창구로 삼아서 실학으로 발전하여 나가는 것이 정구 학맥의 본류이다.

정구의 적전을 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허목이다. 그러나 정구의 문하 중에서 일가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우리는 또 장현광을 들 수 있다.

 

여헌 장현광은 정구에게 배웠던 적이 있으므로, 퇴계학파의 일원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퇴계학의 기본입장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면이 상당히 있었던 모양이다.

 

정구의 학맥은 그 주류가 근기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성을 띄는 것이라서 안동지역과는 무관하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정구 학맥의 주류는 실학으로 발전하여 나가는 것이다. 영남지방의 정구학맥은

퇴계학파의 반경 안에서는 장현광으로 대표되는데, 장현광 역시 인동 사람으로써 안동지역과는 무관하다.

안동지역의 정구 학맥이 빈약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빈약한 것이기는 하더라도, 안동지방에서 정구의 학맥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정구가 안동부사로 부

임하였던 것이 큰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안동부사로 부임한 정구에게 배워 그 문하에 든 사람으로는

권환, 김연조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권기도 이 범주 속에

집어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겠다.

 

권환(1580~1652)은 자가 택보이고, 호는 이우당이다. 그는 권대기의 넷째 아들로, 안동 와룡면 이계리에서 출생하였다. 권대기는 호가 인재이며,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권환은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송재 권우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송재 권우 역시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다. 그는 20여세 쯤 되어서 한강 정구의 문하에 든다.

 

이우당 권환은 정묘호란 때 의병진에 참여하여 부장을 맡는 활약을 한다.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고

안동부에서 의병이 결성되자, 중의에 의하여 권환이 부장의 자리를 맡았던 것이다.

안동 의병진은 임금의 교지를 받고, 여러 읍의 의병들과 연대하여 죽령의 요충지에 진을 친다.

이 때 의병진에서 작성한 문서들은 거의 권환의 손을 거쳤다고 한다. 권환을 부장으로 하는 안동의진은

조정이 오랑캐와 강화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해산하기에 이른다.

 

김연조는 오미동 풍산김씨로, 유명한 김봉조 8형제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안동군 풍산읍 오미동 사람이다.

풍산읍 오미동은 풍산김씨의 세거지이다. 선조때 이 마을에 살았던 김대현은 9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하나는 일찍 타계하고, 8형제가 장성하였다. 그들 8형제는 모두 진사를 하였으며, 그 중 5형제가

문과 급제를 하였다. 후에 인조 임금은 이 점에 주목하여 그들 형제가 살았던 마을을 오미동이라 부르게 하고, 마을 앞에 문을 새워 ‘봉황려’, 즉 ‘봉황의 마을’이라고 써 붙이게 하였다. 봉황은 한꺼번에 아홉 마리 새끼를

낳는다는 점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김연조는 오미동 김대현의 아들들 중 다섯째로써,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온 정구에게 배우는 것이다. 김연조는 정구에게서 특히 󰡔심경󰡕과 󰡔근사록󰡕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정구가 안동지역에 끼치고 있는 영향 중에서 주목하여 보아야 할 것은 권기의 작업이다. 권기는 󰡔영가지󰡕를 편집한 사람이다. 권기를 정구의 문도로 분류하여야 할 것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 것이다.

그는 정구보다는 류성룡 쪽으로 더 접근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기의 최대 업적이 󰡔영가지󰡕의 편집을 완성시킨 것이고, 이 점은 무엇보다도 정구의 독려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것이며, 당시 지방지를 만들어 나가던 문화는 정구에 의하여 대표된다고 할 수 있으므로, 나는 그를 정구의 학맥 속에 넣어서 이해하는 것이 나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권기(1546~1624)는 자가 사립이고 호는 용만이다. 그는 안동 소야촌(현재 서후면 교리) 사람으로, 17세에 당시 현감으로 있던 고흥운에게 나아가 배웠고, 그 후에는 송암 권호문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에게도 배운다. 그리고 그 후에 정구와도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다중의 학문적 연원관계를 가지므로, 권기가 누구의 학통을 계승하는가를 말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라고 하겠다.

 

권기는 처음에는 과장에 열심히 출입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못하였고, 부친이 타계한 뒤로는 과장에 발을 끊고 학문에 침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평생의 사업은 󰡔권씨세보󰡕와 󰡔영가지󰡕를 완성시켜 내는 것이었다. 󰡔권씨세보󰡕는 도원사 권율이 삼태사 묘당에 제향하고 나서 그에게 부탁한 것을 8년여의 노력을 기울여 완성시킨 것이고, 󰡔영가지󰡕는 류성룡의 권유에 따라 7년 여의 노력을 기울여 완성시킨 것이다.

