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은 고려 중기의 유학자로서 현존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남긴 인물로 지금까지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오늘날 김부식은 철저한 사대주의자이자 권력지향주의자이며 수구주의자였다는 평가를 피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의 삶 곳곳에 자주 국가 건설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앞장선 흔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김부식은 초기에는 당시의 최고 권신인 이자겸(李資謙)의 잘못을 지적하는 등 유학자로서 당당하고 올곧은 자세를 보이나, 이자겸과 척준경(拓俊京)이 제거된 이후 실권을 잡게 되면서부터는 수구화, 사대화되어 서경천도파(西京遷都派)의 자주 국가 건설에 적극 반대하였고, 이를 계기로 정적들을 제가힘으로써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인다.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우리의 고대사를 전달해준다는 의미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것은 삼국사기가 우리 고대사에 대한 현존 유일의 정사(正史)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두차례의 국난과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라는 치욕의 역사를 겪으면서 우리 역사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대한 그러한 평가가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이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성향의 수구권신(守舊權臣)이었던 김부식은 철저하게 중국의 입장에서 삼국사기를 편찬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많은 부분을 폄하하고 누락시켰다. 이러한 김부식의 모화사관(慕華史觀)은 삼국사기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선덕여왕조(善德女王條) 말미에 쓴 그의 논평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신(臣)이 들으니 옛날에 여와씨(女?氏)란 이가 있었으나 천자(天子)가 아니고 복희(伏羲)를 도와 구주(九州)를 다스렸을 뿐이며, 여치(呂致)와 무조(武祖) 같은 이는 유약한 임금을 만나 조정에서 정령을 발하였으나 역사서에는 이들을 공공연하게 국왕이라고 일컫지 아니하고 다만 '고후(高后) 여씨', '측천황후(則天皇后) 무씨'라고 썼을 뿐이다. 하늘로 말하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유하며,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거늘 어찌 노구(老耉)로 하여금 규방에서 나와 나라의 정사(政事)를 재단케 하리요. 신라는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진실로 난세의 일이며, 이러고서 나라가 망하지 아니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 할 것이다...'
지난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으로 어려움에 빠지자 당나라에 구원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는데, 이때 당황(唐皇) 태종(太宗)이 신라 사신에게 "신라는 여자가 나라를 다스리기 때문에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다. 우리 황족 중에서 남자 한사람을 보내 다스리게 하면 더 이상 이웃 나라의 침략이 없을 것이로다."라고 했던 것과 김부식의 논평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그가 신라 왕실의 후예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사대의식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알 수 있다.
◆ 유학자로서 원리원칙을 고수하다.
김부식(金富軾)은 문종(文宗) 재위 29년(서기 1075년), 김근(金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신라가 망할 무렵 증조부인 김위영(金衛瑛)이 왕건(王建)에게 귀의하여 경주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에 임명되면서부터 대대로 경주에 기반을 두고 생활했다. 그 뒤 김부식을 비롯하여 다른 형제들, 즉 부필(富弼), 부일(富逸), 부철(富哲)이 모두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중앙으로 진출하자 개경으로 올라왔다.
김부식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偏母) 슬하에서 자랐으나, 자신과 형제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함으로써 그의 어미니는 훌륭한 어머니로 인정받아 매년 정기적으로 임금이 내려주는 곡식을 받았다. 게다가 형제 중 부식과 둘째형 부일, 동생 부철 삼형제는 관직 중에서 가장 명예로운 한림직(翰林職)을 맡아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김부식은 1096년 과거에 급제한 뒤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司錄)과 참군사(參軍事)를 거쳐 직한림원(直翰林院)에 올랐고 곧 우사간(右司諫)으로 승진했다. 김부식이 우사간으로 있던 1115년, 요나라가 여진을 치고자 파병을 요청했는데, 이때 문무백관 대부분이 파병에 찬성했으나 김부식은 척준경 등과 함께 "정해년(丁亥年)과 무자년(茂子年)의 전란 이후로 군사와 백성들이 겨우 어깨를 쉬게 되었는데, 지금 타국을 위해 군사를 출동한다면 스스로 말썽을 초래하는 것이니 장래가 어찌될지 두렵습니다."라며 반대했다.
