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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53.개화 사상의 선구자, 비운의 혁명운동가 김옥균(金玉均)

회기로 2010. 1. 26.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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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金玉均)은 꺼져 가던 조선의 명운을 걱정하며, 시대의 새로운 흐름에 맞게 개화(開化)를 이루어야 나라의 부흥과 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씨(閔氏) 일파의 굴욕적인 외교 정책에 반대하는 폐쇄적인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에 결코 찬성하지 않았지만, 외세의 강요에 의하여 어절 수 없이 무분별하게 개방하는 것도 배척했다. 그러나 나라를 여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이기 때문에 조선이 스스로의 힘을 길러 외세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외국의 장점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한 자주적인 개국론자였다.

처음에 김옥균은 평화적 수단에 의한 개혁운동(改革運動)을 추진했으나,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일파의 벽에 부딪치자 부득이 쿠데타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위로부터의 점진적인 개량주의가 한계에 부딪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이 그로 하여금 폭력적인 수단에 의탁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의해 주도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단순히 정권 탈취 음모로만 매도할 수는 없다. 내적으로는 제도를 혁신하여 힘을 기르고, 외적으로는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그의 사상이 현실적인 장애로 인해 결국 정변의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옥균의 개혁은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젊은 혈기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조급함이 그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로는 개혁이 소수의 개화파(開化派) 인사들에 의해 추진되어 일반 민중과 동떨어졌다는 것과 지나치게 외세에 의존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말하자면 정변의 주체 세력이 너무나 허약했던 것이 주된 이유이며, 또한 그때까지 조선에서는 수구파(守舊派)의 후견자인 청의 세력이 일본보다 강했다는 점을 지나치제 도외시한 것도 실패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결국 내외의 조건이 모두 불리한 상태에서 무리한 정변을 감행했기 때문에 이미 실패가 예견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조국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려 했던 그의 의지와 애국심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는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이라면, 조선은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먼저 사화 체제의 대변혁과 자주적 개국(開國)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한 애국자이자 개혁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 개화 사상에 눈을 뜨다.

김옥균은 철종(哲宗) 재위 2년(서기 1851년)에 충남 공주에서 호군 김병태(金炳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옥균(玉均)'이라는 이름은 그의 얼굴이 백옥 같이 곱고 희다고 해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김옥균은 여섯살 때 5촌 당숙인 좌찬성 김병기(金炳冀)의 양자로 들어갔다. 원래 맏아들은 양자로 보내지 않는데, 당시 김병기가 집안에서 가장 권세가 있었기 때문에 총명한 그의 장래를 위해 아버지가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열한살 되던 해에 양아버지 김병기가 강릉부사로 부임하게 되어 그곳의 송담서원(松潭書院)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은 김옥균은 열여섯살 때 중앙 정계로 전임하는 양아버지를 따라 한성으로 올라오면서 더욱 학문에 정진하여 고종(高宗) 재위 9년(서기 1872년)에 스물두살의 나이로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김옥균은 과거에 응시하기 한두해 전쯤부터 이미 서울 북쪽에 있는 양반 거주 지역인 북촌(北村)에 드나들던 한의원 유대치(劉大致)를 통해 개화 사상을 접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급제하던 해에 성균관 전적이라는 관직에 진출해서 이듬해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민씨 세력과 유림들의 연합공격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다.

대원군은 고종이 등극하던 1863년부터 10년 동안 강력한 통치권자로 군림하였다. 외척의 폐단을 극도로 경계하여 몰락한 가문에서 며느리를 들였으나, 결국 그에 의하여 권력의 정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대원군이 실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동부승지 최익현(崔益鉉)의 탄핵 상소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10년 동안의 강권 통치로 인하여 반대 세력이 많아진 것과 야심 많은 고종의 왕후 민씨의 권력욕이 큰 몫을 차지했다.

대원군이 물러나자 정권은 민씨 일파의 독무대가 되었고, 사회적 악폐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특히 민씨 일파는 자신들의 세력 확장과 부귀 영화를 위해 몰지각한 행동까지 불사하여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놓고 말았다. 이미 대원군의 극심한 쇄국정책(鎖國政策)에 의하여 새 시대로 나갈 기회를 놓친 조선 왕국은 민씨 일파에 의해 완전히 퇴행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막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은 김옥균이 보고 느꼈던 조선의 현실은 이렇듯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상에 의한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관직에 나오기 전부터 접하여 알고 있던 선진 외국의 모습과 개혁 사상은 이즈음 더욱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잡게 되어 나라의 개화에 뜻을 같이하는 인물들과 깊은 교류를 하게 되었다.

● 김옥균의 사상에 영향을 준 사람들

김옥균(金玉均)의 사상과 신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네 사람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우선 김옥균에게 실용적 사고의 틀을 갖추게 해 준 인물로는 실학 사상의 계승자인 박규수(朴珪壽)를 꼽을 수 있다. 박규수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이며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는데, 그 시대의 사대부들 중에서는 상당히 개화된 인물이었으며, 1866년에 평안도 관찰사로 있는 동안 미국의 상선 셔먼 호가 대동강변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자 이를 공격하여 불살라 버리게 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좌의정으로 있는 동안 민씨 세력이 득세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젊은 청년들에게 신문물과 개화 사상을 가르치면서 말년을 보냈다. 그래서 재동에 있던 그의 집 사랑방은 언제나 의기충천한 청년들이 모여서 민족과 국가의 장래에 대하여 토론하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모임은 박규수가 중앙으로 부임한 1869년 무렵부터 시작되어 그가 사망하던 1876년까지 약 7년 동안 지속되었다.

