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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59.영원히 씻을 수 없는 매국노의 오명(汚名) 이완용(李完用)

회기로 2010. 1. 26.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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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李完用)은 한국 역사상 매국노의 상징적 인물로 후세에까지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이지용(李址鎔), 박제순(朴齊純), 이근택(李根澤), 권중현(權重顯)과 더불어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한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에 찬성함으로써 당시 항일투사들로부터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불리우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이완용을 도와 조국의 주권과 영토를 일본에 팔아 넘기고 일본 국왕으로부터 정삼위훈일등욱일동수장(正三位勳一等旭日桐綬章)이라는 훈장을 받은 송병준(宋秉畯)이라는 인물도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부일배(附日輩)에 속한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이완용과 송병준의 역사적 발자취와 그들의 민족반역행위를 함께 고찰함으로써 구한 말 친일세력이 일본의 한국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 이후 일제(日帝)가 배후에서 조종해 성립된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연립정권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전통적인 양반가문 세력부터 나중에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까지 끌어들여 '잡탕 내각'으로 형성되었다. 그 중에서 부일배(附日輩) 세력이 김홍집 내각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는데,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에 반발해서 일어난 의병 봉기,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으로 한반도에서의 일본 세력이 잠시 약화되자 김홍집(金弘集), 정병하(鄭秉夏), 어윤중(魚允中) 등 부일(附日) 관리들은 체포령을 피해 달아나려 하다가 일반 민중에게 붙들려 살해되었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통사(韓國痛史)에는 '일본이 한국을 도모하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한국인 중에서 앞뒤를 이용할 자로 세부류를 뽑았으니 첫째는 이강(李堈), 이준용(李竣鎔) 등 황제의 近親으로 일본에 가 있는 자요, 둘째는 갑신정변(甲申政變)에 가담했던 박영효(朴泳孝)나 갑오경장(甲午更張) 당시의 여러 국사범으로 일본에 가 있는 자요, 셋째는 이른바 일진회(一進會)의 우두머리인 송병준(宋秉畯), 이용구(李容九) 등이다.'라고 씌여 있다. 여기서 이강(李堈)은 고종(高宗)의 다섯번째 아들로 의화군(義和君)을 말하는데, 일제침략기(日帝侵略期)에 전주(全州) 이씨(李氏), 특히 조선 왕실에 관계되는 인물들은 일제(日帝)의 회유와 혜택으로 적극적인 친일파로 다 돌아섰으나 자기 나름대로 지조를 지키면서 살아간 사람은 그래도 의화군(義和君)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1919년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 최익환(崔益煥) 등과 모의하여 상해(上海)의 임시정부로 망명할 것을 결정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망명을 시도했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강제로 송환되었고, 핍박도 많이 받았지만 끝까지 배일정신(排日精神)을 고수했다. 이준용(李竣鎔)은 대원군의 손자로 고종의 형인 이재면(李載冕)의 아들인데, 대단히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을사조약(乙巳條約)과 경술병합(庚戌倂合)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나는 과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파와 주화파로 갈렸을 때 주화파의 최명길(崔鳴吉) 같은 역할을 해냈다." 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변명을 늘어놓은 사람이다. 박영효(朴泳孝)는 몇차례 망명했다가 다시 들어와 결국 일제강점기에 친일파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그도 철종(哲宗)의 부마였기 때문에 왕실에 관련된 인물이었다.

앞의 두 부류는 양반가문, 왕실세력이었지만 세번째에 속하는 인물은 신진관료, 민중세력인데 이들이 일제(日帝)의 침략정책에 가장 크게 이용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이완용의 이름이 빠져 있으나 그는 송병준, 이용구와 같은 범주에 들었던 인물이었다.

