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에 있어 미스터리한 부분으로 남아있는 것이 발해사(渤海史)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발해는 스스로 자국의 기록을 남기지 못했으며, 더군다나 후세 사람들이 발해에 대해 쓴 역사서도 없다.(물론 발해고(渤海考)를 비롯한 몇 몇 사서는 있지만, 이 사서들 역시 발해에 대한 단편적인 파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발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료 부족에 고심을 하고 있다. 발해사(渤海史)는 이웃인 중국과 일본의 역사 자료를 빌려 조명해야 하기 때문에 발해에 관해 정확히 짚은 책이 별로 없다. 하지만 발해는 분명 우리 민족의 역사이며, 고구려를 계승한 당당한 자주국가였다.
국내의 일부 학자들은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 유민이고, 피지배층이 말갈족(靺鞨族)이기 때문에 발해를 한국 역사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필자는 발해는 분명 고구려의 유민들이 세운, 고구려의 계승국가라 밝히고 싶다. 그 이유는 발해의 군주가 스스로를 고려태왕(高麗太王)이라 칭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발해 주민 대부분이 고구려인이었기 때문이다.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를 보면 발해의 중대성(中臺省)에서 일본의 태정관(太政官)에 보낸 외교문서에 "일본은 동쪽으로 멀리 있고, 요양(遼陽)은 서쪽의 장벽이니, 두 나라의 거리가 만 리가 넘는다"는 내용이 있다. 문서 내용으로 보아 발해의 서쪽 접경은 요양이며, 그 이동에 있는 요동은 발해의 영토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옛 고구려의 주민들은 요동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 점을 통해 발해의 주민 구성 대다수가 고구려계인 점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고구려 멸망시 인구가 69만호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구려인 전부가 당(唐)으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없다. 기록을 보면 고구려인 중 4만호가 당나라 내륙으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을 뿐, 고구려인 전부를 당으로 이주시켰다고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머지 고구려인은 어디로 갔을까?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그들은 고구려의 옛 영토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진제국(大震帝國; 渤海)의 건국으로 그들은 대진제국의 일원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발해(渤海)를 구성하고 있던 말갈(靺鞨)은 고구려의 한 예속 종족이었다. 어쩌면 말갈족(靺鞨族)이라는 것도 한족(漢族)이 일방적으로 갖다 붙인 명칭일 것이다. 대진제국(大震帝國)의 건국을 인정하지 않은 당과 신라가 고구려의 후예인 대진제국을 말갈이라고 싸그리 잡아 불렀을 수도 있다. 이는 고대 한족(漢族)들이 자기들 동쪽에 살던 고대 조선족(朝鮮族), 동호족(東胡族), 산융족(山戎族), 숙신족(肅愼族)을 싸그리 잡아 동이족으로 불렀듯이 말이다.
1. 군사강국 발해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지배권을 둘러싼 당(唐)과 발해(渤海)의 대립이 심해지고 있는 가운데, 발해의 황제 무제(武帝)의 아우 대문예(大門藝)가 당에 망명함으로써 발해와 당은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전쟁에서 선수를 친 쪽은 발해였다. 732년 무제는, 장문휴(張文休)에게 수군 병력을 주어 당의 등주(登州)를 치게 하였다. 신속하게 등주에 들이닥친 발해군은 등주자사 위준(韋俊)을 죽이고, 등주를 초토화시킨 후 바로 철수해 버렸다.
당시 발해 수군의 상륙작전이 당나라에 끼친 결과는 엄청났다. 『신당서』 「오승자전」을 보면 발해군의 침공으로, 성읍이 도륙되었고, 많은 유민과 실업사태를 일으켜 등주라는 항구도시를 완전히 파탄시켰다고 씌여 있다. 엉망이 된 등주를 재건하기 위해 전쟁으로 발생한 실업자들을 위해 운전금(運錢金)을 해마다 30만의 규모로 줄이는 긴축재정을 펴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등주의 복구를 위해 다른 데에 예정된 30만의 운전금 지출계획을 바꿔 , 용도를 변경하여 지출했다. 발해 수군의 작전 성공을 통해 당시 발해에 적지 않은 수군과 육군이 있었으며, 수군작전에 따른 많은 인원과 군수물자, 병장기를 실어나르기 위한 거대한 군선이 존재했을 것이라 볼 수 있다. 발해 수군의 이러한 활약을 등주 전투(韋俊戰鬪)라 한다.
그런데 발해와 당과의 전쟁에 알려지지 않은 전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마도산 전투(馬都山戰鬪)이다.
