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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金正喜, 1786~1856), ‘소원학공자’(所願學孔子), 종이에 먹, 26.0×155.0cm, 동산방 소장. ‘원하는 바는 공자를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
요즘 서예가들의 글씨는 글 짓는 것과 별개다. 서예가들은 글 짓는 것보다 쓰는 데 더 치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자는 본질적으로 내용과 조형을 동시에 문제 삼고 있다. 여기에 현대서예의 딜레마가 있다. 글씨를 액션페인팅처럼 뿌리고 쳐바르면 재미도 있겠건만 서법에다 시인까지 되어야 한다니 이것 참 죽을 노릇이다.
# 구체적인 일로 실질 되게 하고 옳음을 추구한다 - 실사구시
아직 우리에게 추사는 서예가다. 기괴한 조형의 대명사인 추사체를 만든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어있다. 이것은 다분히 추사를 단편적으로 이해한 결과지만 추사체가 추사의 전부는 아니다. 그 나머지는 학문이다. 추사의 학문은 경학(經學)으로, 당시 경학은 고증학(考證學)이다. 고증학은 송·명대 공리공담에 치우친 성리학에 대한 반성으로 고증을 통한 고대 금석이나 기물을 통해 유교경전 본래 의미나 자구해석에 치중한 학문이다. ‘고고증금’하는 고증학에 대한 인식을 그의 ‘실사구시잠’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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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金正喜, 1786~1856), ‘사서루’(賜書樓), 종이에 먹, 27.0×73.5cm, 개인 소장. |
攷古證今(옛 것을 상고하여 지금 것을 증명했으니) / 山海崇深(산처럼 높고 바다같이 깊도다) / 覈實在書(사실을 조사함은 책에 있고) / 窮理在心(이치를 궁구함은 마음에 있네) / 一源勿貳(한 가지 근원을 둘로 나뉘지 말아야) / 要津可尋(중요한 나루를 찾을 수 있다네) / 貫徹萬卷(만권 서적을 관철하는 것은) / 只此規箴(다만 이 실사구시잠에 있다네)
근대의 추사연구자 후지즈카 치카시(藤塚隣)에 의하면 ‘실사구시잠’은 추사가 옹방강이 보낸 편지를 읽고 지은 찬사라고 되어 있다. 이보다 앞서 추사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지었다. 여기에는 학문의 방법뿐 아니라 그 지향점도 함께 제시되어 있다. 추사는 ‘실사구시설’ 첫머리에서 ‘구체적인 일로써 실질 되게 하고 옳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이다(實事求是 此語乃學問最要之道)’라고 했다. 여기에서 ‘실사(實事)’는 한학(漢學)의 훈고학적 실증주의를, ‘구시(求是)’는 송학(宋學) 즉 주자학의 의리(義理)적 도덕주의를 지칭한다. 추사는 바로 그의 학문의 지향점인 ‘실사구시’를 통하여, 한학과 송학 즉 훈고학과 의리학의 절충 혹은 조화를 시도한 것이다.
# 학문과 예술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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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金正喜, 1786~1856), ‘판전’(板殿), 종이에 먹, 68.5×180.0cm, 개인 소장. |
사실 추사 작품을 내용적으로 보면 모두 이러한 학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所願學孔子(소원학공자)’는 추사 예서의 절품(絶品)이기 이전에 추사 경학의 지향처다. 정약용의 저서가 500권이 넘는 것에 비하면 추사는 초라하다. 하지만 추사 작품 간찰 시고 하나하나가 알고 보면 추사학문의 결정체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사실에 근거하여 이치를 밝힌 학예일치의 주인공은 추사인 것이다. 그런데 추사를 두고 기괴한 조형만큼이나 또 고도의 관념론만 이야기한다. 예컨대 완당의 ‘관념’ 바람이 조선후기 진경산수나 풍속화 등 사실주의 화풍을 일시에 꺾어버렸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구시(求是)만 보고 실사(實事)를 보지 못한 처사다. 여전히 일부 학계에서는 추사를 두고 ‘실학자’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추사 자신은 이런 시비에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추사에 대한 오해는 불식되어야 할 것이다. 어디 농사나 장사, 먹고 사는 문제만이 실학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추사야말로 학문은 물론 예술에서도 실사와 구시를 일치시켜 낸 인물인 것이다.
# 문자반야(文字般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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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金正喜, 1786~1856), ‘실사구시잠’(實事求是箴), 종이에 먹, 31.9×44.5cm, 개인 소장. |
그러면 서예에서 실사구시는 무엇인가. 추사에서 배워본다면 우선 내용을 온전히 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조형을 고전에서 취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사’다. 서법에 있어 추사의 실사는 진당 고법이고, 또 그것을 넘어선 한예(漢隸: 한나라의 예서)다.
그러나 그것에만 얽매여 있어도 안된다. ‘구시’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이념이나 지향처다. 추사가 글씨를 통해 구한 것은 고졸(古拙)의 아름다움이고 그 정신적 경지는, ‘불이선란도’를 빌려 말하자면 ‘성중천(性中天)’이고 ‘불이선(不二禪)’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내가 하늘로 간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 안에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또 다른 말이자 문자반야(文字般若)이기도 한 것이다.
