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부(鄭仲夫)가 1170년 8월 29일에 유혈정변(流血政變)을 일으켜 집권자가 되고 고려의 무신정권시대(武臣政權時代)를 개막한 과정은 1960년 5.16 군사 쿠데타로 일본군 장교 출신의 군장성(軍將星) 박정희(朴正熙)가 대통령이 된 과정과 비슷하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는 것이다. 처음에 정중부는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 등이 주체세력이 되어 일으킨 경인정변(庚寅政變)의 명목상 우두머리였으나, 이의방이 이고를 죽이고 권력을 독차지하자 한동안 숨죽이고 있다가 마침내 이의방을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박정희 또한 처음에는 김종필(金鍾泌) 등 육군사관학교 8기 졸업생들이 주체세력이 되어 일으킨 군사정변의 명목상 우두머리였다가 나중에 정적들을 제거하고 마침내 대통령에 오르지 않았던가.
물론 고려시대에 무인이 유혈정변을 일으킨 것이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처음은 아니었다. 1009년 2월 3일에 서경도순검사(西京都巡檢使)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위시키고 현종(顯宗)을 옹립한 경우도 있었고, 1014년 11월 1일에는 상장군 김훈(金訓)과 최질(崔質)이 군사를 일으켜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을 내쫓은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 경우는 모두 단발적 사건으로 끝났지만, 정중부의 거사는 문제가 달랐다. 정중부의 정변 이후 고려는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慶大升), 이의민(李義旼) 및 최충헌(崔忠獻) 4대까지 약 100년 동안이나 무신정권시대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중부야말로 고려 무신정권시대(武臣政權時代)의 문을 열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인물이었다.
고려 중기에 무신들의 정변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이른바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창업하는데 앞장섰던 개국공신 대부분은 문인(文人) 출신이 아니라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무인(武人)들이었다. 하지만 나라가 안정되고 왕권이 강화되어가면서 무신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만 갔다.
● 문신 우위 정책으로 무신들의 지위 갈수록 격하
특히 호족들을 숙청하여 왕권 확보에 주력한 광종(光宗)이 중국을 본받아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하고 문신들을 우대하기 시작하면서 무신들의 지위는 급속도로 격하되었다. 문신(文臣)을 높이고 무신(武臣)을 천대하는 이런 정책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무인들의 입지는 자꾸만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성종(成宗) 때부터는 전쟁이 절어져도 무신이 최고 지휘관이 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반드시 문신이 임명되었다. 설상가상으로 998년에는 무관(武官)의 품계(品階)를 낮추기도 했다.
게다가 인종(仁宗)은 무신들의 교육기관인 무학재(武學齋)를 폐지시켰고, 1135년에 김부식(金富軾)이 묘청(妙淸)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무신을 천대하고 멸시하는 풍조는 더욱 만연해져 무신은 문신들로부터 같은 신료가 아니라 잡역부(雜役夫)와 같은 대접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의종(毅宗)대에 이르러서는 여필종부(女必從夫)가 아니라 무필종문(武必從文), 남존여비(男尊女卑)가 아니라 문존무비(文尊武卑) 시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바야흐로 무신들의 울분은 쌓이고 쌓여 폭발 직전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정중부(鄭仲夫)는 예종(睿宗) 즉위 원년(서기 1106년)에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가계(家系)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KBS-1TV '무인시대(武人時代)'라는 드라마에서는 '해주 가문'이 어쩌고 하는 대목이 자주 튀어나오지만, 그것은 그가 정권을 장악한 뒤의 일이고 처음부터 이렇다 하고 내세울 만한 가문은 아니었다. 고려사(高麗史) 정중부열전(鄭仲夫列傳)은 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용모가 웅장하고 훌륭하며, 눈동자가 예리하고 이마가 넓고, 피부가 희고 수염이 아름다웠다. 신장이 7척이나 되었으므로 바라보기에 두려웠다.'
그는 이처럼 훌륭한 체격을 타고났기 때문에 해주에서 군적에 올린 뒤 도망치지 못하도록 팔을 묶어서 개경으로 올려보냈는데, 당시 재상인 최홍재(崔弘宰)가 군사를 뽑다가 그를 보고 이상하게 여겨 묶은 것을 풀어주게 하고 황제의 숙위군인 공학금군(控鶴禁軍)으로 발탁했다. 그리고 인종(仁宗) 때에 황제의 경호대인 견룡군(牽龍軍) 대정(隊正)이 되었다.
● 용모와 체격이 배어나 상장군까지 출세
1146년 2월 인종(仁宗)이 재위 23년 10개월만에 죽고 의종(毅宗)이 그 뒤를 이었다. 그의 나이 당시 20세였다. 의종은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했는데, 특히 격구를 매우 즐겼다. 격구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히 학문을 멀리하고 환관이나 경호병정 등과 어울려 노는 날이 많았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그의 모후(母后) 공예황후(恭睿皇后)가 둘째 아들인 대령후(大寧侯) 경(暻)을 태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했지만 인종이 듣지 않고 그를 태자로 책봉했다.
태자로 책봉된 뒤에도 공예황후는 맏아들이 계속 노는 일에만 정신을 팔자 인종에게 태자를 폐위하고 그 대신 경을 태자로 세우자고 주장했다. 인종도 결국 황후의 말에 기울어 태자를 바꿀 작정을 했는데, 당시 인종의 신임이 두텁던 예부시랑(禮部試郞) 정습명(鄭襲明)이 자신이 책임지고 태자를 보필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가까스로 폐위당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인종은 그래도 태자가 못 미더워 죽으면서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정습명의 말을 따르라."는 유언과 함께 제위를 물려주었다.
인종에 이어 의종이 즉위한 뒤에도 정중부는 자신이 맡은 직분에 충실해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대정(隊正)에서 교위(校尉)로 승진했다. 의종(毅宗) 재위 원년(서기 1147년)에는 어사대(御射臺)에서 "일찍이 조서(詔書)를 받들어 수창궁(壽昌宮) 북문을 봉쇄했는데 정중부 등이 독단적으로 열고 마음대로 출입하고 있으니 그 죄를 물어야 마땅합니다."라고 탄핵했지만 오히려 의종이 이를 대신 해명하고 위로해줄 정도였다. 이는 평소에 정중부가 격구(擊毬)와 수박희(手搏戱)로 의종을 즐겁게 해 준 공로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터운 신임에 힘입어 정중부는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상장군(上將軍)으로 승승장구(乘勝長驅)했다.
의종은 즉위 후 몇년 동안은 정습명이 두려워 자제했지만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그의 잔소리가 귀찮기만 했다. 결국 의종은 총신 김존중(金存重)과 환관 정함(鄭咸)을 시켜 병석에 누워 있는 정습명의 벼슬을 빼앗아 버렸다. 이에 분노한 정습명은 독약을 먹고 자살해 버렸다. 1151년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의종의 주위에는 간신들만 들끓으니, 의종은 마음놓고 바깥으로 놀러다니기 시작했다.
