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열전]3단계로 발전 ‘송설체의 한국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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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선 중기에는 송설체의 전형미에도 불구하고 연미함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퇴계 이황을 비롯한 영남학파 도학자나 석봉 한호 등이 도학자의 미감과 성정 기질에 맞는 왕희지 서법의 복고를 직접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퇴계나 석봉의 초기 토대는 송설체였다는 점에서 이 시기를 또 다른 국면에서 전개되는 송설체의 조선화 단계로 볼 수도 있다. 즉 조선 전기가 송설체를 주로 하면서 왕희지를 겸했다면, 조선 중기는 왕희지를 주로 하면서 송설체를 수용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송설체를 중심으로 글씨를 구사한 인물들이 있었는데,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가 여기에 포함된다. 특히 남창 김현성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송설체의 명가로 이름을 날렸는데 평양의 ‘숭인전비문’이 대표적이다.
한편 왕실에서는 ‘열성어필첩’에서 확인되듯이 시기에 따라 다소 부침은 있지만 글씨의 전형으로서 일관되게 송설체가 구사되고 장려되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성종과 숙종(그림 3)이다. 특히 숙종 대는 미불과 동기창을 재해석해낸 백하 윤순이 나와 소위 ‘동국진체’라는 후기의 글씨문화를 열어젖힐 때임을 감안한다면 왕실문화의 보수성과 정통성이 어느 정도인지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양태로 조선화된 송설체는 후대 평가 또한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특히 안평대군의 필적에 대해 농암 김창협은 “서체(書體)는 조맹부이나 점획은 종요와 왕희지”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안평체의 고전적 규범이 통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원교 이광사는 ‘서결’에서 “안평대군이 조맹부와 우열을 다투지만 오직 조맹부의 필법을 사용하여 속스러움을 면치 못했다”고 혹평을 하였다. 그러나 왕희지의 위본(僞本)을 문제 삼아 원교 이광사를 혹평한 추사 김정희는 정작 “우리나라에 이르러는 통일신라·고려 이래로 온전히 구양순체를 익혔는데, 조선에 들어와서는 안평대군이 비로소 송설체로써 따로 한 시대를 열었다”고 하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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