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결’ 통한 서예비평… 미학적 이상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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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사(1705~1777)의 ‘난저봉상 정약용등’, 비단·삼베에 먹, 개인소장. ‘난새가 날아오르고 봉황이 비상하며, 鼎이 뛰어오르고 용이 솟아오르듯하다’는 뜻이다. 당나라 한유의 ‘석고가’(石鼓歌)에 나오는 구절에서 취한 것으로 서체는 고전(古篆)의 하나인 현침전(懸針篆)이다. |
필자는 최근 어느 잡지에 ‘지금, 한국미술의 현장’이라는 제하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요지는 서예 분야가 유독 다른 분야에 비해 작가나 비평가 교육자 전시기획자 등의 역할구분이 안되어 있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서단이 처한 현실이라 어쩔 수 없지만 실제 국제적인 행사까지 작가가 전시기획이나 비평도 하고 작가 선정을 하다보니 객관성이 떨어지는 일이 왕왕 발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옛 서예가들을 만나면서 정말 작가가 비평을 한다고 해서 수준이 떨어진다고만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 이유는 현대와는 달리 적어도 전통시대에서 만큼은 이 말이 꼭 맞아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뛰어난 비평가는 그 이전에 훌륭한 작가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특히 시·서·화나 문·사·철이 종합되어 있는 서예의 경우 작가이자 비평가는 한 몸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이 모든 작가에게 다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비평이 있다고 해도 전문저작이 없고 편지나 시, 문집의 서문이나 발문 등을 통해 산발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 작가이자 비평가인 원교
이런 가운데 우리 서예비평의 역사에서 추사 김정희나 표암 강세황의 존재는 단연 우뚝한 존재이고, 옥동 이서나 원교 이광사 또한 익히 아는 바대로 각각 ‘필결(筆訣)’과 ‘서결(書訣)’이라는 전문적인 서예이론서이자 비평서까지 남기고 있다. 특히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척박한 우리 서예의 비평문화에서 당시 글씨 역사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귀중하다.
특히 원교는 ‘필결’을 통해 자신의 서예철학이나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예를 보는 관점을 정확하게 피력하고 있다. 예컨대 원교는 우리나라 서예가 비평에서 통일신라 김생을 종장(宗匠)의 반열에 놓고 있다. 즉 “지금 김생의 진적이 거의 전하지 않으나 탑본 또한 기위(奇偉:기이하면서도 아름다움)하여 고려 이후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글씨이다…. 신라 승려 영업글씨는 수경(瘦勁:마르고 굳셈)함이 취할 만하고, 고려 승려 탄연은 오로지 ‘성교서(聖敎序)’만을 따랐으니 실로 우리나라의 비루한 획을 계몽시켰다”고 하였다.
# 비평의 척도로서 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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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사의 ‘서결’(書訣)의 첫장과 마지막장, 17×8.5cm, 목각 탑본, 개인소장. 원교가 신지도에서 1764년 6월 1일 ‘서결’을 완성하여 아들 이영익에게 써 준 글씨를 모각한 탑본(榻本)으로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1766년 1월에 큰아들이 이긍익에게 써 준 것은 간송미술관에 전한다. |
이러한 관점은 원교의 선대 작가이자 이론가인 옥동 이서와도 궤를 같이한다. 그리고 조선의 명서가로서 원교는 수많은 작가 중 안평대군 이용, 자암 김구, 봉래 양사언, 석봉 한호를 4대가라 평하였고 이 중에서 석봉을 최고로 쳤다. 특히 원교는 “석봉 같은 사람은 학식이 높지 못했지만 연습으로 고인의 필법에 부합하였고, 행초의 득의처는 웅심(雄深)하고 질건(質健)하여 송·원과 차이가 없다”고 평가하였다. 이에 반해 원교는 고려 말 조선 초 이후 조선의 국서체로 자리 잡았던 송설체는 물론 이를 토대로 한 안평대군의 글씨를 “재주는 있으나 일가를 이루지 못하였다”고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봉래 양사언에 대해서도 “봉래의 초서는 호탕하여 장지나 왕희지보다 낫지만 재능만 성해 그림자만 얻고 뼈를 잃은 격으로 특별히 일가를 이루지는 못하였다”고 혹평하고 있다. 이것은 백하 윤순이 “봉래는 역시 초서만 잘 쓰지만 역시 가장 훌륭하다”고 치켜세운 것과 달라 주목된다. 즉 원교는 서평의 기준을 고법(古法)이 녹아난 글씨의 굳센 기세에 두면서 우리나라 역대 서가 중 왕법을 기본으로 했던 김생, 영업, 탄연, 석봉을 최고로 꼽았던 것이다. 이러한 원교의 품평 잣대는 옥동의 예에서 보듯이 이미 송설체에 대한 반발로 왕법으로 복귀했던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가 작용되었음은 물론이다.
