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白岩) 박은식(朴殷植)은 한국통사(韓國痛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하여 민족주의 사학의 지표를 제시한 역사학자이다. 또 1911년 해외로 망명하여 1912년 해외항일독립운동(海外抗日獨立運動)의 발판이 된 동제사(同濟社)의 총재를 역임하고, 192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분열과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물러난 이승만(李承晩)에 이어 대통령에 추대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또한 대한제국 말기 반일언론운동(反日言論運動)의 선봉인 황성신문(皇城新聞)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그리고 독립운동의 이념과 주지를 밝힌 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와 한족공보(韓族公報), 그밖에 중국 언론인 향강(香岡), 국시일보(國時日報) 등의 주필과 사장을 역임한 언론인이다.
젊어서는 주자학을 전수하여 서북 제일의 유학자로 추앙되어 성균관(成均館)의 후신인 경학원(經學院) 강사로 초빙되었을 뿐만 아니라 양명학(陽明學)에 정진하여 왕양명실기(王陽明實紀) 등을 저술, 주자학 절대의 근대 유학사상에 양명학을 발전시켜 근대 과학기술문명 수용에 터전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박은식은 한국 근대사의 격랑 속에서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중요한 좌표를 점하고 있는 거인이다.
해방 후 국내외에 더러 흩어져 없어진 한국통사를 비롯한 여러 저술들을 모아 1975년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로 간행되었고, 이어 현재까지 안중근전(安重根傳) 등에 빠져있던 중요 저술들이 계속 발굴되어 그의 애국적 업적의 중요성을 실증하고 있다.
박은식은 1859년 황해도 황주에서 서당 훈장 박용호의 아들로 태어나 1925년 망명지 상해에서 서거하였다. 그의 생애는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 해당하는 제1기는 청, 장년기로 향리에서 나서 자랐고, 조선시대 전통학문인 유학에 전심, 그의 명성하에 원근(遠近)에서 많은 유학자가 모여드는 등 칭송을 받았다. 특히 화서학파(華西學派)의 박문일, 문오 형제에게서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전수받았으며 주자학에 심취하여 주자의 영정을 서실에 걸어놓고 매일 아침 참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약용의 제자 신기영과 정관섭을 찾아 고문학(古文學)과 다산학(茶山學)을 섭렵하는 등 실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897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제국 시기에 해당되던 제2기에는 상경하여 중앙에서 신 문명을 수용하면서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에 헌신, 일제(日帝)에 의한 국권 유린의 참상을 폭로하면서 국권수호를 위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처음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도 참가, 개화혁신과 민권신장운동에도 기여하였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황성신문의 주필이 되어 언론 활동에 주력하였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그가 주필로 참여하자 그의 명성은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과 서로 쌍벽을 이루었다고 평론하고 있다. 특히 황성신문에 이어 대한매일신보에서는 더욱 격렬한 반일시사평론(反日時事評論)을 폈다.
매천야록에 '이때 신문은 수십종이 있으나 모두 아부와 영합을 일삼는 가운데 오직 대한매일신보만이 왕왕 비분의 사(辭)를 터뜨렸다.'고 하면서 '박은식은 그 필설(筆舌)을 빌어 그 울분을 피력하였다. 그의 입을 통한 화살같은 논평과 공박은 꺼리는 바가 없어 왜인들이 환(患)으로 알았다.'라고 평론하고 있다.
이 무렵 박은식은 성리학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양명학에 일가를 형성, 근대 서구문명 수용의 정신적 지주를 삼았으며, 근대 과학기술 수용에 앞장서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정립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 광문회에서 민족고전을 뒤지면서 민족혼을 찾고 민족문화 창달을 위한 저술에 전념하면서도 왕양명실기 등 양명학 관련 저술을 집필한 것이다.
박은식의 말년기에 해당하는 제3기는 그가 압록강을 넘어서 위례성(慰禮城)으로의 망명을 시작으로 태백광노(太白狂奴)란 망국민으로 자처하면서도 남북만주와 시베리아, 연해주, 중원대륙을 누비면서 풍찬노숙(風餐露宿),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에 여생을 불태웠다.
