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열전]‘조선서예사 大綱’ 으로서의 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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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간행 ‘열성어필’ 석각본은 1662년(현종3년) 문종에서 효종까지 구묘(九廟) 어필이고 그 이후 태조를 포함하여 현종 숙종 경종의 어필이 추가되었다. 목판본은 선조 인조 효종 현종 등 사묘(四廟)어필이 숙종 때 처음 간행된 후 숙종·경종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어필이 대를 이어 간행되는 이유는 선왕의 유지를 받들기 위함인데 영조는 자신의 어필을 간행하면서 ‘지금 내가 문(文)과 필(筆)에 대해 이렇게 열심인 것은 어찌 나를 위함이겠는가? 그 뜻은 선왕(先王)을 거듭 이어감에 있다. 문필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정치에 있어서야!’라고 하였다.
한편 어필은 어진(御眞)과 마찬가지로 극도로 존모(尊慕)의 대상이었다. 정조는 임란당시 함경도 관찰사 송언신에게 보낸 선조의 비밀편지를 보고 ‘한점 한 획의 기미에 성인(聖人)의 심법(心法)이 있다’고 할 정도다. 어필의 외부유출 또한 있을 수가 없다. 1642년(인조 20년) 일본에서 통신사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원당(願堂)에 게시할 ‘日光淨界 彰孝道場’(일광정계 창효도량)의 어필을 요청하였는데 의창군 이광이 대필하였던 것이 단적인 예이다.
어필은 국사(國事) 관련 자손과 신하에게 내린 명령이나 가르침인 ‘교시(敎示)’ ‘훈유(訓諭)’ ‘편지’는 물론 ‘현판’ ‘시고’ ‘제발’ 등 본격적인 서예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어필은 민간에서는 ‘어서각(御書閣)’을 세워 봉안하였지만, 역으로 왕실에서 관직 ‘상(賞)’ 하사품을 조건으로 진헌(進獻)을 통해 수집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부조리는 1667년 홍모씨가 박미 소장 장인(선조)의 묵죽병풍을 모사품 바꿔치기 수법으로 훔쳐 바쳤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하사품을 회수당하고 심문을 받는 일까지 있을 정도로 심각하였다.
조선시대 어필의 서풍은 크게 초기 중기 후기 등 세 시기에 걸쳐 바뀌었다. 모든 어필이 기준 아닌 것이 없었지만 각 시기 대표 어필을 굳이 꼽는다면 문종·선조·정조를 각각 들 수 있다.
그 이유는 조선글씨의 토대가 된 조맹부의 송설체가 문종을 통해 씨가 뿌려졌다면 선조는 그것을 가장 조선적인 글씨로 재해석하여 우리의 미감으로 녹여서 것으로 만들었고, 정조는 서체반정(書體反正)을 통해 다시금 흐트러진 서풍을 초기와 중기의 순정(純正)함으로 되돌렸기 때문이다.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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