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金宗瑞)는 흔히 무장(武將)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열여섯살에 문과에 급제한 문관(文官) 출신의 정치인이다. 그가 6진을 개척하여 북방을 경영한 공훈(功勳)이 워낙 커다란 업적이기도 하고, 그의 생애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기 때문에 일종의 선입견이 작용한 셈이다.
조선 초까지는 북쪽의 국경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최윤덕(崔潤德)의 4군과 김종서의 6진 개척으로 인하여 국경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현재의 위치로 결정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에 조선의 국력이 조금만 더 컸거나 국토 확장에 대한 의지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고구려나 발해의 옛 땅을 얼마라도 더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김종서가 문신(文臣)이면서도 군사적 과업을 맡아서 훌륭하게 수행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때까지 조선의 분위기가 문무반의 구별이 심하지 않았던 '열린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관(武官)이었던 아버지에게서 무인(武人)으로서의 자질을 물려받은 김종서 자신이 뛰어난 지략가이면서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이루고 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종서에 대하여 세종(世宗)은 "김종서가 없었다면 6진을 성공적으로 개척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고 말하며 그를 전폭적으로 신임했다. 그러나 훗날 원칙을 지키려는 김종서의 강직성이 권력을 장악하려는 의지가 강한 수양대군(首陽大君)과 대립하게 만들었고, 결국 반대파에 의해 비명에 죽게 되는 원인이 된다.
● 강직하고 성실한 공직 생활
김종서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恭讓王) 재위 2년(서기 1390년)에 전남 순천에서 도총제(都摠制)로 있던 김추(金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이나 청년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주관과 소신이 뚜렷하여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에게 붙여진 '대호(大虎)'라는 별명도 북방 경영과 연관되어 불려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김종서는 잘못된 행동이나 성실하지 못한 태도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지만, 자기의 잘못은 감추지 않고 반성하여 고치는 소박한 일면도 가지고 있었다.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하고 돌아와 형조판서로 중앙정계에 복귀했을 때, 그의 당당한 태도가 오히려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황희(黃喜)의 질책을 그 자리에서 겸손히 받아들였다는 일화는 김종서의 됨됨이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좋은 면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그의 호방함 때문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북방 경영 시절 같이 근무한 것을 계기로 알게 된 신숙주(申叔舟)에 대해서도 그의 재주와 학문적 능력을 높이 사서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훗날 수양대군에게 동조하여 김종서의 반대편에 서게 되었던 신숙주도 이때까지는 김종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서의 관직 생활은 열여섯살인 태종(太宗) 재위 5년(서기 1405년)에 문과에 급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세종(世宗) 재위 15년(서기 1433년)에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북방 경영의 길을 떠날 때까지 큰 문제 없이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김종서로서는 청, 장년 시절 30년 가까이 무난한 관직 생활을 하며 기반을 닦은 셈이다.
김종서가 관료로서 성장하고 있던 태종(太宗)대에는 공신 세력이 득세하고 있는데다가, 아직 나이가 젊어 큰 직책을 맡을 수 없었다. 세종(世宗)대 전반에 와서야 김종서는 조금씩 주요 관직에 등용될 수 있었는데, 세종 원년(서기 1419년)에 사간원 우정언으로 임명된 후 지평, 집의, 우부대언 등을 지냈다. 세종(世宗)대에는 관료들의 세대 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많은 국가적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어서 새로운 인재들이 많이 필요했는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힘입어 김종서도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함길도 관찰사로 파견되기까지 묵묵히 무명 공직자로서 20여년을 보낸 것을 보면, 그가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탐하지 않는 꾸준하고 착실한 관료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함길도 관찰사라는 직책도 북방 경영의 대업(大業)을 지시받고 나간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지방관에 불과했다. 성공 여부 또한 불투명한데다 반드시 출세의 발판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보란 듯이 임무를 완수하고 중앙정계에 복귀했다.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받았을때 김종서의 나이 45세였는데, 30여년 가까이 공직 생활을 해왔다지만 그 나이에 도백(道伯)이면 그때나 지금이나 늦은 출세라고 할 수는 없다.
● 국경지역 사령관으로 부임하다.
