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世宗)대에 이룬 찬란한 문화적 업적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과학 분야의 발전으로서, 장영실은 그와 같은 발전에 누구보다도 높은 기여를 한 뛰어난 과학자다.
장영실은 천민 출신이었지만, 당대의 엄격한 신분 사회의 벽을 뛰어넘어 자신의 뜻을 이룬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일구어 낸 뛰어난 업적보다는 고난을 이겨내고 세상 앞에 우뚝 선 인간 장영실의 꿋굿한 모습이야말로 더 큰 교훈과 감동을 준다. 그는 다행히도 어진 임금이었던 세종 재위기에 살았기 때문에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그와 같은 뛰어난 인재가 있었기 때문에 세종 시절이 찬란한 문화의 융성기로 꽃피울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세종은 나라가 바르게 서려면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야 한다고 믿고, 농업의 발달과 생산성을 향상하기 위해 고심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의 변화를 미리 알아내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절기와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알맞은 시기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 가뭄과 폭우 등 자연재해에도 적절히 대비할 수 있는 과학적 지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사람 중 한명이 장영실이다. 그는 조선의 과학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국가 경영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경제 발전과 민생 안정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1등 공신이었지만, 단 한번의 엄청난 실수 때문에 역사의 무대 뒤로 쓸쓸히 퇴장하고 만다.
● 파격적인 관직 진출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의하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소향주 출신의 중국인이고, 어머니는 동래현의 기생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귀화하거나 파견 나온 중국인 기술자로서 조선의 기생을 현지 처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장영실의 문중으로 알려진 아산(牙山) 장씨(蔣氏) 가문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기술직 관리를 지낸 사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보면 장영실의 과학적 자질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장영실이 역사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태종 재위 12년(서기 1412년)으로 그 즈음에 이미 궁중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太宗)대부터 전문 기술자로 활동하던 장영실은 세종 재위 3년(서기 1421년)에 천문기구 제작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때 벌써 조선 최고의 과학 전문 기술자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적 대사업의 공식 연구단에 천민 출신인 그를 포함시켰다는 것은 그가 당시 어느 정도 수준의 실력자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중국에서 머무르는 동안 장영실은 천문기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개괄적이고 원론적인 이론 정도일 뿐 실물이나 설계도와 같은 실제 제작에 필요한 것은 구하지 못한 채 돌아왔다. 당시에는 천문이 가장 중요한 과학 분야였으므로 다른 나라에 그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통제했기 때문이다.
장영실이 중국에서 돌아오자 세종(世宗)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효율적으로 기구를 제작할 수 있도록, 왕실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상의원 별좌에 그를 임명하려 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세종 재위 6년(서기 1424년)에 수동 물시계인 경점기(更點器)를 고쳐서 보완해 내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결국 상의원 별좌에 임명되었다.
엄격한 신분제도가 국가 운영의 기초였던 당시에 천민이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공식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장영실의 능력이 워낙 배어났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당시만 해도 조선 후기처럼 신분 의식이 극도로 경직되어 있지 않았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장영실의 재주를 높이 평가했을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신뢰하고 있어서 환관들이 하는 일을 그에게 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 천문기구 제작에 참여하다.
장영실의 연구가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자 세종 재위 14년(서기 1432년)부터는 천문 관측 기구 제작을 위한 대규모 사업이 시작되었다. 천문 관측 기구와 현실에 맞는 수시력(授時曆)의 제작은 농업 국가인 조선에게 있어서 시급한 사안이었다. 세종은 집권 초부터 이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고 있다가 장영실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국책 사업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세종은 그 해 가을부터 예문관 제학 정인지(鄭麟趾)에게 총지휘를 명하여 천문대와 그곳에 필요한 각종 천문기구를 제작하는 의표창제(儀表創製) 사업에 착수하게 하였다. 우선 천문 관측 관청인 서운관(書雲觀)을 확장하고 대규모 천문 관측대인 대간의대(大簡儀臺)를 경복궁(景福宮) 안에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규모 천문 관측대인 소간의대(小簡儀臺)도 북부 광화방 부근에 함께 짓도록 하였다. 또 각종 기구 제작 사업에는 공조참판을 역임한 무관이자 뛰어난 과학자였던 이천(李蕆)이 실무책임을 맡아 진행하였으며, 여기에 장영실이 중추적 역할을 하였음을 물론이다.
이들은 먼저 나무로 오늘날의 각도기와 비슷한 간의(簡儀)를 만들어 한성(漢城)의 위도를 새로 측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구리로 여러가지 기구를 제작하였다. 작업에 착수한 지 1년만에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일종의 천문시계인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고, 장영실(蔣英實)은 독자적으로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 주는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세종은 장영실의 자격루가 정확하게 작동하는 것을 크게 치하하며 그를 정4품 무관 벼슬인 호군으로 임명했다. 장영실은 이미 연구 도중에 정5푸 무관 벼슬인 행사직으로 임명되었는데, 자격루의 완성으로 또 한번 승진한 것이다.
