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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37.이상적인 왕도정치를 구현한 위대한 임금 세종(世宗)

회기로 2010. 1. 26.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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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제4대 국왕인 세종(世宗)은 이름이 도(途), 자가 원정(元正)이며 태종(太宗)의 셋째 아들이다. 등극하기 전에는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불렸다.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이며 비(妃)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이다. 1418년 태종(太宗)이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 제(堤)를 폐함에 따라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두 달 후 즉위했다.

세종이 역사에 남긴 업적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이 중 상당수는 세종 자신이 직접 관여한 것이다. 법전과 예제를 정비하여 경제육전(經濟六典)과 오례의(五禮儀)를 편찬했고, 기존의 악보들을 정리했다. 1443년에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고 유학의 기본 서적과 윤리, 농업, 지리, 천문, 움양, 측량, 수학, 약재, 가요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고 간행했다. 관료, 조세, 재정, 형법, 군수, 교통 등에 대한 제도들을 새로 정비하고 고쳤는데, 이때 정해진 규정들은 나중에 조선에서 시행된 모든 제도의 기본이 되었다. 또한 4군과 6진을 개척하여 그곳으로 남도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이외에 도량형, 활자, 화폐, 측우기, 천문도, 혼천의 제작, 역법 연구 등, 과학 기술과 천문학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만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1445년부터 일반 서무는 세자 이향(李珦)이 대신하여 보게 하였으며, 1450년 2월 17일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성군 세종과 인간 세종

언제부터인가 세종 앞에는 성군(聖君)이란 말이 붙었고, 그의 사상과 업적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를 높이 떠받드는 역사학자들 중에는 신분 차별적인 법제가 세종(世宗)대에 분명히 존재했음에도 세종처럼 훌륭한 임금이 신분제나 노비제를 인정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세종이 훌륭한 인격을 갖추었고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지닌 군왕이었음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여러 가지 면으로 볼 때 우리 역사를 빛낸 위대한 제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종의 인간적인 모습까지 과장해서 포장할 필요는 없다. 세종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에 철저했던 군왕으로서 그의 모든 활동은 시대적 상황과 한계 안에서 살펴보아야 진정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한 인물에 대한 평가에 대해 좀더 대범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나 플루타크의 영웅전에는 예상 밖으로 흔히 생각하는 '영웅(英雄)'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영웅의 개인적인 면모나 능력보다는 인물을 둘러싼 시대적 환경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자칫 위인은 완벽한 사람이어야 하고, 심지어 성인(聖人)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힐 수 있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누구보다 세종은 이런 찬양 일변도의 '영웅 만들기'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세종이 이룬 수많은 업적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정인지(鄭麟趾)가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면서 고려시대에 사용한 호칭과 용어들 중 자신이 보기에 예법에 어긋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고쳐서 기술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에는 국왕의 아들을 태자(太子)라고 했는데 태자는 천자(天子)라고 일컬어지는 중원 제국의 통치자인 황제의 아들을 뜻하는 것이므로 중국에 대한 예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세자(世子)라는 단어로 고쳐서 적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며 그것을 다시 고치도록 한 사람이 바로 세종이었다. 그는 역사가 당시의 상황이나 정책 같은 것에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과, 역사의 진실이 갖는 힘과 의미를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역사를 보면 위대한 과업에 도전한 사람일수록 완전한 성공은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이면에 있는 아픔과 슬픔의 그림자 역시 깊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지금부터 인간 세종의 모습과 그의 고뇌, 그리고 그가 실시한 개혁의 본질과 한계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재능

세종은 원래 무장(武將) 가문의 자손이라 그런지 체격이 좋고 기골이 장대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太祖)로 즉위하기 이전에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던 고려 말기의 용맹스러운 장수(將帥)였으므로 당연히 그랬겠지만, 그의 후손들 역시 그를 닮아서인지 대부분 용모가 크고 당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세종은 당당한 체구만큼 뚝심이 있어서 공부도 무섭게(!) 했다. 그는 유학의 경전뿐 아니라 역사, 법학, 천문, 음악, 의학 등 다방면에 걸쳐 깊이 있게 공부했으며, 그로 인해 모든 분야에 대해 전문가 이상의 실력을 가질 수 있었다. 세종 자신이 말하기를, 경서는 모두 1백번씩 읽었고 역사서와 그 외의 책들은 삼십번씩 읽었다고 전한다. 한번은 지나치게 독서에 열중하는 세종(世宗)이 걱정스러워 태종(太宗)이 책을 모두 치워버리고 "과거도 아니 볼 사람이 무슨 독서를 그리고 고단하게 하는가?" 하면서 세종의 건강을 걱정했다는 일화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세종은 선현과 선학의 교훈과 이론을 존중했고, 그것에 많은 가치를 두었으며, 간혹 현재와는 맞지 않는 이야기가 있더라도 섣불리 무시하지 않고 그 의미를 끝까지 찾아보는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절과 행동, 언어와 표정, 심지어 자식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도 정통 유학의 원리에 따라 행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그의 몸가짐은 중후하고 단정했고 점잖을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대단한 집중력과 주의력, 그리고 사고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세종의 박식함에 대해 칭찬하지만, 세종의 진짜 장점은 그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문구를 달달 외우고서 안다고 잘난 체하는 학자들을 싫어했으며, 경전마다 다양한 학설과 주석을 참조하여 각각의 이치와 논리 체계를 이해하고, 이것을 토대로 더욱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했다.

