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족의 항일(抗日) 독립운동(獨立運動)은 1894년부터 1945년가지 약 50년 동안 펼쳐졌다. 이 말은 일제의 침략이 50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독립운동의 첫 장이 의병항쟁(義兵抗爭)이었다. 의병항쟁은 을미거의(乙未擧義), 1894년~1896년), 을사거의(乙巳擧義, 1904년~1907년), 정미거의(丁未擧義, 1907년~1909년) 등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물론 의병항쟁은 경술병합(庚戌竝合) 이후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소규모로 지속되었다. 앞의 세 시기에 걸쳐 매번 의병항쟁을 지도했던 인물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강년(李康秊)은 바로 세 시기에 걸쳐 줄기차게 항전을 벌였던 보기드문 인물이었다.
그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낙인(樂仁), 호를 운강(雲岡)이라 했다. 1858년에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면 도태리에서 이기태(李起台)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무골(武骨)로서 대장부의 기상을 갖고 무예와 병법에 조예가 깊었다고 전해진다. 1880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용앙위부사과(龍壤衛副司果)로서 선전관이 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그는 분개하여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894년 왕비 민씨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되고 이듬해에 갑오경장(甲午更張)의 일환으로 단발령(斷髮令)이 시행되자, 1896년 1월에 가산을 털어 문경가은 농암(籠巖)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마침 문경을 거쳐 상경하던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호위 순검인 이호윤(李浩允), 김인담(金仁譚)을 붙잡아 농암 장터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그들을 참살하고 효수(梟首)하였다. 김석중은 1894년 상주, 보은 일대의 동학군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워 안동부 관찰사로 임명되었다가, 강제로 단발령을 밀고나가 원성을 샀던 인물로 마침 안동 의병들에게 쫓겨 서울로 가고 있던 길이었다.
이강년은 관군의 진공을 피해 제천으로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가 그의 사문(師門)이 되고 유인석의 의병부대에서 유격대장을 맡아 문경, 평천, 수안보 등지에서 많은 전투를 치렀다. 이해 4월에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관군과 교전하다가 패배한 후, 유인석이 요동으로 가자 이강년도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유인석을 따라 3년 동안 그곳에서 지냈으며 다시 돌아와 단양 금채동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전국 곳곳에서 이에 반발하는 의병항쟁이 벌어졌다. 이강년은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경기도 일대를 누비며 애국지사들을 찾아가 재기를 권하였다. 1905년 8월에 원주에서 원용팔(元容八)이 거병할 때 그는 격려의 글을 보냈다. 그 자신도 1907년 5월에 부대를 다시 편성하고 재기하였다. 이강년은 단양 용소동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던 중 왼쪽 뺨이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1907년 8월 1일에 군대가 해산되었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부대에 가담하면서 의병항쟁은 상당히 조직적으로 변하고 전투상황도 그러했다. 부상으로 요양하던 이강년은 영춘(永春)에서 다시 거병하여 8월 제천에 무혈입성하고 원주진위대를 지휘했던 민긍호(閔肯鎬)의 부대와 합세하여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을 궤멸시키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제천을 초토화시켰다.
8월 19일에 의병대 40여개 진을 묶은 뒤, 이강년이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에 추대되었다. 23일에는 충주성을 향해 진공작전을 벌였으며 9월 7일에는 조령, 10일에는 문경 갈평, 15일에는 적성, 25일에는 단양의 영춘, 10월 6일에는 영월 지역, 22일에는 원주 싸릿재, 11월 2일에는 죽령, 15일에는 순흥, 30일에는 다시 영춘, 12월 16일에는 복상동, 12월 25일에는 영월 전동에서 각각 전투를 벌여 일본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1908년에도 이강년(李康秊)의 항일전(抗日戰)은 계속되었다. 그는 1월 6일에 화천 낭천, 3월 19일에 가평 용소동, 22일에 대청리, 28일에 포천 청계, 4월 13일에 인제 백담사, 4월 29일에는 강릉과 홍천 지역, 5월 3일에는 양양의 백사장, 6월 21일에는 제천 오미리에서 각각 전투를 벌여 수십명의 일본 군인과 헌병들을 사살하였다.
이 무렵 심삼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의 서울 진공작전이 추진되었다. 1907년 하반기부터 1908년 전반기까지 전국의 의병부대가 연합군을 이루어 서울로 진격해서 조선통감부(朝鮮統監府)를 격파하자는 작전이었다. 이인영(李麟榮)이 십삼도창의군의 총대장이 되고, 허위(許蔿)가 군사장을 맡았다. 이때 이강년은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에 임명되었다. 1908년 4월 이강년은 허위와 함께 십삼도창의군의 재기를 촉구하는 통문을 전국에 보냈다. 허위가 의병 2천여명을 거느리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군하기도 했지만,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강년의 전투 지역은 주로 강원도, 충청도, 경상북도 일대에 걸쳤다. 그의 부장으로 활약한 김상태(金尙台), 이만원(李萬源), 백남규(白南奎), 하한서(河漢瑞) 등과 그밖의 장졸들이 모두 이 지방 출신이었다. 그들은 이 지역의 지리에 밝고 또 엄격한 군율로 의병부대의 기강이 서 있어 지방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때문에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막강한 의병 세력이었다.
그리고 무관(武官)이었던 그의 경력은 장차 의병항쟁에서 크게 빛나게 되었다. 대다수의 의병대장이 양반 유생이었던 상황이라 군사(軍事)와 전술(戰術)에 무지하여 전투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강년의 경유는 전혀 달랐다. 무관(武官) 출신으로서 군사 지휘와 용병술에 월등한 기량을 보였고, 오랜 전투와 다수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의병항쟁(義兵抗爭)에서 승전(勝戰)을 많이 기록한 의병대장은 이강년(李康秊)과 함께 민긍호(閔肯鎬)와 홍범도(洪範圖)를 들 수 있는데, 민긍호는 바로 원주진위대를 지휘했던 장교 출신이요, 홍범도는 함경도 산천을 누비며 사냥으로 생계를 잇던 포수였다.
악조건 속에서도 많은 전투를 치르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던 이강년은 1908년 7월 2일 경상북도 청풍군 까치성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총격전이 벌어지던 중에 왼쪽 발목의 복숭아 뼈에 총탄을 맞고 부상을 입은 채 적병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환도(環刀)를 빼어 들고 마지막 저항을 하던 그는 결국 일본군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의병항쟁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두던 그가 주저앉는 순간이었다.
그는 수원의 일본 수비대에 구류되었다가 같은해 7월 8일에 서울의 일본군 헌병대사령부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평리원(評理院)으로 옮겨진 그는 "지금이라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천황(天皇) 폐하의 신민(臣民)이 될 생각이 없느냐?"는 재판관의 질문에 침을 뱉으며 "도적 국가의 착취를 당하는 노민(奴民)으로 사느니 차라리 대한(大韓)의 개나 돼지로 사는 것이 낫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9월 23일에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만 37세에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시작하여 50세에 순국한 것이다.
그의 두 아들 승재(承宰), 긍재(兢宰)와 그의 부하였던 권용일(權用佾)은 시신을 유언에 따라 과천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묘 아래 가매장하였다. 그가 효령대군의 19세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유언한 것 같다. 그뒤 시신은 제천 동면 장침리로 옮겨졌다. 저서에는 운강문집(雲岡文集), 운강선생창의일록(雲岡先生倡義日錄)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의병항쟁(義兵抗爭)에 헌신한 이강년(李康秊)의 공훈(功勳)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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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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