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강의>
영화 「관상」의 실제인물, 조선왕조실록에 수두룩
글·송은석(사주칼럼니스트)
이현로, 주인공 ‘내경’의 실재인물
앞서의 강의 「제4강 조선, 과거시험으로 관상감의 사주쟁이를 뽑았다」에서 우리는 ‘천문·지리·사주’ 전문가들을 채용하는 과거시험인 음양과에 대해 살펴본바가 있다. 동시에 관상감 소속의 정식관원이었던 이들이 권력의 향배에 따라 ‘천당’과 ‘지옥’ 사이를 오가는 음지의 삶을 살았다는 점도 함께 살펴보았다. 오늘은 잠깐 쉬어가는 의미에서 음양가들이 역모·반란사건의 중심에 선 사례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조선의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와 관련된 실제의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대다수는 왕실, 조정의 실권자 또는 지방의 세력가들이 음양가를 끼고 일(?)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결국 멸족된다는 이야기들이다.
2013년 대흥행을 기록한 송강호 주연의 「관상」 역시 이러한 테마를 스토리텔링으로 상품화 시켜 대박을 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관상의 시나리오 작가가 탄생시킨 ‘내경’이라는 가상의 인물. 물론 정확히는 어떠한 시각과 의도에서 창조된 인물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필자는 ‘내경’의 실제인물에 가까운 한 인물을 조선왕조실록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현로(李賢老)」인데 활동했던 시기도 세종·문종·단종 시대로 영화 「관상」의 시대적 배경과 동일하다. 그리고 공신의 후예이자 조정의 관료출신 임에도 불구하고 왕조실록에는 안평대군 이용의 ‘가노(家奴·집의 종)’였다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 이는 영화에서 ‘내경’이 조정의 실권자인 김종서의 가노가 되는 장면과 서로 상응한다. 또한 이현로는 안평대군·김종서·황보인의 편에 서서 수양대군과 힘겨루기를 하다 결국은 수양대군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는 점도 영화 「관상」의 주인공 ‘내경’의 삶과 너무나 닮았다. 다만 ‘내경’은 관상가로, ‘이현로’는 풍수가로 묘사된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비운의 음양가 ‘이현로’에 대해 한번 알아보자.
음양학에 밝았던 유자 이현로
‘이현로’가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세종 29년(1447)의 일이다. 조정에서 관복(官服·조정대신들의 유니폼)의 길흉을 논하는 장면에서 이현로는 집현전 부교리(종5품)의 신분으로 등장한다. 당시 그 자리에는 세종을 비롯한 대신들과 함께 집현전 학자인 성삼문, 유성원 같은 인물들도 함께 있었다. 여하튼 집현전 학자로서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한 이현로는 이듬해(세종30년·1448) 병조정랑(정5품)의 신분으로 세종의 막내아들인 8남 영응대군 이염의 집터를 잡아주었다. 당시 집터를 두고 조정 대신들 간에 의견이 분분했으나, 세종은 최종적으로 이현로의 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실록에는 세종이 이현로의 안을 수용하여 안국동의 민가 60채를 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이현로가 원종공신의 후예로서 문관이자 유자(儒者)였지만 풍수지리에도 능통했음을 처음 알려주는 대목이다.