다음으로 앞서 언급한 한의원 유대치(劉大致)가 있다. 유대치는 중인 신분이었지만 일찍이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 개화승(開化僧) 이동인(李東仁) 등과 같은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고, 선진 문물들을 소개한 책들을 탐독하여 오래 전부터 개화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있었다. 유대치는 자신의 이념과 지식을 혈기왕성한 청년들에게 전하여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불렸으며, 그들과는 봉건적 신분 구조를 벗어나 스승과 제자로서 지내왔다.

김옥균은 갑신년(甲申年) 거사 전에도 유대치의 집을 방문하여 병으로 누워있던 그를 위문하고 거사 계획에 대하여 의논하기도 했다. 그 후 유대치는 갑신정변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병든 몸을 이끌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행방을 감추었고, 그의 아내는 자결하였다.

세번째로 중요한 인물은 역관 오경석(吳慶錫)이다. 역관(譯官)은 오늘날로 말하면 통역관인데, 그는 중국을 여러차례 방문하면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중국에서 돌아올 때마다 새 지식들이 담긴 책들을 구해 와서 친구들에게 권했다. 이때 그와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 유대치였고, 오경석이 가져 온 책들은 유대치를 통해 김옥균과 같은 청년들에게 전해졌다.

오경석은 1876년에 있었던 일본과의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당시 척화파들의 반대를 극복하고 협상을 추진하도록 노력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일개 역관이었지만 빈번한 중국 출입으로 국제적 외교 절차를 아는 유일한 조선 관리로서, 교섭 진행 과정에서 크나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인물은 개화승(開化僧) 이동인(李東仁)인데, 그는 서울 근교에 있던 봉원사 소속의 승려였으며, '일본통'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유대치와 교류하다가 그의 소개로 김옥균 등과 만나게 된 이동인은 일본 혼간지[本願寺]의 부산 별원을 왕래하면서 입수한 만국사기(萬國事記)와 세계 각국의 풍물 사진을 청년 관리들에게 전해 주었으며, 고종 재위 16년(서기 1879년)에는 김옥균 등의 주선으로 일본을 여행하여 신문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이동인은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1880년 6월에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金弘集)과 만났는데, 이동인의 식견에 감동한 김홍집의 추천으로 조선 정계에도 연이 닿게 되었다. 귀국한 다음 해에는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에 동행하기도 하였으나 출발 직전에 왕궁에 들렀다가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당시에는 이동인의 실종에 대하여 척화파(斥和派)들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졌었다.

● 일본 시찰과 임오군란(壬午軍亂) 발생

일본과의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이후, 김옥균 등의 신진 개화파(開化派) 청년들은 나라의 자주 독립을 위해 개혁을 뒷받침할 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사회 각 계층의 동지들을 모아 '충의계(忠義契)'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이는 당시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던 신분의 틀을 뛰어넘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모은 단체로서 외부의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계의 형태로 조직을 구성했던 것이다. 물론 지도부는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한 청년 귀족 출신들인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박영교(朴泳敎), 박영효(朴泳孝), 서재필(徐載弼) 등으로, 그 중에서 김옥균이 가장 나이가 많았다.

또한 김옥균은 사고가 깨어 있던 선배 관료들인 김홍집(金弘集), 어윤중(魚允中), 김윤식(金允植) 등과 동지적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그들을 통해 국왕과 측근들을 설득하여 개화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그는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려면 낡은 인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도입하여 근대화하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하였으며, 이 길만이 격동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나라의 독립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역설했다.

1881년에 신사유람단에 동행하여 선진 문물 도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로 한 이동인이 실종되자, 그해 12월에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일본을 시찰하기로 했다. 이때 김옥균은 2만엔의 자금을 마련해서 갔는데, 이것은 일본의 산업 시설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한 돈이었다.

먼저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여 조선소, 제련소, 탄광 등을 시찰한 김옥균은 오사카[大阪]로 가서 군수공장과 조폐국을 둘러보고 교토[京都]와 고베[神戶]를 거쳐 다음해 3월에야 도쿄[東京]에 도착했다. 도쿄에서는 조선 개화파의 후원자 역할을 해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집에서 4개월 정도 머물면서 일본의 발전상을 관찰하고, 정계와 재계의 여러 인물들을 만나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김옥균이 일본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조선에서는 큰 변란이 일어났다. 고종 재위 19년(서기 1882년) 6월에 구군영 소속 군인들에 의하여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난 것이다. 임오군란은 당시 군인 군료 지급 책임자였던 선혜청(宣惠廳) 당상 민겸호(閔謙鎬)의 부정이 발단이 되어 무위영(武衛營), 장위영(壯衛營)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폭동이었다. 구식 군대 2개영은 훈련도감(訓鍊都監), 용호(龍虎), 금위(禁衛), 어영(御營), 총융(摠戎)의 5군영을 통폐합한 것으로, 일본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과 차별 대우를 받고 있는 것에 심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민겸호의 농간으로 급료가 제대로 지불되지 않자 폭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대원군과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던 구군영 소속 군인들은 민씨 일족들을 살해한 뒤에 별기군 병영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를 죽이고 일본 공사관까지 난입하였다. 폭동 이튿날에는 도시 빈민까지 합세하여 대궐로 진입하였고 고종을 사태의 수습을 위해 대원군을 급히 불러들여 전권을 위임하였다. 이에 따라 정권에서 물러난 지 10년만에 대원군이 권력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한편 대궐을 겨우 탈출하여 장호원으로 도피했던 왕후 민씨는 톈진[天津]에 주재하고 있던 영선사 김윤식을 통해 청나라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청은 조선으로 군대를 출동시켰고, 사태 수습을 위해 찾아온 대원군을 남치하여 톈진으로 호송시켜 버렸다.