● 처음에는 친미파(親美派)였던 이완용

이완용(李完用)은 1856년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우봉(牛峯) 이씨(李氏) 가문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낙생면은 백현이라고 해서 지금은 성남시로 편입된 곳이지만 그 마을 사람들도 이 사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나중에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넘긴 매국노로 민중의 지탄을 받는 대상이 되어 그의 묘와 함께 출생지, 생가가 철저하게 파괴되고 그 지방 사람들도 자기 고장의 불명예라고 해서 별로 알리지 않으려는 분위기 때문이다. 이완용의 아버지는 호석(鎬奭), 혹은 석준(奭俊)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하여튼 이 집안은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희생된 이만성(李晩成), 그리고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로 일컬어졌던 이재(李滓)의 후손으로 노론계열이었으나, 19세기에 들어와 별로 관계(官界)에 진출하지 못하고 낙백(落魄)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만성은 신임사화 때 영조(英祖)를 보호하기 위해 투쟁하다가 노론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는데, 훗날 노론이 다시 집권할 때 불천지조(不遷之祖)가 되었다. 이재는 숙부인 이만성이 정권 다툼에서 밀려 희생되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용인에 은거하면서 성리학을 공부했는데, 그가 쓴 사례편람(四禮便覽)은 노론계의 정치이념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완용은 열살 때에 판중추부사 이호준(李鎬俊)의 양자로 들어가 임오군란(壬午軍亂) 진압을 경축하기 위해 실시된 중광별시(重光別試)에 응시해 합격하였고, 주서와 대교, 수찬, 검상 등 여러 벼슬을 지내며 특진을 거듭했다. 수구파 또는 척사파의 소장으로서 개화파를 공격했던 이완용은 1886년 조정에서 육영공원을 세워 양반 자제들에게 서양의 신학문과 영어를 가르칠 때에 여기에 선발되어 교육을 받았고, 대미(對美) 전권대신 박정양(朴定陽)의 휘하에 들어가 참찬관으로서 미국에서 근무했으며 잠시 귀국했다가 1888년에 다시 주차미국대리공사(駐箚美國代理公使)로 부임했다. 미국에서 청나라를 배격하고 일본 편향적인 자세를 보였다가 청나라의 강력한 항의로 해임된 박정양을 대신하여 약 2년간 미국에서 머물던 이완용은 친미파(親美派)가 되어 귀국 후 무역관계라든가 체신관계 등 주로 개화문물과 관련되는 기관의 책임을 맡았다. 1894년 민씨정권이 타도되고 나서 일본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곧이어 외무협판이 되었다.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박정양 내각이 들어서자 학부대신이 되었고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미국 공사관으로 도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친러파[親魯派]에서 친일파(親日派)로 변신한 이완용

이완용은 이 당시 친일세력의 손아귀에 있는 국왕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빼돌리는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이범진(李範晉), 안경수(安璥壽)와 함께 일을 추진했으나, 안경수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미국, 러시아 공사관의 보호를 받으며 서울에 숨어 지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러시아 측과 일을 진행시켜 1896년 마침내 국왕과 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빼돌리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친러정권[親魯政權]이 성립되었는데, 이때 그는 학부대신과 농상공부대신 자리에 앉았고 그의 형인 이윤용(李允用)은 군부대신과 경무사를 겸했다. 친러정권은 친일내각에 있던 김홍집(金弘集), 정병하(鄭秉夏), 어윤중(魚允中) 등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들은 민중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며 유길준(兪吉浚), 장박(張博)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완용은 농상공부대신 서리로 있으면서 운산금광의 채굴권과 경인선 철도부설권을 미국에, 울릉도 등 산림벌채권을 러시아에 각각 넘겨주고 자신의 재산을 굉장히 늘리게 되어 뜻 있는 관리들과 애국지사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 해 7월에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조직되고 이어 독립문과 독립관이 건립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온건개화파들이 주동이 되어 활동했다. 이때 그는 정동구락부의 관료대표로, 창립총회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여기서 보면, 그는 이리저리 눈치를 잘 보면서 어디에 끼어야 자신의 입지와 이익에 잘 맞을까 하고 살피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립협회 초기에는 상당히 협조하는 척했지만, 독립협회가 강대국의 이권침탈과 정부 대신들의 이권개입을 규탄하는 등 차츰 정부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자, 이완용은 독립협회를 탈퇴했고 정부에서도 고문 서재필(徐載弼)을 해고하고 독립신문을 폐간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 무렵 고종(高宗)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오고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조선 반도에서 커지기 시작하자, 그는 전라북도 관찰사로 나가 있기도 하고 양부의 3년상을 치르기도 하면서 약 1년반 동안 정세의 추이를 관망하였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정한론자(征韓論者)들에 의해 소위 '대일본제국전아정복(大日本帝國全亞征服) 60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일본은 1904년 2월 영일동맹(英日同盟)을 맺고 나서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을 도발하여 조선 반도를 흡수하려는 본격적인 움직임에 돌입했다. 일본은 전쟁을 벌이면서 대한제국과 러시아 간의 국교를 단절시키고 일한협약(日韓協約)을 강제로 체결하여 고문정치를 단행했다. 드디어 이완용에게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 해 12월 이완용은 오랜 잠복기를 벗어나 궁내부 특진관으로 나가면서 친일파(親日派)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 일진회(一進會)를 발족시킨 송병준

