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열전](20) 조선 후기- 창암 이삼만 | |||||||||
입력: 2006년 12월 08일 15:50:33 | |||||||||
-구름 가듯 물 흐르듯… 자연에서 得筆하다-
하지만 서예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서예하면 늘 붙어 다니는 수식어가 ‘대한민국’아니면 ‘민족예술’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작금의 공모전중 열의 일곱 여덟은 ‘대한민국’을 운운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 민족을 말하지만 무엇이 한국적이고 민족적인지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점은 좀 다르지만 이러한 현실인식은 서예역사를 보는 데에도 적용되고 있다. 일각에서 창암 서예를 한국적이라 하고 추사를 중국서예 수입업자 정도로 파악하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창암을 우리나라 서예의 가장 큰 병폐인 외래 지향적이고 사대주의적인 서예이론을 자주적이고 민족주체적인 서예이론과 예술로 전환시켜놓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창암이 서예도구나 이론적 측면에서 중국과 달리 독창적인 반면 추사는 도구 재료는 물론 이론까지도 중국 것에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일견 타당한 측면도 있지만 창암만이 한국적이라는 오류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이런 잣대로 한국성 여부를 따지면 정작 한자(漢字)를 소재로 하는 한 중국 것이 아닌 순수 우리 서예가 어디에 있는 가하는 난감한 질문에 봉착하게도 된다. # 도구와 재료의 확장과 극공 창암 이삼만(1770~1847)의 경우 모필(毛筆)과 함께 남들이 쉽게 시도하지 않은 갈필(葛筆·칡뿌리) 죽필(竹筆) 앵우필(鶯羽筆·꽤꼬리털)과 같은 특이한 도구나 옷감을 가지고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것은 예술에 있어 주목되는 도구와 재료의 확장인데 이는 창암 글씨의 소탕(疏宕·탁 트이고 거칠음) 수경(瘦勁·마르고 굳셈)한 맛을 내게 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그림1) 창암의 독특한 글씨 철학 또한 59세 때 쓴 ‘서론’에서 잘 피력되어 있다. “서법은 먼저 팔을 들어 장심(掌心)이 비어 있는 상태로 붓을 쥐어 기혈(氣血)이 종이 위에 붓도록 해야 하며… 곧 모든 서체가 이를 좆아 그 덕을 신명나게 이루어 낼 것이다”고 한 이른바 창암 서법의 5대원칙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집필 운필 용묵 등에 관한 창암의 체험이 그대로 우러나 있다. 또한 창암은 글씨를 씀에 있어 인품·고법(古法)·극공(極工·온 힘을 다 바쳐 공부함) 통영(通靈·신령스러운 경지)등의 네 가지를 강조한 것도 남다르다. 특히 하루 천자쓰기로 벼루 세 개를 구멍 냈다고 전하는 창암의 극공의 결과는 ‘필결’에 집필법 운필법 영자팔법(永字八法) 결구법 등의 학서론으로 정립되어있다. # 글씨는 자연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창암의 서법이론의 토대는 늘 자연(自然)과 결부되어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산은 기복이 있어 세(勢)를 얻고, 물은 굴절(屈折)이 있어 세를 얻으니 붓 또한 회선(回旋)하여 세를 얻는다. 세를 얻은 즉 힘이 저절로 붙어 붓 길이 이루어진다.”라고 하고 있다.(그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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