김부식의 이와 같은 주장은 숙종(肅宗) 이후 계속된 여진정벌전(女眞征伐戰)으로 국력을 소진한 상태에서 또 다시 무리한 출병으로 백성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국제 정세에 어두운 그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얼마 후 신흥세력으로 부상한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웠고, 고려는 금나라가 몽골족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사대의 예를 취하는 굴욕을 행해야만 했다. 만일 고려가 요나라를 도와 여진족을 제압했다면 이후 그들에 대한 굴욕적인 사대외교는 하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른다.
그 후 예부낭중을 거쳐 기거주로 승진한 김부식은 1121년 경연에 나가 서경(書經)을 강의한 것을 시작으로 계속해거 경연에 참여하여 자신의 학문적 소양을 마음껏 발휘하였으며, 이어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승진했다.
예종(睿宗)이 세상을 떠난 1122년 4월, 인종(仁宗)이 열네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이 어린 황제를 보필한다는 명목 아래 국정을 총괄했다. 그러자 그해 7월 인종은 "이자겸은 짐에게 외조부가 되니 그 예우를 백관과 같이 할 수 없다. 여러 대신들은 이에 대해 의논하여 아뢰라."는 조서(詔書)를 내렸다.
이에 정극영(鄭克永)과 최유가 "이자겸은 마땅히 글을 올릴 때 신(臣)이라 일컫지 말고, 군신의 연회 때에도 뜰에서 하례하지 말고 바로 장막으로 나아가 절하며, 성상(聖上)의 답례를 받은 뒤에야 자리에 앉아야 할 것입니다." 하고 아뢰자 모두들 그 의견에 찬성했다. 하지만 당시 보문각(寶文閣) 대제(大提)로 있던 김부식은 중국의 고사를 예로 들며 "부모와는 높고 천함이 서로 멀거늘 어찌 임금과 예를 같이 하겠는가? 마땅히 글월을 올릴 때에는 신을 칭할 것이고, 군신간의 예절에 있어서는 여러 사람을 따라야 할 것이며, 궁중 안에서는 일가의 예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같이 하면 공의(公義)와 사은(私恩) 두가지가 모두 순조로울 것입니다."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인종이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근신 강후현(康逅賢)을 이자겸에게 보내 의견을 묻자, 이자겸은 "신이 비록 무지하오나 김부식의 말을 들으니 실로 천하의 공론입니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노신이 불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원컨대 그의 말을 쫓으소서." 하고 대답했다. 그제야 인종은 비로소 이자겸에게 군신의 예에 따르도록 조치했다. 이때 당대 최고의 권신 이자겸을 상대로 김부식이 반대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던 것은 유학자로서의 원리원칙에 따라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인종(仁宗) 재위 2년(서기 1124년) 5월, 김부식은 동지공거로서 지공거 김약온을 도와 과거를 관장한 데 이어 박승중(朴昇中), 정극영과 함께 예종실록(睿宗實錄)을 편찬하고 곧이어 예부시랑으로 승진했다. 이때 인종이 이자겸의 할아버지 이자연을 추증하는 제지를 내렸다. 그러자 박승중이 이자겸에게 아부하기 위해 죽책(竹冊)으로 책봉의 예를 행하고, 묘 앞에 알리는 날에는 음악을 갖출 것을 청하였다.
유교적 원칙주의자인 김부식이 이를 보고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그는 "묘 앞에서 음악을 쓰는 것은 살아있을 때의 생활을 상징하는 것이니 어찌 음악을 쓸 수 있겠는가?"라며 반대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박승중이 이자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로 부르자고 했다. 이번에도 역시 김부식은 "생일을 절(節)이라 부르는 것은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당(唐) 현종(玄宗) 때에 처음으로 황제의 생일을 가리쳐 천추절(千秋節)이라 불렀으나, 신하의 생일을 절이라 불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며 반대했다. 이와 같이 김부식은 유교적 원리원칙에 어긋난 일들을 보면 지나치지 않고 극구 반대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킴으로써 차근차근 입지를 키워 나갔다.
이후 김부식은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해 개경에 뿌리를 둔 문벌귀족들과 뜻을 같이 했고, 이것은 뒷날 그로 하여금 수구세력의 대표주자로서 묘청(妙淸) 등의 서경천도운동(西京遷都運動)을 좌절시키고 개경(開京)을 사수하게 만들었다.