고려 말, 길주에 만호부(萬戶府)가 설치되어 국경선이 대개 그 부근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여진족의 침입과 행패가 심해 변방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이때 두만강과 압록강에 출몰하던 이민족을 '야인(野人)'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만주 지방에 뿌리를 둔 부족으로서 고려 때는 세력이 강성하여 금(金)이라는 나라를 세운 적도 있고, 후에 명(明)을 멸망시키고 청(淸)을 건국하였다. 당시 만주의 남부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여진족은 끊임없이 조선의 북쪽 국경 지역을 침범하였다. 여진족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이 척박한 땅이었으므로 중국의 동남부와 조선의 북부 지역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 때부터 교역을 통해 회유하기도 하고 군사력을 동원해 정벌하기도 하였지만 여진족과의 분쟁은 끝이 없었다. 이즈음에는 아예 영변 이북으로 조선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세종(世宗)대에 이르러 국내 정치가 안정되고 나서야 국토가 침탈될 상태에 이른 북방에 주목하게 되었다. 사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 지역이 이성계가 조선왕조 건국이라는 크나큰 업적의 발자국을 떼기 시작한 땅이었으므로 국가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마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당시 조선의 최북단 방어진지는 태조(太祖) 때에 정도전이 공주에 설치한 경원부(慶源府)였는데, 세종(世宗) 재위 9년(서기 1409년)에 경성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런데 이곳 역시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입으로 방어하기 힘들어지자, 다시 용성으로 후퇴시키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오히려 영토 개척 의지를 더욱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즉 세종 재위 14년(서기 1432년) 6월에 경원부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영북진(寧北鎭)을 여진족이 출몰하는 지역인 석막에 추가로 설치하여 방어 지역을 좀더 확장한 것이다. 이 영북진 설치아말로 북쪽을 향한 세종의 영토 확장 의지를 잘 나타내 주는 정책으로서, 그 후 기회만 생기면 한 걸음이라도 북쪽으로 더 나아가서 옛 영토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던 세종 재위 15년(서기 1433년)에 여진족 사이에서 부족 간의 내분이 발생했다는 정보가 조정으로 날아들었다. 경원부 지역을 괴롭히던 우디거 부족과 회령 지역에 거주하던 오도리 부족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세력이 많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조선으로서는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가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세종은 이때를 결정적인 기회로 보고 드디어 그 적임자로 김종서를 임명하여 국토 회복 작업을 지시하였다.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 김종서는 우선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대우도 최고 수준으로 개선했으며, 군졸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노고를 치하하는 목적으로 큰 잔치를 자주 열었다. 그런데 그 씀씀이가 너무 커서 관찰사가 인심을 얻기 위해 국가 재정을 심하게 탕진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김종서는 이러한 오해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이곳 군사들은 국경을 지키기 위해 집을 떠나 있은 지 오래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위로하지 않는다면 누가 목숨을 걸고 오랑캐를 막아내려 할 것인가? 지금은 이들에게 소를 잡아 대접하지만 국경이 정비된 후에는 닭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만큼 김종서는 지역 민심과 군사들의 어려움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있었고, 무슨 일이든지 뚜렷한 목적 아래 행했던 것이다.
또 영토 확장의 실질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함길도 남부 지방의 농가 2200호를 경원부와 영북진으로 이주시켰다. 김종서는 이들의 세금을 감면해 주고, 이주민 정착에 기여한 향리(鄕吏)들에게는 중앙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터 주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이주민 안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이후로 이 지역에서는 삼남 지역에까지 이주 지원자를 받는 등 수차례에 걸쳐 이주 정책이 진행되었는데, 김종서가 했던 방식을 따라 천인을 양인으로 승격시키고, 양인에게는 토관직을 수여하고, 향리들에게는 그들의 역(役)을 면제해 주었다.
또한 김종서는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질서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항상 위엄 있고 엄격한 자세로 군사들을 통솔하였다. 천성적으로 강직한 데다 무인의 피를 이어받아 원체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지휘관으로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군사들에게 의식적으로 강한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자세를 잘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김종서는 군사들을 위해 밤이 늦도록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화살 하나가 날아와 김종서의 앞에 놓인 술통을 깨뜨려 버렸다. 급작스런 사건으로 모두 혼란에 바졌지만, 김종서만은 그 자리에 꼼작 않고 앉아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활을 쏜 범인은 붙잡지 못했지만 더 이상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아 소동은 곧 잠잠해졌는데, 너무도 태연자약한 김종서의 태도에 사람들은 무척 놀라워했다. 그러자 김종서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나를 시험해 보려는 자의 농간이거나 야만족들의 소행이 분명한데, 이렇게 든든한 우리 군사들이 모여 있는 마당에 더 이상 두려워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장수인 내가 우왕좌왕한다면 그런 나를 군사들이 어떻게 믿고 따르겠는가?"