세종(世宗)은 경복궁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報漏閣)을 짓고 그 안에 자격루를 설치하여 이듬해(서기 1434년) 7월 1일부터 조선의 표준 시계로 사용하게 했다. 자격루는 보루각에 설치되었다고 하여 '보루각루(報漏閣漏)'라고 부르기도 했고,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 안에 있다고 해서 '금루(禁漏)'라 부르기도 했다. 보루각의 자격루에서 시간을 알려주면 궁궐 밖 종루에서 오정(낮 12시)나 인정(밤 10시경) 등의 시각을 북이나 종을 쳐서 일반인들에게 알렸다. 보신각(普信閣) 옆으로 나 있는 서울의 종로 거리가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되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1536년에 숭례문(崇禮門)과 흥인문(興仁門)에서도 시간을 알려주기 위하여 추가로 만들어진 것이다. 중종(中宗)대에 새로 만들어진 자격루는 창경궁(昌慶宮) 안에 새 보루각을 짓고 그 안에 설치하였는데, 고종(高宗)대에 시간을 알리는 방법이 바뀌자 일제(日帝)가 보루각을 헐고 자격루만 장서각(藏書閣) 앞에 방치해 두었던 것을 현재 덕수궁(德壽宮)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지 5년 후인 세종 재위 20년(서기 1438년)에 더 정교한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만들어 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것으로,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절기에 따라 해야 할 농사일까지 알려주는 다목적 시계였다.
옥루가 완성되자 세종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세종은 자신의 집무실인 경복궁 천추전 서편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그곳에 옥루를 설치하게 하고 수시로 드나들며 관심을 기울였다. 또 우승지 김돈(金暾)에게 흠경각기(欽敬閣記)를 짓게 하여 그 공을 치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옥루도 명종(明宗)대인 1553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만다. 이듬해에 다시 제작하였지만 역시 임진왜란 때에 불타 버려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흠경각의 설치로 7년여에 걸친 의표창제 사업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는데, 그 외에 이미 만들어진 것들로는 혼천의를 간소화한 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시간과 함께 남북의 방위도 알려주는 해시계인 양부일구(仰釜日晷), 밤낮으로 시간을 잴 수 있도록 만든 천문 관측 기구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해의 그림자에 따라 절기를 알 수 있게 만든 규표(圭表) 등이 있다.
이렇게 제작된 관측 기구들은 세종(世宗) 재위 16년(서기 1434년)에 완공된 경복궁 대간의대 안팎으로 설치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천문 관측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대간의대(大簡儀臺)는 높이만 해도 9.5미터에 이르는 왕립천문대로서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대간의대도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은데, 신무문(神武門) 서쪽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 기타 분야의 발명과 기여
장영실은 천문 기구 이외에도 각종 실용 기구들을 만들어 세종(世宗)대이 과학 기술 발전에 앞장섰다.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이 세종 재위 16년(서기 1434년)에 금속활자인 갑인자(甲寅字)의 주조 작업에 참여한 것이다.
금속활자는 고려 고종(高宗) 재위 21년(서기 1234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이후 큰 발전이 없다가, 조선조 태종(太宗) 재위 3년(서기 1403년)에 계미자(癸未子)를 만들어내게 된다. 그러나 이 활자는 크기도 고르지 못하고 활자를 고정시키기 위해 밀랍을 사용하는 불편 때문에 많은 양의 인쇄를 할 수 없었다. 이에 세종 재위 2년(서기 1420년)에 다시 계미자보다 작고 정교한 경자자(更子字)를 만들어 좀더 능률적으로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경자자를 새로 개량한 것이 갑인자로 이천의 총감독 아래 김돈, 김빈, 장영실 등이 보좌하여 주조하였는데, 대,소활자 두 종류로 20여만자나 되었다. 갑인자는 글자의 모양이 아름답고 선명할 뿐 아니라, 종전보다 두배나 빨리 인쇄할 수 있었다. 이 갑인자로 수많은 서적을 출판해 낼 수 있게 되어 세종 재위기의 문화 진흥에 크게 기여하기에 이른다. 이때 만든 갑인자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그것으로 인쇄한 대학연의(大學衍義),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등이 전해져 오고 있다.