의종은 격구와 수박희를 좋아하고 여색(女色)도 밝혔지만, 자기 딴에는 시를 잘 짓고 풍류를 즐긴답시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술 먹고 놀기 좋아했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즉흥적으로 별궁이나 정자를 지었는데, 관북별궁은 민가를 빼앗아 지은 것이고, 태평정은 민가를 무려 50채나 헐고 지은 것이었다. 이밖에도 중미정이니 양화정이니 양이정이니 만춘정이니 하고 만든 별궁과 정자 수가 32군데에 이르렀다. 황제와 근신들이 이 모양이니 정치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만무했다.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궁핍해지고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 곤궁한 백성 돌보지 않고 향락만 쫓던 의종과 문신들
중미정 공사 때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전한다. 이 일에 동원된 일꾼들이 매일같이 점심밥을 싸들고 와서 먹으며 일했는데 유독 한사람만은 밥을 싸오지 못하고 굶자 동료들이 점심때마다 밥 한술씩을 떠서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의 부인이 제법 그럴듯한 점심밥을 싸 가지고 와서 동료들과 나누어 먹으라고 주었다. 난데없는 점심밥에 덜컥 의심이 든 남편이 물었다. "하루에 한끼 먹기도 힘든데 어떻게 이것을 마련했소? 혹시 외간 사내와 정을 통하고 얻어온 게 아니오?" 그러자 아내가 대답했다. "나같이 못생긴 여자를 당신말고 어떤 사내가 좋다고 하겠어요? 또 나처럼 마음 약한 년이 도둑질을 했겠어요? 정 그렇게 궁금하면 이걸 좀 보시오!" 아내가 머리에 쓴 수건을 풀어 보였다. 사내가 보니 삼단 같던 아내의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를 깎아 팔아서 밥을 마련해 왔던 것이다.
백성들이야 그렇게 죽어나거나 말거나 의종(毅宗)은 사치와 향락에 세월 가는 줄 몰랐고, 정중부 또한 황제가 그렇거나 말거나 자신의 임무인 경호에만 충실했다. 그런 정중부(鄭仲夫)도 한번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을 당하고 말았다. 어느 해 섣달 그믐날 밤에 역신(疫神)을 쫓아내는 의식은 나례 도중에 벌어진 잡기놀이에서 새파랗게 젊은 내시 김돈중(金敦中)이 느닷없이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 버렸던 것이다. 김돈중은 인종(仁宗) 때 묘청(妙淸)의 반란을 진압하고 삼국사기(三國史記) 편찬을 지휘했던 김부식(金富軾)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내시(內侍)는 조선시대에 거세한 환관인 고자(鼓子) 내시와 달리 과거에 급제한 명문가의 자제들로 구성된 황제의 근시(近侍)를 가리켰다.
자랑거리인 수염이 그 지경이 되자 화가 머리끝가지 치민 정중부는 김돈중을 두들겨 패며 욕설을 퍼부었다. 나중에 이런 사실을 안 김부식이 의종에게 정중부를 잡아들여 매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종은 마지못해 이를 허락했지만 정중부에게 일단 도망치도록 조치했다. 의종의 배려로 형벌을 면한 정중부는 그때부터 김부식 부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정중부의 아들 김돈중
1164년 3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의종이 총신들과 더불어 달령원으로 놀러나갔다가 자기들끼리 연회를 베풀어 배불리 먹고 마시며 놀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경호대장인 정중부와 그의 부하 군사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의종과 문신들을 기다리며 밤늦도록 쫄쫄 굶었다. 의종 일행은 취흥에 겨워 저희들끼리 귀법사까지 갔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는데 무신들이 허기와 피로에 지친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이런 일이 자꾸만 되풀이되자 무신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그렇게 해서 '문신시대(文臣時代)'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1170년 4월 28일. 그날도 의종과 문신들은 화평재에서 주연을 베풀고 되지도 않은 시를 지으며 왁자지껄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군사들은 여전히 허기와 피로에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지켜주기 위해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정중부가 소변을 보려고 자리를 뜨자 견룡군 장교인 산원(散員)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가 따라나와서 이렇게 말했다.
"더는 참을 수 없소이다. 문신들은 저렇게 배불리 먹고 마시고 노는데 우리는 언제까지나 이렇게 굶주리며 참아야만 한단 말입니까?"
정중부도 이들의 말을 옳다고 여겨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전에 김돈중에게 망신당한 일도 있고 해서 행동을 같이 할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그때부터 이들은 거사할 기회만 엿보았다.
그해 8월 29일, 여전히 정사(政事)는 멀리한 채 향락에만 빠져 있던 의종(毅宗)은 또 다시 연복정을 거쳐 흥왕사로 나가 놀았는데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는 이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정중부는 이의방과 이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말로 기회가 왔다. 그러나 만일 황제가 이곳을 떠나 환궁한다면 거사를 일단 뒤로 미루기로 하고, 그렇지 않고 보현원으로 간다면 바로 거병하기로 하자."
의종은 그 이튿날 보현원(普賢院)으로 자리를 옮겨 연회를 계속하기로 했다. 보현원으로 가기 위해 오문에 다다른 의종이 문신들을 불러 함께 술을 마시고 이렇게 말했다.
"아, 참으로 경치가 좋구나! 가히 군사를 연습할 만하구나!"
의종은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벌이게 했다. 오병수박희란 다섯명씩 짝을 이뤄 맨손으로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것으로서 택견과 씨름을 합친 것과 비슷한 군사들의 놀이였다. 의종은 제 딴에는 계속되는 연회에 불만을 품은 군사들에게 유희를 핑계로 상을 주어 달래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내시 한뢰(韓賴)는 황제의 총애가 무신들에게 기울 것을 걱정하고 시기심을 품고 있었다. 한뢰는 김돈중과 마찬가지로 형소 의종의 총애를 믿고 다른 자들보다 무신을 깔보는 정도가 심해 무신들로부터 원한을 사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윽고 수박희가 시작되었는데 대장군(大將軍) 이소응(李紹膺)은 비록 무장이지만 여읜 체격에 나이까지 들어 상대방을 당할 수 없자 달아났다. 이를 본 한뢰가 쫓아가서 이소응의 뺨을 때리며 소리쳤다. "도망치는 주제에 네깐 놈이 무슨 대장군이란 말이냐!" 이소응이 뺨을 맞고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자 의종과 문신들이 모두 손뼉을 치며 재미있다고 웃어댔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무신들의 눈에서 살기가 뻗쳤다. 정중부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서 한뢰를 꾸짖었다.
"네 이놈! 이소응이 비록 무신이지만 3품관인데 어찌 이토록 욕보일 수 있단 말이냐!"
● 잡역부 취급에 마침내 폭발한 무인들의 분노
사태가 심싱치 않게 돌아간다고 여긴 의종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부의 손을 잡고 달랬다. 이때 이고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려는 것을 본 정중부가 눈짓으로 말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참으라는 뜻이었다. 사태가 수습된 줄 안 의종은 보현원으로 자리를 옮겨 연회를 계속하려고 했다. 날이 저물 무렵 의종의 행차가 보현원 근처에 다다랐는데 이의민(李義旼)과 이고(李高)가 먼저 가서 거짓으로 황명이라면서 순검군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의종이 안으로 들어가고 문신들이 물러가려고 하자 기다렸던 임종직(林宗植)과 이복기(李復基)를 먼저 죽여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좌승선 김돈중(金敦中)은 취한 척하며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잽싸게 달아났고, 한뢰(韓賴)는 의종이 앉은 의자 밑으로 들어가 숨었다.
의종이 뜻밖의 변고에 놀라 환관 왕광취(王光就)로 하여금 살육을 멈추라는 명령을 전하게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정중부가 이르기를, "화근덩어리인 한뢰가 아직도 폐하 곁에 있으니 원컨대 베어 없애개 하소서!"라고 했다. 그래도 한뢰가 의종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리며 나오지 않자 이고가 끌어내어 단칼에 베어 죽였다. 이를 본 지유 김석재(金錫才)가 이의방(李義方)에게 "이고가 감히 어전에서 칼을 휘두르다니...!" 하자 이의방이 금세라도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고려사(高麗史) 정중부열전(鄭仲夫列傳)은 그 자리에서 승선 이세통(李世通), 내시 이당주(李唐柱), 어사 김기신(金起莘), 지후 유익겸(柳益謙), 사천감 김자기(金子期), 태사령 허자단(許子端) 등 의종을 수행했던 모든 문관(文官)과 대소 신료, 환관(宦官)이 살해되었는데 시체가 산과 같았다고 전한다. 또 이르기를, 처음에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가 거사하기 전에 약속하기를, "우리 편은 오른쪽 소매를 빼고 관모(官帽)를 벗어 표시하기로 하고, 그렇지 않은 놈들은 모두 죽여 버리자."고 약속했으므로 무신 가운데서도 관모를 그대로 쓰고 있던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했다. 즐겁게 놀려던 보현원이 피바다로 변하자 의종은 장수들을 불러 보검(寶劍)을 나누어주며 달래려고 했지만 정중부 등이 들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김돈중이 도망쳤다!"고 소리쳤다. 정중부 등은 급히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만일 김돈중이 황궁으로 돌아가 태자를 옹립하고 성문을 굳게 닫아 건 채 항거하면 일이 허사가 될 우려가 있었다. 의논 끝에 그들은 발 빠른 군사로 하여금 급히 개경으로 돌아가 동정을 알아보게 했다.