같은 해인 세종 30년(1448). 이현로는 병조정랑의 자리에 있으면서 매관(賣官·뇌물을 받고 관직을 줌)을 한 죄로 순창, 남평, 사천 등지로 유배형을 받았다. 당시 조정의 대신들은 그 죄의 무거움을 들어 국문(鞠問·임금의 명으로 중죄인을 심문)으로 엄히 다스릴 것을 건의하였으나, 세종은 매번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종서, 황보인 등도 이현로를 중죄인으로 엄히 다스려야한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이현로와 연줄이 닿은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문종 1년(1451) 1월. 드디어 이현로와 김종서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당시 평안도 도체찰사로 나가 있던 김종서가 ‘이현로를 자신이 쓸 수 있도록’ 문종에게 건의하여 윤허를 받아낸 것이다. 이 때 김종서는 문종에게 ‘이현로는 방위를 점치는 일에 능통하니 군중에 데리고 있으면 그 이익이 크다. 지금은 근신 중이니 일단 나의 군중에 두고 문적을 검열하는 소임을 맡기겠다’ 고 상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운명적인 만남을 계기로 이현로는 다시 궁중에 진출하여 궐내의 서적을 검열하는 부사직에 까지 이르게 된다. 이때도 역시 그의 등용에 대해 부당함을 고하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문종은 ‘이현로가 풍수비서에 밝아 그에 상응하는 일을 맡긴 것이니 상관 말라’며 이현로를 비호했다. 이때 즈음 이현로는 안평대군과 김종서의 사람이 된다. 그리하여 이현로는 유자(儒者·유학자)가 아닌 풍수가로서 안평대군과 김종서를 등에 업고 드디어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같은 해에 이현로는 영릉(세종의 능)의 비각공사에 관여하여 기존의 책임자를 쫓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는가 하면, 문종 2년(1452)에는 세종의 부묘(祔廟·상을 마치고 신주를 사당에 봉함)에 대신들의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평대군 이영의 추천으로 주요 소임을 맡기도 했다.
단종 즉위년. 문종의 산릉작업에 대해 ‘목효지(睦孝智)’라는 자가 상소를 올린 일이 있었다. 목효지는 애꾸눈의 풍수가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한낱 천한 신분의 풍수가 왕실을 능멸하였다하여 목효지를 안성참(安城站)의 아전에다 예속시켜버렸다. 그리고 세조, 안평대군, 김종서, 황보인, 정인지 등은 애꾸눈 풍수 목효지의 글을 이현로에게 맡겨 그 진위여부를 판단케 하였다. 이때가 1452년 6월 6일이었는데 같은 날 수양대군는 자신의 4째 동생인 금성대군 이유에게 ‘앞으로는 이현로와 절대 얽히지 말라’고 거듭 경고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사에 대해 사관은 ‘이현로는 공사(公私)의 일을 안평대군에게는 고하고, 수양대군에게는 고하지 않았으며 매우 불손하게 굴었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겉으로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1452년 7월 23일. 권람이 비밀리에 세조를 찾아가 ‘이현로는 안평대군의 가노인데 지금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전했다. 세조는 이에 대해 답하길 ‘이미 알고 있다. 허나 안평대군의 사람들은 모두 재물로 사귄 자들이고, 용렬한 자들이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계유정난은 이 이듬해인 1453년 10월의 일이니, 이미 일 년 전부터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사이에 치열한 왕권쟁탈전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52년 9월. 북경으로 갈 고명사신 자리를 두고 황보인과 김종서가 안평대군을 그 자리에 세우기 위해 미리 손을 썼지만, 수양대군에 의해 좌절되자 안평대군과 이현로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며 분개를 했다.
1452년 윤 9월 6일. 드디어 이현로가 사고를 친다. 문종의 산릉작업에 「산릉도감장무」의 소임으로 있던 이현로가 산릉현장에서 안평대군에게는 아부를 하고, 세조에게는 대답조차 않는 등 매우 무례하게 굴었다. 이 일로 수양대군은 이현로에게 채찍으로 매질을 가하였는데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수양대군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네가 망령되게 화복(禍福)을 말하고 안평(安平)에게 아부하니 죄가 하나이고, 몰래 혀를 놀려 우리 골육을 이간하였으니 죄가 둘이다. 네 죄가 지극히 크니 죽여도 아깝지 아니하다. 예전에 문종께서 네가 예정된 운수로써 사람들을 미혹하게 함을 알고 의논하여 법에 두려고 하였는데, 나의 영구(營救)를 힘입어 〈죄를〉 면함을 얻었으나, 나의 사은(私恩)은 아니며, 오늘 너를 치는 것도 나의 사사로운 노여움이 아니다. 조사(朝士)는 비록 작은 예(禮)일지라도 욕보일 수 없는 것인데 너는 안평(安平)의 집 마졸(馬卒)이다. 내가 이런 까닭으로 매를 친다.”
