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시기에 한국 민족은 다양한 방법으로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민중의 저항이 의병항쟁(義兵抗爭)이었다. 최초에 봉기한 을미의병(乙未義兵)때부터 마지막 저항인 정미의병(丁未義兵)까지 계속 의병을 모집하여 일제에 저항한 애국지사가 바로 허위(許蔿)였다.
허위는 1855년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촌은리에서 허조(許祚)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를 계향(季響), 호를 왕산(旺山)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김해이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을 근검으로 일으켜 천석지기의 재산을 모았다. 그러나 재산의 반을 교육사업에 투자한 유학자였다. 학교를 설립하고 많은 선비를 초청하여 숙식을 제공하면서 학업을 권장하여 영남지방에서 명망있는 유학자로 유명하였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허위는 7세 때부터 큰형 허훈(許訓)에게 글을 배웠는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주변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15세 때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으며 고대천문지지(古代天文地志)와 산수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세 형은 모두 유학자로 명성을 날렸는데 맏형 허훈은 영남 유림의 거두가 되었으며 둘째 형 허신(許薪)도 학문에 재주가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셋째 형 허회(許會)는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 후 허위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에 자신의 소유 토지 3천 두락을 군자금으로 내놓기도 한 애국지사였다.
일제 침략자들이 국모(國母)인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지르자 허위는 그대로 있을 수 없다고 여겨 동지인 이은찬(李殷瓚), 조동호(曺東浩), 이기하(李基夏) 등과 더불어 1896년 3월 10일 김천 장날을 이용하여 의병을 모집했다. 먼저 금산군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을 하고 의병들을 금산과 성주 두 곳에 분산 주둔시켰다. 그리고 인근 각지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들을 모으고 부대 조직을 완료하였다. 그는 먼저 대구로 진격하고자 서둘렀으나 이 정보를 탐지한 관군이 선제 공격하여 성주의 의병부대가 패배하였고, 뒤이어 서울진위대와 공주분견소의 관군 병력에게 포위 협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그후 의병을 다시 수습하여 재기를 준비하던 중 서울에서 황제의 특사가 내려와 의병부대를 해산하라는 칙명을 전달하자 허위는 눈물을 머금고, 부득이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허탈한 마음으로 학문에 몰두하며 은거 생활을 한지 3년 뒤에 관찰사 조한국(趙汗局)이 황제의 칙서를 전하러 왔다. 그 칙서의 내용은 허위의 경륜과 포부를 전해들은 황제 고종(高宗)이 그를 조정으로 불러 크게 스고자 하려는 것이다.
처음 거부의사를 가졌던 허위(許蔿)는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려는 신념에서 마침내 벼슬길로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1899년 44세의 나이로 원구단 참봉에 제수된 이래 1904년 평리원 수석 판사를 거쳐 재판장에 올랐다.
그후 의정부 참찬에 올라 국정을 시정할 방책 10여개 조를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5년 다시 비서원승에 임용되었으나 일제(日帝)의 내정간섭을 저지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일제의 주권 침탈과 온갖 업악행위를 규탄하는 격문을 전국에 살포하였다. 이 일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석방된 뒤 관직생활을 청산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금릉군에서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던 허위는 1907년 정환직(鄭煥直), 용기(鏞基) 부자가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자 군자금 2만냥을 제공하여 격려하였다.
1907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불법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황제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등을 파견하자 일제의 최고 실권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나라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자 허위(許蔿)는 분연히 일어나 경기도 양평을 중심으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포천, 양주 철원, 연천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해산된 한국군 장병들을 의병부대에 합류시켜 의병들의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는 연기우(延基羽), 김규식(金圭植) 등의 부대와 힘을 합쳐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 동안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하나인 이완용(李完用)이 사람을 보내어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일제에 귀순하면 높은 벼슬을 주겠다고 회유하였으나 허위는 이를 거부하고 의병들의 군세 확장에 노력하였다.
이때 전국 각지에 수많은 의병들이 일어났으나 훈련 미숙과 화력의 열세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각지의 의병대장들이 모여 전국의 의병들을 한 군데로 집결시켜 총역량을 발휘하여 서울을 공격, 점령하기로 하였다.