명을 받은 군사가 개경으로 달려가 김돈중이 아직 성내로 들어오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돌아와 보고했다. 이에 정중부 등이 일부 군사를 남겨 보현원을 지키게 하고 개경으로 달려가 도성의 치안을 담당하는 부서인 가구소의 별감 김수장(金守藏) 등을 죽이고 황궁으로 들어가 추밀현부사 양순정(梁純精), 내시지후 김광(金光)을 비롯하여 궐내에서 숙직하던 관리들을 모두 살해했다. 또 밤에 순검군을 이끌고 태자궁에 이르러 행궁감실 김거실(金居實), 원외랑 이인보(李仁甫) 등을 참살하였다. 피를 보고 흥분한 반란군은 "문신(文臣)의 관을 쓴 자는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 씨를 말려라!" 하고 소리치며 관리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50여명의 문신을 잡아 죽였다.
● 의종 축출하고 명종 옹립, 대소 정무 중방에서 처결
의종이 두려움에 떨다가 정중부를 불러 제발 이젠 그만하라고 사정했으나 사태는 이미 정중부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이에 의종은 이의방에게는 용호군(龍虎軍) 중랑장(中郞將)을, 이고에게는 응양군(鷹揚軍) 중랑장 벼슬을 내리고, 그밖에 대장군들은 상장군으로, 상장군들에게는 수사공복야(守司空僕射) 벼슬을 더해주었다. 그제야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은 의종을 환궁토록 했다.
그때 환관(宦官) 왕광취(王光就)가 무리를 모아 정중부 등을 치려다가 동료 한숙(韓淑)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어 내시와 환관 20여명이 군사들에게 잡혀 죽었다. 정중부는 의종을 군기감에 가두고, 태자는 영은관에 가두었다가 그 다음날 이의방, 이고 등과 상의하여 의종은 거제도로, 태자는 진도로 추방하고 태손은 죽여 버렸다. 그리고 감악산에 숨어있던 김돈중도 찾아내 살해하였다.
또 죽인 문신들의 집을 헐어 버리려고 하자 진준(陳俊)이란 자가 "우리가 처음에 제거하려던 자들은 한뢰와 이복기 등 4~5명인데 이미 죄 없는 자들까지 많이 죽이지 않았소? 그런데 또 문신들의 집을 헐어 버린다면 그 처자들은 어떻게 살겠소?" 하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의방과 이고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군사들로 하여금 집들을 헐어 버리게 했다. 그 뒤부터 정적들의 집을 헐어 버리는 것이 무신정권시대(武臣政權時代)의 관습이 되었다.
정중부 등은 폐위시킨 의종(毅宗) 대신 그의 아우인 익양공(翼陽公) 호(晧)를 제위에 내세우니 그가 고려 제19대 황제인 명종(明宗)이다. 명종을 옹립한 뒤 정중부는 의종의 총애를 믿고 설치던 환관 왕광취를 비롯해 백자단(白子端), 영의(榮義), 유방의(劉方義) 등을 효수(梟首)했다. 그리고 전에 의종이 백성들의 집을 헐어 별궁으로 지은 관북택, 천동택, 곽정동택을 정중부, 이의방, 이고가 사이좋게 나누어 차지했다.
무신들의 쿠데타에 의해 옹립된 명종은 정중부를 참지정사로 삼았다가 곧 중서시랑평장사에 이어 문하평장사로 벼슬을 올려주었다. 또 정변의 세 주역 정중부, 이의방, 이고에게 벽상공신의 칭호를 내려 초상화를 공신각에 걸도록 했다. 하지만 정중부는 어디까지나 쿠데타 세력의 명목상 우두머리였지 실권자는 무력(武力)을 장악하고 정변을 주도한 이의방이었다.
무신(武臣)들은 살아남은 문신(文臣)들을 모두 중방(重房)으로 불러모았다. 중방은 본래 상장군과 대장군들로 구성된 최고 군사의결기구였으나 경인정변(庚寅政變) 이후부터 군사는 물론 최고의 정치의결기구로 격상되었다. 정변 주동자 가운데서도 가장 과격한 이고는 이때 남은 문신들을 모두 죽여 없애려고 했으나 노회한 정중부가 이를 말렸다. 이들을 살려두어 뒷날 유사시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때 이미 정중부는 이의방과 이고가 언젠가는 서로 맞설 것이고, 누구든 먼저 제거되면 남은 한명을 자신이 제거하고 권력을 독차지하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주체세력 내분 끝에 이의방이 전권 장악
그 일은 머지않아 현실로 닥 쳐왔다. 1171년 1월 이고가 이의방을 죽이려다가 오히려 이의방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의방은 이고에 이어 자신에게 불복하는 채원(蔡元)까지 잡아 죽였다. 이후 조정 대소사는 이의방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는 중방을 강화하고, 문신들만 임명하던 지방관에 하급 무신들을 임명하여 그들을 회유했다. 이의방의 중방이 곧 조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이의방이 최고 실권자가 되자 정중부는 자기 차례라고 지레 겁을 먹고 병을 핑계로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이에 이의방이 형인 이준의(李俊義)와 함께 술을 가지고 정중부의 집으로 찾아가 달래고 안심시켰다. 고려사(高麗史) 정중부전(鄭仲夫傳)에는 이때 정중부와 이의방이 양부자의 결연까지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의방은 자신이 뒷날 정중부의 친자에게 뒤통수를 맞아 죽을 줄은 그때는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 무신들의 지나친 살육과 횡포에 맞서 이들을 몰아내고 의종을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주인동은 간의대부, 동북면병마사 김보당(金甫當)이었다. 김보당은 평소 담대하고 바른말을 잘해 정중부, 이의방이 꺼리던 인물이었다. 명종(明宗) 재위 3년(서기 1173년) 8월에 그는 이경직(李敬直), 장순석(張純錫), 유인준(柳寅俊) 등과 함께 거병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먼저 장순석과 유인준 등을 보내 거제도에 갇혀 있는 의종을 경주로 모시고 나오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중부와 이의방이 장군 이의민(李義旼)과 산원 박존위(朴存威)를 남쪽으로 내려 보내고 토벌군은 북쪽으로 오려보냈다. 결국 반란군은 토벌되었고 김보당 등은 생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의방이 거사를 주도한 일당을 모두 불라고 고문하자 거사에 참여한 문신은 내시 진의광(陳義光)과 배윤재(裵允材)밖에 없었지만 김보당은 "문신치고 어느 누가 너희들의 무례하고 방자한 행동을 용납할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다. 이 바람에 개경은 또 한차례 피바람이 몰아쳤다. 10일 동안 숱한 문신(文臣)의 목이 달아나고 시체는 강물에 던져졌다.
● 칼바람, 피바람이 잘 날 없는 개경
한편 경주로 내려간 이의민은 맨손으로 의종의 척추뼈를 꺾어 죽였다. 이때 민심이 흉흉하자 승선 의준의와 진준, 낭장 김부(金富) 등이 문신들에 대한 학살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여 정중부와 이의방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뜻은 알 수 없고, 인심은 가히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니 힘만 믿고 의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문관(文官)을 풀 베듯이 사냥하면 어찌 김보당 같은 사람이 또 다시 나오지 않으랴. 우리 가운데 자녀가 있는 사람은 문관과 통혼하여 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장차 편해지는 길이다." 그러자 정중부와 이의방이 그 말이 옳다 하여 학살을 멈추었다.
