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훌륭한 임금이라 해도 직접 자신의 저술을 남기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정조(正祖)는 18세기 후반기에 실학을 크게 융성시키고 서자(庶子)라도 인재를 파격적으로 높이 쓴 성군(聖君)으로 손꼽힌다. 뿐만 아니라 그는 홍재전서(弘齋全書)라는 대작을 손수 저술하였고, 귀족 이하 온 백성들에게 독서의 생활화를 장려한 군주이기도 하다.
"독서란 곧 이 나라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첩경이다. 아무리 읽기 싫어도 열흘에 한권씩 좋은 책을 읽으면 그만큼 자기 자신이 성장할뿐 아니라 이 나라가 부강해질 것이다."
정조는 1752년 영조(英祖)의 둘째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빈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산(汕), 자는 형운(亨運)으로 1759년 8세의 나이로 세손(世孫)에 책봉되었다. 1752년 윤 5월에 신임사화(辛壬士禍)를 비판했던 사도세자가 노론(老論)세력의 음모로 살해된 후 당쟁(黨爭)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며 성장했던 정조는 홍국영(洪國榮)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지켰고, 철저히 스스로를 숨기며 지내다가 1776년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역사학자들이 그를 뛰어난 제왕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이 고질적인 당쟁에 있음을 알고 이를 혁파하는데 진력함으로써 조선 말기 사회적 부흥을 이룬 데 있다. 그는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을 계승하여 당파의 색깔을 가리지 않고 새로운 인재를 대거 등용해 왕권 강화를 추구해 나간 것이다. 그의 이같은 판단은 조선왕조(朝鮮王朝) 내내 신진세력의 위압으로 인해 통치권이 파행으로 치달아 왔음을 절감한 데 따른 것이다.
그는 우선 최측근인 홍국영을 도승지(都承旨)로 발탁한 뒤 국왕을 호위하는 숙위소의 대장을 겸하도록 했다. 세손 시절부터 줄곧 그를 경호하던 홍국영은 날랜 병사들을 뽑아 숙위소를 창설해 국왕을 호위하는 중책을 맡은 것이다. 정조는 이어 새로운 인재를 국왕의 친위세력으로 만들어 최대의 신진세력이었던 노론세력을 적극 견제해 나갔다.
● 규장각(窺巖面) 설치 왕권 강화의 기틀 마련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홍국영(洪國榮)은 실권을 장악하자 누이동생을 정조(正祖)의 후궁으로 밀어넣어 권력을 남용하는 퇴행적인 모습을 보였다. 홍국영의 이같은 행태는 정조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정조가 기대한 것은 노론 주도의 신권세력으로부터 취약한 왕권을 보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홍국영의 세도정치(勢道政治)는 오래가지 못했다. 누이동생이 빈으로 입궁한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고, 정조 또한 그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홍국영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왕비를 독살하려는 음모까지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돼 4년만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방출됐다.
정조는 홍국영의 세도정치 기간 동안 왕실도서관 격인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한 뒤 신진인사를 대거 기용해 이들을 왕권의 친위세력으로 육성해 나갔다. 규장각은 단순한 왕실도서관이 아니었다. 규장각은 통치이념의 최고 유권해석기관이자 근왕(近王)세력의 요람으로 작동한 것이다. 왕실도서관을 사실상의 권력기관으로 만든 정조의 의도는 통치이념의 본거지를 왕권의 관리하에 두고자 했기 때문이다.
1776년에 설치된 규장각이 조선왕조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홍문관(弘文館)을 대신하는 학문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승정원(承政院)과 춘추관(春秋館) 등의 기능도 부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강력한 근왕세력의 중심지로 키우려 했다. 규장각은 규모가 급속도로 팽창하고 기능이 다양해졌다.
정조는 규장각을 운영하면서 당하관의 소장 관원 중 우수한 인재를 뽑아 격려하고 매월 두차례 시험을 실시해 상벌을 내리는 방법을 택했다. 홍국영 축출을 계기로 본격적인 친정(親政)채비를 차린 정조는 규장각을 최고의 국가정책 자문기관 겸 혁신정치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정조의 이같은 '규장각정치(奎章閣政治)'는 영조의 '탕평정치(蕩平政治)'를 계승한 것으로 그 뿌리는 숙종(肅宗)의 '환국정치(換局政治)'에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신권(臣權)에 대한 왕권(王權)의 확고한 우위확립을 제도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정조가 규장각정치의 핵심 인물로 발탁한 대표적인 인물은 남인(南人)계의 채제공(蔡濟恭)을 비롯해 정약용(丁若鏞), 이가환(李家煥) 등의 실학자와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등의 북학파였다.