‘반야’는 인간 생명의 근원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예지(叡智)이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분별심을 초월한다. 예로부터 이를 실상반야(實相般若), 관조반야(觀照般若), 문자반야(文字般若)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실상반야는 진리 그 자체(理經)를 말하고, 관조반야는 사물의 근원자리를 사무쳐 꿰뚫어 보는 지혜를 말한다. 반면 문자반야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經)·율(律)·논(論) 전부를 가리키는데 이는 실상반야와 관조반야를 실어 나르는 도구이다. 요컨대 추사 예술, 즉 서예 또한 문자를 통해 내용과 조형으로 사물의 근원을 꿰뚫어 보는 지혜, 즉 반야의 경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학예일치인 것이다.
# 나는 누구인가
그러나 추사의 실사구시와 학예일치의 경지는 경학과 글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말년의 추사는 어느 날 거울을 들고 자기를 대면했다. 파란만장했던 70 평생을 나를 그리며 정리할 심사였다. 소략한 옷 처리에서 영락없는 과천 촌로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봉발(蓬髮)에 가까운 털 올 하나하나를 리얼리티의 극치라 할 필치로 이 잡듯이 헤아리며 담아냈다. 이것은 화원의 도식화된 필치도 아니고, 붓 몇 번으로 그림이 완성되는 세한도(歲寒圖) 유와는 딴판이다. 여전히 부리부리한 봉황눈매며 꽉 다문 입술은 부러질지언정 굽힐 수 없는 추사의 결연한 의지와 고집 그대로다. 하지만 추사는 이러한 눈에 보이는 리얼리티만을 위해 붓을 들지 않았다.
‘이 사람을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 해도 좋다/나라고 해도 나이고 내가 아니라고 해도 나이다/나이고 나 아닌 사이에 나라고 할 것이 없다/제주가 주렁주렁한데 누가 큰 마니주 속에서 상(相)을 집착하는가. 하하(謂是我亦可 謂非我亦可 是我亦我 非我亦我 是非之間 無以謂我 帝珠重重 誰能執相於大摩尼中 呵呵)’
이미 추사의 붓은 자신의 내면 실상(實相)을 더듬으며 세상의 시비는 물론 자신마저도 넘어서고 있었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추사의 문예론 ‘공부’ 에 역점
추사의 학예일치의 경지는 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추사 문예론은 한마디로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다. 이것은 학문과 서화예술의 일치를 추구하는 가운데 나온 것이다. 그런데 추사의 학예일치론은 시론(詩論)분야에서 보다 분명하다. 추사는 예술 전반에 걸쳐 법을 중시했다. 법의 전수를 통해 서예의 역사가 이루어졌고 따라서 그 근원과 역사에 대한 학문적 탐구가 없이는 서예의 완성을 기약할 수 없다고 여겼다.
시문학에 있어서도 추사는 같은 생각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도달하기 위해 명·청대부터 금·원대와 송대를 거쳐 오르는 시의 학습을 주장한 것이 단적인 예다. 추사는 이 경로를 거쳐 두보의 시법이 전수되어왔다고 인식했다.
또한 추사는 예술에 있어 개성을 매우 중시했다. 추사는 작품 제작과 감상에 있어 각기 자신의 성령(性靈)에 맞는 것을 추구하라고 했다. ‘완당전집’에는 ‘무릇 시도(詩道)는 광대하여 구비하지 않는 것이 없어 웅혼(雄渾)도 있고 섬농(纖濃)도 있고 고고(高古)도 있고 청기(淸奇)도 있으므로 각기 그 성령(性靈)의 가까운 바를 따르고 일단에만 매이고 엉겨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다. 여기서 추사가 예로 든 웅혼·섬농·고고·청기 등은 문예의 다양한 풍격을 제시한 것이다. 각기 자신의 성령에 맞는 것을 추구해야 하며, 어떤 하나의 풍격으로 남을 평가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요컨대 추사가 시 글씨에서 주장한 법이나 성령 겸수는 전통의 전수, 즉 법이나 문학적 개성 또한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추사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글씨 그림은 물론 시론의 핵심으로 수립하여 법으로 개성의 남용을 막았다.
성령설 추종자 중에는 문예를 유희의 도구로 여기며, 개성적 시 세계를 과시하기 위하여 기괴함으로 빠져들어 가던 부류가 많았는데, 추사는 그 위협적 요소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9,999분(分)은 인력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나머지 1분(分)은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도 인력의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라는 경계가 그 단적인 예이다. 석파 이하응에게 준 ‘사란론(寫蘭論)’과 같이 이러한 추사의 서화론은 시론과 어우러져 예술과 학문의 영역이 하나의 길로 통합된다. 여기서는 또 추사가 시문학에는 말로 설명할 수도, 의도적으로 불러들일 수 없는 신명(神明)의 영역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음도 간취되는데, 소동파와 황산곡의 시집을 천번 만번 읽는 학습을 통하여 신명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추사는 70평생 동안 ‘열 개의 벼루와 천 자루의 붓을 다 닳게 하였다(磨穿十硯 禿盡千豪)’고 그 독실한 노력을 자신의 친구 이재 권돈인에게 회고한 바 있는데 이것은 학문과 예술이 별개가 아님을 스스로 자신의 문예론을 통해 입증해 보인 것이다.
이와같이 추사의 문예론은 인력의 힘, 즉 공부를 최우선적으로 강조했다. 이것은 귀족 취미나 탈속의 추구 이전에 당시 고루함으로 세계성을 상실한 조선 문예계의 당면 과제에 대한 추사의 절체절명의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와 해답, 그리고 그 방법론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