이보다 한해 전에는 귀법사의 승려 100여명이 이의방 타도를 외치며 개경 북문으로 쳐들어온 사건이 있었다. 이의방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이들을 마구 참살하고, 도망치는 잔당을 추격하여 귀법사, 중광사, 홍호사, 용흥사, 묘지사, 북흥사 등 개경 인근의 여러 절을 허물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의방이 숱한 승려를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자 보다 못한 그의 형 이준의가 이렇게 꾸짖었다고 한다.
"나에게 세가지 큰 죄악이 있으니 황제를 죽이고 그 집과 계집을 취함이 하나요, 태후의 여동생을 위협하여 간통한 것이 둘이요, 국정을 마음대로 함이 그 셋이다."
이의방이 화를 내어 형을 죽이려 하자 이준의는 도망쳐 한동안 숨어 지냈다. 형제까지 욕을 하고 많은 사람이 등을 돌리자 이의방은 정권안보를 위해 자신의 달을 태자비로 들여보냈는데, 이 일로 오히려 조야의 바방민 더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이듬해인 명종 재위 4년(서기 1174년) 9월에는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북부 지방 40여성의 호응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포악한 정중부와 이의방 일파를 몰아내자는 말에 서경을 중심으로 한 북쪽 사람들이 많이 동조했기 때문이었다. 이의방은 윤인첨(尹鱗瞻)을 원수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그러나 윤인첨이 첫 싸움에서 패배하고, 조위총의 군대가 개경을 향해 남하한다는 보고를 받은 이의방은 서경 출신들을 모조리 숙청한 뒤 자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했다.
● 이의방 죽이고 권세 독점한 정중부 부자
이의방이 군사를 거느리고 절령을 넘어 서경으로 진격하자 서경군이 한때 무너져 개경군에게 전세가 유리한 듯했다. 그러나 조위총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수성전(守城戰)에 돌입하자 개경군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대패하고 말았다. 그해 12월 이의방이 군사를 다시 일으켜 서경으로 진격하려고 할 때,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이 승려 종감과 모의하여 이의방을 살해함으로써 6년간에 걸친 이의방의 시대는 가고 정권은 완전히 정중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정중부는 정권을 장악하자 이의방의 형 이준의와 심복 고득원 등을 모두 죽이고 태자비인 그의 딸까지 폐출시켜 버렸다.
조위총의 반란은 1176년 7월에 윤인첨이 서경군을 격파하고 조위총을 생포함으로써 3년만에 진압되었다. 이로써 천하는 정중부, 정균 부자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정중부 부자 또한 이의방에 못지않게 잔악하고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 정중부는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 곧 수상에 올랐지만 나이가 이미 70세였다. 관례에 따르면 벼슬을 내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권력의 마력에 취한 정중부는 권좌에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이때 괴를 낸 자가 눈치빠른 낭중 최충의(崔忠義)였다. "황제가 재상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면 비록 나이가 70세라도 치사(致仕)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의 말에 정중부는 옳다 하고 무릎을 쳤다. 정중부는 예부의 관리를 시켜 명종에게 그렇게 상주하게 하여 마침내 궤장을 받자 계속해서 국정을 전단했다.
정중부가 독재자가 되어 국권을 좌지우지하자 그의 아들 정균과 사위 송유인(宋有仁)도 뒤 질세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뇌물을 받고 재물을 강탈하니, 이들에 대한 원성이 갈수록 높아졌다. 정균은 본래 난폭하고 음탕한 인물로서 우부승선 김이영(金貽永)의 딸을 유혹하여 아내로 삼고 본처를 구박했으며, 나중에는 공주까지 눈독을 들여 명종과 공예태후의 속을 썩이고 있었다. 또 송유인은 원래 대장군까지 오른 무인이었으나 정중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리고 정중부의 딸에게 새장가를 들어 사위가 된 인물로서 특히 재물에 대한 탐욕이 극에 이르렀다.
그해 9월에 남쪽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토벌군 가운데서 누군가가 익명으로 이런 내용의 괘서를 붙였다.
'시중 정중부와 그의 아들 승선 정균과 사위 복야 송유인 등이 정권을 농락하여 남적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군사를 내어 남적을 토벌하기에 앞서 이자들부터 먼저 죽여야 마땅하다.'
정중부와 정균 부자가 이 사실을 듣고 겁이 나 벼슬을 내놓고 한동안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정중부가 정작 벼슬을 내놓은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178년이었다. 정중부가 사직하자 이번에는 정균과 송유인이 권력을 차고 들어앉아 계속하여 탐학과 전횡을 일삼았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종말의 날이 왔다. 평소 이들의 매관매직과 탐욕, 안하무인에도 오만방자한 행패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던 청년 장군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경대승(慶大升)이었다.
● 정중부 일족을 숙청하고 개혁을 시도한 경대승
경대승은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경진(慶珍)의 아들로 15세에 음직으로 교위에 임명되어 무관직에 나아갔다. 명종 재위 9년 9월에 경대승은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뜻을 같이하는 견룡군(牽龍軍) 지휘자 허승(許升)과 합세하여 궁궐에서 숙직하던 정균을 죽인 다음, 사사(死士)라는 결사대 30여명을 이끌고 대궐 담을 넘어 정중부의 측근인 대장군 이경백(李慶百)과 지유 문공려(文供麗) 등을 습격해 죽였다. 그리고 경대승은 명종에게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이번 거사는 역신(逆臣)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고 사직을 편안케 함이니 성상(聖上)께서는 심려를 놓으소서."
그리고 금군(禁軍)을 풀어 정중부와 송유인, 송유인의 아들 송군수(宋群秀) 등을 체포할 것을 주청했다. 이런 급보를 받은 정중부는 황급히 도망쳐 민가에 숨었다가 붙잡혀 죽고, 송유인 부자도 모두 도망쳐 숨었다가 잡혀 죽었다. 정중부 일파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대소 신하가 모두 입궐하여 경대승의 거사 성공을 축하했다. 하지만 경대승은 "아직도 황제를 시해한 자가 살아 있는데 무엇을 축하한다는 말이오?" 하면서 시큰둥했다고 한다. 이는 바로 의종을 죽인 이의민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이의민은 고향인 경주로 내려가서 나 죽었소 하고 숨죽이며 지냈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경대승은 중방을 무력화시키고 그 대신 도방(都房)을 설치하여 자신의 측근들을 배치했다. 이어서 거사의 동지였으나 다른 뜻을 품고 있던 허승과 김광림(金廣臨) 등을 죽였다. 경대승은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지만 사리사욕을 탐내지 않은 비교적 깨끗한 인물이었다. 그의 관심은 정치개혁에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개혁의 꿈은 경대승이 집권 5년만에 불과 30세의 나이로 병사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의 사인(死因)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때가 명종 재위 13년(서기 1183년) 7월이었다.
경대승이 죽자 겁이 많고 나약한 명종은 경주로 사람을 보내 이의민을 불러올렸다. 이의민은 경대승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도 이를 믿지 않았기에 개경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그만큼 경대승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걱정한 명종은 여러차례 사람을 보내 불러올렸다. 그래도 올라오지 않자 병부상서 벼슬을 내리며 간곡히 당부하니 그제야 상경했다.
