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

[스크랩] [서예가 열전](20) 조선 후기- 창암 이삼만

회기로 2009. 7. 16. 17:43
[서예가 열전](20) 조선 후기- 창암 이삼만
입력: 2006년 12월 08일 15:50:33
-구름 가듯 물 흐르듯… 자연에서 得筆하다-

그림1. 이삼만(李三晩, 1770~1845?), ‘무이도가’(武夷棹歌), 종이에 먹, 67.3×31cm, 개인 소장. 주희(朱喜)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서시(序詩)에서 제7곡(第七曲)까지 여덟 폭에 쓴 것 중 마지막 폭이다. 창암의 행초 필적 가운데 변화로움이 잘 드러나는 수작이다. 탈초하면 七曲移船上碧灘, 隱屛仙掌更回看. 却憐昨夜峰頭雨, 添得飛泉度幾寒.
좀 과격하지만 요즘 예술에서 민족이란 단어는 사라져야 한다는 말이 서슴없이 나온다. 이유는 사람의 정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예술에 한국 민족 노동과 같은 수식어 자체가 제약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예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서예하면 늘 붙어 다니는 수식어가 ‘대한민국’아니면 ‘민족예술’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작금의 공모전중 열의 일곱 여덟은 ‘대한민국’을 운운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 민족을 말하지만 무엇이 한국적이고 민족적인지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점은 좀 다르지만 이러한 현실인식은 서예역사를 보는 데에도 적용되고 있다. 일각에서 창암 서예를 한국적이라 하고 추사를 중국서예 수입업자 정도로 파악하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창암을 우리나라 서예의 가장 큰 병폐인 외래 지향적이고 사대주의적인 서예이론을 자주적이고 민족주체적인 서예이론과 예술로 전환시켜놓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창암이 서예도구나 이론적 측면에서 중국과 달리 독창적인 반면 추사는 도구 재료는 물론 이론까지도 중국 것에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일견 타당한 측면도 있지만 창암만이 한국적이라는 오류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이런 잣대로 한국성 여부를 따지면 정작 한자(漢字)를 소재로 하는 한 중국 것이 아닌 순수 우리 서예가 어디에 있는 가하는 난감한 질문에 봉착하게도 된다.

# 도구와 재료의 확장과 극공

창암 이삼만(1770~1847)의 경우 모필(毛筆)과 함께 남들이 쉽게 시도하지 않은 갈필(葛筆·칡뿌리) 죽필(竹筆) 앵우필(鶯羽筆·꽤꼬리털)과 같은 특이한 도구나 옷감을 가지고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것은 예술에 있어 주목되는 도구와 재료의 확장인데 이는 창암 글씨의 소탕(疏宕·탁 트이고 거칠음) 수경(瘦勁·마르고 굳셈)한 맛을 내게 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그림1)

창암의 독특한 글씨 철학 또한 59세 때 쓴 ‘서론’에서 잘 피력되어 있다. “서법은 먼저 팔을 들어 장심(掌心)이 비어 있는 상태로 붓을 쥐어 기혈(氣血)이 종이 위에 붓도록 해야 하며… 곧 모든 서체가 이를 좆아 그 덕을 신명나게 이루어 낼 것이다”고 한 이른바 창암 서법의 5대원칙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집필 운필 용묵 등에 관한 창암의 체험이 그대로 우러나 있다.

또한 창암은 글씨를 씀에 있어 인품·고법(古法)·극공(極工·온 힘을 다 바쳐 공부함) 통영(通靈·신령스러운 경지)등의 네 가지를 강조한 것도 남다르다. 특히 하루 천자쓰기로 벼루 세 개를 구멍 냈다고 전하는 창암의 극공의 결과는 ‘필결’에 집필법 운필법 영자팔법(永字八法) 결구법 등의 학서론으로 정립되어있다.

# 글씨는 자연에서 비롯되었다

그림2. 이삼만의 ‘소탕수경’(疎宕瘦勁), 31×22cm, 개인소장.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창암의 서법이론의 토대는 늘 자연(自然)과 결부되어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산은 기복이 있어 세(勢)를 얻고, 물은 굴절(屈折)이 있어 세를 얻으니 붓 또한 회선(回旋)하여 세를 얻는다. 세를 얻은 즉 힘이 저절로 붙어 붓 길이 이루어진다.”라고 하고 있다.(그림2)

‘영자팔법’에 대한 창암의 접근방식 또한 이와 같은데 ‘동국진체’의 시작인 옥동과도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영(永)자의 첫 번째 점인 ‘측(側)’에 대해 옥동은 “점은 음 양으로 나누어지려고 하면서도 나누어 지지 않는 형상이다”고 주역원리를 그대로 적용하였다.

반면에 창암은 “점은 하늘의 해와 달 사람의 눈과 같아서 사방을 살피는 것만 맡는다. 작고 굳세게 찍어 높은 산에서 돌 떨어지는 것 같이 하고, 또 솔개가 걸터앉은 듯 맵시 있게 하되 형태는 각각 적절해야 한다.”고 갈파하면서 사물의 형상과 비유해내고 있다.

여기서는 몇 가지 사항만 살펴보았지만 창암의 학서 방법론이나 자연주의적 시각에서 글씨를 풀어내는 것은 고래로부터 있어왔지만 특히 창암에게 있어 유독 두드러진다.