송병준(宋秉畯)은 함경남도 장진 출신으로 조선 후기 붕당정치의 중심 인물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이완용이 친미파(親美派), 친러파(親魯派), 친일파(親日派)로 말을 갈아타며 강대국이라면 무조건 빌붙는 성격을 보인데 반해 송병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에 충성하는 지조(?)를 보였다. 그와 친척간인 송병선(宋秉璿)은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에 반대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송병순(宋秉珣)은 일제(日帝)와의 타협을 거부하며 민족교육운동(民族敎育運動)에 헌신하다가 1912년에 순국하였다. 그러나 송병준은 같은 가문 사람들인 송병선, 송?뉼? 형제와는 달리 일본의 한국 침략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반민족운동(反民族運動)에 앞장섰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북지방이나 관북지방 출신 인사들 사이에는 관계(官界)가 문란해진 틈을 타서 서울 세도가의 식객이 되어 벼슬자리 하나 얻으려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어떤 연줄을 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송병준은 민영환(閔泳煥)의 식객이 되어 1870년대 초반에 무과에 급제해서 수문장, 훈련원 판관, 오위도총부 서사,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그는 1876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때에는 접견사의 수행원으로 참여하여 일본과 첫 인연을 맺었고 일본인 거물급 군납상인인 오쿠라[大倉喜八郞]와 사귀어 부산에 상관(商館)을 열었으나 민중의 습격으로 오쿠라가 살해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부산의 상관은 군납상인과 결탁해서 열었는데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한 일본 상인들의 횡포가 심해지자 조선 상인들이 반발하여 일본인 상업장을 습격한 것으로 보인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에는 무위영(武衛營)의 군병(軍兵)들이 송병준의 집을 불태웠고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때에는 일본인 고위 관리의 아내를 구해준 일로 민중의 습격을 받아 죽을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기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는 계속 빛나는 출세이 길로 치달아 빠른 눈치로 교제 범위를 넓혀갔다.

다음해에는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고 일본에 갔다가 오히려 김옥균의 감화를 받아 그의 동지가 되었고 1886년 귀국한 이후 김옥균과 밀통했다는 죄명으로 일시 투옥되었다가 민영환의 주선으로 곧 풀려나게 된다. 그 후 왕후 민씨의 총애를 입어 흥해군수, 양지현감을 지내고 1891년에는 장위영의 영관으로 승진했다. 그러다가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민씨일파로 지목되어 그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송병준은 재빨리 몸을 피해 일본에 건너가 그곳의 명사들을 두루 사귀고 이름을 노다[野田平治郞]로 고쳐 일본인으로 행세하면서 양잠 염직기술을 익혀 일본 야마구치현에다 양잠강습소를 열었다. 이때 조선인 청년들을 모아서 양잠기술을 가르치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0여년을 일본에서 떠돌던 송병준은 1904년 당시 일본 수상인 가쓰라[桂太郞]를 만났는데, 그는 가쓰라 수상에게 줄곧 "내가 꿈꾸는 것은 일본이 아시아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며, 내가 이를 위해 공훈(功勳)을 세워 명예를 남기는 일이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하루는 가쓰라 수상이 송병준에게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할 텐데 얼마쯤 있어야 가능하겠는가?" 라고 물었더니 송병준은 곧바로 "1억엔 정도의 비용은 감수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책임지고 병합을 무난히 진행시켜 보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이때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병참감 오타니[大谷] 소장(少將)과 데라우치[寺內正毅] 주한(駐韓) 일본 공사의 통역관으로 조선에 나왔고,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군납상인으로 이권을 챙겼다. 이완용이 영어에 능숙해서 행세한 반면, 송병준은 일찍부터 일본어 구사 능력을 출세의 도구로 삼은 것이다.