당시 명종은 왕권 회복의 호기를 맞았음에도 워낙 무신들을 두려워했기에 또 다시 무신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정중부의 반란이라고도 부르는 경인정변(庚寅政變) 이후 집권자는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을 거쳐 이의민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의민은 이의방부터 경대승까지 3명이 13년간 집권한 것과 똑같이 13년이란 오랜 세월을 군사독재자로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그러나 이의민 또한 무상한 세월의 흐름과 시대의 변화를 막을 수 없어 새로운 권력자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게 되니 그가 바로 최충헌(崔忠獻)이었다. 최충헌으로부터 시작된 최씨무신정권(崔氏武臣政權)은 62년간 절대 권력을 독점하다가 여몽전쟁(麗蒙戰爭)을 계기로 몰락하게 된다.
물론 고려시대에 무인이 유혈정변을 일으킨 것이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처음은 아니었다. 1009년 2월 3일에 서경도순검사(西京都巡檢使)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위시키고 현종(顯宗)을 옹립한 경우도 있었고, 1014년 11월 1일에는 상장군 김훈(金訓)과 최질(崔質)이 군사를 일으켜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을 내쫓은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 경우는 모두 단발적 사건으로 끝났지만, 정중부의 거사는 문제가 달랐다. 정중부의 정변 이후 고려는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慶大升), 이의민(李義旼) 및 최충헌(崔忠獻) 4대까지 약 100년 동안이나 무신정권시대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중부야말로 고려 무신정권시대(武臣政權時代)의 문을 열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인물이었다.
고려 중기에 무신들의 정변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이른바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창업하는데 앞장섰던 개국공신 대부분은 문인(文人) 출신이 아니라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무인(武人)들이었다. 하지만 나라가 안정되고 왕권이 강화되어가면서 무신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만 갔다.
● 문신 우위 정책으로 무신들의 지위 갈수록 격하
특히 호족들을 숙청하여 왕권 확보에 주력한 광종(光宗)이 중국을 본받아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하고 문신들을 우대하기 시작하면서 무신들의 지위는 급속도로 격하되었다. 문신(文臣)을 높이고 무신(武臣)을 천대하는 이런 정책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무인들의 입지는 자꾸만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성종(成宗) 때부터는 전쟁이 절어져도 무신이 최고 지휘관이 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반드시 문신이 임명되었다. 설상가상으로 998년에는 무관(武官)의 품계(品階)를 낮추기도 했다.
게다가 인종(仁宗)은 무신들의 교육기관인 무학재(武學齋)를 폐지시켰고, 1135년에 김부식(金富軾)이 묘청(妙淸)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무신을 천대하고 멸시하는 풍조는 더욱 만연해져 무신은 문신들로부터 같은 신료가 아니라 잡역부(雜役夫)와 같은 대접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의종(毅宗)대에 이르러서는 여필종부(女必從夫)가 아니라 무필종문(武必從文), 남존여비(男尊女卑)가 아니라 문존무비(文尊武卑) 시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바야흐로 무신들의 울분은 쌓이고 쌓여 폭발 직전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정중부(鄭仲夫)는 예종(睿宗) 즉위 원년(서기 1106년)에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가계(家系)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KBS-1TV '무인시대(武人時代)'라는 드라마에서는 '해주 가문'이 어쩌고 하는 대목이 자주 튀어나오지만, 그것은 그가 정권을 장악한 뒤의 일이고 처음부터 이렇다 하고 내세울 만한 가문은 아니었다. 고려사(高麗史) 정중부열전(鄭仲夫列傳)은 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용모가 웅장하고 훌륭하며, 눈동자가 예리하고 이마가 넓고, 피부가 희고 수염이 아름다웠다. 신장이 7척이나 되었으므로 바라보기에 두려웠다.'
그는 이처럼 훌륭한 체격을 타고났기 때문에 해주에서 군적에 올린 뒤 도망치지 못하도록 팔을 묶어서 개경으로 올려보냈는데, 당시 재상인 최홍재(崔弘宰)가 군사를 뽑다가 그를 보고 이상하게 여겨 묶은 것을 풀어주게 하고 황제의 숙위군인 공학금군(控鶴禁軍)으로 발탁했다. 그리고 인종(仁宗) 때에 황제의 경호대인 견룡군(牽龍軍) 대정(隊正)이 되었다.
● 용모와 체격이 배어나 상장군까지 출세
1146년 2월 인종(仁宗)이 재위 23년 10개월만에 죽고 의종(毅宗)이 그 뒤를 이었다. 그의 나이 당시 20세였다. 의종은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했는데, 특히 격구를 매우 즐겼다. 격구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히 학문을 멀리하고 환관이나 경호병정 등과 어울려 노는 날이 많았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그의 모후(母后) 공예황후(恭睿皇后)가 둘째 아들인 대령후(大寧侯) 경(暻)을 태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했지만 인종이 듣지 않고 그를 태자로 책봉했다.
태자로 책봉된 뒤에도 공예황후는 맏아들이 계속 노는 일에만 정신을 팔자 인종에게 태자를 폐위하고 그 대신 경을 태자로 세우자고 주장했다. 인종도 결국 황후의 말에 기울어 태자를 바꿀 작정을 했는데, 당시 인종의 신임이 두텁던 예부시랑(禮部試郞) 정습명(鄭襲明)이 자신이 책임지고 태자를 보필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가까스로 폐위당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인종은 그래도 태자가 못 미더워 죽으면서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정습명의 말을 따르라."는 유언과 함께 제위를 물려주었다.
인종에 이어 의종이 즉위한 뒤에도 정중부는 자신이 맡은 직분에 충실해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대정(隊正)에서 교위(校尉)로 승진했다. 의종(毅宗) 재위 원년(서기 1147년)에는 어사대(御射臺)에서 "일찍이 조서(詔書)를 받들어 수창궁(壽昌宮) 북문을 봉쇄했는데 정중부 등이 독단적으로 열고 마음대로 출입하고 있으니 그 죄를 물어야 마땅합니다."라고 탄핵했지만 오히려 의종이 이를 대신 해명하고 위로해줄 정도였다. 이는 평소에 정중부가 격구(擊毬)와 수박희(手搏戱)로 의종을 즐겁게 해 준 공로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터운 신임에 힘입어 정중부는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상장군(上將軍)으로 승승장구(乘勝長驅)했다.
의종은 즉위 후 몇년 동안은 정습명이 두려워 자제했지만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그의 잔소리가 귀찮기만 했다. 결국 의종은 총신 김존중(金存重)과 환관 정함(鄭咸)을 시켜 병석에 누워 있는 정습명의 벼슬을 빼앗아 버렸다. 이에 분노한 정습명은 독약을 먹고 자살해 버렸다. 1151년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의종의 주위에는 간신들만 들끓으니, 의종은 마음놓고 바깥으로 놀러다니기 시작했다.
의종은 격구와 수박희를 좋아하고 여색(女色)도 밝혔지만, 자기 딴에는 시를 잘 짓고 풍류를 즐긴답시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술 먹고 놀기 좋아했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즉흥적으로 별궁이나 정자를 지었는데, 관북별궁은 민가를 빼앗아 지은 것이고, 태평정은 민가를 무려 50채나 헐고 지은 것이었다. 이밖에도 중미정이니 양화정이니 양이정이니 만춘정이니 하고 만든 별궁과 정자 수가 32군데에 이르렀다. 황제와 근신들이 이 모양이니 정치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만무했다.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궁핍해지고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 곤궁한 백성 돌보지 않고 향락만 쫓던 의종과 문신들
중미정 공사 때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전한다. 이 일에 동원된 일꾼들이 매일같이 점심밥을 싸들고 와서 먹으며 일했는데 유독 한사람만은 밥을 싸오지 못하고 굶자 동료들이 점심때마다 밥 한술씩을 떠서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의 부인이 제법 그럴듯한 점심밥을 싸 가지고 와서 동료들과 나누어 먹으라고 주었다. 난데없는 점심밥에 덜컥 의심이 든 남편이 물었다. "하루에 한끼 먹기도 힘든데 어떻게 이것을 마련했소? 혹시 외간 사내와 정을 통하고 얻어온 게 아니오?" 그러자 아내가 대답했다. "나같이 못생긴 여자를 당신말고 어떤 사내가 좋다고 하겠어요? 또 나처럼 마음 약한 년이 도둑질을 했겠어요? 정 그렇게 궁금하면 이걸 좀 보시오!" 아내가 머리에 쓴 수건을 풀어 보였다. 사내가 보니 삼단 같던 아내의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를 깎아 팔아서 밥을 마련해 왔던 것이다.