처음 고구려 옛 땅인 서간도에서는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고문헌과 사서를 연구, 대동고대사(大東古代史)와 동명왕실기(東明王實紀),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발해태조건국기(渤海太祖建國記),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등을 저술,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한국 고대사를 변박(辯駁) 시정하고 민족문화의 바른 역사를 밝히기 시작하였다.
또한 박은식은 1912년 그곳을 떠나 북경을 거쳐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던 만주와 시베리아 여러곳을 돌아다니고 상해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신규식(申圭植), 문일평(文一平) 등과 더불어 동제사를 조직하고 총재에 추대되어 국내외 독립운동의 진두에 나섰다. 한편 그는 상해에서 신규식과 함께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해 망명지에서도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더욱이 박은식은 1914년 그곳에서 민족주의 사학을 開創하는 중요 저서를 차례로 간행, 독립운동의 역사적 이념을 밝히면서 독립운동의 논리와 방법, 책략을 제시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국혼론을 제기한 한국통사를 비롯, 안중근전(安重根傳)과 이충무공전(李忠武公傳) 등이다.
후에 한국통사와 짝을 이루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1920년에 자매편으로 속간하였다. 이충무공전은 박은식 자신이 "우리 위인(偉人)의 완사(完史)가 됨"을 자부한 저술이다. 1914년에 간행된 안중근전은 창해노방실(滄海老紡室)이란, 광복을 위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는다는 숨은 뜻을 지닌 필명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최근에야 중국 길림성, 중앙아시아에서 수집되어 박은식의 저술로 고증되어 학계에 알려진 것이다.
박은식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3.1운동을 맞이하였다. 이미 나이가 환갑에 이르렀지만 항일투쟁(抗日鬪爭)에 대한 열기는 더욱 뜨거웠다. 대한인노인동맹단(大韓人老人同盟團)에 참여, 국내외 독립운동의 사기를 북돋웠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기초하고 김치보(金致寶), 박희평(朴喜坪) 등 간부 20명이 서명한 일본 정부에 보내는 경고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 노인단 독립운동 중에는 이발 등의 연해주 한국인대표의 환국, 만세시위와 같은 특이한 운동도 있었고, 남대문 역전에서의 사이토 조선총독을 저격한 강우규(姜宇奎)의 항일의거(抗日義擧)도 포함되었다.
이후 박은식은 상해로 다시 가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 활동을 주도, 독립운동의 진로를 밝혀갔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시일이 경과할수록 초기의 활발한 대내와 활동과는 달리 여러가지 역경에 빠져들고 말았다. 문화정치로 가장한 일제의 가중되는 민족운동 탄압이나 볼셰비키혁명 이래 대두된 공산주의 운동의 부상 등으로 국내외 독립운동은 이념과 방법 면에서 다같이 분열과 갈등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제에게 유리한 배경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역경을 극복하려던 국민대회마저도 결렬되어 임시정부는 보다 격심한 난맥상을 드러냈다. 임시의정원에서 1924년 6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을 물러나게 하고 분열된 독립운동 진영을 수습할 새 지도자로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은식은 1925년 여름까지 심혈을 기울여 임시정부의 활동을 시의에 맞게 조화, 추진시켰을뿐 아니라 임시정부의 헌법을 시대정신에 부합되게 개정, 대통령중심제를 국무령제로 고쳐 공포하였다. 그리고 이상룡(李相龍), 이회영(李會榮) 등 서북간도와 연해주에서 민족운동에 큰 실적을 쌓은 인물을 국무령과 국무위원으로 선임하고 국정에서 물러났다.
박은식은 독립운동의 원훈(元勳)으로 이와 같이 난국타개 방향을 제시하고 잠시 노후를 요양하였으나 그도 오래 가지 못하고 그해 11월 15일 노환으로 그가 확신하던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서거했다. 임시정부에서는 고인의 장례를 초대국장으로 치르고 그 유해를 상해 정안사 공동묘지에 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지난 1993년 8월 그의 유해는 상해 공동묘지에서 독립된 고국으로 옮겨와 국민제전으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묘역 위자리에 안장되었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년
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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