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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속(續)짜집기 경주여행 독락당 - 회재 이언적...

회기로 2012. 9. 13. 21:47

속(續)짜집기 경주여행 독락당 - 회재 이언적...

 

'게으름은 항상 일을 그르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편함을 쫓다보면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꼴을 만들게 된다.

2009년 5월에 갔던 옥산서원과 독락당 아래 글의 대부분을 당시에 이미 써놓고는 어떤 이유인지도 모르게

그냥 방치해 둔 것을 기억해내고는 3년이 지난 이제서야 다시 찾아 몇 자를 덧붙여 내어 놓는다.'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

조선 성리학파 중 영남학파의 시조격인 인물.

40여년 전 고교시절 배운 국사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자료들을 찾아본다.

이기론(理氣論)에 있어 그가 주창한 주리(主理)론은 퇴계 이황(1501~1570)에 의해 계승되고

이를 따랐던 영남출신의 학자들을 영남학파라 부른다.

 

사림과 훈구의 피튀기는 정권 싸움-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의 시대를 살면서

사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던 그였기에 혼자서 즐거움(獨樂)을 찾을 시간이 절실했던 것일까?

1532년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벼슬에서 밀리어 고향에 내려와서 지은 것이

바로 독락당(獨樂堂)이라고도 불리고 옥산정사(玉山精舍)라고도 불리는 이 집이다.

 

 

 

 

재차 벼슬길에 올라서 다시 을사 사화의 와중에 휩쓸리다가 끝내는 국토의 서북쪽 끝,

평안도 강계땅에서 일생을 마치게 되는 회재.

사실, 성리학의 성짜도 모르는 내가 어줍짢게 이일원론이니 사단칠정이니 하고 읇는다면

나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웃을 것인가?

그래서 그런 부분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사진 몇 장으로 회재가 남겨놓은 옛 집들을 보여드리는 것으로 나의 소임을 다하고자 한다.

 

이곳에 찾아간 것이 5월 초의 어느 날이었으니 벌써 달 반이나 지난 일이 되어 버렸다.

그 동안 이제나 저제나 틈나기를 기다렸으나 좀처럼 사정이 허락치 않아 이제서야 정리해본다.

독락당을 찾을 생각을 한 것은 이왕 경주 부근으로 가는 것,

2003년도엔가 경주 양동마을과 이 곳 독락당에 들러

남들이 찍은 사진으로만 보던 계정(溪亭)과 그 앞의 계곡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남기려고 했으나

카메라 메모리의 부족과 닳아버린 배터리때문에 목표했던 것의 10분의 1도 해내지 못해서

언젠가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해 오던 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그 날은 5월 초의 날씨 치고는 꽤나 더운 날씨였다.

 

 (독락당 솟을 대문)

 

솟을대문을 지나면 앞에 보이는 것이 왼 쪽으로 제법 넓은 마당과 경청재(敬淸齋)라는 현판이 붙은 긴 건물이다.

 

 

 

 

 

淸(맑음)을 공경하라는 이야기는 선비의 도인 청렴을 중히 여긴 회재의 뜻을 받듦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해 본다.

 

 

 

 오른 쪽으로는 계정 쪽으로 나가는 좁은 골목으로 통하는  작은 현관같은 구조의 공간이 나온다.

구조가 복잡하기는 하나 치장은 거의 없는 질박함이 조선의 선비들이 생각해낸 청(淸)이 아닌가?

 

 

 

 

 

 그리고그 소박함은 계곡으로 통하는 골목과 양쪽의 흙담으로 이어진다.

 

 

 

 

 

독락당 경내는 한창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공사 중이어서 오히려 나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왜냐하면 평상시 같았으면 문이 닫혀 볼 수 없을 구석구석을 공사때문에 열린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봉 이호민과 서애 유성룡의 글이다.

아마 두 분이 함께 이곳을 방문해서 쓴 글일 것이다.

서애는 워낙 잘 알려진 인물이라 굳이 내가 언급하지 않아도 되리라 보고

오봉은 선조와 광해군 시절의 인물로 대제학, 판서 , 좌찬성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 윤두수의 글...

서애와 오음은 퇴계에게서 수학하나 당쟁의 와중에 서애는 동인, 오음은 서인으로 갈라선다.

 

 

그런데 나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큰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던 분이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나같은 아마츄어가 아님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가 누군가와 하는 전화통화는 이 댁의 주인 또는 그에 버금가는 인물과 하는 통화인 것 같았다.

그는 평소에는 공개를 하지 않는 이 곳의 깊숙한 곳을 촬영하게 허락해달라는 간청을 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들리지는 않지만 이 집 주인의 대답은 그리 호의적인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어쨌든 자연스레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문화일보 문화부의 기자라고 했다.

(나중에 문화일보 사이트를 찾아보고 그가 박경일 기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뭏든 박경일기자 덕분에 천연기념물 115호인 중국주엽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옛 건물을 보러 간 이 곳에서 천연기념물을 보게 될 줄을 어찌 알았으리오?

 

 

 

 

그리고 공사중이어서 열려 있던 문을 통해서 옥산정사(독락당)를 볼 수 있었고...

누군가가 극찬을 했던 정자인 독락당 계정...

그 계정 앞의 너럭 바위에 일단의 야유회 단체가 자리잡고 있어 좋은 시각(視角)을 확보하지 못하여서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것이 유감이었지만 몇 년 전의 아쉬움을 그런 대로 메꿀 수 있던 시간이었다. 

 

 

 

 

 

 

 

 

공사중이었던 뒷마당에 들어서서야계정(溪亭)은 'ㄱ'자로 꺾어진 건물의 계곡을 면한 정자를 일컬음이고

양진암은 그 안 쪽의 건물을 말한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어  때맞추어 이 곳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정

 

 

 

 

양진암

 

 

새로 신축한 회재유물관...

 

 

 

 

독락당...

계정...

아래에 2003년 당시의 사진 몇 장을 얹는 것으로 맺는다.

  

 

 

 

 

 

그리고 독락당에서 300미터 쯤 더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독특한 모양의 국보 40호

정혜사지 13층 석탑을 덤으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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