백성들이야 그렇게 죽어나거나 말거나 의종(毅宗)은 사치와 향락에 세월 가는 줄 몰랐고, 정중부 또한 황제가 그렇거나 말거나 자신의 임무인 경호에만 충실했다. 그런 정중부(鄭仲夫)도 한번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을 당하고 말았다. 어느 해 섣달 그믐날 밤에 역신(疫神)을 쫓아내는 의식은 나례 도중에 벌어진 잡기놀이에서 새파랗게 젊은 내시 김돈중(金敦中)이 느닷없이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 버렸던 것이다. 김돈중은 인종(仁宗) 때 묘청(妙淸)의 반란을 진압하고 삼국사기(三國史記) 편찬을 지휘했던 김부식(金富軾)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내시(內侍)는 조선시대에 거세한 환관인 고자(鼓子) 내시와 달리 과거에 급제한 명문가의 자제들로 구성된 황제의 근시(近侍)를 가리켰다.
자랑거리인 수염이 그 지경이 되자 화가 머리끝가지 치민 정중부는 김돈중을 두들겨 패며 욕설을 퍼부었다. 나중에 이런 사실을 안 김부식이 의종에게 정중부를 잡아들여 매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종은 마지못해 이를 허락했지만 정중부에게 일단 도망치도록 조치했다. 의종의 배려로 형벌을 면한 정중부는 그때부터 김부식 부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정중부의 아들 김돈중
1164년 3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의종이 총신들과 더불어 달령원으로 놀러나갔다가 자기들끼리 연회를 베풀어 배불리 먹고 마시며 놀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경호대장인 정중부와 그의 부하 군사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의종과 문신들을 기다리며 밤늦도록 쫄쫄 굶었다. 의종 일행은 취흥에 겨워 저희들끼리 귀법사까지 갔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는데 무신들이 허기와 피로에 지친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이런 일이 자꾸만 되풀이되자 무신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그렇게 해서 '문신시대(文臣時代)'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1170년 4월 28일. 그날도 의종과 문신들은 화평재에서 주연을 베풀고 되지도 않은 시를 지으며 왁자지껄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군사들은 여전히 허기와 피로에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지켜주기 위해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정중부가 소변을 보려고 자리를 뜨자 견룡군 장교인 산원(散員)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가 따라나와서 이렇게 말했다.
"더는 참을 수 없소이다. 문신들은 저렇게 배불리 먹고 마시고 노는데 우리는 언제까지나 이렇게 굶주리며 참아야만 한단 말입니까?"
정중부도 이들의 말을 옳다고 여겨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전에 김돈중에게 망신당한 일도 있고 해서 행동을 같이 할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그때부터 이들은 거사할 기회만 엿보았다.
그해 8월 29일, 여전히 정사(政事)는 멀리한 채 향락에만 빠져 있던 의종(毅宗)은 또 다시 연복정을 거쳐 흥왕사로 나가 놀았는데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는 이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정중부는 이의방과 이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말로 기회가 왔다. 그러나 만일 황제가 이곳을 떠나 환궁한다면 거사를 일단 뒤로 미루기로 하고, 그렇지 않고 보현원으로 간다면 바로 거병하기로 하자."
의종은 그 이튿날 보현원(普賢院)으로 자리를 옮겨 연회를 계속하기로 했다. 보현원으로 가기 위해 오문에 다다른 의종이 문신들을 불러 함께 술을 마시고 이렇게 말했다.
"아, 참으로 경치가 좋구나! 가히 군사를 연습할 만하구나!"
의종은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벌이게 했다. 오병수박희란 다섯명씩 짝을 이뤄 맨손으로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것으로서 택견과 씨름을 합친 것과 비슷한 군사들의 놀이였다. 의종은 제 딴에는 계속되는 연회에 불만을 품은 군사들에게 유희를 핑계로 상을 주어 달래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내시 한뢰(韓賴)는 황제의 총애가 무신들에게 기울 것을 걱정하고 시기심을 품고 있었다. 한뢰는 김돈중과 마찬가지로 형소 의종의 총애를 믿고 다른 자들보다 무신을 깔보는 정도가 심해 무신들로부터 원한을 사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윽고 수박희가 시작되었는데 대장군(大將軍) 이소응(李紹膺)은 비록 무장이지만 여읜 체격에 나이까지 들어 상대방을 당할 수 없자 달아났다. 이를 본 한뢰가 쫓아가서 이소응의 뺨을 때리며 소리쳤다. "도망치는 주제에 네깐 놈이 무슨 대장군이란 말이냐!" 이소응이 뺨을 맞고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자 의종과 문신들이 모두 손뼉을 치며 재미있다고 웃어댔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무신들의 눈에서 살기가 뻗쳤다. 정중부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서 한뢰를 꾸짖었다.
"네 이놈! 이소응이 비록 무신이지만 3품관인데 어찌 이토록 욕보일 수 있단 말이냐!"
● 잡역부 취급에 마침내 폭발한 무인들의 분노
사태가 심싱치 않게 돌아간다고 여긴 의종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부의 손을 잡고 달랬다. 이때 이고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려는 것을 본 정중부가 눈짓으로 말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참으라는 뜻이었다. 사태가 수습된 줄 안 의종은 보현원으로 자리를 옮겨 연회를 계속하려고 했다. 날이 저물 무렵 의종의 행차가 보현원 근처에 다다랐는데 이의민(李義旼)과 이고(李高)가 먼저 가서 거짓으로 황명이라면서 순검군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의종이 안으로 들어가고 문신들이 물러가려고 하자 기다렸던 임종직(林宗植)과 이복기(李復基)를 먼저 죽여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좌승선 김돈중(金敦中)은 취한 척하며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잽싸게 달아났고, 한뢰(韓賴)는 의종이 앉은 의자 밑으로 들어가 숨었다.
의종이 뜻밖의 변고에 놀라 환관 왕광취(王光就)로 하여금 살육을 멈추라는 명령을 전하게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정중부가 이르기를, "화근덩어리인 한뢰가 아직도 폐하 곁에 있으니 원컨대 베어 없애개 하소서!"라고 했다. 그래도 한뢰가 의종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리며 나오지 않자 이고가 끌어내어 단칼에 베어 죽였다. 이를 본 지유 김석재(金錫才)가 이의방(李義方)에게 "이고가 감히 어전에서 칼을 휘두르다니...!" 하자 이의방이 금세라도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고려사(高麗史) 정중부열전(鄭仲夫列傳)은 그 자리에서 승선 이세통(李世通), 내시 이당주(李唐柱), 어사 김기신(金起莘), 지후 유익겸(柳益謙), 사천감 김자기(金子期), 태사령 허자단(許子端) 등 의종을 수행했던 모든 문관(文官)과 대소 신료, 환관(宦官)이 살해되었는데 시체가 산과 같았다고 전한다. 또 이르기를, 처음에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가 거사하기 전에 약속하기를, "우리 편은 오른쪽 소매를 빼고 관모(官帽)를 벗어 표시하기로 하고, 그렇지 않은 놈들은 모두 죽여 버리자."고 약속했으므로 무신 가운데서도 관모를 그대로 쓰고 있던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했다. 즐겁게 놀려던 보현원이 피바다로 변하자 의종은 장수들을 불러 보검(寶劍)을 나누어주며 달래려고 했지만 정중부 등이 들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김돈중이 도망쳤다!"고 소리쳤다. 정중부 등은 급히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만일 김돈중이 황궁으로 돌아가 태자를 옹립하고 성문을 굳게 닫아 건 채 항거하면 일이 허사가 될 우려가 있었다. 의논 끝에 그들은 발 빠른 군사로 하여금 급히 개경으로 돌아가 동정을 알아보게 했다.
