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는 만주와 시베리아의 독립운동 기지를 돌아본 후 부산에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경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고, 신문사 중외일보(中外日報)를 운영하며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그는 만주로 망명, 발해농장(渤海農場)과 발해학교(渤海學敎)를 설립, 교민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민족교육을 실시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안희제는 만주와 중국 관내에서 벌어지는 무장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려는 노력을 가장 활발하게 펼쳤던 애국지사였다. 그는 경상남도 의령 사람으로 1885년에 출생하였다.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던 그는 1905년 서울에 올라와 이용익(李容翊)이 설립한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였고, 다음해에는 양정의숙으로 전학하여 24세 때에 졸업하였다. 그의 학창시절은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황제 고종(高宗)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는 등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침탈당하는 시기였다.
조국의 국권이 침탈당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는 강한 민족의식과 국권 회복에 대한 의지를 갖게 되었다. 양정의숙에 재학중이던 1907년에 영남 지역 출신의 동지들과 더불어 교남학우회(嶠南學友會)를 조직,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에 뛰어들었다.
안희제의 활동은 그의 고향에서 시작되었다. 학업을 마치자마자 고향으로 내려간 그는 영남 각지를 돌아다니며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일제의 침략과 국권회복운동(國權恢復運動)의 실상을 고향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민중 계몽운동(民衆啓蒙運動)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는 부산에 구명학교와 고향인 의령에 의신학교, 창남학교를 설립하였다. 학교 설립은 당시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던 계몽운동의 주요한 활동의 하나로서, 교육을 통해 국민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한 교육구국사업(敎育救國事業)이었다.
1909년 10월에는 서상일(徐相日), 남형우(南亨祐), 윤세복(尹世復) 등과 더불어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을 조직해 국권회복운동(國權恢復運動)을 펼쳤다. 단원들은 경상도 지역의 청년 지사들이 중심이었고, 김동삼(金東三), 신채호(申采浩) 등 신민회(新民會) 회원드로 참여하고 있었다. 안희제는 남형우에 이어 두번째 단장을 맡아 교육을 통한 인재 육성과 무력 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을 위한 군자금 마련, 그리고 국외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영남 지역의 독립운동에 선구를 이룬 것으로 이후 달성친목회와 조선국권회복단 등으로 발전, 계승되어 갔다.
경술병합(庚戌倂合) 후 만주로 건너간 안희제(安熙濟)는 안창호(安昌浩), 신채호(申采浩), 이갑(李甲) 등을 만나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면서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14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안희제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할 방편으로 자신의 전답을 팔아 기금을 마련해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곡물, 면포, 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도매상으로 출발하였다. 안희제는 백산상회의 규모를 확장시켜 갔고, 1918년에는 최준(崔俊), 윤태현(尹泰賢) 등 11명으로부터 자본금을 출자받아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로 확대, 개편하였다.
부산에 사무실을 둔 이 회사는 표면적으로는 무역회사였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 자금 마련 및 항일투쟁(抗日鬪爭) 비밀 공작원의 연락거점 역할을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동지인 박상진(朴尙鎭)과 서상일(徐相日)도 같은 목적을 갖고,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와 태궁상점(太弓商店)을 설립하였다.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는 이 지역 최대 규모의 기업으로 발전해 갔다.
안희제는 이를 기반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국내외 독립운동가들과 연락망을 구축하였다. 그는 회사의 실질적인 경영보다는 국외 독립운동가들과의 연락과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데 온 정력을 쏟았다. 이를 위해 서울, 인천, 원산 등지를 비롯하여 만주 지역의 안동, 봉천, 길림 등지에 연락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3.1 운동 직후 동지인 남형우가 상해로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초대 법무차장이 되었다. 안희제는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기 시작하였고, 회사를 임시정부의 연락 거점으로 삼았다. 임시정부에서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통해 국내와의 연계를 도모하였는데, 중국 안동의 이륭양행(怡隆洋行)과 더불어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연락 거점이 되었다. 안희제는 이러한 연락망을 통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받아 이를 국내에 보급하여 임시정부의 존재와 활동을 국내에 알렸다.