이때 윤시병(尹始柄) 등이 이끄는 친일단체 유신회(維新會)가 그를 끌어들였고 일본의 회유에 넘어간 동학교도 이용구(李容九)는 진보회(進步會)라는 단체를 조직했는데, 일본 군부는 이 두단체를 통합시켜 일진회(一進會)를 만들도록 했다. 일진회가 발족하자 회장에는 이용구가 추대되었고 송병준은 평의원회 의장, 지방총대장, 그리고 기관지인 국민신보(國民新報) 대표 등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진보화와 유신회가 일진회로 합쳐지는데는 일본의 다케다[武田範之], 우치다[內田良平] 같은 승려 또는 천우협(天佑俠) 계통의 낭인들이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을미사변(乙未事變)에서 왕후 민씨를 살해하는 일에도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실제 뒤에서 송병준과 이완용을 조종하였다.

사이토 문서에 의하면 송병준은 이때 일진회를 발족시켜 일본의 국익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돈을 뜯어내는 등 갖가지 나쁜 짓을 저질렀고, 러일전쟁 때에는 농민을 강제동원해서 거액을 축재하였다고 한다. 곧 일진회 회원들이 러일전쟁에서 군량 운반 등 노역 동원을 하고 경인선 철도부설에도 노동자를 동원했는데, 이때 그가 부정행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 가부키를 하는 일본 여자를 첩으로 삼아 저동에 요리집 청화정(靑和停)을 열어 우치다 등 일본 낭인들과 일진회 간부들의 밀회장소로 활용했다고 한다. 이곳은 일본인 거류지역이 명동, 충무로 일대였기 때문에 가까워서 이용하기도 좋았을 것이다.

1904년 겨울부터 일진회는 대한제국의 내정과 외교권을 일본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러일전쟁이 끝나자 일제(日帝)는 송병준 등 일진회 무리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제 송병준이나 이용구는 다른 길을 갈래야 갈 수 없는 완전히 버려진 몸이 되었다. 즉 실제로 일본 군부는 러일전쟁에서 일진회 회원들을 이용하고, 그 다음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자 결국 두사람을 쓸모없게 취급해서 일시 소외시켰다. 이용구의 아들 이석규(李碩奎)가 쓴 '이용구의 생애'라는 전기를 보면 다케다가 이용구에게 다음과 같은 고사를 들려줬다고 씌여 있다.

"유방(劉邦)이 한나라를 세울 때 장량(張良)을 잘 이용해 먹었는데 한신(韓信)은 나중에 멋도 모르고 조정에 끼어들어 갔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지요. 그러나 장량은 벌써 알고 피해 버렸는데 원래 개는 토끼를 잡고 난 뒤에는 주인에게 잡혀서 끓여 먹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끓여 먹히는 대상이 되지 않아야 하지요."

경술병합(庚戌倂合) 이후 이용구는 일제(日帝)로부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채 상당히 소외되고 비참한 모습으로 말로를 맞았다.  

송병준은 일진회에서 활동할 적에 탈봉건적인 문제를 거론하면서 "우리는 경제적인 상업을 중시하고 서얼차별을 없애야 하며, 신분제를 타파해야 한다." 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아시아는 크게 일어나야 한다. 아시아가 힘이 부쳐 유럽에 뒤쳐지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흥아론(興亞論) 논리를 들어 일제의 한국 침략에 대한 정당성을 강조하는 일련의 대중강연을 끊임없이 벌였다. 그는 "지금 백인들이 세계를 제패하려고 하는데 황인들이 힘을 길러서 더 우세해야 한다. 동양평화를 이룩하려면 일본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 동양평화의 우선적 과제는 일본과 한국이 합방하는 일을 추진하는 것이다. 후에는 아시아의 대연방, 일한(日韓), 만몽(滿蒙)을 통합하여 연방을 만들어내서 그 연방을 기초로 중국을 굴복시키고 그 다음에 세계화로 가야 한다." 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일본 군국주의 침략자들의 전쟁 명분을 그대로 옮기고 본뜬 논리에 불과하다.

일본 극우분자들의 침략 당위성에 대한 이론은 사실 의미를 달리하는 부분이 많은데, 합방은 일단 두 나라가 동등하게 합해 연방정권과 같은 국가를 만들 수 있으나 병합은 어느 한쪽 나라가 완전히 다른쪽 나라에 병탄(倂呑)되어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 놓이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주장하는 동양평화는 한국, 중국을 비롯한 모든 아시아 국가를 일본권(日本權)에 편입시키는 정복사업(征服事業)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연방정권을 수립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논리이다.