# 근골과 질박함이 구비된 글씨
그러면 이러한 비평의 잣대를 들이대는 원교의 글씨이 대한 이상이나 화두는 무엇인가. 원교는 특히 글씨의 고질(古質)과 연미(姸媚)에 대하여 말하면서 “상사(上士)가 도(道)를 들으면 근실하게 행하고, 중사(中士)가 도를 들으면 있는 듯 없는 듯하며, 하사(下士)가 도를 들으면 크게 웃어버리니, 웃지 않는 것은 도로 삼을 만하지 않다”고 노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교가 모든 사람의 눈에 드는 것은 결코 글씨가 아니라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글씨는 근골(筋骨:근력과 뼈대)을 바탕으로 삼아야 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예의 고박하고 변화 있는 필의를 통해 험경(險勁)함과 소탕(疏宕)함을 동시에 얻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옥동이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지점인데 그래서 원교는 당 이후의 글씨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던 것이며, 동기창의 말을 인용하여 수미(秀媚)한 자태가 글씨의 병폐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원교는 왕희지·왕헌지도 장지·종요에 비해 질박(質朴)하지 않다고 하면서 연미하거나 공교(工巧)보다 험경하고 졸박한 글씨를 우선적으로 보았다. 이에 원교는 이왕을 거슬러 올라가 종요와 장지를 따르고, 더 올라가 한나라 예서와 주나라 전서의 예스러운 필의를 배우라고 하였던 것이다.
# 조선후기 사대부들의 미학적 이상을 대변한 ‘서결’
지금까지 ‘서결’을 통해 본 대로 원교는 위진필법과 전예중비를 지향하였기 때문에 당대 이후 중국서풍에 대해 비판일변도 시각을 보였다. 그리고 조선의 명서가의 우열을 논하면서도 주관적 견해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서결’을 통해 전예고비의 중요성과 공력(功力)의 가치를 일깨운 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나아가서 원교의 서결은 당시 조선후기 시대적 관심사와 사대부들의 미학적 이상을 대변하고 있기도 하다. 원교는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글씨가 비록 작은 도이지만 ‘반드시 먼저 겸손하고 두터우며 크고 굳센 뜻(謙厚弘毅之意)’을 지닌 뒤에라야만 원대한 장래를 기약 할 수도 있고, 성취할 수도 있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고 ‘서결’에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이 공모전을 통해 자격증을 따듯 작가가 속성으로 배출되고 있는 요즈음에 더욱더 크게 들리는 것은 웬일일까.
서법이론·평론서 ‘書訣’
'서결’은 전 후편으로 구성되어있다. 전편은 원교 60세(1764년)에 완성한 것으로 ‘서결’의 근간이자 실마리인 ‘위부인필진도(衛夫人筆陣圖)’와 ‘우군제필진도후(王右軍題衛夫人筆陣圖後)’의 원문과 자신의 해설을 가하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지필묵연, 집필과 용필, 점획과 결구, 삼과절(三過折), 초서와 전서, 팔분과 고예, 고비(古碑)의 학습 등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후편은 64세에 아들 이영익이 초고를 쓰고 원교 자신이 교정한 것이다. 내용은 전편의 보충설명인 상편과 오체일법(五體一法)을 시작으로 이왕서(二王書)와 중국 및 우리나라 역대 서가의 필법에 대한 논평인 하편으로 구성되어있다.
‘서결’은 서법이론서와 평론서의 성격을 겸하고 있다. 또 서예 역사나 서체, 글씨의 품격이나 서풍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교 서학(書學)의 전모를 볼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인용된 고결(古訣)의 진위문제, 여러 가지 전·예 비석이나 왕희지, 당송의 명서가에 대한 원교의 인식에서 후대 비평자들로 하여금 옹호와 비판의 빌미가 되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우선 ‘서결’의 인용 고결인 ‘필진도’의 저자가 위부인인지 왕희지인지를 놓고 역대로 문제가 되어 왔다. 이에 대해 원교는 “오늘날 나도는 ‘필진도’는 피할 길 없는 위작이다. 가로로 곧은 필획이 산가지 같고, 짜임새도 모든 글자가 똑 같다”고 하면서 위작임을 인식하고 있음과 동시에 학습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원교는 그 문장에 대해서는 의심 없이 당대 저록에 보이는 원문을 모두 ‘서결’에 소개하고 있다. 요컨대 ‘필진도’는 위작여부와 관계없이 당 이후 역대서법과 서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원교는 해행초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전·예중비의 학습도 동시에 강조하고 있는데, 그런 만큼 이들에 대한 언급도 ‘서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원교의 전예는 해서나 초서보다 낫다는 평이 있을 정도인데, 자신도 주문(●文)과 소전, 한위예비에 대한 우열의 감식과 학습을 중요시하였다. 원교는 “석고문과 예기비, 수선비 등 한예를 배워 심획(心劃)을 정한 뒤에 후대의 첩을 임모해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옥동 이서나 백하 윤순과 같은 전대 서가는 물론 당시 사람들과 같이 원교는 글씨의 목표를 왕희지에 두었던 만큼 여러 차례 모각을 통해 원형과 멀어진 ‘낙의론’이나 ‘동방삭화상찬’등 왕희지체의 작은 해서나 행초의 법첩을 독실하게 배웠다. 이로 인해 당시 조선글씨가 속됨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어왔다. 이에 대해 추사는 그 원흉을 ‘서결’에 두고 신랄한 논박을 가하였다. 즉 추사는 진나라 사람들의 해서를 배우려면 왕희지에 가까운 당나라 해서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원교는 정작 추사와는 반대로 당·송인들의 서법에 대해 결구가 ‘방판일률(方板一律:천편일률적으로 모가 남)’이고 점획 또한 속되어 서법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서결’에서 비판을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원교 서예에 대한 적나라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서결’ 찬술 동기는 정작 자신이 볼 때 고려 말 이후 우리나라 서가들이 고인의 정통필법을 모르고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즉 원교는 자신이 평생 터득한 서법을 세상에 전하고자 유배지인 신지도에서 아들 영익과 함께 완성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