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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54.정치개혁운동(政治改革運動)과 쇄국정책(鎖國政策)의 양면성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회기로 2010. 1. 26.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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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은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증손자이며, 고종(高宗)의 아버지이다. 그는 국왕의 아버지로서 역사가 격변하고 있을 당시 세차례에 걸쳐 왕권을 대행하며 실질적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를 통치하였다. 이때 시행된 여러가지 정책들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혁신적인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실시한 정책의 타당성 여부를 넘어서서 나아가서 대원군이란 인물에 대하여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곤 한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때는 전에 없던 격변의 시기였다. 수세기 동안 통치의 규범으로 삼아 왔던 중국 중심의 중화(中華) 질서와 성리학적 사상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수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전제군주제와 신분제가 밑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질서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지고 있던 때였다. 조선 전체가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조차 탄단하기 어려운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은 나름대로의 소신을 가지고, 단호하게 여러 정책들을 추진하면서 조선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 제도의 개선과 서원 철폐, 정치 제도의 재정비와 경복궁(景福宮) 재건, 천주교 탄압과 쇄국정책(鎖國政策) 등, 그는 역대 어떤 제왕에게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단호함과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다.

대원군이 조선의 역사에서 강한 인상으로 남는 또 다른 이유는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성행하던 당시의 정치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대원군이 집권하던 때는 안동(安東) 김씨(金氏) 가문이 정권을 잡고 온갖 세도를 휘두르고 있을 때였는데, 대원군에 의해 사실상 세도정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로써 대원군은 화려하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물러나자마자 왕비의 사촌 형제들과 조카들을 비롯한 여흥(驪興) 민씨(閔氏)들이 권력을 독점해 버린 사실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대원군의 또 다른 모습을 그의 집권 과정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왕족으로 태어났다. 그뿐 아니라 그는 왕위 계승권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항상 안동 김씨 세력에게 경계의 대상이었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생명의 위험을 피부로 느끼면서 살아야만 했다. 왕위 세습이 김씨 일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왕권의 훼손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도 그는 왕족으로서의 자존심을 죽여야만 했다. 그는 자신을 더 없이 천한 몸으로 감추었고, 안동 김씨들로부터 궁도령이니, 상갓집 개니, 하는 조롱을 당하면서 난봉꾼처럼 살았다. 그러나 대원군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절치부심하면서 내일을 위한 비상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또 대원군은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기고 있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일으킨 군인들이 그를 추대한 것은 물론이고,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사람들조차 그를 추대하려 했으며, 1894년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의 지도자들도 그의 재집권을 바란다는 의사 표시를 남기기도 했다.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그에 대한 역사적 논란

사실 흥선대원군의 집권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이루어진 변화는 다른 어느 지도자가 집권했을 때보다도 훨씬 폭이 넓고 속도도 빨랐다. 대원군이 집권 후 가장 먼저 서두른 것은 '인사개혁(人事改革)'이었는데, 그는 60년 동안의 세도정치로 노론(老論) 계열의 안동 김씨가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던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안동 김씨의 집권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던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그 대신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의 기능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삼군부를 설치하여 통치 체제를 국왕 중심으로 재정비하였다. 왕실 종친의 지위를 높이고 경복궁을 재건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 한 것도 이러한 정책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원군과 관련하여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쇄국정책(鎖國政策)이다. 그는 청(淸)의 권고를 무시하고 서구 열강과 일본에 대해 극단적인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는데, 그 결과 그가 집권하고 있는 동안 조선은 미국, 프랑스 등의 서구 열강과 무력충돌(武力衝突)을 피할 수 없었다. 또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의 일본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인 고자세로 일관했다. 그는 외국의 침략자와 내응한다는 이유로 국내 천주교도들을 철저히 탄압했고, 한편으로는 서해상에 외국 선박이 들어오는 것을 금하고 국경에 대한 감시를 강화시킴으로써 외국인의 출입은 물론 서양 물품의 수입도 철저히 봉쇄하였다.