● 이완용과 송병준의 결탁과 경계

러일전쟁이 끝난 이후 일제(日帝)의 군부가 일진회(一進會)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자 송병준, 이용구 등은 1905년 4월부터 독립관에서 계몽연설회를 여는 등 이른바 반봉건개화운동(反封建開化運動)을 벌인다. 송신유혼(宋身劉魂)이라 불리며 일진회가 일본의 한국 병탄을 위해 적극적인 움직임을 펼치고 있을 때, 이완용은 9년만에 다시 학부대신이 되어 내각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박제순(朴齊純), 권중현(權重顯) 등과 함께 완전히 적극적인 친일파(親日派)로 바뀌어 있었다. 이때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최고 실권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중대한 음모를 꾸며 서울로 들어왔다. 이토는 버려두었던 일진회를 다시 활용하려 하였고, 내각을 완전히 친일세력으로 만들어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제 체결하였다.

이토와 일본 군인들의 사주를 받은 일진회는 "대한제국은 일본의 지도와 보호를 받아야 한다. 내치도 일본에 맡겨 조선 신민(臣民)이 일본 신민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우리의 자제를 교육하여 문명의 학술로 자립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반일(反日) 노선의 정부 관료나 우국지사의 집을 습격하거나 지방 수령이나 관찰사를 파면하고 일진회 회원들을 등용하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일진회 회원들은 'A'자 휘장을 단 사냥모자를 쓰고 두루마기를 제복으로 입고 다니며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자신들은 회원 수가 100만명에 달한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알고 보면, 일진회에 가담한 사람은 1천여명에 불과했고 러일전쟁 때에는 4천여명이 동원되었는데 그것도 다 일진회 회원이라 할 수 없으며, 일반 노동자나 농민들을 강제 동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을사조약이 맺어졌을 때에는 민중의 지탄을 받게 되니까 우르르 빠져 나가기도 하는데, 먹고 살기 위해서 들어갔다가 욕을 먹으면 나오고 하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일진회를 통해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는 것에 정당성이 충분하다는 명분으로 여론을 환기시킨 이토는 내각 대신들을 일본 공사관에 불러모으고 위협, 공갈로 외교권을 이양하는 조약 체결을 강행시켰다. 이때 참여한 대부분의 대신들이 절대 불가를 약속하였는데, 이완용이 불쑥 "지난날의 모든 조약이 일방적으로 강요에 못 이겨 체결되었으며 그래서 우리 나라는 늘 그 조약의 글자 수정을 못하여 후회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새?恝? 조약은 서로 변경할 수 있도록 하면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나 한규설(韓圭卨)은 펄펄 뛰었다. 이토는 뜻대로 되지 않자 군사들을 풀어놓고 어전회의를 열었는데, 이때 이완용은 또 "오직 불가하다고만 말해서는 안된다. 조약문 중에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서 제정해야 하니 3조에 있는 통감 밑의 외교 두 글자를 명인하지 않아 훗날 폐가 있을 듯하다. 외교권은 우니 나라 실력이 충실할 적에 반환될 것이니 연한을 정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이토가 이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려 하자 이완용은 황실의 안녕 조항을 넣어 통과시키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1905년 12월 17일(양력)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가 한국은 실제적인 식민지가 되었다. 이 조약은 이토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의 주도와 일진회의 송병준, 이용구의 지원과 내각의 이완용, 이준용의 야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완용은 을사조약에 찬성한 이유에 대해 "어차피 강대국에 넘어갈 나라이니 황실을 보호하고 이 땅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손잡고 희생을 줄여야 한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 이권을 챙기는 이완용과 민중의 방화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참정대신 한규설은 유배되었고, 이토는 이완용에게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라면서 통감부 측의 촉탁 조중응(趙重應)을 법부대신으로, 일진회 고문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으로 끼워 넣으라고 지시했다. 이 두 사람은 당시의 여러가지 조건으로 봐서 절대 대신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조중응은 조선시대의 낮은 관료였고 촉탁의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송병준은 일진회 고문이나 평의회 의장을 했지만 당시에는 절대로 대신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는데 순전히 이토의 추천에 의해서 대신이 될 수 있었다. 송병준은 자신의 후원자인 민영환이 자결하자 그의 재산 5백석지기를 갈취했고 평양광업소 총재, 임시재실 및 국유재산 조사국 운영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막대한 재산을 긁어 모았다.