● 본격적인 6진 개척 활동
민심이 안정되고 군사들을 통솔하기 위한 기반도 확실히 닦여지자, 김종서는 허술했던 국경 지역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제일 먼저 석막에 있던 영북진(寧北鎭)을 경원부(慶源府) 북쪽의 백안수소로 옮기고 종성군(鍾城郡)으로 정하여 북방 경영의 의지를 더욱 확고히 했다. 이것은 영북진이 실질적인 최북단 방어기지로 전진되고 북방 개척의 전초기지로 결정되었으며, 동북부 지역의 여진족이 완전 소탕되거나 추방 또는 회유되어 지역적으로 안정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김종서가 주목한 곳은 알목하(斡木河) 근처의 농토였다. 알목하 지방은 강을 끼고 있어 비교적 비옥했기 때문에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다. 또 그 근처에 주로 거주하고 있던 오도리 부족은 우디거 부족의 공격으로 추장 부자가 살해되어 세력이 크게 약해져 잇었다. 김종서는 이곳의 전략적, 경제적 가치를 간파하고 집중 공략하여 결국 이곳에 회령진(會寧鎭)을 설치했다. 그 해 겨울에는 이곳을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켜 방어진지로서 그 중요성을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농민을 이주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여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영북진의 북상으로 후방이 되어 버린 경원부도 더 북쪽인 회질가(會叱家)로 이동시키고 경원부가 있던 지역에는 절제사 휘하에 2백명의 방위군을 배치한 후 300호 정도의 농민을 이주시켜 공성현(孔城縣)을 설치했다. 공성현은 세종(世宗) 재위 19년(서기 1437년)에 경흥읍이 되었다가 세종 재위 25년에는 다시 성을 확장하고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결국 서쪽의 회령에서부터 종성, 경원을 거쳐 경흥에 이르기까지 동북면의 국경을 확정하고 그 지역을 완전히 평정한 것이다. 그리고 세종 재위 22년(서기 1440년)에는 종성군을 백안수소에서 수주로 옮겨 회령부와의 간격을 좁히고, 종성군과 경원부 사이에 있는 다온평(多溫平)에 진을 설치하여 온성군(穩城郡)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거의 7년만에 북방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한 김종서는 세종 재위 22년에 형조판서로 임명되어 중앙정계로 복귀하게 된다. 그 후 세종 재위 25년(서기 1443년)에 종성과 온성 두곳을 모두 도호부로 격상시킨 후, 그 다음해에 훈융에서 연대까지 강을 따라 길게 성을 축조하여 북방 경계를 정비하고 국경 수비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세종 31년(서기 1449년)에 처음 영북진이 있던 석막에 부령부(富寧府)를 설치하여 6진을 완성하였다. 즉,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이 그것인데 오늘날까지도 그 지명이 유지되고 있다. 이것으로 신라의 삼한 통일 이후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북방을 완전히 평정하고 현재의 국경선을 확정짓는 대업을 마친 것이다.
세종(世宗)대의 이러한 북방 개척은 영토를 확장하는 의미뿐 아니라 민본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즉, 농토를 잃거나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을 북방 지역으로 이주시켜 새로운 생활 터전을 만들어 준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인구를 분산시키고 국토를 균형 있게 개발하여 국력을 증대하려는 복합적인 목적이 있었다.
● '고려사(高麗史)' 편찬을 주도하다.
형조판서로 중앙정계에 복귀한 김종서는 예조판서, 우참찬을 역임하다가 세종(世宗) 재위 32년(서기 1450년)에는 좌찬성으로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직하기도 했다. 그 다음 해인 문종(文宗) 원년(재위 1451년)에는 우의정이 되어 그의 나이 61세에 드디어 정승(政丞)의 반열에 올랐다.
이 시기에 김종서는 '고려사(高麗史)'의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바로잡는데, 이것은 매우 큰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원래 고려사는 조선 개국 후 3개월만에 정도전(鄭道傳)과 조준(趙浚) 등이 편찬 작업에 착수하려 태조(太祖) 재위 4년(서기 1395년) 4월에 총 37권으로 처음 완간되었다.
그런데 이 고려사는 조선 건국을 미화하기 위하여 많은 사실을 왜곡시켰고, 편찬자의 개인 감정과 이해 관계까지 게재되어 실록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즉, 고려는 자주성이 강하여 자체적으로 임금의 묘호에 조(祖), 종(宗) 등을 사용하였고, 황제국(皇帝國) 체제를 갖추었던 왕조였는데도 여몽전쟁 이후의 상태에만 맞춰서 의도적으로 격하시켰으며, 고려의 충신들인 정몽주(鄭夢周), 김진양(金震陽) 등은 깎아내리고 별다른 공로가 없는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慶)은 청백리(淸白吏)로 칭송하기까지 했다. 이에 세종은 정도전(鄭道傳)의 고려사(高麗史)를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고까지 하여 그 잘못을 지적하고, 1424년에 유관, 윤희 등에게 명하여 사실과 다른 부분을 바르게 고쳐 쓰도록 하였다. 하지만 다시 쓴 고려사는 왜곡된 사실은 대부분 고쳐졌으나, 연대별로 너무 간략하게 요약되어서 내용이 충실하지 못한 단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1432년에 신개(申槩), 권제(權踶), 안지(安池) 등을 시켜 다시 보완하도록 하였다.
