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일제(日帝)의 영토 확장을 위해 전개된 대외침략전(對外侵略戰)에 참전했던 일본의 전몰자들을 위령(慰靈)하는 도쿄도[東京都] 지요다구[千代田區] 구단[九段]의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는 조선의 한 비석이 1백여년 동안 무거운 바위를 짊어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원래 함경북도 길주에 있었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였다. 1707년에 건립된 이 비문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정문부(鄭文孚)가 이끄는 함경도의 의병부대가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을 진압하고 경성, 길주 등지에서 여섯차례의 전투를 벌여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대를 격파한 승전(勝戰)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함경도 지방에 진출한 일본군 제2예비사단 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池田正介] 소장(少將)이 주민들을 협박하여 비석을 파내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로 옮겼다.
일본군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강탈 사실은 1978년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학연구원 원장에 의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그 이후 해주(海州) 정씨(鄭氏) 가문의 종친회가 야스쿠니 신사 측에 반환요구서를 보냈고, 일본의 승려 가키누마 센신은 한국 불교 복지협회의 초산 스님과 더불어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반환운동(返還運動)에 힘썼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지난 27년 동안 비석은 본래 북한 유물이니 남북한이 합의를 이루면 그때 가서 돌려주겠다는 대답만 되풀이하면서 반환요구를 계속 거절해왔다. 북관대첩비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직접적 계기는 2005년 6월에 열렸던 제15차 남북한 장관급 회담에서였다. 남북대표단은 조금은 이례적인 합의 결과 하나를 발표했다. 남한과 북한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비석을 반환받기로 하고 서로 협조하에 이를 위한 실무적 조치를 취해 나가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2005년 10월 20일 1백여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북관대첩비는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안치되어 일반인에 공개되었고, 북한으로 인도되어 원래 자리인 함경북도 길주에서 복원될 예정이다. 북관대첩비 반환은 제국주의 침략정책을 추진했던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되었던 강제된 약탈 문화재의 공식적인 반환의 첫 사례이며 일제침략기(日帝侵略期)에 약탈당한 문화재에 대한 남북한 공동의 대응이라고 하는 선례를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가 러일전쟁 때에 일본군에 의해 강탈되어 야스쿠니 신사에 옮겨진 이후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애국심과 민족정신을 훼손하려는 의도로 이수(?首)를 없애고 비석 머리부분에 엄청난 무게의 바위돌을 올려놓아 비석에 균열이 생기도록 했다. 일본인들이 이렇게 북관대첩비를 강탈하여 훼손하려 한 까닭은 일본 입장에서는 치욕스러운 패전(敗戰)의 역사가 비문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국함경도임진의병대첩비(朝鮮國咸鏡道壬辰義兵大捷碑).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함경도에서 의병들이 거의(擧義)하여 왜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 함경도 의병들의 승리를 기록한 비가 바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이다.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가 증언하고 있는 왜군의 함경도 진격과 의병들의 항전. 그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의 의병부대를 지휘한 장수는 정문부(鄭文孚)였다. 그는 1565년 2월 19일 서울에서 양주부사를 지낸 정신(鄭愼)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열한살 때부터 논어(論語)를 읽고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했으며 천문(天文)과 산수(算數)에도 뛰어났고 궁술(弓術)을 잘했다고 한다. 문무(文武)를 겸전한 뛰어난 인재였던 것이다. 정문부는 21세 되던 해에 생원과(生員科)와 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했고 23세 때에는 성균관(成均館)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24세 되던 해인 1588년에 문과에 급제, 이듬해 승정원 주서, 부정자, 정자,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 내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가 1591년에 함경북도 병마사를 자원하여 북변 방어 근무를 하던 중 1592년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의 20만 대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해 20일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이에 선조(宣祖)는 왜적(倭敵)을 막아낼 병사를 모으기 위해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함경도와 강원도로 파견했다. 이때 왜군은 개전(開戰) 후 두달도 안 되어 개성과 평양마저 점령하고 함경도로 진격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1592년 7월 1일자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기술되어 있다.
'왜장 가등(加藤)이 북도(北道)에 침입하니 회령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와 여러 재신을 붙잡고 적을 맞아 항복하였다. 이로써 함경남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함경도와 평안도 등 이른바 서북(西北) 지방은 조선왕조 건국 이래 지역적 차별로 불만이 높았던 곳이었다. 함흥 출신인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왕씨(王氏)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씨(李氏) 왕조를 창업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서북지방 무장들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그는 개국 후 "서북지방 사람들을 높이 쓰지 말라"고 후손들에게 가르쳤으며, 세조(世祖) 때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으로 차별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에 따라 서북지방에서는 높은 벼슬아치가 나지 않았고 문벌주의로 인해 서울의 양반들과 서로 혼인도 못해 마침내 이들 지역은 사대부가 없는 고장이 되고 말았다.
