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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51.시대를 앞서간 북학파(北學派)의 거장 박지원(朴趾源)

회기로 2010. 1. 26. 20:41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새로운 문물을 도입하여 낙후된 조선을 개혁하려고 한 선각자였다. 그는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대변되는 실용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서 조선 사회의 전통적인 특성과 결합시키고자 했다. 그렇다고 해서 연암이 당시와 완전히 다른 형태의 사회를 꿈꾸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현 체제를 근본부터 변혁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권력층에 속하면서도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사회를 개혁하고자 한 점에 있어서는 혁신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 연암은 많은 문학 작품을 저술한 문학가이기도 했다. 열여덟살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광문자전(廣文者傳)',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등 모두 12편의 소설을 남겼다. 연암은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 양반 사회의 위선에 찬 실상을 폭로하고 지도층의 무능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그리고 사회 전반에 실용적인 사고 방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했다.

연암을 일찍부터 조선의 낙후성을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끊임없이 찾았다. 당시에는 오랑캐라 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깨고 과감히 배울 것은 배우자고 주장한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학문이나 진리의 가치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것이므로, 그것의 존재 의미도 실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발전이란 항상 새로운 관점을 통해 변화될 때만 얻을 수 있다는 진보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다.

연암의 개방주의는 주체성을 굳건히 지키는 상태에서 가치가 있는 새로운 문물만을 수용하자는 자세였기 때문에 민족의 자존이나 원칙이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도 당시 사회의 굳게 닫힌 문을 완전히 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개방주의는 그 후 실학파와 개화파에게 면면이 이어져 진보주의 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 신학문에 심취하다.

박지원(朴趾源)은 영조(英祖) 재위 13년(서기 1737년)에 한성 반송방 야 동(지금의 서대문)에서 박사유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때 세사을 피해 은거했던 금천 연암협의 지명을 따서 호를 연암(燕巖)이라 하였다. 그의 본관은 반남(潘南)이었는데, 조선의 개국공신 박은(朴訔)의 13대 손이자 선조(宣祖)의 부마(駙馬)였던 금양위(金陽尉) 박미(朴彌)의 5대 손으로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박사유는 벼슬길에 한번도 나가지 못한 백면서생(白面書生)이었고, 할아버지 박필균은 지돈령 부사까지 역임했으나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서 그의 집안은 가난을 면치 못하였다.

연암은 열여섯살 되던 해에 동갑인 전주(全州) 이씨(李氏) 보천의 딸과 혼인한 후에야 비로소 공부다운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연암이 아직 글공부를 제대로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안 장인이 직접 '맹자(孟子)'까지 가르친 후, 자신의 동생인 홍문관 교리 이양천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던 것이다. 연암으로서는 장인과 처숙을 스승으로 모신 셈이었다. 이때부터 처남 이재성(李材盛)과 둘도 없는 글벗으로 지내면서 학문에 몰두한 그는 스무살 무렵까지 두문불출하며 유교 관련 책들은 물론이고 학문에 관련된 모든 책들을 두루 섭렵했다.

