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全琫準)은 나라 전체가 극도로 부패했던 시기에 태어나 고통받는 농민의 대변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외세(外勢)의 침탈에도 강력히 저항하면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어떻게 보면 조선 말기에 발생한 많은 사건들 중 하나를 주도한 인물 정도로만 인식될 수도 있지만, 전봉준은 한국 역사에 있어서 몇 손가락 안에 꼽아야 할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는 단순히 개인적인 야망이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가 생전에 했던 말 그대로 '아무런 죄가 없는 민중을 위하여 일어선 그때까지의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봉준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일반 민중들을 역사의 주역으로 이끌어 낸 선각자였다. 다시 말해 그는 역사를 소수 권력층이 주도하는 시대에서 다수 일반 민중이 만들어 가는 시대로 전환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의 부정부패가 조선 팔도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고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였으며, "일본의 조선 침투는 다른 나라의 그것과 달라 뭔가 숨은 꿍꿍이가 있다."고 인식하여 반봉건운동(反封建運動)과 항일투쟁(抗日鬪爭)에 일찍이 앞장섰다. 이러한 넓은 시야와 뛰어난 식견은 충분히 주목할 만한 점이다.
사실 전봉준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기간은 2년 남짓에 불과하지만, 그가 남긴 파장은 시대의 흐름 자체를 변화시켜 놓았다. 그에 의해 제기된 민중운동(民衆運動)은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주권자로서의 국민의 위치를 자각시켜 주고 있다.
당시의 그 어떤 지도층보다도 백성을 사랑하고 국가의 안위를 걱정했으며 남보다 조금 더 배웠기 때문에 사회와 민중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전봉준은 비록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지만 '녹두장군'이라는 애칭으로 남아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영원히 전해지고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 농민의 대변자
전봉준(全琫準)은 1854년에 전라도 태인구 산외면 동곡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그의 이름은 '명숙'이었지만, 키가 작고 단단하게 생겨서 '녹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의 아버지인 전장혁(全長奕)은 향교장의를 지낸 향리 출신이었는데, 당시 고부군수로 있던 조병갑(趙秉甲)이 모친상을 당하여 과도한 부조금을 거둬들이자 이를 거부하다가 심하게 매를 맞아 장독으로 죽었다. 전봉준과 조병갑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전봉준은 세 마지기 정도 되는 토지를 경작하여 근근이 살았으며 주로 농민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생활했다. 가난하고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선비임을 자처하여 학문에 열중했고, 점치는 일에도 꽤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한때는 지관의 일도 했었고 의원 노릇을 겸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는 어지러운 세상으로 인해 각종 예언들이 유포되고 있었고, 백성들은 이러한 것들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원래 시대가 불안하면 사람들은 미신이나 예언 따위에 휩쓸리기 십상인데, 당시의 시대 상황 역시 각종 민란(民亂)이 끊이지 않고 외세(外勢)에 의하여 조선 땅은 세력 다툼의 현장이 되어 가던 불안한 시기였다. 전봉준의 나이 열 살 때, 철종(哲宗)이 죽고 고종(高宗)이 등극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60년 동안이나 이어졌던 안동 김씨 가문의 세도정치가 무너지긴 했지만, 이미 조선은 내부적인 부패가 너무 깊어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전봉준은 위엄 있고 당차 보이는 외모에 마음이 넓고 기개가 높았다. 그는 글을 배운 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려고 하였고, 힘없는 농민들의 대변자로서 몸을 아끼지 않았다. 갑오년(甲午年) 봉기 전 해에도 두 차례에 걸쳐 수세(水稅)절감을 요청하는 연명진정(連名陳情)에 앞장섰다가 구금되기도 했다. 이처럼 평소에도 그는 개인의 이해를 초월하여 일반 농민들의 요구를 대변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전봉준이 동학(東學)에 입교할 때의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서른 살은 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찍부터 지역의 지도자 역할을 하던 전봉준은 동학에 입교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고부 지역의 포교를 담당하는 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그는 농민 봉기를 주도하면서 동학 접주로서의 위치를 적극 활용하여 동학교도인 농민과 그렇지 않은 농민을 결합시키고, 농민군에 동학의 조직 체계를 도입하여 규율과 단결성을 유지해 내기도 하였다.