매질이 있고 이틀 뒤, 아직은 무명이었던 수양대군의 가신 한명회가 이현로의 집으로 문안을 갔다. 그때 이현로는 세조가 자신을 염병처럼 미워하니 반드시 없애고 말겠다는 뜻을 내비친다. 이에 그 말뜻을 묻는 한명회에게 ‘큰일을 네가 어찌 알겠는가? 두어 달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는 말과 함께 ‘내가 너를 안평대군에게 천거 할테니 곧장 안평대군을 찾아가라’는 말을 남긴다. 이는 한명회가 수양대군의 사람임을 이현로가 몰랐다고도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영화 「관상」에서도 한명회라는 존재를 매우 비밀스럽게 묘사한 것처럼 말이다.
이후 혜빈(세종의 후궁)과 안평대군의 계집종 악비 등의 밀고와 함께 1453년 10월, 드디어 계유정난이 일어난다. 김종서, 황보인 등은 세조의 손에 죽고,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안치되었다가 결국 사사되었다. 이현로 역시 이들과 함께 멸문지화를 피할 수 없었다.
한편 계유정난이 있은 직후, 안평대군과 이현로의 집에서 괴상하고 신비스러운 글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보지도 않고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아마도 이 글들은 풍수도참설에 관계된 글들이었을 것이다. 이현로는 자신의 풍수이론을 근거로 안평대군을 왕권에 도전토록 부추긴 사실이 실록에 여러 번 나타난다. 예를 들자면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왕기가 서려 있는 곳에 집을 짓고 거하게 함은 물론 각종 음양·도참설과 꿈 의 해몽 등을 들 수가 있다.
안평대군의 죄목
안평대군의 죄목에 대해서는 실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 이현로와 함께 풍수도참과 관련된 죄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단종 8권, 1년(1453 계유 / 명 경태(景泰) 4년) 10월 25일(무신) 2번째기사
「이용이 반역 모의한 정상을 조목을 열거하여 효유한 내용」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이용(李瑢)의 모역한 정상을 대소 인민이 혹 알지 못하니, 청컨대 조목을 자세히 열거하여 중외에 효유(曉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용의 역모는 하루 아침 하루 저녁이 아니라, 세종·문종 때에 있어, 맹인(盲人) 지화(池和)가 용의 운수를 보고 망령되게 군왕의 운수라고 말하였고, 이현로(李賢老)가 또한 말하기를, 귀하기가 말할 수 없어서 국군(國君)의 팔자(八字)라 하고, 또 참서(讖書)에 의거하여 말하기를 하원 갑자(下元甲子)에, ‘성인이 나와서 목멱정(木覓井)의 물을 마신다.’운운하였는데, 백악 북쪽이 바로 그 곳이어서 참으로 왕업을 일으킬 땅이니, 그 곳에 살면 복을 받을 수 있다 하였다. 용이 그것을 믿어 그 곳에 집을 짓고 무계 정사(武溪精舍)라고 칭호하여 부참(符讖)에 응하려고 하였으며, 또 여러 번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끝내 대군만 되고 말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지화가 주상의 성산(聖算·사주팔자)과 의춘군(宜春君)이우직(李友直)의 팔자를 비교하여 점을 쳤다.
▖이현로가 가만히 역사 수십 인을 길러 자칭 휘하(麾下)라 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기를, ‘내 휘하는 모두 장용한 사람이다.’ 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남아의 공명은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이 내 재주를 내었으니 반드시 쓸 데가 있을 것이다.’ 하고, 또 사람에게 말하기를, ‘멀지 않아 반드시 난(亂)이 일어날 것이다. 내가 안평에게 권하여 「힘써 인심을 수습하라.」고 하였다.’ 하였다.
▖지난해 가을에 수양 대군이 이현로가 망령되게 화복(禍福)을 말하여 용을 꾀이어 종사를 위태롭게 하기를 도모하는 것을 알고 용 및 황보인·김종서와 더불어 한곳에 모인 자리에서 이현로를 때리어 짐짓 사단을 발하여 장차 법에 처치하려 하였으나, 황보인·김종서 등이 용에게 아부하여 끝내 내버려두고 묻지 않았다...(생략)
세종은 아들만 8형제를 두었다. 장남은 왕위에 오른 문종이요, 수양대군은 2째요, 안평대군은 3째였다. 수양대군에게 한명회가 있었듯, 안평대군에게는 맹인 사주쟁이 ‘이지화’와 그의 가노인 ‘이현로’가 음양술과 풍수도참술로 역모의 명분을 제공한 셈이었다.
