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선덕여왕 시대의 김유신

회기로 2009. 6. 28. 15:21

김유신 열전


 삼국사기 열전 10권중 김유신 상.중.하 로 3권을 제일먼저 작성하고 중요하게 취급한것은  고려 조정에서 신라를 흡수했지만 계승한 것으로 생각하여 고구려.백제보다 중요하게 취급한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몇백년이지난 고려 인종때 고구려 백제의 인물에 대한 자료가 얼마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다행이 김유신의 현손(고손자)집사랑 장청이 행록10권을 남겨서 김부식이 그것을 근거로 간추려 3권을 작성한것입니다.


유신의 현손(玄孫)으로 신라의 집사랑(執事郞)인 장청(長淸)이 [유신의] 행록(行錄)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오는데, [거기에는] 꾸며 만들어 넣은 말이 자못 많으므로 이를 줄이고 그 중에서 기록할 만한 것을 취하여 전(傳)을 지었다.

사론(史論): 당나라의 이강(李絳)이 헌종(憲宗)을 대하여 말하기를 “사특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고 충성되고 정직한 이를 나오게 하며, 대신과 더불어 말할 때는 공경하고 믿음 있게 하여 소인을 참여시키지 말며, 어진 이와 놀 때에는 친하되 예절 있게 하여 어리석은 자가 끼여들지 못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참되도다! 이 말이여! 실로 임금의 정치에 중요한 도리이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어진 이에게 맡기어 의심하지 말며, 사특한 자를 제거하여 의심하지 말라.』 하였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우함을 보건대 친근하여 틈이 없고, 일을 맡겨 의심치 않으며, 꾀를 내면 행하고 말을 하면 들어주어 그로 하여금 쓰여지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않게 하였으니, 이른바 [주역] 육오동몽(六五童蒙)의 길(吉)함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유신이 그 뜻한 바를 행할 수 있게 되어 중국과 협동 모의해서 3국을 합치어 한 집을 만들고, 능히 공을 이루고 이름을 날려 일생을 마치었다.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과 장보고(張保皐)의 의용이 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기록이 없어져 알려지지 않을 뻔하였는데, 유신과 같은 이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칭송하여 지금[고려]까지 끊어지지 않으니, 사대부가 알아줌은 당연하지만 꼴베고 나무하는 어린아이까지도 능히 알고 있으니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가 통일을 했으면 요동벌까지 우리의 영토가 되었을텐데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여 동족을 살상하고 김춘추가 딸의 원수를 갚기위하여 광분한 것으로 역사학자들의 의견도 제 각 각인데 백제와는 전쟁중이었고 고구려는 문경이북의 영토를 달라고 요구하고 왜는 멀고 백제와 가까운 나라이므로 부득이 당나라와 손잡은 것이다는 반론도 우세한 편입니다. 당시 사정을 모르는 우리는 선조의 역사에 대하여 잘알지 못하므로 각자가 알아서 생각하기 바랍니다.


 15세에 시작하여 17세 18세 다음에 35세로 17년을 건너가니 그안에 중요한일이 왜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15세(609)  

 공은 나이 15세에 화랑(花郞)이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기꺼이 따랐으니, [그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17세(611)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611)에 공은 나이 17세로, 고구려·백제·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의분에 넘쳐 침략한 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中嶽) 석굴에 들어가 재계(齋戒)하고 하늘에 [다음과 같이] 고하여 맹세하였다.

“적국이 무도(無道)하여 승냥이와 범처럼 우리 강역을 어지럽게 하니 거의 평안한 해가 없습니다. 저는 한낱 미미한 신하로서 재주와 힘은 헤아리지 않고, 화란(禍亂)을 없애고자 하오니 하늘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저에게 수단을 빌려주십시오!”

머문지 나흘이 되는 날에 문득 거친 털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이 곳은 독충과 맹수가 많아 무서운 곳인데, 귀하게 생긴 소년이 여기에 와서 혼자 있음은 무엇 때문인가?”

유신이 대답하였다.

“어른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존함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노인이 말하였다.

“나는 일정하게 머무르는 곳이 없고 인연따라 가고 머물며, 이름은 난승(難勝)이다.”

공이 이 말을 듣고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그에게] 두 번 절하고 앞에 나아가 말하였다.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근심이 되어 여기 와서 만나는 바가 있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엎드려 비오니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애달피 여기시어 방술(方術)을 가르쳐 주십시오!”

노인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공이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기를 그치지 않고 여섯 일곱 번 하니 그제야 노인은 “그대는 어린 나이에 삼국을 병합할 마음을 가졌으니 또한 장한 일이 아닌가?” 하고, 이에 비법(秘法)을 가르쳐 주면서 말하였다.

“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일 의롭지 못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

말을 마치고 작별을 하였는데 2리쯤 갔을 때 쫓아가 바라보니,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빛이 보일 뿐인데 오색 빛처럼 찬란하였다.   

 

   

         

   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18세(612)  

  건복 29년(진평왕 34년: 612)에 이웃 나라 적병이 점점 닥쳐오자, 공은 장한 마음을 더욱 불러일으켜 혼자서 보검(寶劍)을 가지고 열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갔다. 향을 피우며 하늘에 고하여 빌기를 중악에서 맹서한 것처럼 하고, 이어서 “천관(天官)께서는 빛을 드리워 보검에 신령을 내려 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3일째 되는 밤에 허성(虛星)과 각성(角星) 두 별의 빛 끝이 빛나게 내려오더니 칼이 마치 흔들리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