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열전](6) 조선 초기 -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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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를 이 자리에 모시기까지 곡절이 있었다. 당신께서 서예가가 아니라고 극구 사양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에서 아무도 당신을 서예가로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변명을 하자면 남아 있는 육필이 없으니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서예가 뭐고 또 서예가는 누구인가.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시황 때 이사(李斯)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소전(小篆)을 만들어 문자를 통일했고, 동진 때 왕희지는 문자의 전형을 확립하여 서성(書聖)으로 추앙받았다. 그래서 그들의 글씨는 법(法)이 되었다. 왕법(王法)의 재해석을 통해 삼국시대 이래 고박한 우리 글씨문화를 일신시킨 통일신라 김생 또한 마찬가지 존재였다. 모두 명필이자 그 글씨는 서예역사의 분기나 갈래를 결정짓고 있다. 음악으로 치면 베토벤과 같이 명연주가 일 뿐 아니라 새로운 곡을 만든 악성(樂聖) 같은 존재 아닌가.
△ 세종대왕이 서예가입니까.
전하의 훈민정음(訓民正音·그림1), 즉 한글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든 것이자 그 자체가 삼라만상을 녹여낸 한 세트의 조형의 보고다. 이것은 서예사적 맥락에서만 보아도 한자 일변도 서예가 한글과 한자로 갈라지는 분수령이다. 이미 있었던 대전(大篆)을 소전으로 통일한 것이나 기존의 해서나 행초를 만고의 법으로 만든 것보다 분명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래서 전하를 서예가라고 할 수 없다면 몰라도 정작 이전에 없었던 문자를 만들어 법 그 이상을 세운 사람을 서예가로 못 모시니 이런 역설이 또 있을까. ‘씀’ 그 자체에만 매몰된 한심한 세상인심에 위로가 될까 싶어 손가락 가는 대로 고명하신 서예가 몇 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세종대왕이 서예갑니까?”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이 더운 데 웬 정신나간 질문을 다 하느냐는 투였다.
△ 서론(書論)의 바다 문자(文字)의 숲, 훈민정음
그런데 더욱 더한 역설은 전하께서 만든 문자는 기본적으로 서예가가 아니면 애초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전하, ㄱㄴㅁㅅㅇ 초성의 기본음은 뭘 보고 만들었습니까?”
“어금니(牙) 혀(舌) 입술(脣) 이빨(齒) 목구멍(喉)에서 소리나는 형상을 본떴다.”
“그러면 · ― | 중성의 기본음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하늘(天) 땅(地) 사람(人)이다.”
훈민정음 해례 ‘제자해(制字解)’를 펼쳐보았다. ‘|는 혀가 오그라지지 않고 소리가 얕으니 사람이 인(寅)에서 나는 소리라(|舌不縮而聲淺 人生於寅也)’ 하고, ‘모양이 선 것은 사람을 본뜬 것이라(形之立 象乎人也)’ 하였다(그림2). 둥근 하늘을 본뜬 ‘·’자도, 평평한 땅의 형상을 디자인한 ‘―’자도 마찬가지 원리였다. 새삼 알고 보니 훈민정음의 자모음 기본 8자가 모두 완전히 상형(象形) 아닌가. ‘글씨는 자연에서 비롯되었다(書肇自然)’는 후한 채옹(蔡邕)의 말도 바로 이를 두고 한 것이었다.
그러면 글자의 점획과 꼴은 어떻게 된 것일까. 다시 훈민정음 해례 ‘정인지 서문’을 펼쳐보았다.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형상을 본떴으되 글자 모양은 옛 전서체이다(象形而字倣古篆)’라고 일러주었다. 균일한 점획과 간가결구로 보면 전서 중에서도 소전류임이 분명했다. 전하는 서예가 이전에 디자이너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서론과 서예사를 응용하여 이렇게 완벽한 문자를 만든 사람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지 않은가.
다시 훈민정음 해례 ‘제자해’를 펼쳤다. 이제 그 원리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의 이치는 하나의 음양(陰陽)과 오행(五行)뿐이다(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 고로 사람의 목소리도 다 음양의 이치가 있건마는 도리어 사람이 살피지 못할 뿐이다(故人之聲音 皆有陰陽之理 顧人不察耳)… 정음 지으신 것도 다만 그 목소리에 따라 그 이치를 다하였을 뿐이다(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 목소리에 따라 그 해당 발음기관을 음양원리로 그려낸 것이 바로 한글이었음을 다시 일러주었다.
까마득한 옛날 우리말이 생긴 이래 비로소 그 말과 글이 하나 되는 순간이었다. 요컨대 한글의 제자(制字)나 구조(構造)의 원리가 다 역리(易理)이고 그 자체가 또 서예였던 것이다.
△ 진정 전하께서 한글을 만든 뜻
사실 세계문자사를 차치하고 우리 서예사 맥락에서만 봐도 1446년은 천지가 개벽한 때이다. 비로소 한자와 한글 서예가 분리·공존·혼융되면서 우리 서예문화를 새롭게 쓸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근 500년 넘게 지나온 서예역사를 볼 때 한글은 창제 때 고체(古體)의 근엄함은 16~17세기 과도기(그림3)를 거쳐 19세기를 전후하여 소위 ‘궁체(宮體)’(그림4)로 아름답게 변화하였음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자 위주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조선의 한글서예가 궁궐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 속에서 안주해왔다는 것이다. 또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순도 100%를 지향하는 한글전용의 온실에서 재배돼왔고, 그 방법 또한 남의 생각을 기법적으로 전달하는 데 골몰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전하에게 여쭈어볼 도리밖에 없지만 이미 당신께서 한글을 만든 뜻은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는 통하지 않는 어린 백성을 위할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다분히 명나라를 의식한 외교적 언사일 뿐 내심은 조선의 주체성을 세우는 고도의 작업이었다. 그 방법 또한 역리(易理)와 자방고전(字倣古篆)이라는 정음의 제자나 구조원리가 말해주듯 정체성(正體性)의 끈을 놓지 말되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덮어놓고 ‘씀’에만 골몰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전하의 진정한 메시지인 것이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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