세종29년(1447)에 처음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등장했던 이현로. 그는 단종1년(1453) 계유정난으로 유배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선왕조실록은 그의 마지막 행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단종 8권, 1년(1453 계유 / 명 경태(景泰) 4년) 10월 10일(계사) 6번째기사
「이현로의 간사한 성품과 반역죄로 효수당하기 전까지의 행적」
이현로가 벼슬이 떨어져서 충청도 관찰사 안완경·체찰사 정분을 따라 충주에 이르렀는데, 미처 말에서 내리기 전에 잡는 자가 끌어내리어 묶어서 담 그늘에 두었다. 종자가 술을 찾아 먹이니, 이현로가 말하기를,
“뜻밖에도 내가 묶이어 담 밑에서 술을 마시는구나!” 하였다.
이현로가 성품이 간사하여 꾀가 많고, 아첨하여 이(利)를 좋아하여 항상 기절을 세우고자 하며, 또 음양(陰陽)의 비술(祕術)과 활 쏘고 말 타는 병략을 좋아하고 그 재주를 자랑하여 걸핏하면 예전의 유명한 사람을 끌어서 스스로 비교하며, 사람과 말할 때는 반드시 어깨를 치키고 팔을 벌려 성기(聲氣)를 거짓으로 지어 방약무인이었다. 무릇 자그마한 일도 반드시 괴이한 이름을 숭상하여 그 종에 갓을 만드는 자를 초공(草工)이라 하고, 신을 만드는 자를 혁공(革工)이라 하고, 풀무질을 하는 자를 금공(金工)이라 하여, 사람을 대해서도 그렇게 불러서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여러 불령(不逞)한 사람들을 꾀어 들여 노복으로 부렸는데, 저들 역시 풍지(風旨)를 이어받아 분주하게 사역에 복종하여 혹시라도 뒤질까 두려워하였다. 일찍이 사천으로 귀양갈 때에 의상(衣裳)과 기물이 무려 수십 바리가 되어 모두 건장한 종에게 맡겼는데, 실상은 가동(家僮)이 아니었다. 이때에 이르러서도 수행하는 자가 또한 많았는데, 주형(誅刑)을 당하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사람됨이 여우처럼 아첨하고 원숭이처럼 사특하여 음흉하고 걸힐(桀黠)한 것이 더불어 비교할 사람이 없었다. 그 동료 강희안(姜希顔)이 자제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 녀석을 가까이 하지 말라. 마침내 제 집안에서 죽을 자가 못된다. 내가 일찍이 이 녀석의 골통을 보니, 피에 얼룩진 형상인데, 어떻게 생긴 노파가 이 녀석을 길러냈을까?”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이현로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편이니 어쩌겠는가!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도 다 있다. 이렇게 세상이 욕하고 침을 뱉았던 이현로가 정조대에 제정된 단종 절의신을 위한 「어정배식록(御定配食祿)」의 별단에 들었다는 사실이다. 「어정배식록」은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의 충신단(32명)과 별단(198명)에 오른 인물들을 기록한 것이다. 이점을 고려해보면 이현로는 패배자인 안평대군의 사람이었기에 불행히도 역사에 오명을 남긴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여하튼 조선시대에는 이런 인물도 있었고 이런 사건들도 있었다. 최첨단 과학정보통신시대라 일컬어지는 21세기. 지금은 안평대군과 이현로 같은 인물이 없을까? 글쎄올시다.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요즘. 주변을 잘 한번 돌아보라. 아직도 그들의 뒤를 따르는 후예(?)들이 많이 있다. 아마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없어질리 만무하지 싶다.
이상 끝...
송은석(사주칼럼니스트·daum사주카페 ‘마의태자의 풍경산방’ 방장)
☎018-525-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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