● 고부군농민봉기(古阜郡農民蜂起)
조병갑(趙秉甲)은 1892년에 고부군수(古阜郡守)로 부임하자마자 동진강 상류에 있던 멀쩡한 저수지를 보수한다면서 과중한 세금을 거두어서 자신의 주머니를 챙겼다. 또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며 황폐한 묵은 밭을 경작시키고는 약속을 어기기도 했다. 게다가 태인군수를 지냈던 자기 아버지의 송덕비(頌德碑)를 만든다는 핑계로 강제 모금까지 하는 등 철면피한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경제적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에게 갖은 죄명을 뒤집어 씌워 잡아들이고는 풀어 주는 조건으로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았다. 대동미도 규정을 훨씬 초과하여 거두고는 착복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되자 고부군 농민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군청으로 몰려가서 고통을 호소하였다. 일종의 단체 민원을 낸 셈인데, 조병갑은 이들의 요청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가두어 버렸다. 이 연명진정(連名陳情)에 앞장선 사람이 전봉준(全琫準)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합법적인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탐관오리의 악행만 더욱 극심해지자, 고부군의 농민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894년 2월 15일 새벽에 기어코 봉기를 결행했다.
이날 전봉준은 정익서(丁益序), 김도삼(金道參), 최경선(崔景善) 등과 함께 1천여명의 농민을 거느리고 고부 군청을 습격했다. 먼저 창고의 곡식을 풀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무기를 빼앗아 말목장터에 모인 뒤,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 개선을 요구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이때 조병갑은 가까스로 탈출하여 엿새 후에 전라감영으로 들어가 폭동이 일어났다고 고하고는 진압을 요청했다. 그러나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우선 조정에 민란이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조병갑을 소환한 후 용안현감(龍安縣監) 박원명(朴原銘)을 후임으로 발령하고,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核使)로 임명하여 농민들을 달래도록 조치하였다. 신임 군수 박원명이 농민들의 민원을 해결해 주는 방향으로 노력하자 농민군은 자진 해산하였고, 이에 따라 사태는 진정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의 횡포로 상황은 다시 악화되고 말았다.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농민과 동학교도에게 모두 전가시키며 주모자를 체포하겠다고 하여 다시 한번 고부군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전봉준은 악폐의 근본을 뿌리뽑지 않고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마침내 본격적인 무력항쟁(武力抗爭)에 나서게 되었다.
전봉준은 우선 근처의 동학 접주들에게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해 일제히 궐기하자는 통문(通文)을 띄웠고, 이에 각지에서 수천명의 농민과 동학교도가 호응하여 전봉준이 진을 치고 있는 고부군 백산면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백산에는 관아의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어 식량을 쉽게 조달할 수 있었고, 지형적으로도 주변은 모두 평원인데 비해 유독 백산만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다가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군사행동을 하기에 유리했다.
전봉준은 모여든 농민들을 군사조직으로 편성하여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당시 백산에 모인 인원은 약 1만 3천여명이었는데, 그들은 일반 농민과 동학교도가 대다수였지만 수령의 횡포에 불만이 많았던 각 읍의 야전들과 전국 각지의 범법자들도 끼여 있었다. 이때가 1894년 5월 4일이었다.
●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의 전개.
전봉준은 우선 다음과 같은 격문을 지어서 궐기의 당위성을 알렸다.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利)에 이르니 그 본의가 단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기 위함인데,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한다.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방백 수령 밑에 굴욕을 받는 야전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를 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또 다음과 같은 행동 강령을 제시했다.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재물을 손상하지 말 것. 둘째, 충효(忠孝)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 셋째, 일본 오랑캐를 내쫓아 성도(聖道)를 깨끗이 할 것. 넷째, 한성까지 진격하여 권귀(權貴)를 진멸할 것.'