하나부사 공사의 보고를 통해 임오군란의 전말을 알게 된 일본 정부는 곧바로 군함 4척과 보병 1개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지만, 청의 신속한 군사적 행동으로 사태는 이미 끝나 버린 다음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피해의 책임을 물러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고 피해 배상, 공사관 경비를 위한 일본군 주둔 허용, 군란의 주모자 처벌, 수신사를 파견하여 공식 사과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민씨 일파의 사리사욕과 무분별한 권력욕이 외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된 반국가적 결과를 불러오고 만 것이다.

임오군란 직후에 잠시 권력을 잡았던 대원군은 김옥균이 귀국하는 즉시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 전에 납치되어 톈진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다행히 김옥균은 무사할 수 있었다.

● 수신사 파견과 개화파의 좌절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에 의해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에는 철종의 부마(駙馬)인 박영효, 김만식(金晩植), 홍영식, 서광범 등 여러명이 임명되었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민영익과 함께 수신사의 고문이 되어 다시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일본은 수신사 일행을 국빈으로 대접하고 극진한 환영을 하여 개화파 일색의 젊은 조선 사신들을 친일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외무대신 이노우에는 17만엔의 차관(借款)을 주선하면서 고종의 신임장을 가져온다면 더 많은 차관을 구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당시 수신사 일행이 빌린 17만엔의 차관 중 5만엔은 일본에 대한 배상금 1회분으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수신사 체류 경비 등으로 모두 일본에서 사용되었다.

그해 11월에 수신사 일행은 새로 부임하는 일본 공사 다케조에와 함께 귀국하였으나, 김옥균은 홀로 남아서 일본 정세를 더 살펴보고 협조와 지원에 대한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알아보기로 했다. 그가 다른 수신사 일행보다 6개월 정도 더 일본에 머무르면서 얻게 된 중요한 정보는 일본이 술과 담배에 세금을 부과해서 국가 재정을 늘리고, 그것으로 육군, 해군의 확장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군세 확장이 일본의 국방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기 위해서라는 감언이설(甘言利說)을 흘리고는 차관을 주선할 용의가 있다는 말을 거듭 강조하며 선심 공세를 했다. 이때 김옥균은 아직 젊은 탓인지 일본이 개화파의 조선 개혁운동(改革運動)을 지원하는 체하면서 사실은 조선을 침략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한편 귀국한 수신사 일행 앞에는 암초가 놓여 있었다. 그 사이에 청을 뒤에 업은 수구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여 귀국한 개화파를 박대했던 것이다. 박영효는 한성 판윤을 거쳐 광주 유수로 좌천되었고, 김옥균은 포경사(捕鯨使) 겸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라는 이상한 직책에 임명되어 중앙에서 내몰렸다.

또 조영하(趙寧夏)가 청나라의 소개로 불러들인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정부의 재정 고문이 되었는데, 자기를 초빙해 준 수구파의 입맞 맞추기에만 급급해 함으로써 청책적 퇴행은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파탄 상태에 이른 국가 재정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논의될 때, 묄렌도르프는 수구파의 이익을 위해 당오전(當五錢)의 주조를 주장하였는데, 당오전은 이미 경복궁 중건 때 물가를 올리고, 상거래 질서를 무너뜨리는 등 그 폐해가 드러났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옥균은 당오전은 실질적인 재정 확보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면서 백성들의 고통만 가중시킨다며 반대했다. 민영익의 집에서 벌어진 거의 한나절에 걸친 토론을 통해 김옥균은 묄렌도르프를 논리적으로 몰아붙였는데, 그 후 두사람은 서로 반목하고 증오하는 사이가 되었다.

결국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수구파의 의도대로 당오전이 발행되었고, 그 결과 물가는 폭등하고 국가 재정은 탐관오리들의 농간으로 더욱 어려워졌다. 당오전은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常平通寶)의 다섯배에 달하는 가치로 정해졌지만 실제로는 상평통보와 동일한 가치로 통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관리들은 조세를 상평통보로 거둬들이고서 국고에 상납할 때는 당오전의 액면가로 납부하고 그 차액을 챙겼던 것이다.

