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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예가 열전](8) 조선 초기- 안평대군(下)

회기로 2011. 3. 1. 00:49

[서예가 열전](8) 조선 초기- 안평대군(下)



그림1_ 안평대군 이용(1418~1453), ‘집고첩발(集古帖跋)’ 1443년, 석각 첩장, 개인 소장


그림2_ 조맹부(1254~1322), ‘증도가(證道歌)’, 1316년, 석각 탑본,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소장
-신묘·전형美…조선시대 서체 門을 열다-

고서화의 진위 문제는 작품 가치나 작가 지명도와 정비례한다. 이 명제는 삼척동자도 알지만 필자는 이 바닥에서 근 20년을 구르고 나서야 새삼 실감한다. 좋은 작품은 당연히 돈도 된다. 이 경우는 굳이 감정을 요하지 않는다. 또 돈이 되지 않는 작품은 수준이 말할 것도 없고 가짜도 없다. 문제는 돈도 되고 가치도 뛰어나지만 객관적인 판단기준이 모호한 작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놈의 판단기준이 작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사람마다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대개 현장에서는 이러한 경우가 두 부류로 나뉘는데 안평대군 이용이나 석봉 한호가 전자라면 추사 김정희는 후자다.

몇 해 전 일이지만 필자에게는 안평대군 작품만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너무 일찍 고인이 되었지만 몇 글자 출입을 놓고 “이 작품이 안평대군이면 내 목을 내놓겠다”고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며 정색을 하고 단언했던 선배였다. 당시 하도 단호해서 등골이 오싹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 일은 보는 사람마다 견해가 달라 안평대군이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두고두고 작품을 보는 태도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 귀신같은 예겸의 눈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례가 이미 안평대군의 시대에도 있었다. 김안로가 쓴 ‘용천담적기’를 보자.

중국에서 온 사신 예겸(倪謙)이 신숙주가 들고 있는 책표지에 ‘泛翁(범옹:신숙주의 자)’이라고 쓴 안평대군의 정자 글씨를 보고 “필법이 아주 신묘한데 누가 쓴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신숙주가 강희안이 쓴 것이라 둘러댔다. 예겸의 요청 끝에 강희안의 글씨를 받아 주었더니 정작 그는 “같은 사람의 글씨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세조가 이 말을 듣고 “왕손(王孫)과 공자(公子)는 건전한 문예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니 예술에 있어서 기피할 까닭이 무엇인가” 하고 안평대군을 시켜 글씨를 써서 주도록 하였다. 그 후 조선 사람이 중국에서 좋은 글씨를 구하려고 하면 “당신 나라에 제일 가는 사람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멀리 와서 글씨를 구입하려 하오”라고 했다. 이래서 안평대군의 글씨가 중국에서 중요시되게 된 것이다. 예겸 같은 사람은 감식력이 신같이 깊어서 한 자, 한 구절을 보고도 능히 진짜와 가짜를 판별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귀한 존재였다.

이것을 보면 예겸이 안평대군의 작품 감정은 물론 그를 중국 최고 작가로 데뷔시킨 주인공인 셈인데, 이러한 ‘예겸의 눈’은 아직도 안평대군을 분간하지 못하는 지금이야말로 더욱더 절실한 것이다. 그나마도 현재 유일하다고 알려진 안평대군의 진적 ‘소원화개첩(국보 238호)’은 2001년 1월부터 도난된 상태다. 나머지 대부분 필적은 ‘해동명적’의 석판이나 목판으로 찍은 병풍이나 서첩으로 전해지니 사정은 더 딱하다.

그러면 천하의 안평대군 진적이 왜 이렇게 희귀할까. 그가 계유정란의 희생자라는 점과 500년이 넘는 세월과 잦은 전란에서 그 원인을 찾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퇴계 이황의 유묵 또한 임란 이전이지만 조선을 통틀어 어느 작가보다 많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보고도 못 보는’ 우리시대 안목이 그나마 남아있는 안평을 죽이고, 또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 당신 나라에 제일 가는 사람이 있소

안평대군의 글씨 이야기 중 가장 통쾌한 지점은 조맹부와 비교될 때이다. 이미 예겸을 통해 중국인의 안평대군 글씨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았지만 그들 스스로 “송설옹의 삼매를 얻었다”거나 “당시 어느 작가도 안평대군에게 미치지 못 한다”고 고백할 때 그 우쭐함은 배가된다. 아래는 문종 즉위년(1450) 8월의 실록 기사다.