명을 받은 군사가 개경으로 달려가 김돈중이 아직 성내로 들어오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돌아와 보고했다. 이에 정중부 등이 일부 군사를 남겨 보현원을 지키게 하고 개경으로 달려가 도성의 치안을 담당하는 부서인 가구소의 별감 김수장(金守藏) 등을 죽이고 황궁으로 들어가 추밀현부사 양순정(梁純精), 내시지후 김광(金光)을 비롯하여 궐내에서 숙직하던 관리들을 모두 살해했다. 또 밤에 순검군을 이끌고 태자궁에 이르러 행궁감실 김거실(金居實), 원외랑 이인보(李仁甫) 등을 참살하였다. 피를 보고 흥분한 반란군은 "문신(文臣)의 관을 쓴 자는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 씨를 말려라!" 하고 소리치며 관리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50여명의 문신을 잡아 죽였다.
● 의종 축출하고 명종 옹립, 대소 정무 중방에서 처결
의종이 두려움에 떨다가 정중부를 불러 제발 이젠 그만하라고 사정했으나 사태는 이미 정중부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이에 의종은 이의방에게는 용호군(龍虎軍) 중랑장(中郞將)을, 이고에게는 응양군(鷹揚軍) 중랑장 벼슬을 내리고, 그밖에 대장군들은 상장군으로, 상장군들에게는 수사공복야(守司空僕射) 벼슬을 더해주었다. 그제야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은 의종을 환궁토록 했다.
그때 환관(宦官) 왕광취(王光就)가 무리를 모아 정중부 등을 치려다가 동료 한숙(韓淑)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어 내시와 환관 20여명이 군사들에게 잡혀 죽었다. 정중부는 의종을 군기감에 가두고, 태자는 영은관에 가두었다가 그 다음날 이의방, 이고 등과 상의하여 의종은 거제도로, 태자는 진도로 추방하고 태손은 죽여 버렸다. 그리고 감악산에 숨어있던 김돈중도 찾아내 살해하였다.
또 죽인 문신들의 집을 헐어 버리려고 하자 진준(陳俊)이란 자가 "우리가 처음에 제거하려던 자들은 한뢰와 이복기 등 4~5명인데 이미 죄 없는 자들까지 많이 죽이지 않았소? 그런데 또 문신들의 집을 헐어 버린다면 그 처자들은 어떻게 살겠소?" 하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의방과 이고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군사들로 하여금 집들을 헐어 버리게 했다. 그 뒤부터 정적들의 집을 헐어 버리는 것이 무신정권시대(武臣政權時代)의 관습이 되었다.
정중부 등은 폐위시킨 의종(毅宗) 대신 그의 아우인 익양공(翼陽公) 호(晧)를 제위에 내세우니 그가 고려 제19대 황제인 명종(明宗)이다. 명종을 옹립한 뒤 정중부는 의종의 총애를 믿고 설치던 환관 왕광취를 비롯해 백자단(白子端), 영의(榮義), 유방의(劉方義) 등을 효수(梟首)했다. 그리고 전에 의종이 백성들의 집을 헐어 별궁으로 지은 관북택, 천동택, 곽정동택을 정중부, 이의방, 이고가 사이좋게 나누어 차지했다.
무신들의 쿠데타에 의해 옹립된 명종은 정중부를 참지정사로 삼았다가 곧 중서시랑평장사에 이어 문하평장사로 벼슬을 올려주었다. 또 정변의 세 주역 정중부, 이의방, 이고에게 벽상공신의 칭호를 내려 초상화를 공신각에 걸도록 했다. 하지만 정중부는 어디까지나 쿠데타 세력의 명목상 우두머리였지 실권자는 무력(武力)을 장악하고 정변을 주도한 이의방이었다.
무신(武臣)들은 살아남은 문신(文臣)들을 모두 중방(重房)으로 불러모았다. 중방은 본래 상장군과 대장군들로 구성된 최고 군사의결기구였으나 경인정변(庚寅政變) 이후부터 군사는 물론 최고의 정치의결기구로 격상되었다. 정변 주동자 가운데서도 가장 과격한 이고는 이때 남은 문신들을 모두 죽여 없애려고 했으나 노회한 정중부가 이를 말렸다. 이들을 살려두어 뒷날 유사시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때 이미 정중부는 이의방과 이고가 언젠가는 서로 맞설 것이고, 누구든 먼저 제거되면 남은 한명을 자신이 제거하고 권력을 독차지하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주체세력 내분 끝에 이의방이 전권 장악
그 일은 머지않아 현실로 닥 쳐왔다. 1171년 1월 이고가 이의방을 죽이려다가 오히려 이의방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의방은 이고에 이어 자신에게 불복하는 채원(蔡元)까지 잡아 죽였다. 이후 조정 대소사는 이의방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는 중방을 강화하고, 문신들만 임명하던 지방관에 하급 무신들을 임명하여 그들을 회유했다. 이의방의 중방이 곧 조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이의방이 최고 실권자가 되자 정중부는 자기 차례라고 지레 겁을 먹고 병을 핑계로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이에 이의방이 형인 이준의(李俊義)와 함께 술을 가지고 정중부의 집으로 찾아가 달래고 안심시켰다. 고려사(高麗史) 정중부전(鄭仲夫傳)에는 이때 정중부와 이의방이 양부자의 결연까지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의방은 자신이 뒷날 정중부의 친자에게 뒤통수를 맞아 죽을 줄은 그때는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 무신들의 지나친 살육과 횡포에 맞서 이들을 몰아내고 의종을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주인동은 간의대부, 동북면병마사 김보당(金甫當)이었다. 김보당은 평소 담대하고 바른말을 잘해 정중부, 이의방이 꺼리던 인물이었다. 명종(明宗) 재위 3년(서기 1173년) 8월에 그는 이경직(李敬直), 장순석(張純錫), 유인준(柳寅俊) 등과 함께 거병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먼저 장순석과 유인준 등을 보내 거제도에 갇혀 있는 의종을 경주로 모시고 나오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중부와 이의방이 장군 이의민(李義旼)과 산원 박존위(朴存威)를 남쪽으로 내려 보내고 토벌군은 북쪽으로 오려보냈다. 결국 반란군은 토벌되었고 김보당 등은 생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의방이 거사를 주도한 일당을 모두 불라고 고문하자 거사에 참여한 문신은 내시 진의광(陳義光)과 배윤재(裵允材)밖에 없었지만 김보당은 "문신치고 어느 누가 너희들의 무례하고 방자한 행동을 용납할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다. 이 바람에 개경은 또 한차례 피바람이 몰아쳤다. 10일 동안 숱한 문신(文臣)의 목이 달아나고 시체는 강물에 던져졌다.
● 칼바람, 피바람이 잘 날 없는 개경
한편 경주로 내려간 이의민은 맨손으로 의종의 척추뼈를 꺾어 죽였다. 이때 민심이 흉흉하자 승선 의준의와 진준, 낭장 김부(金富) 등이 문신들에 대한 학살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여 정중부와 이의방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뜻은 알 수 없고, 인심은 가히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니 힘만 믿고 의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문관(文官)을 풀 베듯이 사냥하면 어찌 김보당 같은 사람이 또 다시 나오지 않으랴. 우리 가운데 자녀가 있는 사람은 문관과 통혼하여 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장차 편해지는 길이다." 그러자 정중부와 이의방이 그 말이 옳다 하여 학살을 멈추었다.