이는 장문휴 수군 선단의 해상기동작전과는 별도로, 발해 무제(武帝)의 친정(親征)이라 할 수 있다. 『발해사 연구 논문집』을 보면 "발해의 무제는 직접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요하, 대릉하를 건너 당나라의 영주, 평주지역의 성읍을 점령하고 장성계선으로 진출했다"고 못박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견해를 뒷받침하는 사료가 있으니 『신당서』의 「오승자전」을 들 수 있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발해의 대무예(大武藝; 武帝)가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러 성읍을 점령했다"고 한다. 이러한 때 당나라 조정은 발해의 침공에 정신이 없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보면 "대문예(大門藝)를 유주로 보내, 군사들을 징발케 하여 싸우게 하는 한편, 유주절도사로 하여금 '하북채방처치사'를 겸하게 하고 상주, 낙주, 패주, 기주, 위주 등 16개주에 이르는 주와 안동도호부(평주)의 병력까지도 통솔케 했다"고 한다. 당시의 기사를 통해 당 조정이 발해군의 공격에 대해 얼마나 긴장했던가를 확인하게 한다. 즉 발해군이 당 조정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일종의 전면전과 같은 정벌전쟁을 펼친 셈이었다.
발해군이 요서의 마도산에 진격한 것은 엄청나게 위협적인 기습작전으로 평가된다. 『신당서』 「오승자전」을 보면 발해군에 맞서고자 하던 오승자가 당군을 움직여 "요긴한 길목을 막고 큰 돌로 참호를 만들어 400리에 걸치게 했다"고 한다. 『통감고이』에도 오승자가 축조한 석축참호에 대해 "길을 막고 언덕을 파고 돌을 쌓아 400리 구간에 걸쳐 깊이와 높이가 각각 3길이나 되게 했다"는 규모였다고 씌여 있다.
당시 당이 400리에 걸친 참호를 만들 정도로 발해의 기습전 능력이 엄청났음을 가늠해볼 수 있다. 그리고 발해군의 지상전투 능력이 당나라 군대를 긴장시킬만큼 수준급이었음을 증명한다 볼 수 있다. 해상을 통한 등주 전투와 육전을 통한 마도산 전투를 통해 당시 발해는 고구려에 견줄만한 군사강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겠다.
발해와 당의 숨겨진 전투인 마도산 전투.....
왜 이와 같은 기록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 전투가 당으로서는 매우 치욕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제대로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일까? 마도산 전투를 통해 우리는 발해가 고구려 못지 않은 군사 강국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한다.
2. 황제국(皇帝國) 발해
우리는 발해가 연호를 정하고 황제를 자칭한 제국(帝國)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발해가 황제국(皇帝國)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설마~" 하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발해는 연호를 정하고 황제를 자칭한 황제국이었다. 그리고 발해가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발해가 당나라와 대등한 지위를 지닌 국가였다는 것을 말한다 볼 수 있다. 당시 동아시아를 보면 당 중심의 국제질서가 성립되었고 이런 당 중심의 국제질서에는 신라가 포함되었다. 그런데 발해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정한 것은 신라와 달리 발해와 당이 대등한 제국(帝國)임을 나타낸다 할 수 있다.
발해는 건국자 대조영(大祚榮)을 비롯하여 모든 군주들이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발해의 시조인 고제(高帝) 대조영(大祚榮)은 천통(天通), 무제(武帝)은 인안(仁安), 문제(文帝)는 대흥(大興), 성제(成帝)은 중흥(中興), 강제(康帝) 정력(正歷), 정제(定帝)는 영덕(永德), 희제(僖帝)는 주작(朱雀), 간제(簡帝)는 태시(泰時), 선제(宣帝)는 건흥(建興), 화제(化帝)는 함화(咸和) 등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이상 태백일사(太白逸史) 참조)
발해 문제(文帝)의 넷째 딸인 정효황녀(貞孝皇女)의 무덤에는 발해가 황제국(皇帝國)임을 증명하는 증거 중의 하나이다. 무덤입구에 발견된 묘지석을 보면 문제(文帝)를 가리키는 말로 '황상(皇上)'이라는 단어가 있다. 황상은 곧 황제로, 당시 발해인들이 자신들의 군주를 황상(황제)으로 부른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천하관을 계승한 것으로, 말갈 소수민족이나 북만주지역의 소수민족에 대해 발해 중앙 정부를 황제국(皇帝國)으로 예우하도록 요구하고 그에 대한 답례를 한 사실로 뒷받침 된다.