◆ 반란을 핑계로 문적(文敵) 정지상(鄭知常)을 제거하다.
김부식은 1126년 어사대부(御史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고, 이듬해 사신으로 송나라에 가게 됐으나 금나라가 송나라를 침략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명주에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이어 추밀원사와 호부상서를 거쳐 1128년에는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역임하고 평장사로 승진했다. 그해 김부식은 묘청(妙淸)을 비롯해 정지상(鄭知常), 김안(金安), 백수한(白壽翰) 등이 중심이 되어 서경천도(西京遷都)를 주장하며 문무백관들의 서명을 청하자 임원애(林元愛), 이지저(李之?) 등과 함께 이에 반대하여 서명하지 않았다.
이어 김부식은 판삼사사와 정당문학(政堂文學) 수국사(修國史)를 거쳐 1132년에는 수사공(守司空) 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오르는 등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하지만 여전히 서경 천도에 대한 반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인종(仁宗)은 1134년에 서경에 순행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서경에 행차하는 것만이 재앙을 피하는 길이라는 묘청 등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 김부식은 "올 여름에 벼락이 건룡전(乾龍殿)을 친 것은 결코 길한 징조가 아닌데, 벼락을 맞은 그곳으로 재앙을 피해 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아직 추곡을 거두지 못한 지금 행차하게 되면 반드시 벼를 밟게 될 것이니, 이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만물을 사랑하는 뜻에 어긋납니다."라며 극구 반대했다. 또 여러 간관들과 더불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리하여 인종은 마침내 서경 순행을 포기했다.
그러자 이듬해 1월, 인종이 서경 천도를 포기했다고 판단한 묘청이 조광(趙匡), 유참(柳塹) 등과 더불어 서경에서 무장봉기(武裝蜂起)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인종은 김부식, 임원애 등을 불러 의논한 뒤 서경에 선유사를 파견하는 한편, 김부식을 원수(元帥)로 삼아 삼군(三軍)을 지휘하여 반란군을 토벌하도록 했다.
김부식은 서경으로 출정하기에 앞서 평소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던 정지상 등 서경파(西京派)를 제거했다. 그는 김안 등이 군사를 모아 반역을 꾀한다는 밀고를 듣고 이를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여러 재상들에게 "서경의 반란에 정지상, 김안, 백수한 등도 함께 하였으니, 먼저 이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결코 서경을 평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재상들은 진위를 알아보고자 정지상 등 세사람을 불러들였다. 이에 무심코 궁궐로 들어서던 세사람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도부수(刀斧手)들에게 피습을 당해 참살되었다. 그것은 김부식의 밀명을 받은 김정순(金情巡)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 김부식은 뒤늦게 그 사실을 인종에게 알렸다.
만약 정지상과 김안 등이 김부식의 주장대로 역모를 계획했다면 이미 토벌군이 꾸려진 마당에 군사들의 호위도 받지 않은 채 궁궐에 들어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서경 봉기와 무관했기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재상들의 부름에 응했던 것이다. 게다가 백수한은 아들 백청을 통해 "서경에서 봉기가 벌어졌으니 빨리 몸을 빼어 오라."는 친구의 서신을 인종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김부식이 서둘러 정지상 등을 죽인 것은 두가지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번째는 인종이 변심할 것에 대한 우려에서였다. 즉, 김부식은 자신이 토벌군을 이끌고 떠난 뒤 인종이 김안, 정지상, 백수한 등에게 설득당해 마음을 바꾸어 토벌 대신 서경 천도를 감행할까 염려했던 것이다.
두번째는 당시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자신의 문적(文敵), 정지상을 제거함으로써 당대 최고의 문장가가 되고자 했던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다. 김부식에 의해 정지상이 목숨을 잃은 뒤 "김부식은 본래 정지상에 대하여 문자 관계로 불만을 품고 있던 바 반역을 핑계로 정지상을 죽인 것"이라는 사람들의 얘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김부식이 정지상에 대해 가졌던 열등감은 다음의 일화들이 잘 말해준다.
어느날 시회(詩會)에 참석한 정지상이 특유의 문장으로 주위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김부식 또한 그 자리에 빠질 리 없었다. 정지상이 그 날 자신이 지은 시를 읊자 그 자리에 있던 김부식이 말했다.