1907년 고종(高宗)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등 세명의 밀사를 파견했으나 실패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이토는 고종의 양위를 추진시킨다. 이때 이완용과 송병준은 칼을 차고 궁궐 안으로 들어와 고종을 위협하여 끝내 양위를 성사시켰고, 이어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넘겨주는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체결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두사람은 라이벌 관계에 있게 되지만 고종을 일본에 보내 당시 일본 국왕인 무쓰히토왕[睦仁王]에게 사죄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는 동의를 했고, 다른 대신들은 반대 또는 묵인했다.

이에 분노한 민중이 남대문 밖 약고개에 있던 이완용의 저택을 불질러 버리자 이완용은 재빨리 진고개의 집으로 피신했다. 이때 이완용은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죽은 조상을 영원히 제사지내야 한다고 모셨던, 조상들의 위패가 모조리 불타 버리는 수모를 겪는다. 자손을 잘못 둔 탓에 조상들이 완전히 욕을 당한 셈이다. 이완용과 송병준은 나중에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羅喆), 오기호(吳基鎬) 등이 조직한 결사대의 습격으로 여러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용케 살아남았다. 송병준은 이완용보다 신변을 보호하는데 더 철저했기 때문에 이미 명동성당 근처 일본인 거주지역에 집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일본인 거주지역은 외곽에서 헌병이나 경찰이 보호하고 있었고 내부의 경비도 철저했기 때문에 이완용으로서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겠지만 송병준의 집으로 가서 일시 피난을 했다. 이완용이 계속 내각의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안 내무대신, 궁내부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그리스도 교도들이 미국에 의지하여 일본의 구속을 벗어나려 한다고 떠들어댄 탓에 미국 영사의 항의를 받아 면직되었다.

1909년 송병준이 대신 자리에서 쫓겨난 뒤 일본에 건너가 새로운 발판을 마련하려 하는 와중에 이 해에 이토 히로부미가 허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맞아 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토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완용은 크게 애통해하면서 서울 장충동에서 추도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때 일진회는 '합방선언서'를 발표하고 정부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완용은 아직 시기가 이르다고 퇴짜를 놓으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비서인 이인직(李人稙)과 민영규(閔泳奎)를 시켜 원각사에서 국민대연설회를 개최했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일진회가 합방론을 정부에 바쳐 황제께 상주하기를 요구하자 이완용이 이를 물리쳤다. 이완용이 스스로 합방안을 제창코자 하였으나 일진회가 선수를 치자 이것을 질투하여 민영규 등을 꼬드겨 연설회를 개최하여 일진회의 건의를 비판하는 척 하고 병합의 공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완용은 이 해 12월에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다가 이재명(李在明) 열사의 단도에 찔렸으나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그 후 온양에서 부상 후유증을 치료하던 이완용은 데라우치가 새 통감으로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채 낫지 않은 몸을 이끌고 상경한다. 일본의 한국 강점에 기여한 공로를 일진회 쪽에 빼앗기면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데라우치는 그에게 '일한합방안'을 제시하고 내무대신 이완용, 외무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고영희,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의 동의를 손쉽게 얻어 통과시켰다. 이들은 데라우치에게 조선인 귀족을 예우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을 뿐이다.

● 일본의 한국병합에 기여한 공로를 다투는 송병준과 이완용

이때 송병준은 일본에서 새로운 공작을 벌이느라 한국병합에는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통사(韓國痛史)에는 '처음 이토가 이완용, 송병준을 끌어내어 하수인으로 삼고 이들 둘이 서로 세력을 다투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이 두사람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아첨하여 국권을 팔아 넘기기에 온갖 기술을 다 부렸기 때문에 이토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가 더욱 쉬웠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법부대신으로 들어간 조중응이 이완용과 호홉을 척척 맞추면서 나라를 일본의 침략자들에게 팔아 넘겼다. 이때 송병준은 실직하여 도쿄에 있으면서 늘 불만에 차서 이완용을 원망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데라우치는 한국병합을 결행할 계획을 세우고 이완용을 재촉하는 한편 도쿄에서 송병준이 돌아온다고 여러차례 전보가 왔다고 말했다. 이완용은 이 말을 듣고 송병준에게 공훈을 빼앗길까 두려워서 급하게 병합조약을 체결하도록 했다. 이렇듯 일본 군국주의 세력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사람을 써먹고 적당히 버리고 또 써먹고 싶으면 적당하게 등용해서 써먹고 이렇게 자꾸 돌려가면서 이용하고, 또 그들을 부추겨서 더 주구가 되게끔 하는 심리전 수법을 썼던 것이다.