이러한 기치를 높이 들고 백산을 나온 농민군이 고부는 물론 금구, 부안까지 진격해 들어가자, 호남 일대는 완전히 격랑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농민군은 전주까지 쳐들어갈 계획이었으나 전주에서 관군이 진압을 위해 출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부로 다시 돌아가 도교산에 진을 쳤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법성포를 비롯한 인근 각지의 향리들에게 통문을 보내 누적된 민폐를 개선하라고 요구했다. 실제 군산포와 법성포에는 일부 농민군의 공격으로 조운(漕運) 업무가 마비되기도 했다.
이렇듯 호남 일대가 농민군에 의해 장악되자 조정에서는 민원의 대상이 된 안핵사 이용태(李容泰), 균전관 김창석(金昌錫), 전운사 조필영(曺泌英)을 파면시키고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초토사(招討使)로 임명하여 진?極? 나섰다. 이때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자체 진압을 위해 5월 11일, 전라감영 소속 군졸들과 농민들의 봉기로 장사에 지장을 받아 불만이 많았던 보부상 1천 6백여명을 동원하여 농민군에 대한 토벌작전(討伐作戰)에 돌입했다.
그러나 농민군은 황토현전투(黃土峴戰鬪)에서 유인작전(誘引作戰)을 통한 기습전(奇襲戰)으로 관군 780여명을 사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동안 가급적 무력(武力) 충돌을 피했던 농민군은 관군과의 첫번째 교전에서 승리하게 되자 기세가 올라 그 날로 정읍을 점령하고 이튿날 흥덕, 고창을 석권한 후 5월 13일에는 무장까지 쳐들어갔다.
무장은 동학의 교구 중 하나인 손화중(係華仲) 포(包)의 근거지로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이 특히 심했던 곳이었다. 전봉준은 이곳에 구금되어 있던 40여명의 동학교도들을 구출한 후 병력을 고산봉에 주둔시키고는 다시 한번 봉기의 취지를 선포하였다. 그 후 17일에 영광, 20일에 함평과 무안, 22일에는 나주까지 진입해 들어감으로써, 농민군은 봉기한 지 한달 만에 전 호남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초토사 홍계훈이 인솔하는 장위영(壯衛營)의 관군 800여명은 인천에서 배를 타고 군산까지 이동한 후 닷새 만인 5월 11일에야 전주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군산에서 전주까지 이동하는 사이에 탈주자가 속출하여 전주성에 도착했을 때는 병력이 470여명으로 줄어 있었다. 이에 따라 홍계훈은 진압작전(鎭壓作戰)에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부랴부랴 증원군 파병을 요청하여 병력을 추가로 지원받기로 했다.
전주성에서 한동안 사태를 지켜보던 홍계훈(洪啓薰)은 증원군이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농민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5월 25일에는 함풍현감(咸豊縣監) 권풍식(權豊式)으로부터 남하하던 농민군이 다시 북상하여 장성으로 진출했다는 보고를 받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장성으로 출전하게 된 것이다. 결국 농민군과 진압군은 장성군 황룡촌 계곡에서 격돌하게 되었는데, 이 전투에서도 관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고 말았다.