늦은 나이에 장인과 처숙에게 처음 학문을 배운 이후로는 특별히 스승을 모시지 않고 독학을 한 연암이었지만, 천성적으로 뛰어난 글재주를 가지고 있었던지 20대 초반에 이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시 뛰어난 문장가였던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이 연암의 글을 보고 "장차 나의 자리를 차지할 사람은 이 젊은이밖에 없다."고 경탄할 정도였으나, 연암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청년 시절에 연암은 스스로도 자신이 이룬 성과에 흡족했던지, 세상의 모든 일 중에는 하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자신만만해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정도로 패기에 넘쳤던 연암은 과거(科擧)에는 원래 뜻이 없었는지 아니면 계속 실패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른다섯살부터는 아예 응시조차 하지 않았다. 한때 성균관에 소속되어 있었고, 성균관에서 자체적으로 치르는 시험에도 정기적으로 참가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애초부터 과거에 뜻이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연암은 왜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그의 성격과 당시의 정치적 현실, 그리고 학문의 새로운 경향인 북학에 몰입했던 그 무렵의 행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암은 타협을 모르는 성품이었고, 언행 자체도 엄격하여 주변의 배척과 질시를 받기 쉬웠다. 또한 당시의 시대 분위기에 불만이 많았고, 세도가와 고위 관리들에 대한 비판 의식이 높아서 권력층의 비호를 받기는커녕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또 하나의 이유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정조(正祖)의 외척 방지 정책이다. 정조는 즉위하기 전부터 홍봉한(洪鳳漢)과 김귀주(金龜柱)로 대표되는 외척의 폐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외척 출신은 가급적 등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연암의 집안은 앞서 언급한 대로 왕실과 인척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조정에서 의도적으로 멀리한 일면이 있었다. 그리고 주변의 심한 견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연암이 과거르 포기한 원인은 이것만이 아니다. 좀더 정확한 이유는 그 무렵부터 그가 청나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 사상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담헌 홍대용과의 교류를 통하여 신학문을 접하게 된 연암은 가족을 아예 처가에 맡겨 놓고 관청에 딸린 숙소에 거처하면서 북학파 사람들과 학문 탐구에만 골몰하였다. 결국 그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해 주는 신학문에 심취한 나머지, 관직으로의 진출을 포기하고 학문 탐구의 길을 인생의 목표로 정했던 것이다.

● 고통과 핍박의 세월, 그리고 연행(燕行)

이처럼 연암에게는 시대에 앞선 식견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를 개척하는데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있었지만, 아무런 경제적 뒷받침이 없는 그의 생활은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뜨게 된 이 시기는 연암에게 있어서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운 시기였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가장 불우한 시기였다. 그의 생활은 남이 보기에도 딱할 지경으로, 그의 제자이자 평생의 동지였던 이서구(李書九)는 연암의 비참한 생활을 보고 눈물로 한탄하기도 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폐인이나 마찬가지인 생활을 하던 연암에게 정치적으로도 위험한 시기가 다가왔다. 그의 나이 마흔살 때에 영조(英祖)가 죽고 정조(正祖)가 등극하여 국왕의 측근인 홍국영(洪國榮)이 득세할 때의 일이다. 홍국영은 권력을 잡자 왕세손 시절 정조를 위협하던 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했는데, 연암을 아끼던 홍낙성(洪樂性)이 이에 연루되자 그 화가 여암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홍낙성은 홍국영과 같은 집안 출신이었지만 홍국영에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나섰기 때문에 제거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다.

친구 백영숙으로부터 홍국영이 자신을 옭아 넣으려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연암은 가족을 데리고 한성을 빠져 나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숨었다. 그곳은 개성으로부터 30리쯤 떨어진 좁은 골짜기로, 봄이면 바위 절벽에 제비들이 둥지를 튼다고 하여 '연암(燕巖)'이라고 불렸다.

이곳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에 홍국영이 실각하여 다행히 화는 면할 수 있었지만 궁핍한 생활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연암은 그곳에서 직접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험한 일 한번 해 보지 않았던 서생으로서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때 개성 유수로 재직하고 있던 친구 유언호(兪彦鎬)가 많은 도움을 주어서 근근이 살아갈 수는 있었다.

연암은 조숙하여 평소 교류하던 친구들이 대부분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다. 유언호도 연암보다 일곱살 연상으로, 둘은 한성에서 같이 학문을 익히고 금강산 유람도 함게 했던 절친한 사이였다. 또한 연암을 신학문의 길로 인도했던 홍대용(洪大容)도 멀리서나마 항상 후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당시 태인 현감으로 있던 홍대용도 연암보다 여섯살 연상이었다.