대원군의 이러한 쇄국정책에 대해서는, 그를 긍정적이고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조차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세계가 자국의 부국강병을 위해 우수한 문물을 서로 교류하고 있는데, 계속 문을 닫고 있다가는 시대의 흐름에 크게 뒤 질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대원군은 곳곳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외세에 대해 철저한 대결 자세를 유지했다. 대원군의 이러한 정책은 당시에도 많은 비판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이 다른 나라와의 교역이 일상화되어 있고 수시로 외국을 오가며 문화의 교류가 다반사로 이루어지는 때에는, 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거꾸로 돌아간 역사의 시계

대원군은 안동 김씨 세도정권을 무너뜨리며 집권했기 때문에, 그가 집권하면서부터는 왕권이 강대해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뜻과는 다르게 왕비의 친척들인 민씨 세력이 국왕의 주변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새로운 사태가 벌어졌다. 그의 의도가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그리하여 대원군인 집권한 지 10년만에 권력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 후 헐어 버렸던 서원들 중에 만동묘(萬東廟)가 다시 복원되었고, 화폐 정책이 수정되는 등 그가 추진했던 정책들 가운데 많은 것이 원상복귀되었다.

그러나 실권에서 물러난 후에도 대원군은 여전히 재야의 실력자로 군림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를 지지했다. 그리하여 나라가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ㅔ면 항상 그의 통치력이 불사조처럼 되살아나곤 하였다.

권력에서 밀려난 대원군이 다시 정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881년에 전국을 강타한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의 와중에서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이후 일본 세력의 침투에 배해 많은 우려를 하고 있던 유생들은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金弘集)이 국왕에게 올린 조선책략(朝鮮策略)이 널리 보급되자 대규모 항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1880년 겨울부터 미국과 손을 잡고 일본과 굳게 결속하여 러시아를 막아야 한다는 내용의 조선책략에 반대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2월부터는 서울로 몰려들어 상소 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3월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유생들의 일본 정벌 계획으로 이어지면서 급기야는 대원군 세력과 연결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척사운동을 추진하던 일부 유림과 대원군 추종 세력은 각 군영의 하급 군인들과 도시의 하층민들을 동원하여, 현재의 국왕을 폐위시키고 대원군의 서자인 이재선(李載先)을 왕위에 앉히려고 했다. 그 다음에 대원군으로 하여금 다시 권력을 잡게 하려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재선 역모사건'이다. 결국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로부터 1년 후 대원군은 다시 권좌에 오르게 되었다. 다름 아닌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난 것이다.

● 다시 역사의 중심으로

재집권한 대원군은 처음 집권할 당시에도 그랬던 것처럼 과단성 있는 정책을 신속하게 밀고 나갔다. 군제를 개혁하여 종래의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였으며, 특권 상업 체제를 혁파하고 화폐의 남발을 막아 경제를 안정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대대적인 인사 개혁을 단행하여 민씨 세도정권을 무너뜨리는 일단의 조치를 취해 나갔다. 강력하게 배일(排日) 정책을 주창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대원군이 그토록 주장한 쇄국정책은 결국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통치 질서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일 뿐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왕조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들을 배척했을 뿐이고, 이를 위협하는 국내외적인 요인들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조선 사회를 한번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며, 진정 이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지 않았다. 대원군이 추진했던 세도정치의 척결이나 조세 제도의 개력도 결국은 경복궁 재건 사업과 왕실 인사의 등용이라는 한계 위에 기초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이 등장하기 전의 조선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그와 함께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와 어떤 면에서 비슷했고 어떤 면에서 달랐는가? 또 그가 실시한 여러 정책들은 결국 어떤 결과를 남겼는가? 등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이제 우리는 대원군, 그리고 1860년대 조선 사회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조명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곰곰이 따져 보아야 한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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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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