일제(日帝)의 한국병합이 이루어진 후 조선인으로 일본의 귀족이 된 친일파는 62명이었다. 원래는 75명 정도에서 이 특전(?)을 주었는데, 이 작위와 은사금이 주어질 적에 어떤 사람은 거절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은사금만 받고 작위를 거절하여 62명만이 정식 귀족이 된 것이다. 일본 귀족이 될 수 있는 신분적인 조건은 거부하면서 돈만 챙긴 사람도 있었고, 또 작위가 주어질 적에는 적당히 넘어갔다가 나중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윤식(金允植)처럼 작위를 반환한 사람도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죽을 나이는 닥 쳐오는데 후대의 역사 기록을 생각하니 무섭게 느껴저서 작위를 거절했다는 소리라도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작위를 거절하고는 신문기자들에게 적당히 조선자치권 운운 하고 떠들어댄 것이다.

이때 작위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세월이 지나면서 작위를 받은 당사자나 그 아들들이 돈을 펑펑 쓰고 기생집에 드나들면서 탕진해 버리고 나중에는 품위를 지키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품위도 돈이 있어야 지킬 수 있는데 흥청망청 써대다가 결국에는 돈이 없어 품위를 지키지 못하게 되니 나중에는 이 작위로 유명무실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아무리 일제(日帝)의 보호 아래 있었다고 해도 끝까지 먹여 살리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연금이 지급되었지만, 작위를 받은 사람 중에는 성공한 경우가 많지 않았다.

이 귀족직 수여에서 이완용은 백작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후작으로 승진한다. 송병준은 자작이었다가 나중에 백작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이완용은 많은 은사금을 받았고 이어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발족되어 식민통치가 진행될 적에 고문에서 부의장을 맡게 된다. 송병준은 중추원 고문이 된다. 이 두사람은 일제강점기에도 일제(日帝)에 적극 협력하여 큰 재산을 모았고 대지주가 되었다. 이완용은 대정친목회의 고문 등 크고 작은 감투를 쓰고 활동했으며 정우회를 조직하여 정치활동을 하면서 나중에는 조선자치권 따위를 주장하기도 했다. 송병준은 대정친목회의 간부를 지내다가 조중응이 조선일보를 경영하다 실패하자 이를 인수하였으나 그도 역시 실패하였다. 그리고 3.1운동 이후에는 조선소작인상조회(朝鮮小作人相助會)를 만들어 그 자신이 대지주로서 소작쟁의를 미리 방지하거나 파괴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여기에는 그의 아들 송종헌(宋鍾憲)도 가담한다. 그는 작위를 자식에게까지 세습으로 물려주었는데 이렇게 한 예는 이완용이 아들 이항구에게 물려준 것과 송병준의 경우뿐으로, 이런 점에서 그들은 일제(日帝)로부터 작위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 상당히 성공한 예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 친일파의 최후와 그 후손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고 자국의 식민지로 삼는데 가장 크게 기여했던 매국노 이완용은 3.1 운동 이전부터 마른 기침을 자주 하는 병으로 고생했는데, 1909년 명동성당에서 이재명(李在明)의 칼에 옆구리, 어깨, 허벅지를 찔렸을때 그 중의 하나가 폐를 찔러 그 부작용으로 겨울만 되면 계속 기침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1925년이 되자 이완용은 조카에게 "나는 사세를 봐서 여기저기 붙는데,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계속 변신했다. 앞으로는 구미세력이 일어나서 미국 중심으로 번질 테니 그쪽으로 가려고 관심을 두는데 너는 과연 어떻게 되는가 잘 살펴보아라." 라고 말했다. 기회주의자인 이완용의 예상대로 훗날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하고 미국이 세계의 경찰국가로 자리잡는 새로운 국제정세가 형성되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재산을 갖고 작위와 부를 누리며 살았던 이완용은 말년에 지저분한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그의 며느리가 임씨인데 신혼을 한 그의 아들이 도쿄로 유학을 간 사이에 이완용은 며느리의 미색에 반해서 그녀와 사통하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와 아내가 간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은 "나라도 망했고 집안도 망했으니 나는 죽어야겠다." 하고는 자살했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또 이완용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자기 묘자리를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에다 잡아두었는데, 그가 죽은 뒤 그의 시체를 실은 특별열차가 강경까지 가서 거기에 묘를 썼다. 명정에는 총리대신, 학부대신 같은 직책은 하나도 쓰지 않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완용지구(李完用之柩)'라고만 새겼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철저한 친일파의 모습이다.