당오전 발행 이전에는 엔화에 대한 조선 화폐의 비교 가치는 1 대 2.5 정도였는데, 당오전이 통용된 이후에는 1대 8로 급락하여 무역 수지에도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그야말로 잘못된 통화 팽창 정책으로 국가 경제가 완전히 파국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런데도 민씨 일파와 묄렌도르프는 자신들의 정책 과오를 오히려 김옥균과 개화파에 대한 공격으로 얼버무리려고 했고,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 일본의 배신과 차관 도입 실패

그즈음 일본 외무성의 주요 인사로부터 국왕의 위임장이 있으면 외채(外債)를 모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 왔다. 그동안 수구파의 방해와 재정 부족으로 개혁 추진에 장애를 느끼고 있던 김옥균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대궐로 들어가 고종에게 피폐한 국가 재정 확보를 위해서는 외채 도입이 필요함을 역설하여 위임장을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고종의 위임장을 받아든 김옥균은 새 희망을 갖고 1883년 6월에 서재필, 서재창 등 50명에 이르는 유학생들을 인솔하여 세번째 일본행에 나서게 되었다. 그대까지 김옥균은 배후에서 비열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김옥균이 고종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묄렌도르프와 수구파는 백방으로 방해 공작을 펼쳤다. 먼저 고종의 생각을 바꾸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일본 공사 다케조에에게 김옥균이 일본에 가져가는 위임장은 위조된 것이라고 거짓으로 알렸다. 다케조에는 이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본국에 보고하여 일본에서는 김옥균의 방문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일본에 도착한 김옥균은 외무대신 이노우에를 통해 차관 교섭을 벌였으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냉담한 반응만 돌아올 뿐이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김옥균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차관 도입은 단념하고,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 상사와 민간 은행을 통한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하나같이 일본 정부의 보증을 요구하여 결국 차관 도입을 위한 일본 방문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차관 도입 실패는 수구파의 방해 활동도 한 몫을 했지만, 당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 변화에 주요 원인이 있었다. 그동안 일본이 개화파를 지원했던 것은 자신들이 쉽게 조선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개방적인 인사들이 조선 정부의 실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즈음의 민씨 정권은 말만 수구파였지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일본의 조선 진출을 묵인해 주고 있어서, 오히려 그 어떤 개방적 정권보다 다루기 쉬웠다. 그래서 자주성이 강한 개화파 정부가 조선에 들어서면 도리어 진출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한 일본은 개화파의 입지가 강화되도록 조선에 차관을 빌려 주느니 그 돈으로 군비 확장에 더 주력해 경쟁 상대인 청(淸)을 무력(武力)으로 제압하는 것이 더 나은 길이라고 판단하고 김옥균의 차관 교섭단을 박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속사정을 알지 ?幣? 김옥균은 일본 정부가 차관 제공에 당연히 협조해 줄 것으로 믿었다가 의외의 배신을 당하자, 낭패와 분노를 삭이면서 이듬해 2월에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귀국한다. 김옥균이 아무런 성과 없이 귀국하자 그동안 차관 도입을 기대하고 개화파가 벌여 놓았던 사업은 모두 중지되고 말았다.

박영효가 추진하던 양병(養兵) 사업은 자금 부족으로 포기되어, 양성해 오던 병력이 한규직, 윤태준의 지휘 아래로 편입되고 말아 수구파의 군사적 기반만 강화시켜 주었고, 박영효는 광주 유수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또 최초의 인쇄 및 출판 기관인 박문국(博文局)에서 발행한 한성순보(漢城旬報)도 청나라 군사들의 행패를 보도한 것이 말썽이 되어 일본인 기술자들이 추방된데다가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외채 도입 실패를 추궁하는 수구파의 압력이 거세지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김옥균은 정계에서 물러나 한성 동쪽 교외에 있던 집에 칩거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근 2년 동안 공들여 추진해 왔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 폭풍 전야

이제 수구파들은 공공연하게 "김옥균을 죽여라." 하고 주장하면서 노골적으로 신변에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개화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민영익(閔泳翊)마저 수구 세력에 가세하자 김옥균 등은 마지막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민영익은 김옥균보다 아홉살 어린 스물다섯살이었는데, 그해 4월에 유럽과 미국 시찰을 마치고 귀국하여 누구보다도 외국의 선진 문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가문의 이익을 위해 수구파에 앞장을 섰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순리적 방법을 통한 개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김옥균과 급진 개화파는 정변(政變)에 의하여 일거에 국정 개혁을 수행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때 나라 안팎의 정세는 개화파들의 결심을 더욱 재촉하였다. 나라 안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의 저항이 빈발하여 수구파 정권을 흔들고 있었고, 나라 밖에서는 청이 베트남을 장악하기 위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다가 계속 패배하자 그해 6월에 가능한 병력을 모두 차출하여 전선에 투입하는 바람에 조선 주둔군 병력이 반으로 줄어 있었던 것이다.

개화파 내부에서는 그즈음 동원 가능한 군사력이 꽤 많이 확보되어 있었는데, 우선 충의계에도 40여명의 비밀조직원이 있었고, 미국과 일본에 유학 갔다 돌아온 사관 생도들도 서재필을 비롯하여 십여명이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개화파 동료 윤웅렬(尹雄烈)이 함경도 남병사로 재임하면서 5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고, 비록 수구파 군영으로 편입되기는 했지만 박영효(朴泳孝)가 양성하던 병력도 어느 정도 동원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거사를 위한 병력은 자체 조달이 가능해졌지만 수구파의 배후에 있는 청나라 군사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일본군의 협조가 필요했다. 청군이 병력을 줄였다 하더라도, 아직 1500명이 남아 있어서 개화파의 군사력으로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김옥균은 일본 측의 의향을 타진하기 위해 일본 공사 다케조에를 만나 차관 교섭에 비협조적이었던 일에 대해 항의하고 조선의 국정 개혁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때 다케조에는 차관 교섭 건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시인하면서 앞으로는 김옥균의 활동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김옥균은 달라진 다케조에의 태도에 안심하기는 했지만, 전날의 행태를 생각해 보면 좀처럼 신뢰할 수가 없었다. 며칠 후에 박영효를 보내 다시 다케조에의 마음을 떠 보았는데, 이에 다케조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부추기기까지 하면서 협조를 약속했다.