정조는 왜 이같이 변형된 통치체제를 만들어냈던 것일까? 이는 영조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노론 주도의 신권세력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해가는 상황을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탕평책은 사실 왕권 회복을 겨냥한 영조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신권을 신봉하는 신권세력과 부딪쳐 숱한 알력을 빚었다. 그 희생물이 바로 사도세자였던 것이다.
정조는 왕권 약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몸소 체득했기 때문에 영조의 의지를 이어받아 노론 일색의 신권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계 인사를 대거 발탁했던 것이다. 이로써 신권세력은 크게 영조 재위기에 형성되었던 외척 중심의 노론이 발전한 벽파(僻派)와 정조의 정치노선을 추종하는 남인과 소론(少論) 및 일부 노론세력이 결집된 시파(時派)가 대립하게 되었다. 시파는 '시류에 영합한다'는 의미에서 벽파가 붙인 것이고, 벽파는 '시류를 무시한 외고집'의 의미에서 시파가 붙인 이름이다. 정조가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 및 노론에 기반한 북학파 등 모든 학파의 장점을 수용해 정국을 이끌어가자 조정은 당연히 시파 중심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위기감을 느낀 벽파는 더욱 똘똘 뭉쳐 정국주도권 탈환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중 벽파가 힘을 회복할 수 있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양반 출신인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尹持忠)이 모친상을 당해 천주교식으로 상(喪)을 치른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조정의 여론이 들끓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정조가 윤지충을 국문하도록 명령을 내려 사형에 처했다. 이로써 조정의 대세가 벽파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지 4년 뒤인 1795년 한족(漢族) 출신의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조선에 밀입국하여 포교 활동을 하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터져 벽파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이로써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던 정약용이 수세에 몰려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고 채제공 등의 남인 중신들의 입지도 크게 약화되었다. 1799년 채제공이 죽자 남인세력은 더욱 위축되었다. 이듬해 정조가 급서(急逝)함으로써 근왕세력의 주축을 이루었던 시파세력은 노론 출신의 일부 외척세력을 제외하고 대부분 거세되고 말았다.
정조의 죽음과 관련해 당시 남인의 본거지였던 영남지역에서는 정조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는 이인좌(李麟佐)의 반란 이후 취해진 영남유생의 과거응시 제한조치를 풀처준데다 남인을 대거 중용함으로써 호감을 산 정조가 벽파의 힘에 밀려 그 뜻을 펴지못한 데 따른 아쉬움의 표현이었다. 정조는 그의 나이 49세가 되던 1800년 6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현재까지도 그의 사인(死因)에 대해 병사론(病死論)과 독살론(毒殺論)이 서로 대립하여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 정조(正祖)의 사망으로 미완(未完)에 그친 '규장각정치(奎章閣政治)'
이렇게 하여 24년에 걸친 정조의 '규장각정치'도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정조가 추구한 통치이념은 면면히 살아 있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비롯해 동문휘고(同文彙考), 규장전운(奎章全韻) 편찬 등 숱한 문물정비작업이 이를 말해준다. 중인 이하의 평민층이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독자적인 서민문화를 가꾸어 내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정조의 치세가 조선 후기 최후로 찬란한 문화정치로 꽃피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의 왕권확립을 통한 부국강병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조(正祖)는 숙종(肅宗) 이래 최대 현안이 되었던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뛰어난 제왕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영조(英祖)와 마찬가지로 집권신진세력이었던 노론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통치이념에 관한 최종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해석권을 가진 홍문관(弘文館)을 대신해 규장각(窺巖面)을 설치했지만 노론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기존의 전통성리학의 틀을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통치이념인 전통성리학은 사실상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재위기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거치면서 그 무기력함을 적나라하게 노출한 바 있다. 따라서 숙종 이래 꽃피우기 시작한 실학사상이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수용돼 적극적인 이념쇄신작업이 이뤄져야만 했다. 그러나 노론을 중심으로 한 신권세력의 반격에 의해 좌절되었던 것이다.