# 창암서예의 졸박성

그럼에도 창암의 경우 글씨의 이상을 진(晋)을 넘어 한(漢) 위(魏)시대 예서(隸書)에 두고 있다. “글씨의 도(道)는 한·위를 근원으로 삼아야 한다. 만약 진나라 명가들만 전적으로 공부한다면 혹시 고운 것만 취할까 두렵다”는 창암의 인식은 스승격인 원교나 동시대 라이벌격인 추사와도 기본적으로는 궤를 같이 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창암은 두메산골에서도 이미 조선말기 시대서풍의 국제적 동향을 꿰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즉 첩학(帖學)중심의 창암과 비·첩 혼융의 추사의 차이는 학서 방법과 실천의 차이이지 왕법(王法)을 초극한데에서 글씨의 근원을 찾는다는 점에서 근본 지향이 다른지 않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득필(得筆)의 경지가 아니면 거론조차하지 않고, 일운(逸韻)이 없으면 칭찬하지 않았는데, 이는 오로지 필력이 강하며 근골이 풍성한가에 달려있다”고 하는 데에서 창암 글씨의 지향이 읽혀지는데, 초서에 대한 다음 언술은 창암의 심미 이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농섬(濃纖)한 곳은 싸늘한 연기가 외로운 소나무에 옅게 낀 듯하고, 우뚝 솟은 곳은 마치 만 길이나 되는 봉우리에 구름이 걷힌 듯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창암 서예의 한국성과 세계성

주지하듯 초서는 작가의 성정을 가장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서체다. 창암은 여기서 작가의 성정과 기질이 삼라만상의 형상을 빌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야 감상자에게 무한한 감동을 줄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창암 서예의 풍격이나 이상은 한마디로 자연에서 얻은 졸박미(拙朴美)로 함축되는데, 이것은 이미 원교의 ‘고질미(古質美)’ 추사의 ‘고졸미(古拙美)와 동궤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창암 만이 한국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논의는 오히려 설득력이 떨어진다.

요컨대 서예야 말로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보편성이나 세계성을 전제하지 않고 한국이나 민족을 너무 앞세우면 곤란해 질수 있다고 본다. 작가의 활동근거지가 시골 서울 중국의 문제도 아니고, 소재가 한글인가 한자(漢字)인가도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문제는 작품이 예술의 본질에 여하히 접근하고 있는 가가 최우선적으로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창암이나 추사는 모두 한국적이고 그래서 세계적이다.

〈이동국|예술의 전당 학예사〉

 

적극적 이론서… 창암의 ‘서결’
입력: 2006년 12월 08일 15:50:41
그림3. 이삼만의 ‘용비’(龍飛), 43×56cm, 개인소장.
서론(書論)은 서예와 관련한 모든 생각과 논의이다. 예술로서 글자는 단순히 의사전달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작가의 성정과 기질을 형상화해 낸다. 글씨에 대한 이러한 예술적 차원의 접근은 한대(漢代) 이래 창작과 품평이 본격화되면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고전 서론은 양적인 면에서 중국과 비교할 때 크게 부족하다. 그러나 문집이나 편지 등에서 단편이지만 괄목할 내용이 있고, 조선 후기에는 논리체계를 갖춘 서론이 본격 저술되었다. 예컨대 옥동 이서 ‘필결’, 원교 이광사 ‘서결’, 배와 김상숙 ‘필결’, 이삼만 ‘서결’, 서석지 ‘필감’ 등이다. 이들 이론서는 중국 역대이론의 전범들을 수용한 것도 사실이지만 수용대상의 선택과 변용에는 우리의 심미의식이 개재되어있다.

창암의 서예이론서인 ‘서결’은 옥동과 원교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서예본질에 대한 그의 인식은 매우 적극적이다. 즉 조선 지식인들이 시문 글씨를 도학(道學)의 여사나 말기(末技)로 인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평생 글씨로 삶을 맞바꾼 원교조차 글씨를 소도(小道)라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창암은 이와 달리 확고한 서예관을 견지하였는데 “서는 자연에서 비롯되어 음과 양이 생겨나고, 형·세·기가 붓에 실려 부드러움, 거침, 기이함 괴상함이 생겨난다(書肇於自然 陰陽生焉 形勢氣載筆 惟軟碍奇怪生焉). 세차고 빠름 느리고 껄끄러움 이 두 가지 오묘함을 터득하면 서법은 끝난다(峻疾遲澁二妙 書法盡矣)”고 단언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글씨에 대한 인식과 실천 또한 매우 적극적인데 “글씨는 소도가 아니다(書非小道). 도의 근본은 인륜을 돕는 것이다(道本助於人倫). 하여 매번 고요한 곳에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故每於靜處 先正其心) 미리 심획(心劃)을 생각한 뒤에 글씨를 써야 하니(豫想心劃 然後下筆) 마음에 생각함이 있는 자라야 끝내 공력을 얻게 된다(而有心者 竟爲得功)”고 피력하고 있다.

또한 창암은 “서예를 공부하는 자는 마땅히 한(漢)나라 서법에 마음을 두어야 하니 그렇게 하면 체(體)를 얻기가 쉽고 골력(骨力)도 빨리 생겨 진과 당·송의 체 같은데 이르러서는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도달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창암이 글씨 근원을 근골에서 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암 서예의 일생에 걸친 체험적 보고서라 할 ‘서결’은 1840년 창암 71세 때 저술되었다.

총론과 영자팔법 결구법(結構法) 집필법(執筆法) 논습자지필(論習字紙筆)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신영자팔법 득필천연론(得筆天然論)이 주목된다. 특히 득필천연은 창암 서예의 최고경지인 통영(通靈)의 다른 말로 “빼어난 소리는 그 흔적이 없고 빼어난 글씨는 천연 그 자체다(逸韻無跡 得筆天然)”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경지가 작품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창암의 ‘유수체’(그림3)이다.

출처 : 해외유학,교환교수,출장자보험
글쓴이 : AI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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