이때 홍계훈은 관군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영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5월 27일에 증원군이 법성포를 통하여 합류했으나 장성에서 선봉부대가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더 이상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렇게 연이은 전투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전주를 향해 질풍노도(疾風怒濤)와 같이 진격하여 5월 31일에 별 저항 없이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농민군이 계속되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관군보다 지역의 지형을 잘 알고 있어 이를 잘 활용하였고 각 지역 민중에게서 절대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한 다음 날, 장성전투(長城戰鬪)에서 패배한 관군이 농민군의 뒤를 쫓아 전주에 도착하여 성 주변의 고지인 완산에 진을 치고 전주성 안으로 포격을 시도하였다. 이로 인해 성내에 큰 화재가 발생하게 되었고 마지못해 농민군은 성문을 열고 관군 진영을 향해 돌격전(突擊戰)을 감행했다. 그러나 농민군의 두차례에 걸친 반격은 관군의 집중 사격에 밀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봉기 직후부터 여러 전투마다 앞장서서 수훈(首勳)을 세웠던 김순명(金巡銘)과 동장자(童壯子)라 불리던 열네살의 소년 용사 이복용(李複用)이 관군의 총탄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전봉준이 전주에 입성하면서 전략상 유리한 고지인 완산을 점령하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전주는 조선 왕가의 본관지로서 성을 둘러싸고 있는 완산을 신성시하여 벌채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조선의 백성으로서 나라에서 신성시하는 지역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지만, 군사 전술상으로는 커다란 오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오히려 조정의 명을 받아 농민군이 기피한 완산을 거리낌없이 점령한 관군은 전략상 유리한 위치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관군은 성을 직접 공격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관군과 농민군은 한동안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양측 모두 이러한 상태로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민씨 일파가 득세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외국의 군사력을 빌리자는 홍계훈의 의견대로 청나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이에 자극받은 일본도 동시에 군대를 조선에 진출시켜 버리고 말았다. 전봉준은 자신들의 봉기가 외적의 침략 야욕에 이용되는 현실을 보고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민씨 일파가 자신들의 실정(失政)에 대해 반성하고 고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서라도 자신들의 위치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반민족적인 자세에 이를 갈았지만, 외국 군대를 국내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당면한 과제 때문에 관군 측과의 타협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군의 입장에서도 사태를 오래 끌어서 좋을 것이 없었으므로 농민군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자진 해산을 유도하였다.
● 민중이 참여하는 지방행정(地方行政)
당시 농민들이 제시한 화약(和約)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전운사(轉運使)와 균전사(均田使)를 없앨 것. 둘째,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축출할 것. 셋째, 역전(役錢)은 봄과 가을에 호(戶)당 1냥씩 배정할 것. 넷째, 미곡 밀수는 엄금할 것. 다섯째, 수령이 관할 지역의 토지를 매입하는 것을 금지할 것. 여섯째, 보부상의 폐단을 없앨 것. 일곱째, 나라의 정치를 독점하고 매관매직을 일삼는 간신들을 축출할 것. 여덟째, 어염세(魚鹽稅), 보세(洑稅), 궁방전세(宮房田稅)를 폐지할 것. 아홉째, 연호세와 환곡을 거듭 징수하지 말 것. 열째, 규정에 맞는 전세(田稅)를 징수할 것'
이에 따라 6월 10일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와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이 입회한 가운데 농민군의 총지휘관인 전봉준(全琫準)과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 사이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고 농민군은 순창, 남원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전주화약(全州和約)의 결과 전라도 53개 주에는 농민 자치기구인 집강소(執綱所)가 설치되었고, 전봉준은 금구, 원평을 근거지로 하여 전라우도를 관할하고, 김개남(金開南)은 남원에서 전라좌도를 지도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두번째 봉기 이후 집강소(執綱所)를 통하여 농민들의 대표가 지방 행정 자치에 참여한 것은 비록 전라도에 한정된 일이기는 했지만 조선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집강소에 서기, 성찰, 집사, 동몽 등의 직책을 두고 관청의 형태를 갖추어서 지방 행정을 관할하게 되자 기존의 관리들은 별 도리 없이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의 요청으로 전주 감영 안에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하여 각 지역의 집강소를 통괄하고 원활한 행정의 실행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12개 조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마련했다.
'첫째, 동학교도와 관리들은 원한 관계를 버리고 서로 협력할 것. 둘째 탐관오리는 죄목을 조사하여 엄정할 것. 셋째 횡포를 부린 부호(富豪)는 징계할 것. 넷째, 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들은 징벌할 것. 다섯째, 노비 문서는 불태워 버릴 것. 여섯째, 천인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이 머리에 쓰는 평양립(平壤笠)을 벗게 해 줄 것. 일곱째, 청상 과부의 개가를 허용할 것. 여덟째, 무명잡세(無名雜稅)는 모두 없앨 것. 아홉째, 관리 채용에 있어 지위와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열째 외적과 간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열한번째, 공사채 모두 기왕의 것은 무효로 할 것. 열두번째, 토지는 균등하게 나누어 경작하게 할 것.'