연암에서의 2년여 도피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한성으로 돌아온 연암은 평계에 있던 처남 이재성의 집에 한동안 얹혀 살았다. 그즈음 팔촌형 되는 영조의 부마 금성위(金星尉) 박명원(朴明元)이 청황(淸皇) 고종(高宗)의 칠순을 축하하는 사절로 선발되어 연암에게 수행원으로 동행할 것을 권했다. 그리하여 연암은 그의 인생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던 연행(燕行)에 나서게 된다.

정조 재위 4년(서기 1780년)의 이 연행은 생활고와 좌절에 허덕이던 연암에게는 일종의 돌파구이기도 했지만, 그동안 자신이 그렇게 몰두했던 신학문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로서는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으나 감히 청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는데 그동안 너무 많은 고생을 한 탓인지 머리가 이미 백발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연암 일행은 압록강을 건너 연경으로 들어갔으나 청나라 황제가 열하로 피서를 떠나 있어서 그곳까지 찾아가야 했다. 연암은 이 여행의 전 과정을 날짜별로 자세하게 기록하여 훗날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세상에 내놓았다.

● 열하일기(熱河日記)로 유명인사가 되다.

연암은 연행에서 돌아온지 3년 후쯤 열하일기를 총 26권으로 발간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찬반양론으로 극명하게 갈렸다. 신진 사대부들에게는 혁신적 사상과 신선한 문체로 호감을 샀지만, 기존의 사대부들에게는 극도의 반감을 샀던 것이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청의 발달된 문물을 소개하고, 조선도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부강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허구에 찬 양반 사회를 특유의 독설로 풍자하여 당시 사회에 한층 더 충격을 던져주었다.

무엇보다도 열하일기 파문의 근원은 당시 선비들의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와 '북벌론(北伐論)'의 허위와 위선을 적나라하게 지적한데 있었다. 청(淸)이 명(明)을 멸망시킨 후 조선 역시 힘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청에 굴복하고 조공까지 바치는 처지가 되었지만, 애초부터 청을 오랑캐로 여기던 경향이 강해 청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일한 문명국으로 떠받들던 명이 사라졌으니 이제 참된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할 나라는 조선밖에 없다는 '조선중화주의'가 지도층의 의식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문명국이 오랑캐들에게 치욕을 당했으므로 언젠가는 보복을 해야 한다는 '북벌론'이 명분상 힘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의 허구성을 연암이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연암은 세상이 바뀌어 가고 있는데 실생활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성리학적 관념론에만 매달려 있는 것을 한심하게 여겼다. 그리고 나라의 수준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청의 발전된 실용 학문을 오랑캐 문화라고 배척하는 고루한 생각을 통렬하게 공박하였다.

또 '북벌론'이라는 것은 실제적인 힘과 의지도 없으면서 입으로 떠들기만 하는 빈말에 불과하므로,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유명무실한 백일몽일뿐이라고 거침없이 야유했다. 더구나 그러한 왜곡된 사고는 모두 독선적이고 허구에 찬 양반 사대부들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하고 나왔으니, 당시로서는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대적 모순의 정곡을 찔러 버린 셈이었다. 내용도 매우 파격적인데다 문체마저 당시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던 고문체가 아닌, 일상 생활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서술체여서 더욱 큰 물의를 일으켰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나오자 연암은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젊은 인사들 사이에서는 그의 파격적인 사상과 문체에 심취하여 그것을 본받는 것이 어느덧 유행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훗날, 열하일기 출간으로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한 실용 문체에 대한 정치적 반감의 표출로서 '문체반정(文體反正)' 조치가 일어나기도 했다.

● 뒤늦은 관직 생활

연암은 이러한 명성과 규장각(窺巖面) 소속 관리로 포진해 있던 그의 제자들의 뒷받침에 힘입어 정조 재위 10년(서기 1786년)에 종9품에 해당하는 선공감 감역이라는 관직에 등용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쉰으로 미관말직이나마 처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당시 규장각은 연암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규장각의 검서관(檢書官)으로 있던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성해응(成海應) 등은 연암학파의 대표적 인물이었으며, 연암의 제자들인 이서구(李書九), 남공철(南公轍), 김조순(金祖淳) 등이 모두 규장각에 있었던 것이다.