다음으로 장영실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인 측우기(測雨器)가 있다. 조선은 농업이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업 국가였다. 따라서 생산량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자연 현상에 대한 연구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강우량의 측정은 농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때문에 이것을 조사하여 자료화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눈이 쌓인 높이로 강설량을 측정하는 것처럼, 비가 내린 후에도 비가 땅 속에 스며든 깊이를 재서 강우량을 측정했다. 그러나 그런 원시적인 방법으로는 정확한 강우량을 측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세종 재위 18년(서기 1436년)을 전후로 가뭄과 폭우가 잇따라 발생하여 농업생산에 심대한 타격을 받자, 강우량을 좀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세자를 중심으로 장영실 등이 참가해서 1440년에 처음으로 높이 41.2센티미터, 직경 16.5센티미터 크기의 원통형 쇠그릇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세계 기상학 사상 최초의 측우기이다. 이 측우기는 그 다음 해에 높이 30.9센티미터, 직경 14.1센티미터로 규격이 통일되었다. 그러나 그때 만들어진 측우기는 현재 남아 있지 않고 현종(顯宗) 재위 3년(서기 1837년)에 만들어진 금영(錦營) 측우기가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기상청에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장영실이 고안해 낸 강우량을 측정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수표(水標)가 있다. 이 수표는 청계천의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설치되었는데, 현재 세계 각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양수표(量水標)와 똑같은 방식이다.
● 역사에서의 퇴장
장영실은 과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정3품인 상호군으로싸지 승진하였다. 그러나 세종 재위 24년(서기 1442년)에 그가 감독하여 제작한 어가(御駕)를 세종이 사용하다가 부서지는 사고가 일어나, 하루아침에 불경죄로 파직되고 만다. 장영실을 아끼고 칭찬했던 세종은 곤장 100대의 형벌을 80대로 감해 주었을 뿐 더 이상 구해 주지 않았으며, 이 사건 이후 장영실은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30년 동안의 찬란한 공적을 뒤로한 채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 천재 과학자는 출생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처럼 개인적인 사생활이나 말년도 전혀 확인할 길이 없다. 승승장구하던 삶이 한순간에 가루처럼 흩어져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은 장영실이 원체 혈통이 없는 천민 출신인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파직 이후 곧바로 사망하거나 스스로 완전히 종적을 감춰 버린 것이 아니라면 역사가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말년의 삶이 무시되어 버린 탓이라고 짐작할 따름이다.
장영실의 갑작스런 퇴장에는 몇가지 의문이 남는다. 먼저 정교한 과학 기구를 수도 없이 많이 만들어 온 그가 가마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여 사용 중에 부서지게 했을까 하는 점이다. 기록된 것이 사실 그대로라면, 일단 장영실의 내적이나 외적인 변화에서 그 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급격한 신분 상승으로 인해 차츰 정신이 나태해져서 가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장영실이 바로 전해까지 정교한 과학 기구를 직접 발명했던 ㅣ인물로서 1년 사이에 갑자기 변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렵다.
또 장영실이 실제로 가마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작업의 감독관이었을 뿐이라는 점도 그렇다. 물론 책임자였기 때문에 사고에 대한 처벌을 받은 것이지만, 장영실이 감도을 맡았던 가마만 부실하여 사고가 났다는 것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더욱이 그동안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해왔던 기술자들이 임금이 탈 가마를 허술하게 만들 리도 없다. 따라서 그 사고는 이미 제작된 가마를 누군가가 고의로 허술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실 그때까지는 신분제도가 조선 후기처럼 경직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노비에서 정3품 관직으로의 파격적인 신분 상승은 양반 사대부들에게는 거슬리는 일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장영실의 출세가 신분제를 뿌리부터 흔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 보수세력에 의해 그가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그래도 가장 수긍이 가는 결론이다.
두번째로 그토록 장영실을 아끼로 칭찬했던 세종이 왜 끝가지 그를 구해 주지 않았을까 하는 점도 의문이다. 우선 그즈음 세종의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세종은 원래부터 병치레가 잦았는데, 사고가 난 그해에는 과중한 업무를 견디지 못하고 세자에게 결재권을 넘겨 줄 정도로 건강에 악화되어 있었다. 이런 처지에서 가마가 부서지는 사고까지 당했으니 건강이 더욱 나빠졌을 것이다.
따라서 가마를 다룬 자들이나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시절에는 아무리 실수라고 해도 임금에게 위해를 끼쳤을 경우에는 대역죄로 처벌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곤장을 맞고 파직되는데 그친 것은 세종이 변호해 주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한다.
비록 인생의 최정상에서 갑자기 허무하게 추락하고 말았지만, 장영실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참으로 크다. 그는 천한 노비 출신이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리하여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정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장영실이 동래현 소년 관노로 있던 시절의 일화는 그의 진면목을 잘 보여준다. 그는 일을 마치고 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틈틈이 병기 창고에 들어가 녹슬고 망가진 병장기와 공구들을 말끔히 정비하여 현감의 신임을 얻었다. 누구라도 고달픈 노비 생활을 하다보면 틈이 날 때마다 편히 쉬고 싶게 마련이다. 그러나 장영실은 스스로 일을 찾아 그것마저도 완벽하게 해냈던 것이다.
이러한 장영실의 행동은 장래를 위해 계산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신분의 벽이 단단하게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오히려 일 자체가 좋아 스스로 일을 찾아다닌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순간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며 자신의 능력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성공도 찾아온 것이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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