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열전]조선중기, 퇴계·석봉體와 정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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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서는 보통 행서에서 발전한 것으로 여기지만 그 원류는 예서(隸書)다. 즉 전서를 빨리 쓴 것이 예서이고, 이러한 예서를 더 빨리 쓰면서 필획이 간략화된 것이 초서의 시작이다. 초서의 시작으로 보는 중국의 황상(皇象)이나 삭정(索靖)의 글씨는 물론 필속(筆速)이 빠르면서도 여전히 예서의 파임이 남아있는 한대(漢代)의 목간(木簡)과 같은 서체를 장초(章草)라 한다.
이것은 다시 동한(東漢)의 장지(張芝)와 왕희지에 와서 규범화되어 오늘날의 초서로 완성을 보았고, 당대의 손과정(孫過廷)은 물론 장욱(張旭)과 회소(懷素)가 이전에 없던 혁신적인 광초를 구사해냄으로써 서예의 예술성을 최고 경지로 끌어올렸다. 명대는 초기 왕희지와 왕헌지의 전통을 이어간 가운데 당대 광초정신을 재해석한 장필의 등장으로 또 다른 혁신적인 서풍도 구사되었다. 특히 이러한 장필 초서는 최경창이 ‘늙은 교룡이 똬리를 틀고 있고, 바람과 우레가 벽에서 일어나는 듯하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 조선 초서의 형성과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자암 김구, 하서 김인후, 봉래 양사언, 고산 황기로이다. 황고산의 초서풍은 그의 사위이자 율곡 이이의 동생인 옥산 이우, 아계 이산해, 어우 유몽인, 청선 이지정, 옥동 이서, 송하 조윤형 등으로 맥이 이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될 것은 한반도의 초서, 즉 광초나 금초 이전에 그 시작인 장초의 전래 문제이다. 지금까지는 이렇다 할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고대 서예사는 기존 자료에 의존하여 소극적인 연구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년에 들어와 함안 성산산성(그림2), 하남 이성산성, 김해 봉황동유적, 경주 월성해자 등지에서 괄목할 만한 삼국시대 목간이 출토됨으로써 빠르게는 한대의 장초에서부터 위진 남북조시대 과도기적인 해서체가 한반도에 전래되어 일상문자생활에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그 내용이나 유적지 출토물을 통해 목간의 제작시기가 이미 상당한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시기나 지역에 따라 편차가 심하게 보이는데 서체적 측면에서 당시 중국과의 비교는 물론 기존의 금석문에 나타난 글씨와의 관계를 규명하여 그 영향관계를 보다 정확히 규명하는 것이 향후 과제라 하겠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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