규장각은 정조가 외척과 권신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억제하고 학문 중심의 정치를 펴 나가기 위해 설립한 기구로서, 신진 관료들을 국왕의 근위 세력으로 양성하고 탕평정치(蕩平政治)를 보좌할 관료들을 키우기 위한 정책적 산실이었다. 겉모습은 왕실 직속 도서관이었지만, 정치적 무게는 그 이상이었다. 이러한 규장각이 연암학파의 온상으로 변해 있었으니, 연암학파의 근원이자 최고 지도자격인 연암을 조정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연암은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나가는 것을 일찍이 포기하였지만, 그가 쌓아 올린 학문적 성과에 의해 결국은 벼슬길에 나서게 된 셈이다.

젊어서부터 스스로 관직으로의 진출을 포기하고 학문에만 정진했던 연암이었지만, 이때는 순순히 벼슬을 받아들였다. 계속되는 경제적 어려움도 이유였겠지만, 유언호를 비롯한 친구들의 적극적인 권유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학문적 이념을 국가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거으로 보인다. 또 연암 스스로도 그동안 갈고 닦은 학문을 실제 정치에 실현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연암이 관직에 나간 이듬해에 그에게 시집 와서 평생을 고생만 한 동갑내기 부인 이씨가 별세하고 만다. 연암의 부인 이씨는 이상 속에서만 사는 남편 때문에 가난으로 고통받으면서도 가정 살림을 도맡아 훌륭한 내조를 했던, 연암에게는 더없이 좋은 반려자였다. 연암이 관직에 나가게 되어 처음으로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는데, 반년도 못 되어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 애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씨가 사망한 뒤 그는 두번 다시 재혼하지 않았을 정도로 이씨 부인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또 부인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자신이 부모처럼 따랐던 열다섯살 손위의 유일한 형 희원이 세상을 떠났으니, 연암에게 있어 그해는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할 수 있는 해였다.

뒤늦게 관직에 나간 연암은 사복시 주부, 사헌부 감찰, 제능령을 거쳐 55세 되던 해에 잠시 한성부 판관을 역임한 후, 그 해 겨울에 현감이 되어 안의로 가게 되었다. 안의현(安義縣)은 경상도와 전라도가 만나는 경계 지역으로 이인좌(李麟佐)의 반란 때에 적극 호응했던 전력 때문에 반란이 진압된 후 핍박을 받아 연암이 부임할 당시까지만 해도 민심이 흉흉한 상태였다. 이곳에서 연암은 사심 없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최대한 발휘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4년여를 근무하는 동안 지역 살림과 정서를 많이 회복시켜 놓았다. 연암의 선정에 대한 소식을 들은 정조가 "다스림에 있어 지극히 선량하다."는 치하와 함께 검서관으로 있던 박제가를 연암에게 보내 위로하게 할 만큼 큰 인정을 받았다.

연암은 공무 중에도 틈틈이 집필에 정력을 기울여서 미신을 타파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조하는 '홍범우익서(洪範羽翼序)'와 모순된 인습을 비판하는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을 저술하였다. 박씨전은 아전 임술중의 아내가 남편의 3년상을 마치던 날 자결한 사건을 목격하고, 그러한 행동을 순절이라며 칭찬하는 사회 풍습을 비인간적이라고 비판한 글로서, 여성 해방 사상을 담고 있다.

