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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52.실학 연구를 집대성한 민중철학의 선구자 정약용(丁若鏞)

회기로 2010. 1. 26.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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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개혁 사상가이자 엄청난 양의 저서를 남긴 뛰어난 저술가이다. 그는 북학파(北學派)가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히 청(淸)의 문화를 흉내내고 답습해서는 나라의 발전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여 더 근본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우선 지도층의 각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개인적 덕성을 함양시키는 유교적 본질주의에 입각하였고, 그러한 바탕 위에 서학(西學) 등의 선진 문물을 적절히 수용하여 궁극적으로 조선의 경제적 토대가 되는 농촌의 발전을 도모하려 했다.

그가 생각한 인간형 역시 새로운 문물을 무조건 받아들이려고만 하는 기능적인 면에 치우친 모습이 아니라, 전통 사회의 이상주의와 본질주의적 사고에 기초를 둔 개방적 인간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수단과 목적'만 생각하고 '정신'은 쉽게 잊어버리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다산의 사상은 본성의 수양을 강조하는 퇴계(退溪)의 이론을 따르면서도 능동적 실천의 중요성을 내세우는 율곡(栗谷)의 입장도 수용하는 포용성에서 잘 드러난다. 이것은 당파 논리에 의하여 자신들의 이론적 기반과 반대되는 주장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던 당시의 경직된 사고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다산의 한계는 개혁의 방향을 미래에 다가올 발전된 세계에 맞추지 않고, 과거의 태평성대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데 있다. 또 하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개혁 방안에 나타나 있는 발전성의 개념이 불명확하고, 사회 발전을 선두에 서서 추진해 갈 개혁의 주체가 잘못 선정되어 있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힘을 인정하기보다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주장한 것을 보면, 그도 역시 어쩔 수 없는 유교적 사고에 입각한 왕정시대의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정약용의 사상에 깔려 있는 '애민주의(愛民主義)'는 일생을 통한 그의 행동과 작품들에 일관되게 나타나 있다. 그는 전통적인 농업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여 오로지 농민의 입장에서 나라를 개혁하려 했고, 전면적으로 폐정과 악습을 타파시킨 기반 위에서만 안정적인 농민정책을 시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생의 안정을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이념적 근간으로 했다는 점에서 그는 민중철학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수많은 저술을 통해서 왜곡되고 모순된 현실 사회를 실제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대해 가차없이 공격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자신의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 재상감으로 지목되었던 뛰어난 자질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1762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에서 정재원(丁材元)의 네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다산이 태어나던 해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에 따른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 관직을 떠나 있었다.

다산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는데, 배우는 속도는 빨랐지만 장난이 무척 심했다고 한다. 학문의 기초를 아버지에게서 배운 후에는 강 건너 양평에 살던 권철신(權哲身) 밑에서 한동안 공부하였는데, 권철신은 남인 학자로 실학 사상의 시조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제자였다.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의 보살핌 속에서 자란 그는 열다섯살의 어린 나이로 승지 홍화보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서기 1776년)에 영조(英祖)가 죽고 정조(正祖)가 즉위하자 그의 아버지가 호조좌랑(戶曹佐郎)으로 관직에 복귀하게 되어 한성으로 이사를 하였다.

한성으로 온 다산은 돌아가신 어머니 윤씨의 친정인 외가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외증조부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가 보유하고 있는 많은 책들을 탐독하기 위해서였다. 또 둘째 형 약전(若銓)의 친구 이승훈(李承薰)의 일가인 이가환(李家煥)의 집에 출입하면서 이가환의 증조부인 성호의 책들을 읽고 새로운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서학(西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천주교 신봉자로 지목되어 평생 끊임없이 규탄받기도 했다.