1999년 이이화(李利和)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이 성균관대학교에서 열린 3.1운동 80주년 기념 강연회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얘기한 바 있다.

"해방 직후에 낭산면 국민학교를 비롯한 주변의 학생들이 소풍을 갈 데가 없으니까 이완용의 묘 근처로 가곤 했습니다. 하도 넓고 소나무가 많은 데다 잔디도 깔려 있어서 아이들이 놀기가 아주 좋았거든요. 소풍 온 아이들이 묘 등에 올라가서 '이놈, 이 매국노 뒈 져라!' 하고 발을 굴러댔답니다. 죽은 사람의 묘 등에서 "뒈 져라! 뒈 져라!" 하니까 그 자리에는 잔디가 자라지 않더래요. 그 소문을 듣고 미국에 있던 이완용의 후손들과 우봉 이씨 가문 사람들이 안되겠다 싶어 묘를 파서 시체를 화장했다고 합니다.

그때 묘를 파던 일꾼이 가만히 보니까 명정을 쓴 비단은 썩지도 않고 보존되어 있더랍니다. 명정이 습기가 차지 않고 건조하지도 않은 상태로 오래 보존되는 곳이니 얼마나 좋은 묘자리겠어요? 게다가 워낙 단단하게 해놨기 때문에 명정이 썩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불태우지 않고 둘둘 말아 집어 넣어가지고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가서는 이완용의 묘에서 나온 것이라며 사라고 했더랍니다. 그래서 담당자가 가만히 생각해보고는 '그래요? 사야죠' 하고는 그때 돈 5만원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대가 아마 1960년대 말이니까 5만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죠.

5만원을 주고 산 내 키만큼 긴 명정을 박물관에 걸어두었더니 우리 나라 명문대학의 국사학과 교수로 있는 이완용의 집안사람 되는 이모씨가 왔다가 본 모양이에요. 그 사람은 박물관장이 자기 제자이니까 정년퇴직을 한 뒤에 강의하러 왔다갔다 했다지요. 관장에게 '이거 어디서 났느냐?'고 물어 얘기를 해주었더니 '그것 내게 팔게.' 하더래요. 박물관 소장품이지만 자기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떻게 해요? 그래서 팔았다는 겁니다. 그는 그것을 사와서는 서울 동승동 자기 집 뒤꼍에서 성냥불로 불태워 버렸다고 해요. 이것은 전후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 같습니다.

송병준의 묘는 어디에 있는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용구의 묘는 군사주둔지역이며 특별보호지역인 용산에 위치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송병준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의 아들 송종헌은 해방 후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 후 어떤 과정을 걸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완용의 일가는 전부 친일파로 전락하여 일제강점기에는 떵떵거리고 살았지만 오늘날 그 자손들은 이름도 내지 못하고 거의 운둔하다시피 살고 있지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완용의 증손자가 서울의 어느 회사에 다니는데 40세가 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하고 있답니다. 왜냐하면 얼굴도 잘생기고 건실한 사람인데 양심적이어서 혼담이 이루어지면 마지막 단계에 가서 꼭 자기 아내 될 사람에게 자기가 누구의 증손자라고 얘기를 했답니다. 사랑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이야기만 나오면 다 가버린다는 거예요. 듣기에도 참 비참한 모습입니다. 또 근래 들으니 지금 캐나다에 살고 있는 장증손자 이윤형씨는 8.15 해방 이후 자기 할아버지가 제대로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해 땅의 소유권이 넘어갔다고 하면서, 특히 고(故) 이병도(李丙燾) 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의 장손인 이기영씨가 서울대학교에 기증한 땅을 되찾으려고 소송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송병준의 손자들은 아마 이완용의 후손들보다 더 비참하게 숨어 살았을 것이고, 결코 드러내놓고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거울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년
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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