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9월 9일, 평양의 남산 정부병원 2층 11호실. 조소앙(趙素昻)이 그의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병실에는 6.25 동란 때에 함께 납북되었던 안재홍(安在鴻), 윤기섭(尹琦燮), 최동오(崔東旿) 등의 동지들이 모여 있었다. 조소앙은 이들을 향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삼균주의(三均主義)의 이념과 사상을 후세에 전해주기 바라오. 조국의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나를 바쳤다고 후세에 전해주시오."
이승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자신의 말대로 조소앙은 일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하였고, 삼균주의를 창안하여 이에 기초한 민족국가 수립을 꿈꾸었던 인물이었다.
조소앙은 1887년 경기도 교하에서 세조(世祖) 때에 생육신(生六臣)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조여(趙旅)의 16대 손으로 태어났다. 7남매 중 둘째였다. 본명은 용은(鏞殷)이고, 소앙(素昻)은 그의 호이다. 맏형 조용하(趙鏞廈)를 포함한 6남매와 2세들까지 합쳐, 모두 11명이 독립운동가 포상을 받았다. 그의 집안은 이시영(李始榮)의 집안과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꼽히고 있다.
조소앙은 일본 유학 시절, 조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침탈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었다. 그는 성균관을 거쳐 1904년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 1912년에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이 시기는 그가 전통학문과 신학문을 겸비한 청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시기이기도 했다.
일제가 한반도를 자국의 식민지로 삼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는 강한 민족의식과 국권회복 의지를 불태웠다. 공수학회(共修學會),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 등의 단체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항거하거나, 한국 강점 음모를 폭로하는 등 반일운동(反日運動)을 주도하였고 안재홍과 함께 상해 망명을 시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조소앙은 마침내 1913년에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는 신규식(申圭植),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등이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조소앙은 이에 가담하였다. 1917년에 이들과 함께 국내와 독립운동가들이 대동단결하여 민족의 대표기구를 세우자는 취지의 대동단결 선언을 기초 작성, 14명 명의로 발표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수립을 최초로 제창한 선언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대동단결은 쉽지 않았다. 조소앙은 만주 지역의 민족지도자들과 이 문제를 협의하기로 하고 길림에서 김동삼(金東三), 김혁(金赫),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19년 2월에는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를 김교헌(金敎獻), 여준(呂準) 등 국외 독립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발표하였다. 무력혈전(武力血戰)을 통해 일제의 침략 세력을 우리 땅에서 몰아내고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자는 내용의 이 선언서는 조소앙이 기초 작성한 것이었고, 2.8 독립선언서,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와 더불어 3대 독립선언서로 평가되고 있다.
1919년 3.1 반일시위(反日示威)가 벌어지자, 조소앙(趙素昻)은 만주 지역 대표로 상해에 갔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서였다. 상해에는 각 지역의 대표자들이 모였고, 4월 10일 대표 29명이 참가하여 회의를 개최하였다. 조소앙은 회의의 명칭을 임시의정원으로 할 것을 제의하였고 그대로 결정되었다. 의정원을 구성한 후 여기서 정부가 구성되고,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이 공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임시정부의 헌법인 임시헌장과 임시 의정원법을 기초하는 등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조소앙은 8.15 해방 때까지 임시정부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초대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된 이래 임시의정원 의장, 국무위원을 비롯해 다섯 차례에 걸쳐 외무총장을 맡으며 임시정부를 이끌었고, 특히 임시정부의 대표적 이론가이자 사상가로서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 5월 조소앙은 유럽으로 떠났다.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프랑스로 이동한 김규식(金奎植)을 후원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조소앙은 이 회의에서 임시정부의 성립과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한국 독립 승인요구서'를 제출하였고, 1919년 8월 9일 참가한 25개국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이어 1920년 로테르담에서 개최된 제2회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에도 참석하여 한국 문제를 국제연맹에 제출한다는 '한국 독립 문제 실행 요구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국제회의에서 최초로 한국 독립 문제를 승인받은 쾌거이자 외교적 성과였다.
이후 조소앙은 영국을 비롯하여 덴마크, 리투아니아, 벨기에, 에스토니아 등 유럽 각국을 순방하였다. 영국에서는 노동당의 헨더슨, 맥도널드 등을 만났다. 1920년 11월에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로 갔다. 여기서 혁명기념대회에 침석하여 연설을 하기도 했고, 8개국 25인의 대표로 구성된 시찰단에 참가하여 러시아 각지를 돌아볼 기회도 가졌다. 유럽의 사회주의와 혁명 직후 러시아의 실정을 직접 살펴본 것이다.
조소앙은 1921년에 상해로 귀환, 임시정부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전선은 독립운동 방법론과 이념적 차이 등의 요인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고, 독립운동 세력은 좌우로 분열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고, 이어 유일당 촉성운동이 일어났다. 유일당 촉성운동은 전민족이 대동단결한 민족정당을 조직하자는 것이었다. 조소앙은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공통된 이념과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1928년경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창안하였다. 하지만 유일당 촉성운동은 결렬되고 말았다.
유일당 촉성운동이 결렬되자 그는 1930년 1월에 김구(金九), 안창호(安昌浩) 등과 더불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하는 기초 세력이었고, 임시정부와는 표리일체의 관계를 이루는 정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의 정치이념으로 삼균주의가 채택, 수용되었다. 삼균주의가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정치적 이념이자 독립운동의 목표가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삼균주의는 다른 독립운동 단체들에게도 수용되어 갔다. 김구가 이끄는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비롯한 우익 진영의 정당들은 물론이고, 좌익 진영인 김원봉(金元鳳)의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의 정치이념도 이와 흡사했다. 삼균주의가 좌우익 진영의 공통된 정치이념이 된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조소앙은 삼균주의를 기본골격으로 한 민족국가 건설계획을 수립,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작성하였다. 삼균주의는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하여 전민족 최대 다수의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 균등사회 건설을 핵심내용으로 한 정치사상이다. 건국강령은 임시정부 국무회의를 통과, 1941년 11월 임시정부의 광복 후 민족국가 건설계획으로 공포되었다.
해방 이후 조소앙(趙素昻)은 1945년 12월 임시정부 요인들과 더불어 귀국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독립된 조국이 아니었다. 김구,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하려 하였지만 미국 군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조소앙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학생동맹과 청년동맹을 결성하여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보급, 실현시키고자 했다.
1947년 북한 지역의 소비에트화가 진행되면서 조국이 분단될 판이었다. 조소앙은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통일국가 수립을 추진해 갔다. 그리고 1948년 4월 그는 남북협상안 7개조를 발표하고,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으로 가 남북협상에 참석하였다. 민족의 분단을 저지하고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렇지만 남북에는 개별정권이 성립되었고, 민족은 분단되고 말았다.
1948년 12월 조소앙은 조선사회당(朝鮮社會黨)을 창당하였다. 삼균주의라는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1950년 5월 30일 서울 성북구에서 선거에 출마, 경무부장을 지낸 조병옥(趙炳玉)과 경합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곧 6.25 동란이 터졌고, 9월에 그는 납북되었다. 1989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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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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