스물두살 때 생원 회시에 급제하였으며, 그 해에 장남 학연(鶴然)이 태어나기도 했다. 소과에 급제한 다산은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1784년에 국왕이 '중용(中庸)'에 대한 70개항의 질문을 만들어 성균관 유생들에게 답변을 제출하라는 시험을 실시했다. 정조의 질문에는 자신이 이끌고자 하는 탕평정치와 인간의 관계를 설정해 보라는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다산은 이벽(李檗)과 의논하여 답안을 만들어 제출했는데, 정조는 다산의 답안에 크게 만족하여 극찬하였다. 당시 정조는 아무도 모르게 인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종합하여 사칠속편(四七續編)이라는 책으로 만들어서 가지고 있었는데 다산의 답변이 이 책의 내용과 상당부분 일치했던 것이다.

다산은 인간 본성의 수양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능동적인 활동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답안을 작성했다. 즉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이론에 이율곡(李栗谷)의 학설을 접목시킨 것인데, 이것이 정조의 속마음과 일치했던 것이다. 이때 다산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은 정조는 그 후에 그를 후원하고 보호해 주게 된다. 당시 다산의 나이는 스물세살이었고, 정조는 서른세살이었다.

그 후에도 다산은 정조가 묻는 문제마다 우수한 답안을 제출하여 칭찬과 함께 포상으로 많은 책을 하사받았다. 당시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학문 정진을 위하여 규장각에서 발행한 책을 성적이 우수한 사람에게 국왕이 친히 하사하곤 하였는데, 다산은 너무나 많은 책을 하사받아서 나중에는 더 이상 줄 만한 책이 없어 병학통(兵學通)이라는 병서까지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산은 대과에 네번이나 낙방했는데, 이것은 다산의 집안이 남인 계열이라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노론과 소론이 심하게 견제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결국 다산은 남인 지도자 채제공(蔡濟恭)이 우의정(右議政)이 된 다음해인 1789년 식년시에서야 비로소 차석으로 급제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붕당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적극적인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하던 정조(正祖)대였는데도, 이미 국왕이 그 실력을 인정한 다산마저도 당쟁의 영향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정조의 신임을 얻다.

승정원 소속의 가주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다산은 곧바로 초계문신(秒啓文臣)에 선발되었다. 초계문신은 선진 관료 중 우수한 자를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서 재교육시키는 제도로서 당색이나 문벌이 서로 다른 초임 관리들을 교류하게 하여 동료 의식을 갖게 하고, 탕평정치를 보좌할 관료 집단으로 양성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다산은 관직에 진출한 첫해 겨울, 한강에 설치할 배다리[浮橋]의 설계도를 만들어 제출했는데, 그것이 그대로 채택될 정도로 기술 분야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과시했다. 학문의 모든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천재성을 일찍부터 나타낸 것이다.

이 배다리 설치 작업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것으로서 신하들의 반대가 심했으나, 정조(正祖)는 국가 위신과 기술 문화를 높이는 차원에서 강력히 추진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배다리는 정조가 매년 수원에 있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에 행차할 때 요긴하게 사용되었으며, 배로 이동하는 것보다 빠르고 비용도 줄일 수 있어서 백성들에게 어질고 현명한 군왕으로서 정조의 이미지를 심어 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관직에 나간 이듬해인 1790년, 예문관 검열로 재직하던 다산은 서학(西學)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충청도 서산군 해미로 유배되고 말았다. 당시 조정은 그즈음 유입되기 시작한 천주교와 서학에 대하여 상반된 입장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서학을 긍정하는 '신서파(信西派)'와 이를 배격하는 '공서파(攻西派)'가 그것이었다. 당시 진보적 성향의 일부 인사들만 신서파였고, 조정의 주류는 공서파였다. 다행히 정조가 개입하여 다산의 첫 유배는 열흘 정도의 짧은 기간으로 끝났고, 다산은 관직에 복귀하여 사헌부 지평, 훈련원 감찰을 거쳐 2년 후에는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

수찬으로 임명되던 1792년 4월에는 진주 목사로 재직 중이던 아버지가 별세하고 사직하여 상(喪) 중에 있었으나, 그해 말에 수원성을 축조하기로 한 정조가 다산에게 설계를 지시하여 이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 다산은 독창성을 발휘하여 선진화된 형태의 건축 도안을 선보였으며, 직접 건축 장비들을 제작하여 경비를 절약하고 공사 기간도 단축할 수 있었다. 정조는 수원성 건설을 백성들의 부역 동원으로 하지 않고 임금 노동자만으로 추진하도록 지시하였는데, 다산의 이러한 기술적인 뒷받침 덕분에 그 뜻을 무리 없이 실천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친 다산은 1794년 10월에 복직한 후, 곧바로 국왕의 특명을 받고 암행어사로 경기도 연천 일대를 순찰하였다. 당시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徐龍輔)의 부정과 축재가 심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는데, 과연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한 다산은 서용보의 협잡과 부정에 대하여 보고하고 엄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서용보는 파직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앙심을 품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산을 궁지로 몰아 넣으려고 했다.