"그 시가 참으로 절묘하니 나에게 주지 않겠나? 한번 대구(對句)를 맞춰보고 싶은데..."
"그러면 봄날의 흐드러진 산천경개를 한번 읊어보시지요. 제 맘에 들면 대감께 이 시를 드리겠습니다."
정지상은 김부식에게 이와 같이 제의하며 "푸를 녹(綠)" 하고 운을 뗐다. 그러자 김부식은 "버들은 천개의 가지로 푸르고(柳色千絲綠)" 하고 읊었다. 이번에는 정지상이 "붉을 홍(紅)" 하고 운을 떼자, 김부식은 "도화는 만개의 꽃으로 붉다.(桃花萬點紅)" 라고 읊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정지상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지상의 입에서는 뜻밖에도 핀잔의 말이 흘러나왔다.
"천개의 가지와 만개의 꽃을 대체 누가 셀 수 있단 말입니까? 차라리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버들은 가지마다 푸르고 도화는 점점이 붉다(柳色絲絲綠桃花點點紅)'고 말입니다."
정지상은 김부식의 비위를 긁어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미 다섯살 때 시를 지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지은 '송인(送人)'은 오늘날에도 찬탄 속에 회자될 만큼 뛰어난 시적 재능을 타고난 정지상의 눈에 김부식의 시는 한낱 말장난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김부식은 정지상에 대해 마음 한구석에 원한을 품게 되었다. 자신의 관직과 비교하면 말단이나 다름없는 정지상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같은 수모를 안겨주었으니, 김부식으로서는 그 날 겪었던 일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이런 얘기도 ?L다. 김부식과 정지상은 한때 뛰어난 문장으로 어깨를 나란히 했는데, 두사람은 사이가 몹시 나빠 만나기만 하면 싸웠다고 전한다. 그러던 어느날 정지상이 "숲 속 절간의 독경 소리 끝나고, 하늘은 유리처럼 맑도다(琳宮梵語罷天色淨琉璃)"라는 시구를 지었다. 우연히 그 시구를 보고 감탄한 김부식이 그 시구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지은 이를 찾고 보니 바로 정지상이었다. 김부식은 정지상을 찾아가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그 시구를 달라고 사정했으나 정지상은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김부식은 정지상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화들은 정지상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 그것을 안타까워한 사람들이 그의 천재적 문재(文材)를 화제 삼아 얘기했고, 그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는 과정 속에서 과장되고 부풀려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지상은 정치에 있어서나 문장에 있어서나 김부식의 최고 라이벌이었다. 관직에 있어서는 개경에 기반을 둔 김부식이 서경 출신의 정지상보다 한발 앞서 나갔으나, 문장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문재를 가진 정지상이 김부식보다 한발 앞섰다. 두사람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며 끝까지 대립했고, 이것은 결국 정지상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 서경의 봉기를 진압하여 권세를 쥐다.
마침내 김부식은 천보전에서 인종의 황명과 함께 부월(斧鉞)을 하사받고 서경을 향해 출발했다. 김부식이 금교역에 이르렀을 때 병사들이 서경의 첩자 전원직을 붙잡아왔다. 김부식은 그의 결박을 풀어주며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이미 대군이 출발했으니 스스로 죄를 뉘우치고 귀순하는 자는 생명을 보전할 것이라고 고하라" 며 돌려보냈다. 그러는 한편 반란군이 방비를 튼튼히 하기 전에 속전속결할 것을 주장하는 막료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천천히 진군하며 모든 성에 격문을 돌려 사람들을 회유하고 군리를 보내 서경의 백성들을 타일렀다.