만일 정조의 개혁이 결실을 맺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미완으로 끝나기는 했으나 정조의 개혁적 의도만큼은 높게 평가해야만 한다. 최근 학계에서는 정조의 개혁정책을 놓고 그의 개혁의지를 높게 평가하는 견해와 그 한계를 지적하는 견해가 대립되고 있다. 물론 그가 취한 일련의 개혁에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치세 기간은 우리 민족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다양한 사상이 분출했던 시기였다. 이는 그가 나름대로 치도(治道)의 요체를 통달한 것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정조의 치세기간 동안 남인을 중심으로 실학이 극성하였다. 이는 통치이념으로서의 성리학 자체에 대한 회의가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선조 때에 왕위세습제를 부인하며 역성혁명을 주창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가장 대표적인 예였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만들어낸 이지함(李之咸)은 상업에 부정적인 성리학을 정면에서 거부하기도 했다.
광해군(光海君) 때 이수광(李洙光)을 비롯해 한백겸(韓百謙), 허균(許筠) 등이 이단설을 수용해 성리학에 새로운 기풍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이들은 제자백가(諸子百家)사상을 비롯해 도가사상(道家思想)과 양명학(陽明學) 등 이단설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가의 전통적인 통치이다양한 이단설을 통해 현실 속에서 구현하려는 이같은 학풍을 흔히 실학이라고 부른다. 조선의 실학은 전통성리학에 대한 대칭적인 개념으로 성립한 것이다.
실학이라는 이름은 원래 주자(朱子)가 자신이 정립한 성리학을 한당시대(漢唐時代)의 유학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다. 주자는 자신의 성리학이 현실적 통치에 있어 매우 실용적이라는 의미에서 실학이라고 명명했다. 주자 자신이 실학이라고 주장했던 성리학은 수백년 뒤 조선에서는 오히려 공허한 허학(虛學)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실학을 최초로 이론화한 이수광은 지봉유설(芝峰類說)을 통해 조선이 중국과 동등한 문화선진국임을 자랑했다. 한백겸도 사서(四書)를 강조하는 성리학으로부터 육경(六經)을 중시하는 한당시대의 고학(古學)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같은 반주자학(反朱子學)적인 학풍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성리학자들이 다시 중용되면서 비주류로 밀려나게 되었다. 특히 주자학의 대의명분론은 북벌(北伐)을 내세운 서인집권층에게 불변의 통치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성리학이 집권 서인세력에 의해 더욱 고집스러운 명분주의에 매몰된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밖에도 실학의 탄생배경으로 조선 성리학이 후대로 갈수록 점차 신권세력과 권력유지를 위한 이론적인 도구로 전락한 점을 들 수 있다. 집권 서인세력은 주자학을 비판하는 자들을 모두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이 와중에 서인에게 밀려나 서울 부근의 농촌에 칩거하던 남인들이 초기 실학자들의 주장에 크게 공명하고 나섰다. 이들은 한때 숙종(肅宗)의 '환국정치(換局政治)'에 의해 실학의 통치이념을 현실정치에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이내 서인들의 반격으로 권좌에서 밀려났다. 농촌에 돌아온 이들은 서인의 대의명분론이 정권유지의 도구로 악용되고 있는 것은 물론 서민들에게 심각한 폐해를 끼치고 있음을 몸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농촌경제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이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통치의 기강을 확립하는 일종의 경세치용(經世致用)에 중점을 두었다. 이익(李瀷)은 우리 실정에 맞는 통치체계를 갖출 것을 주장함으로써 이른바 성호학파로 불리우는 독특한 사상체계를 형성했다. 그는 자신의 친형이 역적으로 몰려 참살되는 모습을 목격한 뒤 출사의 뜻을 버리고 독서에 매달렸다.
그는 성호사설(星湖僿說)을 통해 다양한 개혁안을 설파했다. 나라를 좀먹는 여섯가지 악폐로 노비제도와 과거제도, 양반문벌 등을 들었다. 그는 선비들도 농사를 지어야 하고 과거시험 합격자 수를 줄이는 대신 천거제도를 병행해 재야인사를 과감히 등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군주와 재상의 권한을 높임으로써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조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같은 제안들은 지금 보아도 탁견이 아닐 수 없다. 당시의 과거제도는 성리학이 한낱 신권세력의 권력유지를 위한 이론적 도구로 전락한 상황에서 통치체계의 모순이 가장 집약돼 나타난 제도였기 때문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당쟁의 격화는 선비들의 이익 다툼에서 비롯됐다고 파악한 것이다.