서용보는 영조(英祖)의 왕위 계승에 공로가 컸던 서종제(徐宗齊)의 증손으로 다산에 의하여 한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당시 조정에는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많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복귀하여 정승의 반열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여러 중요한 직책을 역임하였지만 부정과 축재에 눈이 먼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다. 서용보의 부정과 궁핍한 백성의 현실을 목격한 다산은 백성들의 피폐한 현실과 탄관오리들의 수탈을 고발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어사의 임무를 마친 이듬해에 다산은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임명되었다. 이때 청인(淸人) 사제(司祭)인 주문모(周文謨)가 조선에서 천주교를 포교한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다산은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이 사건에 휘말려서 충청도 금정 찰방으로 좌천되고 만다. 다산은 금정에서 일하는 틈틈이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성호(星湖) 이익(李瀷)에 대한 연구를 해서 성호유고(星湖遺稿)를 정리하고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저술하였다. 5개월만에 용양위 부사직으로 복귀하지만, 그를 적대시하던 세력에 의해 천주교 신봉자라는 이유로 계속 비판을 당하자 정조는 그를 활해도 곡산 부사로 임명하여 다시 지방으로 보냈다.

다산은 곡산에서 근무하는 동안 혼신을 다하여 백성을 보살피는 관리로서 올바른 행정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밖에 곡산에서 수령의 임무를 다하는 중에 천연두가 창궐하자 마과회통(麻科會通)이라는 의학서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이 훗날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저술할 때의 바탕이 된다.

2년여 동안의 지방 근무를 마친 다산은 1799년에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중앙 관직에 복귀하여 형조참의(刑曹參議)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또 다시 서학과 관련하여 반대파에게 집중 공격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때 다산은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자명소(自明疏)'를 제출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마제로 돌아와 버렸다. 이것은 그의 나이 서른아홉살 때의 일이었는데, 그 후로 벼슬길에서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신임하던 정조가 1800년 6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 18년 동안의 기나긴 유배 생활

정조(正祖)가 급작스럽게 죽자 열한살의 순조(純祖)가 보위에 올랐다. 국왕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영조(英祖)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노론 벽파의 기둥으로서 그녀가 섭정하는 동안에는 자연히 벽파가 득세하였다. 권력을 잡은 벽파 정권은 천주교 신다들을 반역자 집단으로 매도하여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는데, 탄압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당시 노론의 반대파인 남인 계열 중에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벽파 정권은 1801년에 신유사옥(辛酉邪獄)을 일으켜 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 권철신(權哲身), 정약종(丁若鍾) 등을 처형하였고,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다산의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당시 조정 일각에서는 정조가 생전에 특히 신임했던 다산만은 석방하려 했지만, 악연 깊은 서용보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유배지로 내려온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성수봉(成壽奉)이라는 하급 관리의 집에 머무르며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체계화하는 노력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다산에게 이런 생활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조카 사위인 황사영(黃嗣永)이 조선 교회에 대한 박해 사실을 적은 밀서를 연경의 프랑스인 주교에게 전하려다 발각된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진 것이다. 벽파 강경론자들은 이 기회에 남인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유배된 인사들까지 다시 조사한다는 핑계로 한양으로 압송해 모두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다산은 예전의 공적(功積)이 인정되어 간신히 죽음만은 면하고,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신으로 재유배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들 형제는 전라도까지는 동행하다가 나주 근처 율정이라는 곳에서 헤어져 각자의 유배지로 향했는데, 이때가 생전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만다. 정약전이 유배지 흑산도에서 1816년에 사망하기 때문이다.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변두리에 거처를 정하고 두문불출하며 학문에만 정진하여 여러 권의 책을 남겼다. 귀양 생활 8년째인 1808년부터는 만덕동 산자락에 있던 윤박(尹博)이라는 선비의 별채를 빌려 생활하였는데, 가까운 절 만덕사(萬德寺)에는 1천여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어서, 이 책들도 그의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유배지에서 수십 권의 책을 저술하며 지내던 다산은 1817년에 훗날 경세유표(經世遺表)로 불리던 방례초본(邦禮草本) 40권을 정리하였다. 이 책은 국가 행정기구 및 제도의 축소 계획부터 토지, 조세 문제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국가 경영서다. 하지만 사법 제도와 기술 분야에 관한 부분은 빠져 있는데, 이는 다산이 당시 국가 경영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일로 보았던 민생 안정을 위해 서둘러 지방관의 실무 지침서인 목민심서(牧民心書)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집필을 시작한 이듬해 봄에 다산은 총 48권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다. 이 책은 지방관의 청렴한 자세와 아전 단속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백성들의 고통과 탐관오리의 수탈을 폭로하고 그 해결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서 그의 애민사상이 구체적으로 전개되어 있다.