이때 서경성 안에서는 뜻밖의 변고가 일어났다. 평주판관 김순부(金順夫)가 가지고 온 조서를 보고 배반을 결심한 조광이 심복들을 시켜 묘청과 유참을 죽이도록 한 뒤 윤첨 등을 시켜 김순부와 함께 조정에 항복을 알리게 했다. 이에 김부식은 녹사 백록진(白祿震)을 개경에 보내 인종에게 그 사실을 아뢰고, 양부에 글을 보내 윤첨 등을 너그럽게 대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재상 문공인(文公仁), 최유, 한유충(韓兪忠)은 백록진에게 "너의 원수는 바로 개경으로 나아가지 않고 우회하여 안북부로 나아갔으므로 우리가 사람을 시켜 조서를 보내 회유하자 이에 반란군이 항복해 온 것이다. 너희 원수의 공이 아니거늘 네가 오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고 말했다. 또한 양부가 김부식의 의견에 따르지 않고 윤첨 등에게 칼을 씌워 하옥시키기를 청하고, 대간 또한 이들을 극형에 처하기를 청했다.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채 초조하게 조정의 조치를 기다리고 있던 조광은 윤첨 등이 하옥된 사실을 전해 듣고는 자신의 목숨 또한 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다시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인종은 황문상(黃文相) 등을 윤첨과 함께 보내 이를 무마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반역을 결심한 서경 세력은 조서를 가지고 온 황문상과 윤첨 등을 죽이고는 성문을 닫아 걸고 나오지 않았다.
이에 김부식은 토벌군을 이끌고 서경을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서경의 지세로 보아 쉽게 함락시키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김부식은 서경을 포위한 채 기회를 엿보았다. 막료들이 속전속결을 주장하고 나섰지만, 김부식은 "성안에 군량이 남아 있고 인심이 굳으니 쳐도 이기기가 어렵다. 어찌 싸움을 재촉하여 많은 목숨들이 희생하기를 바라는가?" 라며 막료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싸움을 장기전(長期戰)으로 이끌었다.
이듬해 1136년 2월, 드디어 성을 함락시킬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김부식은 일제히 돌격을 명하여 치열한 접전(接戰) 끝에 간신히 서경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1135년 1월 무장 봉기로 시작하여 반란으로 이어진 묘청(妙淸)의 서경천도운동(西京遷都運動)은 1년 2개월만에 진압되었고, 그 결과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 세력이 득세하게 되었다.
서경의 반란군을 진압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종은 김부식에게 의복, 안마, 금띠 등의 상품을 하사하고, 이어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봉하고 검교태보수태위(檢校太保守太尉)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감수국사(監修國史) 상주국태자태보(上柱國太子太保)에 제수하였다. 이어 김부식이 개경으로 돌아오자 아주 좋은 집 한채를 하사했다.
이로써 인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게 된 김부식은 이를 계기로 반대파 제거에 나섰다. 김부식은 먼저 한유충과 윤언이(尹彦?)를 탄핵했다.
"추밀원부사 한유충은 국가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고 군사에 관한 일을 번번이 막았으며, 보문각직학사 윤언이는 정지상과 깊은 정을 맺었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 일로 한유충은 충주목사로, 윤언이는 안주방어사로 좌천되고 말았다. 이때 김부식이 서경 반란군 토벌작전에 참가하여 공훈(功勳)을 세운 윤언이를 정지상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를 들어 탄핵한 것은, 그가 서경파와 같이 ?芙ざ? 정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지난날 여진족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던 윤관의 아들인 윤언이가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서경 천도와 금나라 정벌을 주장한 서경파의 노선과 일치했던 것이다.
김부식이 이렇듯 윤언이를 탄핵한 데에는 단순히 정지상과의 친분관계를 떠나 두사람간의 사적인 원한이 크게 작용했다. 예전에 김부식은 윤관이 황명을 받아 쓴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훈적비문(勳積碑文)을 사전에 양해도 구하지 않고 고친 적이 있었다. 이에 김부식에 대한 복수를 단단히 벼르고 있던 윤언이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국자감(國子監)에 행차한 인종이 김부식에게 주역(周易)을 강의하게 하고, 윤언이로 하여금 질문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주역에 관한 한 최고 권위를 자랑하고 있던 윤언이는 김부식이 대답하기가 어려워 땀을 흘렸을 정도로 날카로운 질문을 퍼부어 김부식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이로 인해 두사람 사이의 원한은 더욱 깊어졌고 결국 윤언이는 김부식의 탄핵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듯 김부식은 자신과 뜻이 맞지 않거나 사적인 원한이 있으면 가차없이 탄핵하여 좌천시켰다.