이렇게 농민군과 관청이 협조하여 유례 없는 민관(民官) 합동 행정을 시행해 나가자 봉기는 성공하고 사태는 점점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때의 정세는 조선 내부의 변화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은 1876년 개항 이후 근 20년 동안 조선에 대하여 경제적 침투를 자행하여 이즈음에 와서는 완전히 독점 이익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에서 곡물을 싸게 사서 일본으로 반출해 큰 이득을 얻지 일본 상인들에 의한 미곡 유출이 심해졌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의 곡물 가격은 자연히 폭등하였고, 다른 생필품의 가격도 오르게 되었다. 더구나 당시 일본 상인들이 곡물을 사들이는 방법은 시장에서 자유 거래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산지에서 아직 자라고 있느 상태의 벼를 미리 사들이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조선 농민들의 피해를 가중시켰으며, 특히 곡칭 지역인 전라도 일대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러한 때에 고부군은 일본 상인들이 각지에서 미곡을 수입하여 반출시키는 중간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부군에는 선박 운영을 위한 부당한 세금 부담까지 가중되었고, 일반 농민으러서는 이러한 각종 잡세도 감당하기 힘든 처지였는데, 조병갑의 부정부패까지 자세하였으니 견디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고부군에서 일어난 민란이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된 것은 균전관 김창석(金昌錫), 전운사 조필영(曺泌英)의 부정과 수탈에도 원인이 있었다. 전운 사업은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중앙으로 운반하는 일로서 전운사는 이 업무를 총괄하는 기구의 책임자였다. 조영필은 이 직위를 악용하여 규정된 세금보다도 많은 양을 추가 징수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또 김창석은 왕실이 출자하여 개간한 농지를 관리하여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책임자로서, 황무지를 새로 개간하면 3년 동안 세금을 면제해 주게 되어 있는 규정을 무시하고 세금을 부과하여 포탈하였다. 심지어 경작하고 있지 않은 토지에까지 징세하는 횡포를 자행하기도 했다.
결국 최대 곡창 지역인 전라도 일대는 조선 내부의 봉건적 모순이 극심하게 드러나고 있는데다 일본 상인의 곡물 매점 과정에 의한 피해까지 겹쳐, 그 인내가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조선에서 독점 이익을 얻고 있던 일본의 입장에서는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 인하여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면 자신들의 이익이 잠식당할 것을 우려하였다. 일본은 호시탐탐 조선에 군사적 침투를 노리던 차에 자기들에게 배타적이던 민씨 정권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하여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이자, 양국이 함께 군사 행동을 하기로 한 천진조약(天津條約)을 핑계로 자신들도 조선에 군함과 병사들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일본은 청과 협조하여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고 하면서 군대의 주둔을 기정사실화하려고 했으나, 청군 측이 "내란이 끝났으니 공동 철병하자."고 제의하여 양국 간에 긴장이 높아졌다. 일본은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을 빌미로 군사적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고, 심지어 농민들을 선동하여 소요를 일으키려는 음모도 몇 차례 꾸몄다. 일본은 조선의 내란(內亂)을 부채질하여 청나라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교,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확고히 구축하려고 한 것이다.
이에 주조일본공사(駐朝日本公使)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1894년 7월 23일에 군사들을 거느리고 궁궐에 침입한 후, 조선 국왕인 고종(高宗)을 위협하여 내정 개혁을 추진한다는 명분으로 조선 조정에 친일 내각을 구성했다. 그리고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꼭두각시로 섭정의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이틀 뒤인 7월 25일에 아산만에 정박 중이던 청나라의 군함에 대해 불시의 포격을 감행하여 마침내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일으켰다. 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조선 내정을 직접 간섭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한 후, 일본 공사의 주도 아래 조선의 모든 제도를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고쳐 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9월 15일의 평양전투(平壤戰鬪)를 고비로 청일전쟁(淸日戰爭)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청군이 물러난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다.