"청나라는 장차 망할 것이니 귀국의 개혁 지사들께서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마시오."

예전의 의심 많고 소극적이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다케조에의 모습이었다. 김옥균은 의구심이 아직 가시지는 않았지만, 달라진 다케조에의 행동에서 일본 측의 정책 변화를 읽고 거사를 계획대로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일본은 청나라와 프랑스 간의 전쟁으로 인해 청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을 이용해 조선의 개화파를 부추기고 청과 연결된 수구파 정권을 약화시킨 다음, 그 틈에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계획을 알아탠 김옥균은 그 점을 거사에 역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 뒤 20여일 동안을 거사를 준비하면서 보낸 김옥균은 거사 10일 전쯤 다케조에를 다시 만나서 이른바 '삼책(三策)'을 알려 주고 협조에 대한 확답을 받아 냈다. 삼책이라 함은 첫째, 충의계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단결을 통하여 정변을 계획대로 추진시키고 둘째, 고종을 설득하여 정변을 승인받아서 거사 명분을 확립한 다음 셋째, 청군의 간섭이나 방해 책동은 일본군이 막아 준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김옥균은 거사 5일 전인 10월 12일에 대궐 안으로 들어가 고종과 단독으로 대면하여 세계{의 정세와 청과 결탁한 수구파의 매국적 작태를 설명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새 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김옥균의 역설에 감동한 고종은 마침내, "국가의 명운이 위급할 때, 모든 조처를 경의 지모에 맡기겠다."는 지시를 은밀히 내렸다.

고종의 동의를 얻는데 성공한 김옥균은 미국 공사에게도 곧 정변이 있을 것임을 알리고 협조를 부탁하여 대내외적으로 거사를 위한 준비 작업을 마쳤다. 아직 완전히 미덥지 않은 일본 측에게는 거사 일자를 정확히 알리지 않았지만, 우정국(郵政局) 낙성식 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동지들과 준비를 마무리했다. 다케조에로부터 일본 정부의 정확한 지시를 받은 후에 거사를 일으키자는 요청을 받았지만 김옥균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 무리한 정변 강행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E다. 1884년 10월 17일 오후 6시, 정동에 신축한 우정국 낙성식에는 총판 홍영식(洪英植)의 초청으로 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하여 축하연이 벌어졌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김옥균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 서기관에게 이날 거사를 일으킬 것임을 은밀히 알려서 일본군 동원을 준비시켰다.

연회가 거의 끝날 무렵 우정국 북쪽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화재가 발생했다. 가장 먼저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던 민영익이 매복하고 있던 개화파 무사들에게 칼을 맞고 한쪽 귀가 떨어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허겁지겁 다시 들어오자 연회장 안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때를 틈타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은 급히 우정국을 빠져나와, 매복하고 있던 서재필 휘하 사관 생도들을 경우궁으로 이동시키고 교동에 있는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일본군의 출동을 확인한 후에 대궐로 향했다.

창덕궁 금호문 앞에 당도한 그들은 김봉균(金奉均), 신복모(愼福謀) 등이 거느리고 온 40여명의 병사들을 문 밖에서 지키게 하고는 미리 내통하고 있던 수문군의 도움을 받아 대궐 안으로 들어섰다. 윤경완(尹景完)이 인솔하는 무장병력 50여명에게는 전문 앞을 지키게 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세사람은 고종이 있는 침전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고종(高宗)에게 우정국에서 변란이 일어난 것과 그 원인이 수구 세력에게 있음을 알리고 형세가 위급함으로 경우궁으로 피할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사태의 자초지종을 다지던 고종 내외도 침전 동북쪽 통명전 부근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오자 놀라서 그들을 따라나섰다.

고종 일행이 경우궁에 도착하자 박영효가 다케조에와 함게 일본군 병사 200명을 거느리고 와서 외곽을 지켰다. 그리고 서재필이 지휘하는 사관 생도 13명이 국왕의 거처 바로 앞을 지키면서 출입자를 통제하도록 조치한 후에, 왕명으로 중신들을 불러들여서 일단의 수구 세력을 척살해 버렸다. 그날 밤 안에 살해된 수구파 인사들은 윤태준(尹泰駿), 이조연(李祖淵), 한규직(韓圭稷), 민영목, 조영하, 민태호 등과 내시 유재현이었다.

수구파의 우두머리들을 제거한 개화파는 날이 밝자 대네외에 신정부의 발족을 알렸다. 새 정부 주요 직책의 면면을 살펴보면 고종의 사촌형 이재원(李載元)을 영의정에 내정하고 홍영식(洪英植)은 좌의정에, 박영효는 전후영사, 서광범은 좌우영사, 서재필이 병조참판, 윤웅렬이 형조판서, 이조참판에 신기선(申箕善), 도승지에 박영교가 포진하여 국가 중추기관을 개화파가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김옥균은 내무와 재무의 실권을 쥐게 되는 호조참판을 맡아 개혁을 뒷받침하는 재정의 조달을 담당하기로 했다. 내각 구성을 마친 새 정부는 다음과 같은 혁신적인 새 정책을 발표했다.