두차례의 수정과 보완을 거친 고려사는 예전 것에 비해 훨씬 상세하게 기록되기는 했으나 사실과 다른 내용이 여전히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권제가 자기 조상인 권근(權近)이나 권수중의 좋지 못한 점을 빼거나 고쳐 썼던 것이다. 이에 따라 세종 재위 31년(서기 1449년)에 세번째 개수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실록 판서를 관창하는 지춘추관사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전임자였던 안지가 두번째 고려사 재수 작업을 바르게 처리하지 못했다 하여 파면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제대로 된 실록을 편찬하려면 총책임자가 강직하고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당시 우참찬으로 있던 김종서를 지춘추관사에 임명하였다.
이때 함게 한 인물들은 이조판서 정인지(鄭麟趾), 호조참판 이선제(李先除),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鄭昌孫) 등과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양성지(梁誠之), 최항(崔恒) 등의 사관들이었다. 세번째로 개수된 고려사는 이전 것들과는 달리 기전체로 작성되었으며 문종 재위 원년(서기 1451년) 8월 25일에 총 139권으로 완간되었다. 작업에 착수한 지 2년 7개월만에 완성된 것이 고려사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정인지의 고려사다.
그렇다면 분명 김종서가 지춘추관사로 있으면서 총책임을 지고 편찬하였는데 왜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이 자신에게 대항했던 인물들을 명단에서 모두 빼버렸기 때문이다. 역사의 승자들이 실제 사실을 왜곡시켜 버린 또 하나의 사례를 고려사 편찬 과정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 천추의 한을 남기고
조선왕조 제5대 국왕인 문종(文宗)은 병약하여 왕위에 오른지 2년 3개월만에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어 외아들 홍위가 열두살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비운의 임금' 단종(端宗)이다. 이때 김종서는 좌의정에 올라 있었다.
단종대 초기에는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은 고명대신인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 등 노재상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어린 임금에게는 장성한 숙부들이 10명 넘게 있었고, 그 중에서도 야망이 크고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암암리에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결국 김종서를 제거하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수양대군은 단종 원년(서기 1453년) 10월 10일에 거사를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일단 김종서를 유인하여 죽이기로 계획한 수양대군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하인 한명만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향했다. 평소 수양대군을 의심하고 있던 김종서는 수양대군의 급작스러운 방문에 경계하기는 했지만, 설마 자기 집 앞에서 무슨 일이 있으랴 싶어 방심하게 되는데, 그 틈을 타서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철퇴(鐵槌)로 내리쳐 치명상을 입히고, 왕명을 빌려 대신들을 소집한 후에 반대파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니 이것이 바로 계유정난의 전 과정이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김종서는 다행히 죽지 않고 대궐로 들어가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고자 하였지만, 이미 모든 성문은 수양대군의 부하들에게 장악되어 있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종서는 부상당한 몸으로 잠시 아들의 집에 숨어 있다가, 다음 날 새벽 수양대군이 보낸 자객에게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김종서는 대역모반죄(大逆謀反罪)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효수되었으며, 그의 가족들도 모두 살해당하고 말았다. 김종서의 묘가 공주 근처 무성산 부근에 있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지금은 그것조차 찾을 수 없다. 김종서가 죽은 후 정권은 완전히 수양대군에 의해 장악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조카를 위협하여 양위 형식으로 왕위를 넘겨받으니, 이 사람이 조선왕조 제7대 국왕인 세조(世祖)다.
김종서는 단종이 즉위한 후 독단적으로 정사(政事)를 처리한다는 오해도 받았으나, 평소 그의 강직한 태도에 비추어 볼 때,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했다기보다 어린 국왕을 보좌하여 흔들림 없이 국사를 운영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뛰어난 장수요, 훌륭한 재상이었던 강직한 인물 김종서. 그는 말년에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잘 보위하려다가 반대파들에게 죽임을 당한 불행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북방 개척 시절에 얻은 경험을 살려 저술한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는 병서를 남기기도 한 김종서는 영조(英祖) 재위 22년(서기 1746년)에야 복관(復官)되어 충절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고 있으나, 그로서는 수양대군을 먼저 제압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恨)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난 셈이다. 김종서가 남긴 시조를 통해 그의 강인한 인물됨을 되짚어 보며 그의 통한에 가슴 아파할 뿐이다.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장백산(長白山)에 기(旗)를 꽂고 두만강(豆滿江)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대장부냐
어떠타 나라에 큰 공(功)을 누가 먼저 세우리요'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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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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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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