외세를 몰아냄으로 인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봉기의 주요 목적으로 삼았던 전봉준은 이러한 상황을 묵과할 수 없었다. 이제는 나라의 상태가 폐정개혁(弊政改革)이라는 내부 문제에만 집착할 단계를 넘어서 그 존망이 걱정되는 위급한 지경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부당한 외세의 속박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한 전봉준은 구국항일투쟁(救國抗日鬪爭)의 차원에서 다시 거병(擧兵)을 단행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10월 10일에 농민군의 재궐기에 대한 회의가 삼례에서 열렸다. 여기에서 남접(南接) 지도자들은 일제 봉기를 주장하였고 동학의 상층 간부들인 북접(北接) 지도자들은 신중론을 제기하였다. 결국 재궐기를 하기로 결정하고, 이번에는 전주에서 공주를 거쳐 한성까지 공격하는 구체적인 진격 항로까지 계획했다. 이 결과에 대해 최시형(崔時亨)을 비롯한 북접 지도부는 불만을 갖고 남접을 비판했으나, 북접 근거지인 충청도에서도 관군이 무고한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살육하고 탄압하자 어쩔 수 없이 봉기에 동참하게 되었다.
외세의 침탈에 대하여 국가 권력 상층부는 수수방관하였지만 힘 없고 수탈당하던 민중은 남은 힘을 모아 쓰러져 가는 나라를 건져 내려고 일어섰으니, 농민군의 세번째 봉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 구국(救國)의 칼날은 부러지고.....
전봉준은 먼저 전주에 있던 동학 조직인 대도소(大都所)를 교통의 요충지인 삼례로 옮기고 각지에 격문을 보내 구국(救國)을 위한 재궐기를 촉구하였다. 이러한 전봉준의 호소에 따라 당시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봉기한 농민군의 수는 전봉준이 인솔한 호남 농민군의 주력부대 1만여명에다 각지에서 몰려든 지원부대까지 합쳐 2만여명을 웃돌았다.
이에 대하여 공주에 포진하고 있던 관군은 충청감영 소속 군사 3500여명이 주력부대였고 미나미 소좌가 인솔하는 일본군 제19대대 병력 1천여명과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에 각 지방 병영의 지원군이 많이 합류하여 1만여명 정도의 군세(軍勢)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의나 인원수 면에서는 농민군이 유리한 입장에 있었으나, 훈련 정도와 군사 장비에 있어서는 관군에 비해 열세한 입장이었다. 더구나 농민군은 남북접 연합을 위해 한달이나 허비하는 큰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 기간 동안 농민군이 공격하려 한 공주성에 관군과 일본군은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11월 중순에 이르러 전봉준이 이끄는 호남 농민군은 공주 남쪽 경천점으로 육박해 들어갔고, 목천 세성산으로는 북접의 김복용(金復勇) 부대가 집결하였다. 그리고 효포 쪽으로는 북접의 옥천포(玉川浦) 부대가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바로 공주를 향해 삼면으로 공격하는 태세를 갖춘 것이다. 그런데 공주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강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지형상 한 곳에 들어앉아 전투를 벌이기에 유리한 곳이었다. 즉 공격하기보다는 수비하기 쉬운 지역이었던 것이다.