 

󰡔영가지󰡕는 류성룡의 권유로 편찬을 시작한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에 지방지를 만드는 문화를 선도하여 나가던 것은 정구였다. 정구는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곳마다에서 지방지를 편찬하여 내고 있었다. 󰡔영가지󰡕가

완성되기 전에 그가 지방관을 거쳤던 몇 군데 지역에서는 이미 지방지가 간행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가지󰡕의 완성도 정구가 없었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영가지󰡕의 편집은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서 중단되어 있었다. 편집이 마무리되면 감수를 하여 주기로 하였던 류성룡이 그것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을 정구가 안동부사로 와서 편집을 독려하고 인원을 보충하여서 완성시켜 내는 것이다. 정구는 󰡔영가지󰡕의 편집과정에 마무리 부분에서 참여하지만, 󰡔영가지󰡕의 편집을 완성시켜 냄에 있어서는 그가 여러 지역에서 지방지를 편찬하였던 경험이 소중한 자산이 되었으리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영가지󰡕는 그의 독려와 지도를 통하여 그의 안동부사 재임기간 중에 편집이 완료되지만, 그가 안동부사 직을 떠남으로써 편찬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2차의 수정작업을 거쳐서 1899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발간되는 것이다. 1899년에 발간된 󰡔영가지󰡕는 비록 두 번의 수정작업을 거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체제와 내용이 권기의 그것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영가지󰡕의 내용과 체제는 권기가 정구의 독려와 지도를 받아 완성시켜 낸 그대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영가지󰡕는 조선 후기에 집중적으로 발간되었던 지방지 문화의 첫머리에 놓여질 수는 없지만, 최초의 지방지들 중에서 가장 체제가 정비되고 내용이 풍부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것은 권기와 그를 도왔던 당시 안동의 학인들의 노력이 보다 진지하였던 결과라고 할 수 있으나, 정구의 경험과 지도가 훌륭하였다고 할 수도 있는 일이다. 󰡔영가지󰡕와 권기를 분리하여 볼 수 없듯이, 󰡔영가지󰡕와 정구도 분리하여 볼 수 없고, 그런 점에서 󰡔영가지󰡕의 편집 완성을 최대 업적으로 하는 권기는 지방지 문화의 중심에 놓여지는 정구와 구분하여 말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장현광을 통하여 정구 학맥과 연결되는 사람으로는 오미동의 김봉조 8형제 중 여섯째 김응조를 말할 수 있다. 김응조는 김봉조 8형제 중 김성일의 사위인 둘째 김영조와 함께 가장 출중하였던 인물로 말하여진다.

김응조는 류성룡과 장현광으로부터 배운 사람이다.

 

정구가 지방지 문화를 선도하여 나갔던 것과 그의 학맥이 근기지방에서 실학파를 출현시키는 것 사이에는

일정한 상관관계가 살펴진다. 정구가 부임하는 곳마다 지방지를 만드는 것에 열중하였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현장과 현실을 중시하는 태도와 연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삶은 구체적 현실

위에 놓여지는 것이다. 삶이 구체적 현실 위에 놓여진다면, 인간의 고민이나 공부도 그 현실과 연계되어 행하여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 할 터이다. 우리가 구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실천적으로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현실은 개량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와 고민은 구체적 현실 속에 놓여져 있는데, 그 구체적 현실은 도외시하고, 매양 어떤 추상적인 주제만을 가지고 배우고 익혀나가는데 열중한다면, 그것은 헛된 공부가 아닐 수 없을 터이다. 삶이 놓여지는 구체적 환경을 돌아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현실로 돌아감을 뜻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학문함의 실학적 의미와 연결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지방지의 시대는 지방민들이 자기 자신의 삶터에 눈을 돌린 결과 개막되기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문화의 중앙집중적인 시대가 서원과 향약의 전통이 출현하면서 지역중심의 다극적 구조를 갖추어 나갔다면, 지방지의 출판은 그 다극적 문화의식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민들이 스스로의 삶터를 진실한 눈으로 돌아본다는 것은, 자기지역과 연계되어 있는 문화 중심성을 회복한 것임을 증거하여 준다. 문화 중심성을 갖추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삶의 주체성을 갖추어주기 때문이다.

 

삶의 주체성은 그 삶의 실제적 모습과 실제적 문제에 관심을 집중한다. 실학은 역사와 시대 속에서의 삶의 실제적 모습에 눈을 돌린 결과이다. 지방지의 시대는 지방적 삶의 실제적 환경에 눈을 돌린 결과이다. 영역과 범주는 다르지만, 이 두 가지가 다 실제적 삶의 문제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양상을 같이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지방적 삶의 환경에 눈을 돌렸던 정구의 학문적 입장이 그 후인들에게서 국가적 삶을 전제로 하여 드러났을 때 실학이라는 학문이 조형되어 나오는 것이라고 하겠다.

 

어쨌든 실학을 중시하는 정구의 학문은 안동 인근에서는 크게 세력을 갖추어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얼마쯤 흔적이 살펴지는 정구의 학맥도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퇴계학파의 다른 학맥 속으로 수렴되어 들어가는 것이다.

<윤천근 : 안동대 국학부 교수>

출처: http://www.toegye.ne.kr 

출처 : 豊 柳 마 을
글쓴이 : 李翰邦(松河)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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