다산은 목민심서를 완성하던 해 9월에 이태순(李泰順)의 상소에 의하여 귀양에서 풀려 무려 18년만에 고향 마재로 돌아왔다. 이때에는 다행히도 악연 깊은 서용보(徐龍輔)가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반대하는 세력이 없었고, 국왕의 외척으로 실권을 쥐고 있던 김조순(金祖淳)이 찬성하여 간신히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다산이 워낙 긴 세월 동안 유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정적(政敵)들도 더 이상 그를 붙들어둘 명분을 찾을 수 없었다.

◆ 집필에 몰두한 말년

다산은 고향에 돌아온 다음에도 학문에 정진하면서 집필을 계속했다. 비록 귀양 생활에서 풀려나기는 했으나 그에 대한 조정의 감시는 여전하였는데, 그는 처신이 자유롭지 못한 가운데 말년을 보내면서도 의연하게 연구와 집필에 몰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귀양에서 풀린 1819년에는 재판 제도와 각 지방의 관습을 기록한 흠흠신서(欽欽新書) 30권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다산의 나이 66세 때에도 또 다시 서학을 유포한다는 허무맹랑한 혐의를 받았으나, 곧 헛소문으로 밝혀져 무사할 수 있었다.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서용보와의 악연은 말년까지 이어졌는데, 공교롭게도 은퇴한 서용보가 이웃 동네에 내려와 살게 되었던 것이다. 다산은 옛 감정을 풀고자 하였으나 서용보는 겉으로는 응하는 척하면서도 끝까지 다산에 대한 응어리를 풀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다산은 고향에서도 외부 출입을 끊은 채 독서와 집필에만 몰두하며 말년을 보냈다. 그러나 생활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도 그의 애민사상은 여전하여, 죽기 3년 전인 72세 때 '황년수춘춘사십수'라는 시를 지어 고통받는 농촌의 현실을 한탄하였다.

조용히 저술과 시작(詩作)에 전념하며 말년을 보내던 그는 1836년에 75세의 나이로 마재의 저택에서 눈을 감는다. 원래 그날은 다산 부부의 회혼(回婚)이어서 조촐한 기념 잔치를 하려 했는데, 경사스러운 날이 애통한 날로 변해 버리고 만 것이다.

18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다시 18년만에 세상을 하직한 다산은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이면서도 불우한 생활에 굴하지 않고 수많은 저술을 남긴 불세출(不世出)의 대학자임에 분명하다.