전봉준은 공주로 진격하기 전에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에게 격문을 보내 구국(救國)을 위한 궐기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농민군의 이번 궐기는 구국항일투쟁(救國抗日鬪爭)의 차원이지 관군과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천명하여 불필요한 관군과의 충돌을 피하고 동조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농민군이 다시 봉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호위부장 신정회(申貞檜)를 순무사(巡撫使)로 임명하여 농민군을 토벌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주조일본공사(駐朝日本公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으며 오히려 자신들의 계획에 방해가 되고 있는 동학교도들을 이 기회에 완전히 소탕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본국에 추가 병력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에 도착한 일본군 제19대대는 즉시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북상하는 농민군을 토벌하기로 했다. 제1부대는 한성에서 강원도로 우회하여 충청도로 들어갔고, 제2부대는 한성에서 직선으로 남하하였으며, 제3부대는 인천에서 해로를 통해 전라도 서남 해안으로 상륙하였다. 그리하여 충청감사 박제순은 남하하는 일본군과 합세하여 이인, 효포, 봉황산, 우금치 등에 진을 치고 북상하는 농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11월 18일에 목천 세성산에서 북접 김복용(金復勇)의 부대가 죽산부사(竹山府使) 이두횡(李斗橫)이 이끄는 관군에게 기습공격을 받고 참패하여 거의 전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전봉준이 인솔하는 호남 농민군의 주력부대는 19일에 선제공격을 개시하여 전초기지였던 이인에서 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成夏泳)이 이끄는 관군을 격퇴시키고 웅치까지 진격했다.
그 반면 또 하나의 북접 농민군인 옥천포 부대는 11월 22일에 안성군수(安城郡守) 홍운섭(洪云燮)의 관군이 방어하고 있던 효포를 공격했으나, 효포 동쪽의 대교에서 일본군의 후방 기습공격으로 패배, 퇴각하고 말았다.
이렇게 첫 전투에서 농민군은 전봉준이 지휘하는 호남 주력부대 이외에는 모두 패전(敗戰)하고 말았다. 전봉준의 주력부대도 22일에 웅치에서 성하영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군 경리청 부대의 협공을 받아 접전을 벌였지만 승패를 내지 못하고 다시 경천점까지 후퇴해야 했다. 이리하여 농민군의 첫번째 공주 공격은 관군의 지형을 이용한 포위 공격과 일본군의 근대화된 중화기(重火器)에 밀려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첫번째 공격에 실패한 후 농민군은 반격에 나서려는 진압군과 교전을 계속하면서 전열을 정비하고 부대를 재편성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의 서해안을 통한 후방 기습을 저지하기 위해 남아 있던 김개남(金開南)의 부대까지 투입하여 전력을 모은 농민군은 12월 4일에 두번째 공주 공격에 나섰다.
관군은 이인, 판치에서 농민군의 총공격에 맞서 접전을 벌였으나 끝내 방어선을 지키지 못하고 우금치까지 후퇴하여 이곳에서 진을 치고 있던 일본군과 합류하였다. 이 고지를 중심으로 약 1주일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攻防戰)이 계속되었지만,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 앞에 농민군은 1천여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결국 패배하여 고성, 논산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전봉준은 관군과 일본군의 급추격을 받아 은진 황화대에서도 또 한 번의 격전을 벌였지만 또 다시 패배하여 금구의 원평과 태인의 석현점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이제 전쟁의 양상은 농민군의 공격전(攻擊戰)에서 관군의 추격전(追擊戰)으로 바뀌고 있었다. 전봉준의 농민군은 12월 21일에 태인의 삼산에서 최후의 결사전(決死戰)을 전개했으나, 이곳에서도 패퇴하고 말아 농민군의 조직적 투쟁은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이후로는 관군과 일본군의 일방적인 살육만이 진행되었는데, 이런 양상은 다음해 1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전봉준은 태인의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한 뒤 입암산성(笠巖山城)에 잠시 피신했다가 손화중(係華仲), 김덕명(金德明), 최경선(崔景善) 등과 함께 순창의 피로리라는 산골까지 숨어들었다. 그러나 현상금에 눈이 어두워진 한신현(韓信鉉) 등에게 붙잡혀서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그리고 곳곳에서 체포된 농민군 지도자와 함께 전봉준도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형식상의 재판 끝에 동지들인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 등과 함께 사형이 집행되었고, 전봉준은 42세의 나이에 오로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해 바쳤던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나라를 걱정하는 단심(丹心)을 누가 알 것인가!" 하면서 자기의 피를 종로 거리에 뿌려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외세를 몰아내고 조국을 구하려던 동학 농민 혁명군은 오히려 그들이 몰아내려던 일본군에 의해 섬멸되는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말끝마다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해 일본이 지원할 것이다."라는 명분을 내세우던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진정한 자주 독립을 요구하는 조선 민중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며 자신들의 야욕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이 바로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의 결말이었다.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이 좌절된 이후 노골적으로 일제(日帝)의 침략이 자행되었고, 조선은 결국 굴욕적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것은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이 조선 말기의 역사 전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전환점이었는지를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전봉준은 사형이 집행되기까지 줄곧 의연한 자세를 지켜서 교도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재판에 참여한 일본 관헌들을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가 이끈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은 일본 군국주의 침략 세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지만, 이후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이처럼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은 19세기 아시아 민족 투쟁사를 대표하는 사건이자, 군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대항하여 투쟁한 최초의 대중적인 농민항쟁(農民抗爭)으로서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 동학사상(東學思想)과 농민항쟁(農民抗爭)과의 관련성.