1907년 9월 관동 창의대장 이인영(李麟榮)은 각지의 의병부대에 연락하여 11월까지 모든 의병부대를 양주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일하여 13도에서 편성된 의병부대가 양주에 집결하였는데, 이때 허위는 진동 창의대장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참가하였다.
이들 의병들은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으로 편성되었는데, 전 군사의 수효는 1만여명이었고 이중 해산된 한국군 장병들로 이루어진 창의군의 정예부대는 3천여명이었다. 총대장 이인영(李麟榮), 군사장 허위(許蔿), 호남 창의대장 문태수(文泰洙), 호서 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교남 창의대장 박정빈(朴定斌), 진동 창의대장 권의희(權意希), 관서 창의대장 방인관(方仁寬), 관북 창의대장 정봉준(鄭鳳俊) 등 이렇게 13도 창의군의 지휘부가 구성되었다.
진용을 갖추고 전투 준비를 마친 13도 창의군은 1908년 1월 서울로 진격하여 일거에 조선통감부(朝鮮統監府)를 격파하기로 하고, 각국 영사관에 통문을 보내 의병 궐기의 정당성을 밝히면서 의병부대를 국제법상 교전 단체로 인정해 줄 것과 후원을 요청하였다.
작전 개시일이 다가오자 허위는 친히 3백여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동대문으로 향하여 진격하였으나, 다른 의병부대들이 약속 시간에 당도하지 못하고 허위의 부대만이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과 교전했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배하였다.
한편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해 모든 일을 허위에게 맡기고 고향으로 내려가자 의병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그러나 허위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군사들을 독려하여 서울 진공작전을 계속 추진하였다. 일부 부대는 망우리까지 진출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창의군 선발대는 세검정을 거쳐 자하문을 돌파하려 하였다. 그러나 막강한 일본군을 당해 내기에는 의병들의 무기와 탄약이 너무 부족하였다.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의 서울 진공작전이 실패한 후 허위(許蔿)의 부대는 임진강 유역으로 철수하여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인환(曺仁煥), 권준(權俊), 왕회종(王會鍾) 등의 의병부대와 합세하였다. 이때 박종한(朴鍾漢), 김수민(金秀民), 김응두(金應斗) 등의 부대도 합류하여 의병들의 연합군이 구성되었다.
새로운 의병 연합군의 총대장으로 추대된 허위는 의병들에게 민주정의를 역설하고 새로운 정신적 단합을 호소하며 엄격한 군율을 세워 의병들의 기강을 확립하였다. 도한 독자적인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물자를 조달함으로써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강력한 일본군과 정면으로 대적하고 전술에서 신속한 기동력을 요하는 유격작전(遊擊作戰)을 사용함으로써 일본군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그러나 그해 6월 경기도 양평에서 일본군 헌병 40여명의 급습을 받고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 갇혔다. 일본군 서울 헌병대장 아카시[明石] 소장(少將)이 그를 심문했을 때, 허위(許蔿)는 "나는 이 항쟁으로 꼭 조선 반도에 주둔한 일본의 침략군을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차마 일본인과 함께 이 땅에 살 수 없어서 거의(擧義)한 것이다."라고 진술하면서 "일본이 서구 열강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하겠다는 것은 거짓말에 불과하며 실상은 속으로 한국을 멸망시킬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들이 앉아서 볼 수가 없어서 적은 힘으로나마 거병(擧兵)을 한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아카시[明石] 소장(少將)은 허위(許蔿)의 충군애국정신(忠君愛國精神)과 동양평화(東洋平和)에 대한 탁월한 경륜, 한학(漢學)과 역학(易學) 등에 대한 깊은 조예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들어 허위의 목숨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하지만 허위는 1908년 10월 21일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하였다.
1960년 대한민국 정부는 항일 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기려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서울의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의 거리 이름인 왕산로(旺山路)는 허위(許蔿)의 호를 따서 작명한 것이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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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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