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는 성(姓)으로 뭉쳐진 집단
화랑에 대해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화랑 또는 화랑도, 그것은 바로 신라 진흥왕 때 조직된 인재 양성 단체이다. 화랑도는 신라가 삼한일통(절대로 삼국통일이 아님)하는데 크나큰 기여를 했다. 많은 화랑들이 목숨을 바쳐 국가를 위해 충성을 바쳤고, 그러한 그들의 살신성인으로 인해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일부를 통합하고 당을 몰아낼 수 있었다.
화랑도에 대해 삼국사기는 진흥왕 37년인 576년에 설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화랑세기 등에서는 진흥왕 원년인 540년에 창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흥왕의 모후인 지소태후가 화랑도 형성에 깊숙이 관여한 사실로 보건대, 화랑도는 어린 진흥왕(즉위했을 때 나이 7세) 대신 섭정한 지소태후에 의해 창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신라에는 유망한 왕족, 귀족의 남녀들이 휘하에 여러 젊은 남성들을 거느리는 형태의 사교집단이 많았다. 지소태후가 섭정으로 정권을 잡은 뒤 이들 단체를 인재 양성을 위한 국가조직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했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선화와 원화였다.
선화(禪花)제도는 덕망 높은 귀족 남성을 지도자로 삼고 그 아래에 수백 명의 낭도 조직을 형성한 집단으로, 우두머리를 선화라 한다. 원화(源花)제도는 우두머리가 여성으로, 왕의 후궁이나 공주들이 많은 낭도들을 거느리고 발전한 제도로, 그 여성을 일컬어 원화라 했다. 우리는 화랑도 이전에 원화제도만 있는 줄 알았지만, 사실 원화 말고도 선화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원화는 낭도들이 원화를 보호하고 추종하는 호위무사 역할을 했음에 비해 선화는 선도(禪道)의 전통에 따라 참선과 무예 학문을 닦고 유사시에 전쟁에 참여하는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비록 두 단체의 성격은 달랐지만 인재를 천거하는 집단이라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원화인 준정이 다른 원화인 남모를 죽임으로써 원화제도는 폐지되고, 원화의 낭도들은 선화의 낭도로 편입되었으니 그 때부터 선화의 무리들을 풍월도(風月途)라 불리게 되었고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하였다.
풍월주는 바로 화랑도의 우두머리 화랑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풍월주를 화랑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초대 풍월주인 위화랑과 관련이 있다. 화랑세기에는 위화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얼굴이 백옥과 같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고,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가졌다"
게다가 위화랑은 성격이 곧고 대의를 알며 공평무사했다. 이런 까닭에 많은 낭도가 그를 존경하였다. 하지만 이 외에도 그는 신라 21대 소지왕의 마복자였다. 위화랑은 아버지가 섬신공 김파로이며, 어머니는 벽아부인이었다. 그가 잉태되었을 때 소지왕의 총애를 받던 벽아부인이 궁에 입궁하여 왕과 합궁을 하였는데 이 때문에 위화랑은 마복자의 지위를 부여 받았다. 그의 인품과 왕의 마복자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위화랑은 초대 풍월주가 될 수 있었고 자신의 이름이 풍월주를 지칭하는 영예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복자'는 무엇인가?
마복자는 말 그대로 '배를 문질러서 낳은 아이'란 뜻이다. 이 마복자라는 풍습은 세계 어디에도 볼 수 없는 신라에만 있었던 독특한 풍습이며 문화다.
어떤 집단이 있다고 치자 그 집단의 우두머리는 휘하에 거느리는 부하 중 임신한 아내가 있을 때 그 부하의 아내를 자기 처소로 불러와 살게 하면서 살을 맞대고 정을 통함으로써 태어날 아이와 인연을 맺는다. 이는 일종의 의제가족 관계를 맺는 풍습인데, 성적인 접촉을 그 수단으로 하고 있다.
이 같은 마복자 풍습은 신라 사회 어느 집단에서나 흔히 있는 일이었다.
왕의 마복자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왕과 마복자 관계를 맺는 이는 왕족이었다. 즉 왕의 마복자가 될 수 있는 신분은 한정되어 있었으며, 신라에서 왕의 마복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출세가 보장되었다는 뜻이다. 참고로 법흥왕 역시 소지왕의 마복자 출신이었다.
화랑은 풍월주를 우두머리로 그 아래에 부제 1인이 있었다. 그 밑으로 내려가서 좌우전방 대화랑 각 1인에 3명씩, 좌우전 화랑 2인씩 6명, 소우전화랑 12명, 묘화랑 84명 등의 화랑들이 상층을 이루고, 화랑 밑으로는 중간계층인 낭두가 있다. 낭두는 가장 아랫계급인 망두에서 제9대 노두까지 9 계급으로 나뉘며 그들의 계급에 따라 아내와 자녀의 계급이 결정된다. 이는 마치 골품제 처럼 부모의 신분에 따라 자녀의 신분이 결정되는 것과 같다. 낭두 아래에는 낭도가 있었는데 대개 소귀족, 서민들이 낭도를 구성했다.
풍월주의 아내는 화주라 하고 풍월주에서 물러난 화랑은 상선이라 불리웠다. 비록 풍월주에서 물러났지만 상선은 풍월주나 부제의 지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낭두는 모두 상선이나 풍월주의 마복자로 구성되며, 만약 자식을 잉태했는데고 그 자식이 상선이나 풍월주의 마복자가 되지 못하면 낭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화랑과 낭두의 관계는 상관과 부하의 관계를 넘어선 의제가족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 신라는 성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숙부와 조카가 누나와 동생이 사촌끼리 혼인하는게 다반사였던 신라에게 성은 신성적이고 그들 고유의 신국의 도였다.
낭도의 딸은 봉화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풍월주가 머무는 선문에 들어가 교육을 받아야 했다. 봉화 중 풍월주의 총애를 받는 여인을 봉로화라 하였으며 봉로화가 되어야 낭두의 처가 될 수 있었다. 화랑도에 속한 서민의 딸은 유화라 불리웠는데 이들은 화랑과 낭두의 시중을 들면서 그들과 육체 관계를 맺곤 했다.
화랑도는 우리가 생각했던 심신수련단체가 아니었다. 물론 심신수련도 하고 인재 양성의 기관이었지만, 화랑도는 성으로 끈끈이 연결된 집단이었다. 자신의 아내가 임신하면 상관과 성 관계를 맺는 그들의 풍속에 대해 우리가 비난을 할 수는 없다.
신라는 성을 창피함, 더러운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성은 아이를 만드는 신성한 행위였다. 그리고 그들은 성을 통해 화랑도란 조직을 단순한 계급사회가 아닌 계급을 넘어선 하나의 가족집단으로 형성한 것이다.
7세기 말 격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신라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강력한 요인에는 바로 이 화랑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 화랑도가 보다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소속원들이 남이 아닌 하나의 가족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참고, 김대문의 화랑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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