일본 구라시키시의 오오하라 미술관에는 발해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유물이 발해가 황제국(皇帝國)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유물은 함화(咸和) 4년명 비상(碑像)으로, 함화란 발해 제11대 황제인 화제(化帝) 대이진(大彛震)의 연호로 834년(함화 4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비상은 허왕부(許王府)의 관리였던 조문휴의 어머니가 모둔 불제자를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허왕부(許王府)'라는 관청의 이름이다. 이는 발해에 군왕(郡王)으로 봉해진 이가 있었다는 뜻이 된다. 당시 중국의 제도를 참조해보면 왕부는 황제국(정확히는 황제를 주장하는 국가나 황제의 위치에 있는 나라)에서 개설할 수 있다. 허왕부라는 명칭의 등장은 발해가 황제국임을 주장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3. 무역대국 발해
흔히 발해가 차지한 땅이 만주, 연해주, 한반도 북부지방이라 하여 발해가 사람 살기 힘들고, 경제가 낙후된 국가라 오인하기 쉽다. 하지만 발해는 경제대국이었다. 당시 발해는 교역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켰다. 발해는 당~일본~북방유목민족을 잇는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외화를 벌여들였다.
발해에는 다섯개의 교역로가 있었다. 바로 영주도, 조공도, 신라도, 일본도, 거란도가 그것이다. 영주도는 육지를 통해 당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가는 교역로이고, 조공도는 해로를 통해 당의 수도 장안으로 가는 교역로, 신라도는 발해 남경에서 출발하여 신라로 가는 교역로, 일본도는 일본과의 교역로, 거란도는 거란을 비롯한 북방유목종족과 발해와의 교역로이다. 발해는 땅이 안좋은 대신 교역으로 땅에서 얻는 부족분을 채우고 있었다.
발해의 교역상대국인 일본과 비교해볼 때 발해 측에서 많은 흑자를 남기고 있었다. 발해는 일본에 발해 특산물인 가죽, 모피를 수출했는데, 이 물품들은 당시 일본에서 인기있는 상품이었다. 그래서 일본 왕실은 발해 사신을 통해 가죽, 모피, 발해 특산물을 받으면, 사신들에게 많은 면, 비단, 황금, 수은, 우산 등을 선물로 주었다.
일본에 파견된 발해 사신들은 교역에 중요한 활동을 하였다. 발해 사신들은 일본에서 무역을 전개한다. 첫날은 관리들과, 둘째날은 수도 사람들과, 셋째 날은 시장상인들과 거래를 한다. 기록에 의하면 871년 발해 사신들은 첫날의 관무역에서 일본 화폐로 40만 냥을 얻었다고 한다. (발해 수도에서 당시 일본 화폐인 화동개진이 출토되는데 이는 발해 사신들의 무역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이 40만냥은 어느 정도의 가치일까? 화동개진의 가치가 가장 높을 때는 700엔, 가장 낮을 때는 33엔이다. 대략 150엔으로 잡아도 40만냥은 요즘 돈으로 6억 6천만 원이다. 이를 통해 당시 발해가 교역으로 얻어들이는 수입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와 일본의 무역 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다. 일본 시장에서 발해산 담비나 가죽을 금지시킨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발해 사신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의 왕족 하나가 담비 가죽 여덟벌을 입고 나와 자신을 과시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발해 가죽옷이 신분을 과시할만큼 일본에서의 인기가 컸음을 말해준다.
발해와 일본과의 교역만으로도 당시 발해의 경제수준에 대해 참고가 될 듯하다.
러시아의 샤프쿠노프 박사는 기존의 실크로드 외에 사마르칸트에서 치타를 지나 발해의 수도 상경성으로 가는 제2의 동서 교역로가 있고, 이 교역로는 담비의 길이라 말했다. 소그드 및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은 가능한 한 많은 모피를 사들였고, 이를 위해 발해의 모피를 수입했다. 게다가 발해 지역에는 중앙아시아의 은화가 많이 발견됨을 볼 때 당시 발해와 중앙아시아 간의 교역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의 교역로인 발해 5도(영주도, 조공도, 일본도, 신라도, 거란도)는 거란, 중국, 신라, 일본으로 이어진 국제 교역로였다. 그리고 상경에서 사마르칸트로 이어지는 담비의 길은 발해의 여섯번째 국제 교역로였다. 이는 발해가 구축한 아시아 네트워크다. 발해 5도와 담비의 길, 이 길을 통해 발해는 국제무역을 펼치고 부를 얻었다. 아시아 네트워크 발해의 길은 발해가 해동성국(海東聖國)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원천이었다.
출처; 국사광복국민운동본부 編 「우리 역사의 비밀」(2003년版)
해설; 이문규(李文圭) 한국청년민족사학회 부회장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글쓴이 : 조의선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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