● 문체반정(文體反正) 정책의 대상으로 지목되다.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부인한 다음 해(서기 1792년), 사회 정서의 문란이 경박한 문체를 추종하는 사조 때문이라는 판단 아래 일종의 문풍(文風) 복고 운동인 '문체반정(文體反正)' 정책이 시행되었다. 정조가 주도한 이 정책은 단순한 문예사조의 재정립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분산된 국가 여론을 한데 모으고 자신의 탕평정치를 강화하려는 여러가지 정치적 목적을 담고 있었다. 정조는 문풍 변질의 책임을 연암에게 돌리고 기존의 고문체를 사용하여 일종의 반성문을 제출하도록 하였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연암을 개혁주의자들의 막후 실력자로 인정하여, 연암을 정조 자신의 정치 세력으로 끌어들이려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기도 했다. 정조로서는 보수파의 요청을 수용하면서도 그 반대편에 있는 개혁 진보파의 실세인 연암을 포섭하려는 일석이조의 정책을 구사한 셈이다. 문제에서 해결책을 찾고 혼란 속에서 유리한 돌파구를 발견하는 정조 특유의 정치 감각을 보여주는 정책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사건은 이동직(李東織)이 정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이가환(李家煥)을 질투하여 그의 문장과 사조를 문제삼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던 것이 시포가 되었다. 마침 청나라를 모방하려는 당시 사조가 못마땅했던 정조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도 달성할 양으로 문풍의 변화에 대한 책임이 이가환에게 있지 않고 연암에게 있다고 지목한 것이다. 개인을 비난하는 상소를 엉둥하게 확대시켜 정치적으로 이용한 셈인데, 한족의 불만은 선수를 쳐서 강경책으로 무마시키고 다른 편은 자신의 지시에 순응하도록 만들어 포용하는 고단수의 정치력을 보여 준 것이다.

정조의 의도를 알아챈 연암은 고문체를 사용하여 농업 관계서인 '진과농소초문'을 지어 바쳤고, 정조가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비록 자신의 뜻과는 상반되지만, 몸을 한번 굽혀 자신에 대한 비판을 줄이고 정조의 정치적 의도도 만족시켰던 사실을 통해, 젊은 시절 그토록 강경했던 연암도 이 시기에 와서는 노련한 정치 감각을 갖게 외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의 문장 서술 방법은 육경(六經)에 나오는 옛 글귀를 그대로 인용하는, 실제 현실에서 쓰는 언어와 동떨어진 난해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른바 문장은 한나라의 경향을, 시는 당나라 사조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암은 "글이란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여 형식에 얽매이는 태도에 반대하였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증좌소산인(贈左蘇山人)'이라는 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사실대로 쓰는 데에 글의 참맛이 있는 것이지, 굳이 먼 옛날에서 그 근본을 가져올 이유가 없다. 한, 당은 지금 세상이 아니며, 설사 반고(班固)나 사마천(司馬遷)이 다시 살아온다 하더라도 과거의 자신들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의 진리도 천년 뒤에는 고대의 것이 되고 마는 법이다.'

이렇게 혁신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던 연암이었지만, 현실과 타협하여 정조의 정책을 도와주려는 뜻으로 반성문을 제출하고 고비를 넘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 무렵 연암에게 정치적 위기를 가져온 또 한번의 파문이 있었다. 연암이 청의 풍물을 흠모한 나머지 오랑캐 복장을 하고 다닌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던 것이다. 이 헛소문을 기회로 청을 배척하는 척화파(斥和派)의 후손으로 평소 연암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유한준(兪漢雋)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사실 무근임이 밝혀져 이번에도 역시 무사할 수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의 와중에도 지방관의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하던 연암은 안의 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잠시 쉬었다가 정조(正祖) 재위 21년(서기 1796년) 7월에 60세의 나이로 면천 군수에 임명되었다.

● 물러날 때를 알다.