다산은 무려 508권이라는 방대한 양의 저서를 남겼으며, 시도 무려 2469편이나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산 자신이 작성한 목록을 통해 확인될 분, 많은 수의 작품이 소실되어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방대한 분야를 망라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전문적인 관점에서 쓰여져 있다. 모든 저술은 유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를 평생 곤경에 빠뜨렸던 서학 등 새로운 경향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접목시켜 애민적 입장에서 집필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산의 관심은 항상 쇠퇴하고 있는 국력을 회복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는 헝클어진 조선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교주의적 관점만으로는 어렵다고 보고, 선진화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서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종교적인 관점보다는 과학 기술적인 매력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새로운 학문데 대한 개인적인 흥미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통하여 국가 개혁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는 목적이 더 강했던 것이다. 국가의 개혁과 발전을 위하여 당시에는 금기시 되는 학문이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배우려던 선각자적인 집념이 그를 곤경의 길로 내몰았던 것이다.

◆ 다산의 사상적 경향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실증적인 학풍은 물론 서양의 신학문까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세계화'를 강조하였다. 반면에 정조(正祖) 군왕은 "동국(東國)에 태어난 이상 마땅히 본 모습을 지켜야 한다."며 조선 소중화주의에 입각한 '주체성'을 강조했다. 이렇듯 다산과 정조는 사회 개혁이라는 목표는 같았지만 개혁의 방향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인다. 정조는 실력 있는 기술관료에 의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했고, 다산은 국가 전체 체제의 변혁을 주장하며 더 나아가 의식까지 개혁해야 한다고 했다. 정조는 당시의 체제를 지키면서 이끌고 가야 할 대표자인 군왕이었고, 다산은 일반 민중의 시각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그러한 차이가 생겼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점진적인 개혁이 더 적합한가, 아니면 좀더 획기적인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가 하는 점은 결정하기 쉬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개혁의 최대 지주였던 정조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아서 다산 등의 개혁 추진론자들을 조직화하고 정치 주도 세력으로 기를 수 있었다면, 개혁의 방향이 달라지고 아울러 조선의 역사도 바뀌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개혁주의자들이 채 기반을 갖추고 세력을 모으지 못한 상태에서 그나마 그들을 지지하고 후원하던 정조가 죽었기 때문에 수구(守舊) 새력의 반격을 당한 개혁주의자들은 완전히 궤멸되고 말았던 것이다.

영조, 정조의 통치 아래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던 개혁 의지가 정조 사망 이후에 완전히 차단되고 무위로 끝나 버린 역사적 불행은 사회적 관념이 아직 성리학적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개혁 세력을 집단화하여 전면에 내세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제도 개혁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어저면 위로부터의 개혁이 안고 있는 태생적 한계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어정쩡한 당시의 상황에서 다산은 남들보다 앞에 서서 개혁을 주창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다산의 사상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적 입지가 부족한 가운데 관직 생활을 끝냈던 것은 다산 자신의 불운이자 조선의 불행이었다. 그리고 다신의 개혁 방안 또한 다분히 이상적인 방향에만 그치고, 실제로 개혁을 추진할 주체가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사회 전체를 부정하고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급진적 성향을 가진 것이 아니고, 현 체제 안에서 잘못된 점을 바꾸어 보려는 온건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즉, 다산의 개혁 방안은 정조와 같은 개혁 군주에 의해 주도적으로 추진되어야만 가능한 내용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다산이 가지고 있던 한계였다. 중국의 주(周) 왕조를 지향해야 할 사회의 모습으로 설정한 다산은 결국 유교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특권층의 권한을 축소하고 약화시킴에 따라 상대적으로 군주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개혁의 방향을 설정했다.

이러한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다산의 개혁 사상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잇다. 그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국가와 사회의 구조가 바뀌었으므로, 통치기구와 이념 역시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겨서 민생의 근간이 무너지고 국가의 조세 기반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이 부분의 개혁이 가장 시급하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의식의 개혁을 역설하여 농민들의 주체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 그리고 다스리는 자의 자세를 무엇보다 중요시하여 수령들에게 청렴결백할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다산은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 덕과 함께 위엄과 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여기에 올바른 뜻과 공명함이 있어야 바른 행정을 펼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지도자는 전인적인 인격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고 목민심서(牧民心書)를 통해 역설한 것이다. 따라서 다산의 정신과 사상은 세상을 다스리는 원칙이기에 앞서 인간 사회의 근본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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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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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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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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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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