세종의 학문에 대한 열의와 재능은 하루아침에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가 걸어간 수행의 길 역시 분명한 목적 의식과 의지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다. 태종의 말처럼 과거를 볼 필요도 없는 세종은 무슨 목표를 가지고 그러한 길을 택했던 것일까? 소년 시절부터 그의 마음속에는 국가와 국정에 대한 남다른 생각이 들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 시대를 초월하여 군주(君主)의 모범이 되다.

1418년 8월 11일, 세종(世宗)의 즉위식에 참석한 신하들은 그곳에 감도는 새로운 기대와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 개혁에 대한 갈등과 방황은 태종(太宗)대에 와서 대략 정리가 되었다. 어수선하던 집권층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으며, 국가 제도는 골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인구는 늘었고 다양한 직업이 생겨났다. 이제 남은 일은 그것을 다듬고 마무리해서 그 열매를 충분히 섭취하는 일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조선은 체제와 지배층이 안정되면서 기존의 제도와 관행에 적당히 잔손질만 하여도 계속해서 번영하고 평탄할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젊은 국왕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즉위하기 전부터 자신이 일생을 바쳐 이루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태종이 넘겨 준 조선 체제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소수 집권층들의 문제 의식이 약화되면서 자신들이 가진 특권을 누리려고 하는 세대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사회의 위계 질서를 생활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평민들과는 다르게 말이나 가마를 타고 다녔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폐단이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국가의 모든 부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세종은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독특한 해결법을 제시했다. 그는 정계를 개편하거나 체제 자체를 개혁하는 대신, 역사서와 경전을 뒤져 이상적인 제도를 연구한 후, 현재 문제가 있는 제도를 세부 사항까지 세밀하게 분석하여 관련 규정을 대폭 보완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학식과 정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정책과 제도의 내용을 떠나서 세종의 인품과 제도의 운영 방식은 조선시대 국왕의 모범으로 칭송받는다. 세종은 이상적인 군주, 어질고 현명하며 백성들에게 모범이 되는 제왕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세종이 백성을 얼마나 아꼈는지를 보여 주는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법의 기강이 서지 않고 백성들이 자꾸 요행수를 바라게 된다는 관료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자주 죄인들을 사면해 주었으며, 징발된 군사들은 늘 기한 전에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행차 중에 말이 밭의 곡식을 짓밟아서 백성들에게 손해를 끼치면 반드시 그 이상으로 보상해 주었다. 어지간한 잘못에는 관대한 태도를 보인 세종이지만 감사와 수령이 종자를 늦게 보급해서 농사를 망치거나 진제(賑濟)를 잘못해서 백성이 굶어 죽는 일이 발생하면 엄하게 처벌했다.

◆ 일에 대한 욕심으로 악화된 건강

그러나 세종의 만년은 병마로 인한 음울한 그림자로 덮여 있다. 자신의 일생을 마무리하고 정리해야 할 시기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세종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어 있었는데, 30대이던 1427년부터 한쪽 다리에 풍을 앓았고 종기로 고통받았다. 또 1431년부터 생긴 눈병으로 인해 10년 후에는 어두운 곳에서 걷기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 때문에 온천과 초정약수 등을 찾아다니며 요양을 했으나 효과는 언제나 일시적일 뿐이었다. 신하들은 장기적인 치료를 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세종은 민폐가 심하다는 이유로 두 달 이상은 같은 장소에서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세종은 요양 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는 일이 없었으며, 여러 가지 합병증에 시달리면서도 새로 편찬한 책들을 매일 수십 권씩 직접 검토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인 법.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정력으로 국가와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았던 세종(世宗)은 마침내 재위 33년 만인 1450년 2월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 동쪽 별궁에서 승하(昇遐)하였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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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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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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