면천 군수로 부임하기 전에 입궐한 연암은 제주도 사람 이방익의 '표류기(漂流記)'를 고쳐 쓰라는 왕명을 받고 임지에 부임하기에 앞서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로 개작(改作)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중국 지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과시했다. 또 1799년에 농업을 진흥하기 위하여 개량된 농사법을 필요로 하자, 예전에 지었던 '과농소초(課農小抄)'를 보강하여 내고, 사회개혁론을 담은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추가로 지었다. 그 다음해에 65세의 나이로 양양 부사가 되었지만, 채 1년도 되지 않아 늙고 병들었음을 이유로 사직하고 한성으로 돌아온다.

양양 부사로 임명되던 해에는 평소 그를 신임하던 정조(正祖)가 갑자기 죽고 순조(純祖)가 즉위하여, 그동안의 개혁 조치를 무시하고 옛 제도로 되돌리는 수구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또 정권을 틀어쥔 노론 벽파가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사학(邪學)을 타파한다는 구실로, 개혁적 성향의 관료와 학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때 발생한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연암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자신이 관직에 머물러 있을 시대가 아님을 알게 된 연임은 병을 핑계로 스스로 물러나 버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당장의 큰 화는 모면할 수 있었지만, 관직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편안히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직하고 얼마 후에 연암은 포천에 땅을 구해 부친의 묘를 이장하려고 했는데, 이로 인해 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사실 젊었을 때 연암의 부친이 사망하자, 장지 문제를 놓고 연암의 집안과 이유라는 사람의 후손들 사이에 송사가 벌어진 적이 있었다. 송사의 결과는 연암의 집안의 쇠락하기는 했지만 당시 권력층과 연이 닿아 있던 까닭에, 연암 집안의 의도대로 처리되었다. 실상은 경제적 능력이 없는 연암의 집안이 분쟁의 소지가 많은 땅에 장지를 정한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인데, 권력의 끝자락이나마 쥐고 있던 연암 측이 관청의 도움을 받아 장지를 인정받는 것으로 결론이 났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상대방은 자책 끝에 관직에서까지 물러나고 말아, 연암은 항상 죄스러운 마음이 있었다. 그러다가 인생의 말년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그동안 찜찜하게 여겨 왔던 부분을 정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포천에 새로 구입한 땅 역시 연암과는 적대적 관계에 있던 유한준(兪漢雋)의 선산이 있는 곳이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는데, 그 말대로 되고 만 것이다. 유한준은 연암이 이장한 묘를 들어내 버리고 그곳에 자기 종친의 묘를 이장해 버렸고, 어쩔 수 없이 연암은 다른 장소를 구해 부친의 묘를 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얽히게 된 연암과 유한준의 악연은 그 뒤 그들의 후손대에서 화해의 계기를 맞게 된다. 연암의 사상과 정신은 그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에 의해 계승되어서 구한 말 김옥균(金玉均), 유길준(兪吉濬) 등의 개화파에게 전해졌는데, 이때 유길준이 유한준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역사가 만들어 낸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말년을 보내던 연암은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순조(純祖) 재위 5년(서기 1805년) 10월 20일에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인 박제가가 달려와서 "선생님! 어찌 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제자를 내버려두고 가시렵니까?" 하고 통곡했지만 연암은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 '까마귀는 검지 않다.'

연암은 일찍이 그의 장인이자 스승인 이보천이 지적한 대로 재주가 비범하고 총명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뜻이 높아 일정한 틸이나 형식에 얽매이기를 싫어하였으며, 당시 권력자나 양반들의 속물 근성을 혐오하여 우스개로 희화화하여 비꼬기를 즐겼다. 그러나 세상에 대하여 무조건 부딪쳐 나가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비타협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을 풍자와 해학으로 완화시켜 세상의 풍파로부터 비껴가기도 했다.