서울에서 함경도로 부임해 온 벼슬아치들은 이곳 백성들을 무시했고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아 조정에 뿌리 깊은 반감만 심어 주었다. 그로 인해 함경도는 전쟁 중 가장 많은 반란이 일어났고, 두 왕자를 비롯하여 가장 많은 수령, 방백들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었다. 7월 18일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2만 8천여명의 왜군이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북진하자 북병사 한극함(韓克喊)은 1천여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해정창(海汀倉)에서 적군을 맞아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 두만강 너머까지 도망갔다가 되돌아와 경흥(慶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지역의 주민들에게 붙잡혀 왜군의 포로로 넘겨졌으며, 양주(楊州)에서 탈출하여 피난 조정을 찾아갔으나 적군과 내통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사형당했다.
서북지방에서는 계속 반란이 번졌다. 명천현(明川縣)의 사노(寺奴) 정말수(鄭末守)가 반란을 일으켰고, 종성(鐘城)의 관노(官奴) 귀석(貴石)과 성인손(成仁孫)이 우후 이범(李範)을 붙잡아 왜군에 투항했다. 온성 부원관 강신(姜信) 등은 부사 이수(李洙)를 붙잡아 적군에게 투항하면서 포로로 넘겼고, 종성 판관 이홍업(李弘業)이 적군에게 사로잡히자 부인과 며느리가 자살했다. 23일 마천령을 넘어 회령까지 쫓겨간 두 왕자와 수행했던 영중추부사 김귀영(金貴榮), 호소사 황정욱(黃廷彧), 호군 황혁(黃赫), 회령부사 문몽헌(文夢軒) 등은 종성 관노 국세필(鞠世弼), 회령의 토관진무(土官鎭憮) 국경인(鞠景仁) 등의 무리에게 납치되어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졌다. 지역적 차별과 학정에 대한 혹독한 보복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서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는 가토 기요마사는 강력한 철포부대를 앞세워 승승장구(乘勝長驅)하면서 함경도로 진군, 조선 침략 이후 두 왕자를 사로잡는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가토 기요마사는 무력(武力)으로만 조선 땅을 짓밟은 것이 아니었다. 기타지마 만지[北島万次] 일본공립여자대학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기요마사는 함경도 수탈 계획을 면밀하게 세우는데, 항복한 조선의 관리를 시켜 점령지역의 인구수를 파악하게 하고 곡식의 종류와 수확량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조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함경도를 자신의 영지로 만들려고 했던 기요마사의 계획은 정문부의 함경도 의병부대에 의해 물거품이 되고 만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병마평사로 있던 정문부는 왜군과의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경성 바닷가 외딴 곳에 사는 유생 지달원(池達源)의 집에 숨어 있었다. 이때 지달원은 동지 최배천(崔配天)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곧이어 산속에 숨어있던 경성부사 정견룡(鄭見龍), 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 경흥부사 나정언(羅廷彦), 고령첨사 유경천(柳擎天), 군관 오대남(吳大男), 서북보만호 고경민(高敬民), 전 만호 강문우(姜文佑) 등이 휘하 병사들을 거느리고 합류하여 병력은 3천여명이 되었다. 이들은 정문부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함경도에서 봉기한 반란세력을 진압한 뒤 유격전(遊擊戰)으로 왜군을 무찔렀다.
관직체계로 따지면 6품에 불과한 정문부가 의병대장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의병들은 애국충절(愛國忠節)로 무장하고 관직이 아닌 철저한 능력 위주로 조직을 꾸렸다. 결국 이 선택은 승전(勝戰)을 올리는 원동력이 된다.
정문부의 의병부대는 곧바로 경성부를 들이쳐 국세필(鞠世弼) 일당 13명을 처단했고 명천의 정말수(鄭末守)를 잡아 참수형(斬首刑)에 처했으며 정문부 창의진(倡義鎭)의 거의(擧義) 소식을 들은 회령의 유생 신세준(申世俊), 오윤적(吳允迪) 등이 국경일(鞠景仁) 일당의 목을 베어 정문부에게 바쳤다.