첫째, 청에 잡혀 간 대원군을 환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한다.

둘째, 문벌을 폐지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한다.

셋째, 조세 제도를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가난한 백성을 보호하여 국가 재정을 늘린다.

넷째,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서 우수한 자는 관직에 등용한다.

다섯째, 탐관오리 중에서 그 죄가 극심한 자는 처벌한다.

여섯째, 백성들에게 빌려 주었던 정부 소유의 환자미는 모두 탕감하고 받지 않는다.

일곱째, 규장각을 폐지한다.

여덟째, 빠른 시일 내에 순검(巡檢)을 두어 치안에 주력한다.

아홉째,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한다.

열번째, 유배되거나 구속되어 있는 자는 형을 감해 준다.

열한번째, 4개영을 1개영으로 통폐합하되, 그 중에서 장정을 봅아 근위대를 설치한다.

열두번째, 일반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하고 기타 모든 재정 담당 관청은 폐지한다.

열세번째, 대신과 참찬은 매일 합문 안에 있는 의정소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열네번째, 육조 이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은 없애되, 대신과 참찬이 이를 결정하게 한다.

그 외에도 개화파 혁명 정부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개혁안을 발표했다.

첫번째, 전 국민은 단발한다.

두번째, 외국 유학생을 선발하여 파견한다.

세번째, 궁내성을 별도로 설치하여 왕실 업무와 일반 국무를 구분한다.

네번째, 국왕을 '성상(聖上) 폐하(陛下)'로 칭해서 타국의 황제와 동등하게 예우하며 대조선국의 군주로서 존엄을 유지한다.

다섯번째, 지금까지의 관제를 폐지하고 내각에 여섯개의 부서를 둔다.

여섯번째, 과거제도를 폐지한다.

일곱번째, 내외의 공채(公債)를 모집하여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한다.

이와 같이 청년 개화파 관료들은 갑신년 혁명으로 부패와 무능에 젖어서 자신들의 안일만 추구하던 수구파를 몰아내고,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려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이때 김옥균은 34세, 홍영식이 30세, 서광범은 26세, 박영효는 24세, 서재필은 불과 19세였다. 그러나 민중의 기반을 확보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지하여 조급하게 서둘러 준비한 탓에, 불과 3일만에 단 한번의 반격을 받아 밀려나고 만다.

● 삼일천하

문제의 발단은 왕후 민씨에게서 나왔다. 민씨는 경우궁으로 옮긴 다음 날 아침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거처가 너무 협소하다면서 창덕궁으로 환궁하자고 졸 라댔다. 경우궁으로 옮기게 한 것은 좁아서 경비하기가 쉽기 때문이었는데 왕후 민씨가 이를 트집잡고 나온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조금 더 넓고 비교적 안심이 되는 계동궁으로 옮기도록 하였으나 왕후는 계속해서 환궁을 요구했다. 이것은 수구파의 일원인 전 경기감사 심상훈(沈相薰)을 통해 사건의 실상을 알게 된 민씨 세력이 청군과 내통하고 일부러 벌인 행동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김옥균 등이 외부 문제로 분주한 틈을 타서 민씨는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다케조에를 졸 라 기어코 환궁 의지를 관철시키고 말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옥균이 다케조에를 책망했지만, 다케조에는 "창덕궁으로 환궁해도 경비에는 문제가 없다."며 큰소리를 쳤다. 이미 환궁이 결정되어 고종도 채비를 마친 터라 어쩔 수 없이 박영효 등이 일본군의 무라카미 중대 병력과 함께 호위하여 국왕을 창덕궁으로 모셔갔다. 그러나 해질 무렵 대궐 문을 닫으려고 하자, 선인문 밖에서 진을 치고 있던 청군이 방해하여 양측 사이에 일촉즉발의 긴박한 상태가 조성되었다. 박영효는 강경하게 대응하자고 앴지만 김옥균과 다케조에는 타협책을 쓰기로 하여 궐문을 닫지 않고 궐 밖은 청군이 경비를 서고 궐 안은 일본군이 지키는 것으로 청군 측과 합의했다.

그런데 정번 3일째 되는 날 아침이 되자 다케조에는 돌연히 태도를 바꿨다. 일본군은 형편상 오랫동안 조선의 궐 안에 머무를 수가 없다고 하면서, 그날 안으로 철수하겠다고 통보해 온 것이다. 김옥균은 다케조에와 담판을 벌여서, 개화 정권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 3일 동안 철병을 미루고, 개혁 사업의 추진을 위한 자금 조달에 협조한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허망하게도 그날 안에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날 오전에 청군 제독 오조유(吳助維)로부터 시내가 평안하다는 편지가 고종에게 전해졌다. 그 얼마 후 원세개(袁世凱)가 600여명의 병사를 대동하여 국왕과의 접견을 요청했는데, 김옥균 등은 원세개의 접견은 허락할 수 있으나 군사들이 대궐로 들어오는 것은 안 된다고 주장하여 이 요구는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원세개는 전 우의정 심순택(沈舜澤)으로 하여금 청군 출동을 요청하게 하여 자신들의 군사적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억지로 확보한 다음, 마침내 5백명으로 구성된 한 부대는 오조유의 지휘 아래 선인문 쪽으로, 8백명으로 구성된 다른 부대는 자기가 직접 지휘하여 돈화문 족에서 창덕궁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에 따라 궁궐 외곽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과 청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당시 창덕궁을 에워싸고 공격했던 인원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전 병력과 수구파가 장악했던 좌우영 소속 조선 군졸들에다가, 개화파가 일본과 결탁하여 국왕을 연금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한 일반 백성들까지 가세하여 엄청난 수의 대부대를 이루었다. 이에 반하여 궁궐을 수비하던 병력은 일본군 200명과 개화파 자체 동원 병력 800명 정도로 그 수에서 이미 결판이 나 있었으며, 더구나 개화파의 병력은 변변한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