인종(仁宗) 재위 16년(서기 1138년), 검교태사 집현전대학사 태자대사에 오른 김부식은 4년 뒤 세번이나 표문을 올려 사직을 청한 끝에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이때 인종은 "경은 비록 늙었으나 크게 의논할 바가 있으면 마땅히 불러들여 의견을 물을 것"이라는 조서와 함께 동덕찬화공신(同德贊化功臣)의 작호를 더해주었다. 사임하고 나서도 김부식은 여전히 공신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다.
1145년 12월, 김부식은 마침내 삼국사기를 완성했다. 오늘날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책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그에 따른 비판 또한 만만치 않다. 그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곳곳에 드러난 김부식의 편협한 사고방식과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사대주의적 입장 때문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을 처음으로 하나의 완성된 국가로 본 점, 역사 서술을 현실 비판의 도구로 사용한 점, 지도층의 내분과 백성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최후를 역사의 필연으로 기술한 점, 각국의 기사에서 그 나라를 1인칭으로 표현했다는 점 등등 긍정적인 면이 많음에도 삼국사기가 비판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사대주의적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김부식의 사대주의적 사관은 삼국사기 곳곳에 나타나는데, 그는 신라가 사대를 하는 나라로서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한 것은 옳지 않고, 고구려가 멸망한 원인은 중원 왕조인 당나라에 대한 불손한 태도 때문이며, 백제 또한 전쟁을 일삼아 대국에 거짓말을 하는 죄를 지었다고 평함으로써 사대주의적 입장에 입각하여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둘째,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의해 우리 고유의 전통 문화를 배제하고 있다. 철저하게 유교적 사관에 입각하여 쓰여진 삼국사기는 우리의 전통 문화를 빈곤하게 만들고 축소시켰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는 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 명칭만 언급하고 있을 뿐 향가들은 수록하지 않고 있다. 즉, 우리 고대 문화의 주류인 불교 문화에 대해서는 일체 고려하지 않고, 다만 중국의 고전과 고사를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박학을 과시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화랑의 경우에는 이를 유교적 성격에 맞게 바꾸어 놓기까지 했다.
셋째, 삼국에 대한 역사 기록의 형평성이다. 삼국사기의 구성을 살펴보면 본기(本紀)의 경우 신라가 12권, 고구려가 10권, 백제가 6권으로 삼국에 대한 기사가 엇비슷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지(志)에 대해서는 신라의 것이 월등하고 열전(列傳) 또한 신라에 편중되어 있다. 물론 김부식이 신라 왕실의 후예이고,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함으로써 좀더 긴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신라의 문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배려해야 했다.
이렇듯 삼국사기에 나타난 김부식의 사대주의적 입장은 훗날 신채호(申采浩) 등의 민족사학자들로부터 민족의 주체성을 손상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이후 삼국사기로부터 시작된 이와 같은 중국 중심의 유교적 사관이 역사학을 주름잡게 되었다.
하지만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한 공로로 인종의 치하와 함께 꽃과 술을 후하게 하사받았다. 그 뒤 김부식은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의종(毅宗)으로부터 낙랑군개국후(樂浪郡開國候)에 책봉되어 식읍 1천호 등을 하사받았으며, 황명을 받아 인종실록(仁宗實錄)을 편찬하기도 했다.
이렇듯 묘청의 반란을 계기로 권력을 한손에 쥐고 부귀영화를 누리던 김부식은 1151년 일흔일곱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은 김부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용모가 풍만하고 체구가 컸으며 안색은 검고 눈은 빛났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크게 떨쳤다. 송나라 사신 노윤적(路允迪)이 왔을 때에 김부식이 접대관으로 나갔는데, 사신 중 한사람인 서긍(徐兢)이 김부식이 글을 잘 짓고 고금에 통달함을 보고 그 사람됨을 좋아하여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김부식에 대한 소개를 싣고 돌아가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다. 뒤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니 이르는 곳마다 예로써 대하였고, 세번 예부시(禮部試)를 주관하여 인재를 얻었다는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김부식이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서경 세력의 자주 국가 건설 주장을 묵살했으며, 우리의 고대사 또한 사대주의적 입장에서 크게 축소시켰다는 비난을 면할 수는 없다. 김부식은 죽은 후 중서령(中書令)을 추증받고 문열(文烈)이라는 시호와 함께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년
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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