9월 16일, 왜장 가토 우마노조[加藤右馬允]가 거느린 군사 1500명이 길주에서 올라와 경성을 공격하자 정문부 의병부대의 후군장 강문우가 기병들을 거느리고 성 밑에 진군한 왜군을 기습하여 격퇴시켰다. 왜군은 함경도에서도 몰리기 시작했다. 함경도 북병영(北兵營)과 북수영(北水營)이 있는 조선의 북방요새인 경성을 수복한 정문부의 의병부대는 그동안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수령들이 거의 모두 그의 휘하에 모여들어 병력 규모가 더욱 커졌다.
함경도에서 전세가 어려워지자 기요마사는 부장인 우마노?뗄“? 1300여명의 병력을 주어 길주를 지키게 했다. 10월은 함경도에서는 한겨울이다. 추위에 익숙하지 못하고 겨울 준비가 충분치 못한 왜군은 수시로 성을 나와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며 식량과 의류를 약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들은 그간 조선군의 이렇다 할 본격적인 저항을 받아 본 일이 없어 경비를 매우 소흘히 했다.
10월 21일, 정문부는 길주성의 왜군을 치기 위해 치밀한 작전계획을 짰다. 정견룡을 중위장으로 1천여명의 병사를 주어 명천에 진주하게 하고, 유경천을 좌위장으로 병사 1천명을 주어 해정에, 오응태를 우위장으로 병력 수백을 주어 서북보에 각각 진주하게 하고, 원충노(元忠怒)에게 병사 2백명을 주어 아간창(阿間倉)에 진주하고 있다가 적군의 동정을 살펴 공격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30일 아침에 왜군 1천여명이 성을 나와 해정(海汀) 가파리 쪽으로 행군한다는 원충노의 보고를 받고 정문부는 각 군에 통보하여 귀로의 적군을 급습하기로 하고 대기토록 했다. 적군은 이날 하오 4시쯤 약탈한 물건을 말과 소 등에 가득 싣고 경계도 하지 않은 채 길주성을 향해 장평석현(長坪石峴)을 넘으려 했다. 이때 매복하고 있던 원충노, 한인제의 병력이 일제히 적군을 덮치고 강문우, 황사원 등이 뒤따라 싸움을 거들었다. 포위망을 빠져 나간 적군이 길주성 동쪽 장덕산으로 도망가자 산정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경민의 군사들이 내리닥 쳐 10리를 추격하여 적군을 전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정문부의 의병부대는 적군 800여명의 목을 베고 군마(軍馬) 118필을 비롯한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정문부 의병부대의 활약으로 길주성 북쪽의 함경도는 거의 정상을 되찾은 가운데 길주성 내의 일본군 잔류 병력은 꼼짝 않고 성을 지키고만 있었다. 12월에 들어 정문부는 길주성을 공격하여 탈환하기로 하고 10일에 3천여명의 병력으로 성을 에워싼 뒤 30리 남쪽 마천령 기슭의 영동관 책성을 지키는 적군 4백명의 지원 출동을 차단하기 위해 정견룡, 유경천, 오응태가 인솔하는 3위군을 접근로에 배치해 두고 복병장 김국신(金國信)의 병력을 입구에 매복시켰다. 책성의 왜군 전원이 길주로 향하다가 정문부 의병부대의 포위망 안으로 들어와 1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책성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조선 관군과 명군(明軍)이 합세하여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가 주둔한 평양성을 이미 수복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고립될 것을 염려하여 철수하려 했는데, 길주에 머물고 있는 왜군이 의병들의 포위망에 차단되어 나오지 못하자 기요마사는 직접 2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마천령을 넘어 영동의 왜군과 합세, 내원하였다. 소식을 접한 정문부는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임명(臨溟)에 거점을 삼고 매복하였다. 얼마 후 가토 기요마사의 정예부대가 영동에 이르자 정문부는 복병을 움직여 그 후미를 끊고 정견룡과 오응태의 돌격대를 재촉하여 적군을 공격하였다. 가토 기요마사는 필사적으로 응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졌다는 것을 깨닫고 60여리를 퇴각하면서 성 안으로 들어가 전사자들의 시체를 불태우고 밤을 이용하여 도주하였다. 이 싸움이 곧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을 함경도에서 완전히 패주시킨 백탑교전투(白塔郊戰鬪)였다.
병력 규모가 겨우 3천여명 정도였고 대부분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烏合之卒)이었던 정문부(鄭文孚)의 함경도 의병부대가 조총수(鳥銃手)로 무장한 일본 최고의 정예군단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기갑부대를 격파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10월 30일자 기록에는 그 전술을 추측할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다.