사신 정선(鄭善)이 궁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예겸과 사마순(司馬恂)이 안평대군의 친필을 바치니 황제께서 말하시기를 ‘매우 좋다. 꼭 이것이 조맹부다’ 하면서 칭찬하기를 마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급기야 황제까지 나서니 당시 안평대군의 필명이 하늘을 찌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그 필적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는가. 안평대군의 글씨(그림 1)를 두고 박팽년은 “꽃같이 아름다운 글자 자태가 무궁하고(美質揷花無盡態)/햇살 같은 신채 기이함도 가지가지(神光射日更多奇)”라고 노래하며 인상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조형적으로도 보통 해서의 기준작품으로 치는 ‘몽유도원도’ 발문을 보면 골기가 드러나지 않는 유려한 점획, 균제미가 뛰어난 결구는 안평체의 전형미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점은 조맹부의 ‘증도가’(그림 2)와 비교해 보아도 확인되는데, 동일한 서풍 속에서도 안평대군의 글씨가 증도가보다 더욱 정돈된 필획으로 구사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안평체’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은 해서뿐만 아니라 행서나 초서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그것은 이덕무가 ‘청장관전서’에서 “안평대군이 취중에 금니(金泥)를 흑단에 뿌린 뒤에 붓을 들어 그 뿌려진 금니의 점을 따라 초서를 만들었다”고 특기할 정도로 기운생동의 묘가 극에 달할지라도 전형이자 시대양식으로서 안평대군의 서풍은 여전한 것이다.

# 개창기 조선문화의 전형으로서 안평체

그러면 안평대군 글씨의 이런 전형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그것은 이미 아는 대로 송설체에서 나왔고, 더 거슬러 가면 그 토대가 된 왕희지에서 찾아진다. 그래서 역사가 조맹부를 두고 한족의 정체성을 왕희지 서법에서 찾은 복고주의 화신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지만, 같은 맥락에서 안평체의 ‘고전적인 아름다움’ 또한 그 개인의 성취로만 끝나지 않았다. 요컨대 안평대군의 글씨는 세종대에 절정을 구가한 개창기 문화의 미감과 바로 직결된다는 것이다.

숭유억불정책을 기조로 사대부들이 주도해나간 조선 초기 문치주의의 지향점은 바로 고전에서 전형을 찾아내는 데에 맞추어졌고, 중심 현장은 왕실과 집현전이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훈민정음 창제인데 주역과 사물의 형상을 본뜬 제자원리, 글씨의 점과 획을 옛 전자(篆字)에서 착안하였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요컨대 ‘뿌리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을 모토로 한 세종시대 문예의 기조는 주로 고제(古制) 연구를 통해 국가 기틀을 세우고 토대를 다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글씨분야만 해도 그 근본을 왕희지에서 찾아낸 송설체를 안평대군이 핵이 된 왕실과 집현전 학사들이 조선식으로 재해석해낸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송설체의 단순도입만이 아니라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내내 토대가 되었던 ‘나정서’ 등 왕희지 필법이 그 토대로서 동시에 교육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조선왕족실록을 보자.

주자소에 전교하기를, “교서관에 소장한 ‘집고첩’ 중에서 조맹부의 ‘증도가’ ‘진초천자’ ‘동서명’과 왕희지의 ‘동방삭전’ ‘난정기’ ‘설암두타첩’ 등의 서본(書本)을 인쇄하여 이를 성균관으로 보내어 학생들로 하여금 모범으로 삼게 하라”고 하였다. (세조 1년 10월 21일자)

여기서 조맹부와 왕희지 법첩이 조선 초기 글씨의 기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안평대군 글씨의 가치 또한 이러한 고전에서 그 전형을 찾아내었다는 데 있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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