이보다 한해 전에는 귀법사의 승려 100여명이 이의방 타도를 외치며 개경 북문으로 쳐들어온 사건이 있었다. 이의방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이들을 마구 참살하고, 도망치는 잔당을 추격하여 귀법사, 중광사, 홍호사, 용흥사, 묘지사, 북흥사 등 개경 인근의 여러 절을 허물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의방이 숱한 승려를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자 보다 못한 그의 형 이준의가 이렇게 꾸짖었다고 한다.
"나에게 세가지 큰 죄악이 있으니 황제를 죽이고 그 집과 계집을 취함이 하나요, 태후의 여동생을 위협하여 간통한 것이 둘이요, 국정을 마음대로 함이 그 셋이다."
이의방이 화를 내어 형을 죽이려 하자 이준의는 도망쳐 한동안 숨어 지냈다. 형제까지 욕을 하고 많은 사람이 등을 돌리자 이의방은 정권안보를 위해 자신의 달을 태자비로 들여보냈는데, 이 일로 오히려 조야의 바방민 더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이듬해인 명종 재위 4년(서기 1174년) 9월에는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북부 지방 40여성의 호응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포악한 정중부와 이의방 일파를 몰아내자는 말에 서경을 중심으로 한 북쪽 사람들이 많이 동조했기 때문이었다. 이의방은 윤인첨(尹鱗瞻)을 원수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그러나 윤인첨이 첫 싸움에서 패배하고, 조위총의 군대가 개경을 향해 남하한다는 보고를 받은 이의방은 서경 출신들을 모조리 숙청한 뒤 자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했다.
● 이의방 죽이고 권세 독점한 정중부 부자
이의방이 군사를 거느리고 절령을 넘어 서경으로 진격하자 서경군이 한때 무너져 개경군에게 전세가 유리한 듯했다. 그러나 조위총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수성전(守城戰)에 돌입하자 개경군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대패하고 말았다. 그해 12월 이의방이 군사를 다시 일으켜 서경으로 진격하려고 할 때,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이 승려 종감과 모의하여 이의방을 살해함으로써 6년간에 걸친 이의방의 시대는 가고 정권은 완전히 정중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정중부는 정권을 장악하자 이의방의 형 이준의와 심복 고득원 등을 모두 죽이고 태자비인 그의 딸까지 폐출시켜 버렸다.
조위총의 반란은 1176년 7월에 윤인첨이 서경군을 격파하고 조위총을 생포함으로써 3년만에 진압되었다. 이로써 천하는 정중부, 정균 부자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정중부 부자 또한 이의방에 못지않게 잔악하고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 정중부는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 곧 수상에 올랐지만 나이가 이미 70세였다. 관례에 따르면 벼슬을 내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권력의 마력에 취한 정중부는 권좌에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이때 괴를 낸 자가 눈치빠른 낭중 최충의(崔忠義)였다. "황제가 재상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면 비록 나이가 70세라도 치사(致仕)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의 말에 정중부는 옳다 하고 무릎을 쳤다. 정중부는 예부의 관리를 시켜 명종에게 그렇게 상주하게 하여 마침내 궤장을 받자 계속해서 국정을 전단했다.
정중부가 독재자가 되어 국권을 좌지우지하자 그의 아들 정균과 사위 송유인(宋有仁)도 뒤 질세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뇌물을 받고 재물을 강탈하니, 이들에 대한 원성이 갈수록 높아졌다. 정균은 본래 난폭하고 음탕한 인물로서 우부승선 김이영(金貽永)의 딸을 유혹하여 아내로 삼고 본처를 구박했으며, 나중에는 공주까지 눈독을 들여 명종과 공예태후의 속을 썩이고 있었다. 또 송유인은 원래 대장군까지 오른 무인이었으나 정중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리고 정중부의 딸에게 새장가를 들어 사위가 된 인물로서 특히 재물에 대한 탐욕이 극에 이르렀다.
그해 9월에 남쪽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토벌군 가운데서 누군가가 익명으로 이런 내용의 괘서를 붙였다.
'시중 정중부와 그의 아들 승선 정균과 사위 복야 송유인 등이 정권을 농락하여 남적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군사를 내어 남적을 토벌하기에 앞서 이자들부터 먼저 죽여야 마땅하다.'
정중부와 정균 부자가 이 사실을 듣고 겁이 나 벼슬을 내놓고 한동안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정중부가 정작 벼슬을 내놓은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178년이었다. 정중부가 사직하자 이번에는 정균과 송유인이 권력을 차고 들어앉아 계속하여 탐학과 전횡을 일삼았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종말의 날이 왔다. 평소 이들의 매관매직과 탐욕, 안하무인에도 오만방자한 행패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던 청년 장군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경대승(慶大升)이었다.
● 정중부 일족을 숙청하고 개혁을 시도한 경대승
경대승은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경진(慶珍)의 아들로 15세에 음직으로 교위에 임명되어 무관직에 나아갔다. 명종 재위 9년 9월에 경대승은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뜻을 같이하는 견룡군(牽龍軍) 지휘자 허승(許升)과 합세하여 궁궐에서 숙직하던 정균을 죽인 다음, 사사(死士)라는 결사대 30여명을 이끌고 대궐 담을 넘어 정중부의 측근인 대장군 이경백(李慶百)과 지유 문공려(文供麗) 등을 습격해 죽였다. 그리고 경대승은 명종에게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이번 거사는 역신(逆臣)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고 사직을 편안케 함이니 성상(聖上)께서는 심려를 놓으소서."
그리고 금군(禁軍)을 풀어 정중부와 송유인, 송유인의 아들 송군수(宋群秀) 등을 체포할 것을 주청했다. 이런 급보를 받은 정중부는 황급히 도망쳐 민가에 숨었다가 붙잡혀 죽고, 송유인 부자도 모두 도망쳐 숨었다가 잡혀 죽었다. 정중부 일파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대소 신하가 모두 입궐하여 경대승의 거사 성공을 축하했다. 하지만 경대승은 "아직도 황제를 시해한 자가 살아 있는데 무엇을 축하한다는 말이오?" 하면서 시큰둥했다고 한다. 이는 바로 의종을 죽인 이의민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이의민은 고향인 경주로 내려가서 나 죽었소 하고 숨죽이며 지냈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경대승은 중방을 무력화시키고 그 대신 도방(都房)을 설치하여 자신의 측근들을 배치했다. 이어서 거사의 동지였으나 다른 뜻을 품고 있던 허승과 김광림(金廣臨) 등을 죽였다. 경대승은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지만 사리사욕을 탐내지 않은 비교적 깨끗한 인물이었다. 그의 관심은 정치개혁에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개혁의 꿈은 경대승이 집권 5년만에 불과 30세의 나이로 병사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의 사인(死因)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때가 명종 재위 13년(서기 1183년) 7월이었다.
경대승이 죽자 겁이 많고 나약한 명종은 경주로 사람을 보내 이의민을 불러올렸다. 이의민은 경대승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도 이를 믿지 않았기에 개경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그만큼 경대승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걱정한 명종은 여러차례 사람을 보내 불러올렸다. 그래도 올라오지 않자 병부상서 벼슬을 내리며 간곡히 당부하니 그제야 상경했다.
당시 명종은 왕권 회복의 호기를 맞았음에도 워낙 무신들을 두려워했기에 또 다시 무신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정중부의 반란이라고도 부르는 경인정변(庚寅政變) 이후 집권자는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을 거쳐 이의민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의민은 이의방부터 경대승까지 3명이 13년간 집권한 것과 똑같이 13년이란 오랜 세월을 군사독재자로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그러나 이의민 또한 무상한 세월의 흐름과 시대의 변화를 막을 수 없어 새로운 권력자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게 되니 그가 바로 최충헌(崔忠獻)이었다. 최충헌으로부터 시작된 최씨무신정권(崔氏武臣政權)은 62년간 절대 권력을 독점하다가 여몽전쟁(麗蒙戰爭)을 계기로 몰락하게 된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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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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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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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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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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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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