양쪽이 충돌하자 왕후 민씨는 청군 진지를 통해 이미 북묘로 옮겨갔고, 고종도 뒤따라가려고 했기 때문에 신정부 주요 인사들은 할 수 없이 일본군과 함께 이를 호위하여 나다가다 도중에 각자의 판단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 홍영식, 박영교 등 사관 생도 7명은 고종과 함께 북묘로 향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邊洙), 이규완(李珪完) 등과 나머지 사관 생도는 다케조에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향했다. 홍영식 등은 개화파 중에서 비교적 온건한데다가 원세개와 친분도 있고 수구파 족에도 가까운 사람들이 많아서 국왕을 따라가면 신변은 안전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묘에 도착한 직후 그들 모두는 참혹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한편 일본 공사관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김옥균 등은 10월 20일 오후에 다케조에와 함께 일본군의 호위 아래 인천으로 탈출하여, 이튿날 아침에는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지도세마루 호에 승선할 수 있었다.

● 고통스러운 망명

김옥균 등은 안전하다고 믿은 그곳에서도 또 한번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수구파의 집요한 추적과 다케조에의 배신으로 자칫 배에서 내몰리는 상황에 빠지고 만 것이다. 수구파는 그 사이에 벌써 심순택을 영의정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 구성을 마치고 김옥균 등을 '오적'으로 규정하여 인천까지 쫓아와서 다케조에에게 김옥균 등의 신병을 인도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런 상태에서 거짓말을 밥먹듯이 해 온 다케조에가 김옥균, 박영효 등에게 배에서 내릴 것을 요구했다. 김옥균 등은 이제 자결하는 방법 이외에 달리 도리가 없게 되었는데, 이때 지도세마루 호의 스치 선장이 "내가 이 배에 조선 개화당 인사들을 승선시킨 것은 공사의 체면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공사의 말을 믿고 모종의 일을 도모하다가 잘못되어 쫓기는 모양인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배에서 내리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도리인가? 이 배에 탄 이상 모든 것은 선장인 내 책임이니 인간의 도리로는 도저히 이들을 배에서 내리게 할 수 없다."라고 다케조에를 꾸짖고는 김옥균 일행을 배 밑의 밀실에 숨겨 주었다. 그러고 나서 수구파 인사들에게 "그런 사람들이 탄 사실이 없다." 하고 잡아 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추적자들도 외국 선박을 수색할 수가 없는 노릇이라 별 수 없이 돌아서고 말았다.

이렇게 김옥균 일행은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여 10월 24일에 지도세마루 호가 인천항을 떠날 때까지 4일 동안 꼼짝없이 배 밑바닥 밀실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인천항을 출발한 지 3일 후에 배가 나가사키에 도착하자 젊은 망명객들은 그제서야 안도와 좌절감이 함게 밀려와서 서로 붙잡고 통곡하며 회한을 삭였다. 그들은 도툐로 옮겨가 예전의 연고에 의지하여 한동안 후쿠자와의 집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셋집을 얻어 합숙하며 피곤한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끊임없이 망명지에 있는 그들을 죽이려고 했는데 갑신정변 때 발생한 일본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한 한성조약을 체결하면서 김옥균 등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일본이 정치범은 국제법상 인도하지 않는다고 거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비열한 일본 측은 자객을 보내서 드러나지 않게 처리한다면 이를 묵인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한편 조선에서는 개화파의 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민씨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전보다 더 심한 악폐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백성들이 부정부패가 심한 민영준(閔泳駿), 민영환(閔泳煥), 민영소(閔泳韶), 민영달(閔泳達)을 '사민(四閔)'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리고 개화파의 가족들은 모조리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러한 때에 김옥균은 일본에 도착한 직후부터 외무대신 이노우에를 만나려고 하였으나, 이미 이용가치가 없어진 그를 일본 측은 따돌리기만 했고 노골적으로 귀찮아하기까지 했다.

일본의 배신에 분노한 김옥균은 갑신정변의 경위와 일본 측의 관여를 만천하에 알리겠다고 나섰지만, 이 또한 명명지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본은 1885년 4월에 청과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고 조선에서 양국이 공동으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한 후, 거리낌없이 조선에 대한 경제 침략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는 개화파의 협조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김옥균 등을 더욱 박대했다. 김옥균은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울화를 겨우 다스리고 거처에 틀어박혀, 자신의 개혁운동을 회고하는 갑신일록(甲申日錄)을 쓰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 연이은 자객과 암살

김옥균을 제거하려는 조선 자객은 그의 목숨을 노리고 끊임없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제일 먼저 온 사람은 장은규(張殷奎)인데, "김옥균이 자유당 계열 무사들과 결탁하여 조선을 침공하려 한다."라는 소문을 퍼뜨려서 이른바 '오사카 사건'을 일으켰을 뿐, 김옥균의 신변에 위해를 가하지는 못했다. 이 사건이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는 김옥균에게 일본을 떠나 달라고 요청했지만, 빈곤한 조선 망명객 처지에 일본 이외의 다른 나라로 가기는 쉽지 않았다.