● 18세기에 대두된 실학론(實學論)
영조(英祖)와 정조(正祖)의 '탕평정치(蕩平政治)'와 '규장각정치(奎章閣政治)'도 바로 이익의 이같은 주장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는 특히 농촌경제의 파탄을 막기 위한 대대적인 토지제도의 개혁을 촉구했다. 그의 이같은 중농주의적 개혁사상은 훗날 정약용(丁若鏞)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익의 이같은 주장이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되자 노론의 일각에서도 주자학을 계승하되 시대적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었다. 이들은 비록 여진(女眞)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일망정 배울 것은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같은 학통을 '북학(北學)'이라고 명명했다. 북쪽의 청나라에게서 배우자는 뜻이다.
사실 이때의 청(淸)은 산업이 극도로 발달하는 것은 물론 역대문화의 정수가 총정리되는 성세(聖世)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들 북학파는 바로 이같은 현실을 직시했다. 이들이 취한 태도는 청나라의 주인인 여진족을 여전히 멸시하되 그 안에 담긴 중국 문화와 기술문명만큼은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북학파는 자신들의 이같은 이중적인 잣대를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이론을 통해 합리화했다. '인물성동론'은 우주만물의 보편적 이치는 마찬가지라는 입장에서 인성과 물성을 동일시하는 이론이다. 이율곡(李栗谷)의 주기설(主氣說)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주리설(主理說)을 집합시킨 결과이다.
북학파는 이 이론을 적극 원용해 청나라가 비록 오랑캐 종족이 세운 나라이기는 하나 높은 기술문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파악했다. 이들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용인하려는 현실주의적인 입장을 배경에 깔고 있었다. 북학파가 서울 출신 노론에서 나타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에 반해 당시 주류였던 충청 출신 노론은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보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에 입각해 있었다. 이들은 오랑캐인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物性)는 소중화문명국(小中華文明國)인 조선(人性)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명나라가 망한 이상 조선이 중화주의의 핵심이라는 사고를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학파의 선구자인 유수원(柳壽垣)은 우서(迂書)를 통해 무위도식하는 양반들을 모두 농공상(農工商)으로 전업시키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을 모두 평등한 직업으로 만들어 전문화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성공한 상인이 학교와 교량을 건설하고 방위시설을 구축해 국방의 일익을 담당하는 등 지역사회발전에 공헌할 것을 제안했다.
북학파의 이론을 집대성한 학자인 박지원(朴趾源)은 열하일기(熱河日記) 등을 통해 양반들의 허위의식과 무위도식을 신랄하게 질타했다. 그는 북벌론으로 상징되는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우위의식은 사대주의적 허위의식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청의 문불이 우리의 현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면 과감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마디로 청나라 문물에 대한 적극 수용으로 상공업발전을 이룩해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것이 북학파 주장의 핵심이었다. 북학파의 이같은 주장은 노론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젊은 선비들에 의해 긍정적으로 수용돼 북학파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조는 전통성리학을 통해 사상적 독재를 꾀하는 집권 노론세력에 대해 비주류 신권세력의 연합공세가 커지던 시기에 즉위하였다. 그는 바로 이같은 상황을 적극 활용해 실추된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부국강병을 달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의 이같은 의지에 의해 전격 발탁된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용이었다.
정조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던 남인학자 정약용은 실학사상의 최대 집대성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익 등 선배 남인학자의 실학을 계승하면서도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조하는 북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가장 포괄적이면서도 진보적인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의 사상은 매우 다양하고 심도가 깊어 한마디로 요약하기가 쉽지 않다.
그 또한 모든 위대한 사상가가 대부분 그렇듯이 그의 사상 역시 당대에는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는 그가 끝내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나타나지 않으면 자신의 저술을 횃불로 태워버려도 좋다고 술회한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도모하고 지방의 부유한 농민들에게는 향촌사회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관직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국가는 장기적으로 토지를 사들여 빈농에게 나누어주어 자영농을 육성하고 농민들에게 골고루 경작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교정치의 도덕성을 회복하면서 시대의 흐름을 따라 부강한 산업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나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개혁운동은 정조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이들 대부분이 집권 노론세력에 의해 '규장각정치'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일거에 밀려났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정조의 개혁이 미완으로 끝남에 따라 사실상 통치이념의 상실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 구체적인 표현이 바로 노론계 외척세력에 의해 권력이 농단되는 세도정치의 도래였던 것이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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