동학(東學)이란 명칭은 당시 천주교를 대표하던 서학(西學)에 대립하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다. 동학은 경상도 지방의 몰락 양반 출신인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1860년 4월에 창시되었다. 동학의 기본 이념은 인간평등사상(人間平等思想)에 기초한 '인내천(人乃天)'으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이다. 또 인간의 본성은 자연의 섭리와 통한다는 '천인일여(天人一如)'의 정신을 내세워 세상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성의 본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동학의 목적이며, 그것이 실현된 세상이 지상천국(地上天國)이라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동학은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지극히 현세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동학의 사상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고무적인 내용이었지만, 특권 지배층에게는 위협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외세의 침략을 막고 내부적 악폐의 근절을 통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동학 창시의 동기라고 주장하면서 당시 조선의 통치이념이었던 유학적 정치 원리로는 이를 극복할 수 없다고까지 주장하였으므로 더욱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양명학(陽明學)마저도 유교 사상에 어긋나는 것으로 이단시하던 당시의 풍토로 볼 때 동학은 도저히 묵인할 수 있는 사학(邪學)이었으며, 결국 초대 교주였던 최제우는 세상을 어지럽혔다는 죄로 처형되고 그 후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외적을 구축하고 현실의 고통스러운 질곡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동학이 제시한 것은 극히 비과학적인 음양 사상과 무속들이었다. 즉, 동학은 양이고 서학은 음이므로 13자의 주문을 계속 암송하면 양으로 음을 제압할 수 있고, 당시의 상황이 이재궁궁(利在弓弓)한 시기이기 때문에 '궁(弓)'자를 종이에 써서 태우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합리적인 방책이 질곡에서의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따라서 동학이 당시 민중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한 종교적 형태로 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농민봉기(農民蜂起)와 무력투쟁(武力鬪爭)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직접적 요인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전봉준이 갑오년(甲午年)에 주도한 봉기가 동학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하여 발생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투쟁을 주도한 전봉준 등의 인물이 동학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동학이 관련되었던 것이지 동학의 직접적 작용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동학의 상층 지도부는 무력투쟁(武力鬪爭)에 반대하다가 조정의 무차별적인 탄압과 하부 조직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봉기에 참여했었다.
그러므로 전봉준이 일으킨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을 동학의 시각에 고착시켜 동학혁명운동(東學革命運動)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또 봉기 초기에는 대다수가 동학교도가 아닌 일반 농민이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농민봉기(農民蜂起)가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 전국적인 농민항쟁(農民抗爭)으로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은 동학의 조직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년
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
'역사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54.정치개혁운동(政治改革運動)과 쇄국정책(鎖國政策)의 양면성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0) | 2010.01.26 |
---|---|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55.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제작한 국내 지리학 연구의 선구자 김정호(金正浩) (0) | 2010.01.26 |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57.의병항쟁(義兵抗爭)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펼쳤던 이강년(李康秊) (0) | 2010.01.26 |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58.의병항쟁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군을 압도한 의병대장 허위(許蔿) (0) | 2010.01.26 |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59.영원히 씻을 수 없는 매국노의 오명(汚名) 이완용(李完用) (0) | 2010.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