두번째 자객으로는 지운영(池運永)이라는 사람이 왔다. 그러나 지운영은 오히려 김옥균의 반대 공작에 휘말려 ?瞿?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옥균은 이 사실을 거론하며 외무대신 이노우에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본 신문에 보도되자 일본 정부는 지운영을 조선에 송환하고, 김옥균에게는 일본과 조선의 우호에 방해가 된다면서 일본을 떠나 달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김옥균은 이에 항의하며 이노우에를 상대로 한 문서를 공개하고 일본 신문에 고종에게 보내는 장문의 상소와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 앞으로 사건의 책임을 따지는 공개 서한을 게재하였다.

이렇게 김옥균으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큰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하자, 일본 정부는 1886년 7월에 그를 오카사와라 섬에 강제로 연금해 버렸다. 이때 동행한 동지는 이윤과 한사람뿐으로, 이곳에서 김옥균은 2년 동안 실의의 나날들을 보냈다. 습한 기후와 악조건을 견디지 못하여 연금 해제를 호소했으나, 1888년에 훗카이도[北海道]로 이송되었다가 1890년에야 겨우 풀려나올 수 있었다. 오카사와라 섬에서는 소일 삼아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때 만난 와다라는 청년이 그를 추종하여 상하이에서 죽는 순간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연금에서 해방되어 도쿄로 돌아온 김옥균은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승부를 걸기 위해 청나라로 들어가 실권자 이홍장(李鴻章)과 담판을 짓기로 했다. 이것은 마침 일본 주재 공사로 새로 부임한 이홍장의 아들 이경방이 자신의 아버지가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편지를 건네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김옥균으로서는 일본에서의 거듭된 재기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아직도 조선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청의 실권자를 만나서 협조를 얻어 보려는 의도였지만, 그것은 외세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었던 날개 꺾인 조선 지식인의 한계를 보여 준 것이었다.

청국행을 결심한 김옥균은 백방으로 여비를 조달하기 위해 노력하던 차에 오사카의 한 후원자에게서 경비를 지원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동료들은 그의 신변을 걱정해서 비밀리에 행동하고 여러명의 수행원과 함께 가도록 권했으나, 그는 일본인 와다와 심부름꾼 한사람만 데리고 떠났다.

그런데 오사카 역에 도착하자 의외의 마중객이 나와 있었다. 조선에서 온 자객인 이일직(李逸直)과 홍종우(洪鍾宇)가 그들이었다. 이일직은 자신을 청나라와 일본을 왕래하면서 약재상을 하는 사람이고,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생이며 자신의 친척이라고 거짓으로 소개했다. 그러면서 평소부터 김옥균을 존경해 왔기 때문에 자기가 청국행 경비를 제공하겠노라고 말했다.

김옥균은 한눈에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객임을 알아보았지만 이드를 역이용하려는 생각으로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러자 이일직은 홍종우가 동행하며 김옥균을 도와줄 것이라고 말해 그의 의심을 줄이려고 했다. 하지만 사실은 김옥균이 상하이로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 박영효까지 암살하려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결국 박영효를 암살할 간 이일직은 박영효의 재치 있는 대응으로 체포되어 훗날 그들의 배후가 밝혀지기도 했다.

한편 1894년 2월 말쯤 상하이에 도착한 김옥균 일행은 외국인 거주지 안에 있는 한 여관에 짐을 풀었다. 투숙한 다음 날 오후, 김옥균 일행은 거리를 구경하기로 하고 오전에는 각자 용무를 보았다.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김옥균은 피곤하다고 침대에 누우면서, 와다에게 일본에서 타고 온 배의 사무장인 마쓰모토에게 전할 말이 있으니 그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때가 김옥균에게는 운명의 시간이 되고 말았다. 와다가 나가자 김옥균의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눈치챈 자객 홍종우가 때를 놓치지 않고 김옥균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여 그를 절명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상하이 경찰은 홍종우를 체포하고 김옥균의 사체는 와다의 요청에 따라 일본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홍종우와 김옥균의 사체를 청국에게 넘겼고, 청국 정부는 홍종우의 범행을 조선인 상호간의 문제라고 하여 다시 조선에 인계하였다. 조선에 도착한 김옥균의 사체는 양화진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되고 말았다. 효시(梟示)된 그의 목에는 '모반(謀反)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 옥균(玉均) 당일 양화진두(楊花津頭) 능지처참'이라고 쓰여진 커다란 천이 나부끼고 있었다.

이렇게 김옥균은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44세의 한창 때였다. 독립, 자주, 자립이라는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문벌을 폐지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국민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그는 이역 땅에서 동족의 손에 암살되는 비운을 맞고 만 것이다.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 이 개화주의자는 살해된 이듬해에 반역죄가 사면되고 1910년에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은 민중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소수 지성인들의 거사였다는 점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과 비교되고, 외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조선 내부의 기층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점에서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과 구분된다. 또 조선왕조의 체제 자체를 변화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갑오경장(甲午更張)과도 구별된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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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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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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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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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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