'눈이 내리고 추위가 심하여 적병들이 모두 얼어 쓰러져 싸우지 못하였다. 해가 뜰 무렵에 수색, 공격하여 적병 6백여명의 목을 베었다. 사면을 포위하고 그들의 땔감 공급로를 끊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의병들은 함경도의 추운 날씨와 험난한 지형을 이용했고, 상대적으로 앞선 화력을 지니고 있는 일본군을 차단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시킨다거나 한데 집결하여 적재적소에 활용한 작전을 구사한 것이 정문부가 이상 6회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정문부는 장례원판결사, 호조참의, 예조참판,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고 1607년부터 장단부사, 남원부사, 길주목사 등 지방 목민관으로서의 직책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살아생전 전공(戰功)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 의하면 정문부가 세운 전공을 윤탁연(尹卓然)이 모두 사실과 반대로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정문부의 부하가 수급(首級)을 가지고 관아를 지나면 그가 모두 빼앗아 자신의 군사들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찰사 윤탁연의 모함을 받고 전공을 빼앗긴 일은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반대하고 광해군(光海君)을 복위하려는 역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형벌을 받다가 1624년 11월 60세의 나이로 옥사한다.
정문부의 혐의는 40년이 지난 후에야 풀렸다. 현종(顯宗)은 그의 신원을 회복시키고 좌찬성에 추증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나고 100여년이 흐른 후였다. 그러나 200년 후 그의 명예는 또 한번 훼손된다. 정문부의 전공(戰功)이 기록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일본인들이 강탈해 간 것이다.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의 분할권을 놓고 서로 싸웠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함경북도에 주둔하면서 러시아군과 대치하고 있었던 일본군이 길주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하고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함경북도 길주를 떠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히로시마에 도착한 후 도쿄로 이송된다. 전리품의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일제(日帝)는 전리품 정리규정을 만들고 이 규정에 따라 모든 전리품을 정리하고 분배했다. 그런데 북관대첩비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이 비석을 가져가겠다고 나선 사찰이 있었다. 약 4백년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정문부에게 패배했던 가토 기요마사가 세운 구마모토[態本]의 혼묘사[本妙寺]였다. 하지만 북관대첩비는 개인사찰인 혼묘사가 아니라 일본 황실의 신사인 야스쿠니 신사로 옮겨졌다. 북관대첩비는 신사의 뒷마당에 3톤이나 되는 머릿돌을 이고 100년 동안 철창 안에 갇혀 있었다.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의 담당자들은 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가져와서 햇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으슥한 곳에, 그것도 이수(?首)마저 제거하고 3톤 무게의 바위를 비석의 머리부분에 얹어놓은 상태로 보관했는지 지금까지도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와 비슷한 운명을 가진 과거의 기념비들이 무수히 많았다. 일제(日帝)는 1380년 이성계(李成桂)와 이지란(李之蘭)이 이끄는 고려군이 전라도 남원에서 왜구를 토벌한 승전(勝戰)을 기록한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산산조각을 내고 비석에 새겨진 글자들을 정으로 정교하게 쪼아 해독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에 승군(僧軍)을 이끌고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1604년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조선인 포로 6천여명을 데리고 돌아온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의 공적을 기린 해인사(海印寺)의 석장비(錫杖碑)도 1943년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파괴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조선의 승리로 종결시키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웠던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인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유적비(遺跡碑)들도 일제(日帝)의 한민족문화말살정책(韓民族文化抹殺政策)의 일환으로 대부분 수난을 당했다. 파괴되거나 철거되어 어디론가 옮겨졌는데,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도 비극을 피해갈 수 없었다. 명량대첩비가 감쪽같이 사라지자 당시 주민들은 일제(日帝)가 바다에 수장시킨 줄 알고 통탄해 했다고 한다. 이 비는 일제(日帝)의 박해로 피해를 입어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옮겨졌던 것을 1945년 해방 이후 충무공 유적 보존 위원회에 의해 원래 세워졌던 장소로 회수되었다.
이런 유적비들의 파괴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산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1943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각 도의 경찰부장들에게 보낸 비밀문서에는 '유림의 숙청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라는 제목하에 파괴 대상 비석 목록들이 적혀 있는데, 총독부는 전국에 있는 20개의 유적비를 파괴하거나 없애라고 명령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에 갇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일본으로 끌려간 북관대첩비는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으로 벌어진 조직적인 문화재 수탈의 시작이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중국을 비롯한 일본과의 역사 문제가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과거의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동아시아의 진정한 미래 또한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반환은 실로 큰 의미를 지닌다. 중국과 일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폄하되어 세계에 왜곡된 채로 알려지고 있는 우리 역사의 진실을 우리 스스로 지켜내고 바로 세우지 않는다면 한반도 평화는 공염불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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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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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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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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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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