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열전](7) 조선초기 - 안평대군(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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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글 전서와 한자 해서라는 전혀 다른 서체임에도 불구하고 그 원류를 따지면 한글이 역리(易理)에 바탕을 둔 제자원리나 상형(象形)을 고전체(古篆體)로 디자인한 글자형태라는 측면에서 상통의 여지가 많다. 그래서 15세기 조선의 글씨 메커니즘을 알기 위해서도 그렇고 한글·한자의 미래를 위해서도 전혀 다른 이 둘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한자인 안평의 조선 송설체를 보기 위해 한글인 훈민정음으로 들어가 보자.
사실 세종이 서예가여도 아니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훈민정음이 세종 개인의 천재적 산물만이 아니라 15세기 문자문화 역량의 총 집결체라는 점이다. 혹자는 훈민정음 창제를 두고 베일에 싸인 비밀 프로젝트라 소설을 쓰고 있지만 명명백백한 사실 하나는 세종은 물론 여러 왕자와 집현전 학사 모두 말에 짝하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 문자창제에 필수 불가결한 언어학·자학(字學)·서예이론은 물론 문자역사에 대한 통찰력이나 서사능력이 최고수라는 점이다.
-훈민정음과 안평대군, 그리고 고전(古篆)-
훈민정음이 반포되던 세종실록 26년(1444년) 2월16일 기사를 보면, 송설체만 잘 쓴 줄 알았던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 훈민정음 창제에도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즉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이선로·이개, 돈령부 주부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에 나아가 언문(諺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고, 동궁(東宮)과 진안대군 이유·안평대군 이용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 세종22년(1440년) 1월10일의 기사에는 문자학에 대한 세종의 독려에 예조에서 마련한 교서관의 자학(字學) 권면 조건이 있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전자(篆字)를 쓰는 능력에 따라 종학박사, 교리, 낭(郞)을 겸임케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조에 통보하여 승진과 좌천의 증빙 근거로 삼았다. ▲공문서의 도장을 해독하지 못 할 경우 최고 관직을 파면케까지 하고 있다. ▲예조와 교서관에서 취재(取才)를 할 때 전자(篆字)를 쓰지 않는 자 그 가족을 가두고, 세차례나 쓰지 않는 자는 계문(啓聞)하여 논죄한다. 또 관리 선발과목에 대전(大篆)은 비(碑)·갈(碣)에 쓰고, 소전(小篆)은 도서(圖書) 위에 쓰며, 방전(方篆)은 인장(印章)에 쓰는 것이라 모두 뺄 수 없다고 했다. 더 나아가 매양 사맹삭(四孟朔:음력1, 4, 7, 10)이 되면 예조와 그 학(學)의 제조가 시험해 뽑되 대전·소전·인전(印篆)·팔분(八分)을 차례로 쓰게 하여 평점 결과를 거관(去官)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 사실을 지금 접한 필자부터가 충격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사물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옛 전서체를 모방했다(象形而字倣古篆)’는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을 증명해서만이 아니다. 필자의 과문인지 몰라도 아직도 우리 서예가들에게 ‘자방고전’(字倣古篆)은 하나의 설일 뿐이다.
15세기 한국 서예사에서 송설체는 이미 노래가 되었지만 전서가 이렇게 국가적 차원에서 연구되고 실천되었다는 사실을 들어보지 못했다. ‘궁체’를 통한 작금의 빈곤한 한글서예 이론 찾기나 중국 아류정도의 극심한 자기비하 속에 전개되는 한국서예 정체성 모색은 훈민정음에 대한 이러한 피상적 이해의 연장선상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세종은 한자를 극복하기 위해 더 철저히 한자를 파고들었던 것이다.
-조선글씨의 토대 ‘안평체’-
그러한 경우는 안평대군을 보는 우리의 눈에서도 발견된다. 지금까지 안평에 대한 평가는 청경수려(淸勁秀麗)한 필치(그림1)로 송설 조맹부를 뛰어넘은 송설체의 대가로 조선의 3대 혹은 4대 서가라는 개인적인 성취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그러나 즉 송설체의 명가는 안평만도 아니고, 송설체의 현장 또한 몽유도원도 발문만이 아니었다. 세종은 물론이었겠지만 문종(그림2) 정인지 성삼문 박팽년 강희안 등 집현전 학사 모두 송설체의 대가였다. 훈민정음에 보이는 한자는 그 자체가 또한 송설체의 표본이었다. 이것은 조선화된 송설체, 즉 ‘안평체(安平體)’가 조선의 국서체(國書體)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추사로 마무리된 500년 조선 서예역사의 토대가 되고 기준이 된 것이 송설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단적인 예가 ‘홍재전서’에 보인다.
정조는 ‘지금사람들의 글자는 무게가 없고 경박스러워서 삐딱하게 기울어지거나 날카롭고 약해보이지 않으면 사납고 거칠다’고 당시 서풍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윤순이 열어놓은 순정(醇正)치 못한 이런 서풍을 바로잡고자 서체반정(書體反正)을 단행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된 것이 바로 송설체 진수를 체득한 안평의 글씨였던 것이다.
-예원의 총수이자 강력한 후원자-
그러나 안평의 존재가치는 예술가만이 아니다. 학예에 천부적 소질을 타고난 그는 시문(詩文)·서화(書畵)·금기(琴碁) 등 쌍 삼절로 불린 풍류왕자였다. 하지만 활자와 법첩제작, 고서화 콜렉션 등에서 조선 글씨문화의 인프라를 구축한 사람이자 당시 집현전을 중심으로 전개된 예원과 문원의 총수로서 교유 인물들의 강력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 직접적인 예는 먼저 우리서화사의 기념비적 작품인 ‘몽유도원도’제작 현장에서 찾아진다.
이 유물은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안견의 그림 안평대군의 제찬과 제시, 그리고 당대명사 21명의 시문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이다. 이 그림의 가치는 유교가 국시인 나라에서 도가사상에 뿌리박고 있는 15세기 또 다른 조선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결정판으로 평가받고 있는 데에 있다.
컬렉션의 세계 또한 빼놓을 수 없는데 신숙주의 ‘보한재집’에 의하면 17세쯤부터 10여년간 모은 중국서화가 192점인데, 고개지·왕유·소동파·곽희·조맹부·선우추 등 명가명품을 일괄하고 있다.
안평대군은 활자제작에도 가담하였다. 그가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수양대군의 손에 사사(賜死)되면서 무위가 되었지만 경오자(庚午字) 판하본(判下本)을 쓴 것이 그것이다. 서법(書法) 판본의 간행에 대해서는 문종 원년(1450년) 11월10일자 기사를 보자.
“안평대군이 ‘역대제왕 명현집’과 ‘왕희지진행초’ 3체와 ‘조자앙 진초천자’ 등의 서법 판본을 바치니, 문종이 명하여 교서관(校書館)에 주어 사람들이 모인(模印)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요컨대 안평대군은 한 개인으로 천재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15세기 조선 문화 황금기 예원의 총수이자 패트런으로서 조선 초의 문자문화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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