이와 함께 그는 1919년 11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고, 애국 청년들을 외국으로 유학시키는 일을 추진하였다.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매년 10명씩의 유학생을 선발했는데 전진한(錢鎭漢), 안호상(安浩相), 이극로(李克魯) 등을 독일과 영국으로 유학보냈다. 그리고 1929년에는 운영난에 빠진 중외일보(中外日報)를 인수하여 그는 사장으로 신문사를 경영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난하는 논설을 싣는 한편, 약소 민족의 독립운동을 소개하는 방법으로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부당함을 주장하고, 조선 민족의 자주의식을 고취시킨 반일논조(反日論調)로 인해 중외일보(中外日報)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받게 되었다. 1931년에는 중외일보를 중앙일보(中央日報)로 개칭하고 그는 고문으로 신문사 운영에 관여하였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순조롭지 못했다. 반일언론운동(反日言論運動)으로 인해 그는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피할 수 없게 되었고,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도 1928년 재정난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결국 안희제는 1933년에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고대 제국 발해(渤海)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에 정착한 그는 이곳에 토지를 구입하고, 발해농장(渤海農場) 설립을 추진하였다. 발해농장에는 한국인 소작농 3백여호를 이주시켜 이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새로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한 것이었다. 농장의 설립과 함께 그는 발해학교(渤海學敎)를 세워 자신이 교장을 맡아 교민 2세들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는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34년 대종교(大倧敎) 총본사가 만주의 동경성으로 옮겨오자, 안희제는 대종교에 관여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당시 대종교 교주인 윤세복(尹世復)은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서 함께 활동하던 동지였고, 그 자신도 이미 1911년 대종교에 입교했었다. 그는 대종교의 참교(參敎), 지교(知敎), 상교(尙敎) 등 간부로 활동하면서 대종교 서적 간행회 회장을 맡아 민족 교유의 종교를 통한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다. 1937년 12월부터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金九)의 특명을 맡아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하는 3인조 첩보조직을 운영하기도 했다.
동경성을 근거로 대종교가 교세(敎勢)를 확장하고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 세력으로 발전해 가자 일제는 1942년 11월 국내외 대종교 간부 21명을 체포, 박해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임오교변(壬午敎變)이다. 이때 안희제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목단강의 경무청에 수감되었다. 안희제를 비롯한 대종교 지도자들은 만주의 액하감옥에서 전기고문을 비롯해 온갖 잔인하고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항일정신을 굽히지 않았으나, 결국 고문의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는 1943년 8월 3일에 숨을 거두었다.
임오교변(壬午敎變) 때에 일제의 탄압으로 순국한 권상익(權相益)·이정(李楨)·안희제(安熙濟)·나정련(羅正練)·김서종(金書鍾)·강철구(姜?求)·오근태(吳根泰)·나정문(羅正紋)·이창언(李昌彦)·이재유(李在?) 10명을 임오순국십현(壬午殉國十賢)이라 부른다. 당시 일본 헌병들이 액하감옥에서 고문받다가 죽은 사람들을 소 달구지에 실어서 끌어내서 매장도 하지 않고 그냥 거리에 내다 버리면 수십마리의 까마귀들이 날아와 그 시체들을 파먹는 모습이 만주 지역의 주민들에게 자주 목격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안희제가 항일 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년
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역사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70.무장 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의 선봉장 김좌진(金佐鎭) (0) | 2010.01.26 |
---|---|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71.민족주의 사학의 지표 제시한 훌륭한 학자 박은식(朴殷植) (0) | 2010.01.26 |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73.삼균주의(三均主義) 창안한 정치사상가 조소앙(趙素昻) (0) | 2010.01.26 |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74.만주 대일항전(對日抗戰) 연전연승(連戰連勝)의 신화를 남긴 양세봉(梁世奉) (0) | 2010.01.26 |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75.도쿄에서 일본 국왕에게 폭탄을 투척한 순국열사 이봉창(李奉昌) (0) | 2010.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