술을 즐기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일면 때문에,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주제에 노는 것만 즐긴다는 오해도 받았지만, 그에게 있어 술자리는 눈에 거슬리는 세상을 잊고 동료들과 토론을 나누고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연암은 예술가의 호방함과 선비의 근엄함을 함께 가지고 있었으며, 싫고 좋음이 분병하여 사람들을 세심하게 가려서 싫어하는 사람들은 거리를 두고 상대하였다. 이런 까다로운 처세 때문에 관직에 나가서도 잘 맞지 않는 사람들과는 자주 불화를 일으켰으며, 오만한 독불장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공무에 임할 때는 기강이 서릿발 같았고, 핵심을 잘 파악하여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절도가 있고 사리를 잘 분별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우스개로 복잡한 분쟁을 해소하기도 했으며, 때로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극히 싫어했다. 청렴결백한 일면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성품으로, "사대부는 물질로서 사람을 기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평생 지키며 살았다. 또 안의 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한성으로 돌아와 있을 때, 그의 선정을 치하하기 위하여 현민(縣民)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우려 하자, "비문을 세운다면 내가 앞장서 그것을 깨버리고 주모자는 벌주도록 하겠다."며 강경하게 저지하기도 했다.

연암의 사상적 바탕은 "같다면 벌써 진실이 아니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형식주의와 보수 성향을 거부하는데 있다. 특히, "까마귀는 검다."는 식의 경직되고 고착화된 생각을 싫어했다. 그는 "까마귀 날개보다 더 검은 것도 없어 보이지만, 빛에 비추어 보면 엷은 황색도 들고 연한 녹색도 보이며 비취색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매사에는 정해진 일정한 빛깔이 없는데도 사람이 먼저 눈와 마음으로 정해 버리고 만다."며 주관적 독단주의를 비판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조선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조선중화주의'와 '북벌론'을 내세워 국민적 단합과 국력의 축적을 도모했다. 그것이 전대미문의 전란을 연이어 겪은 조선 사회를 통합시키고 지탱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한 세기 정도 세월이 지나자 그것이 내포하고 있던 국수주의적 폐쇄성으로 인해 조선을 낙후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반면에 조선이 오랑캐로 취급하던 청(淸)은 한족(漢族) 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서양 문물까지 도입하여, 18세기 즈음에는 찬란한 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제는 쓸데없는 북벌론에 집착하지 말고 청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바로 연암 등이 주장한 북학(北學) 사상이었다.

더구나 조선의 정신 구조를 형성하고 있던 성리학은 이즈음 그 생명력이 다하여 공리공론에만 매달리는 폐단을 드러내고 있어서, 새로운 사상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즉, 사상계가 재편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던 것이다.

연암의 사상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소유 관계를 변혁해야 한다는 주장과, 사회의 변화는 전통적인 인간성을 극복해낼 새로운 인간상이 나타남으로써 가능해지고 더욱 촉진된다는 생각이다. 우선 당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던 대지주의 토지 집중화 현상을 막기 위하여 토지의 재분배를 주장하였다. 개인의 토지를 국가가 전부 회수하여 골고루 재분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그것은 이상에 불과하므로 차선책으로 들고 나온 것이 바로 '한전법(限田法)'이었다.

연암이 주장한 한전법은 일종의 토지 소유 상한제로서, 일정 한도 이상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고 소유 한도를 넘어선 토지는 타인에게 매매 등의 방법으로 양도하게 하여,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균등하게 분배되게끔 유도하자는 방안이다.

또 연암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새로운 인간형은 상공법의 발달과 유통 경제의 확대에 따라 이러한 시대적 경향에 적응할 수 있는 기업가적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인간형은 양반뿐 아니라 어떤 계층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고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로 인해 연암은 보수파로부터 더욱 집중적인 비난과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다만 그의 출신이 권력층과 연결된 가문이었고, 혈기왕성하여 좌충우돌하던 시기에는 재야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견제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갔을 때도 거의 외직이나 미관말직에 있었던 것은 물론, 그때에는 이미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관직의 주요 기반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극도로 험한 경우는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말년에 정조가 죽고 시대 사조가 보수 반동으로 회귀하자 더 이상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은퇴하였으며, 그 얼마 후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극심한 탄압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 역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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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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