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열전]② 통일신라 - 최치원 | ||||||
# 유·불·도교 아우른 한국유학 선구자 용케도 장마를 피한 주말, 번개피서차 해운대를 갔다. 이곳은 해수욕장으로 명물이 된 지 오래지만 최근 APEC정상회담이 열린 ‘누리마루’로 명물 하나가 더 추가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수많은 발길들은 천 년 전 명물을 아는지, 모르는지 불나방처럼 바닷물에 몸을 담그기에 정신이 없다. 나도 모르게 발길을 멈춘 ‘海雲臺’. 바위에 대필(大筆)로 거침없이 구사된 각자(刻字). 일견 여사 필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작자가 누구인가. -한문학 개산조이자 유·불·선 삼교회통론자- 요즈음 ‘직업서예가’와는 달리 역사적으로 필명을 날린 사람은 대개 그 본업은 따로 있다. 어필이나 선필, 사자관, 도학자나 노장, 문인사대부의 필적으로 글씨를 구분하는 것은 이를 입증한다. 그리고 그 자체가 글씨의 성격이나 서예미를 대체적으로 규정한다. 최치원(857~908?·얼굴)은 서예가 이전에 시문으로나 사상으로 우리 역사의 문을 연 사람이다. 그가 남긴 시문은 현전하는 ‘계원필경’(20책), ‘사산비명’을 포함하여 ‘삼국사기’에만도 문집 30권이 전한다고 기록할 정도로 방대하다. 이 중 당나라 유학시절인 25세(881년) 때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적장 황소가 혼이 빠져 평상에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전해올 정도로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최치원은 또한 한국유학의 선구자였다. 38세 때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십여조’로 아찬에 임명된 것에서 보듯 하대신라 사회의 혼란상을 유교기치로 개혁코자 한 경세가였다. 이처럼 그의 사상은 한국유학사에서 최초로 그 철학적 문제와 결부되어 불교 도교와 회통(會通)할 수 있고, 유교 입장에서 양교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기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보편과 독자성을 겸비한 ‘진감선사비명’- 그러면 그 글씨는 어떠한가. 최치원 글씨의 기준은 당연 ‘진감선사비’다. 그것은 그가 당에서 돌아온 지 3년 만인 31세(887년) 때 문장을 짓고 쓴 유일한 비문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이 비의 글씨에 대해 아직 우리서예사의 자생성문제가 본격 거론되지 않는 점이 아쉽지만,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은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안진경 유공권에 이르기까지 당해의 전형적인 필법을 9세기 통일신라 말기의 미의식에 가장 알맞게 유려한 필치로 소화해냈다고 하는 걸작이다. 이 비는 한 세기 앞선 김생(711~790이후)의 ‘낭공대사비’의 횡장(橫長)하면서도 다이내믹한 필적과 비교할 때도 점획과 결구, 운필 면에서 해서의 전형답게 종장(縱長)의 균제미(均齊美)가 뛰어나 매우 대조적이다. 또한 국운이 기울고 있었지만 이것을 바로잡을 기세로 9세기 난만한 통일기의 미감을 긴장감 있게 마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선비의 흉중일기(胸中逸氣) 서린 마애각자- 그런데 필자가 여기서 같이 재고해보자는 것은 최치원 글씨의 기준을 잡는 문제이다. 이 비는 한 사람이 동일 시점에 쓴 두전과 본문이지만 나 자신마저도 어색하게 느껴진 적이 있을 정도다. 즉 인식에 있어 너무 익숙한 본문과 너무 생소한 두전의 간극은 전서에서 해서로 변천된 역사만큼 넓을 수도 있다. 그런데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본문 해서가 아니면 최치원의 필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는 우리시대의 눈이다. 다시 ‘해운대’로 가자. 고려 문신 정포(1309~1345년)는 이미 700년 전 ‘대(臺)는 황폐하여 흔적도 없어졌는데 오직 해운대만 말하네(荒臺漫無址 猶說海雲臺)’라고 읊었지만 지금 우리에게 그 필자의 존재조차 가물가물해진다. 이 경우는 최치원이 머문 자리마다 남긴 마산 ‘月影臺’(월영대), 진해 ‘靑龍臺’(청룡대), 쌍계사 ‘雙谿石門’(쌍계석문), 문경 ‘夜遊岩’(야유암)도 마찬가지다. 이미 ‘세종실록’ ‘남명집’ ‘신증동국여지승람’ ‘해동금석원’ 등 역사가 최치원과 관계하여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만 오늘의 역사를 기록하는 논문에서는 ‘진감선사비’ 글씨와 다르다고 소극적이거나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 스스로에게 드는 의문 하나. 이러한 대자(大字)로 구사된 마애각자들이 설사 소해(小楷) ‘진감선사비’와는 다른 점획과 결구, 필의와 서풍으로 보일지라도 마애각자 모두에서 유유자적한 선비의 흉중일기(胸中逸氣)와 도량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사실 북위의 정도소(?~516) 글씨에서 봄직한 웅장한 점획과 만상을 다 끌어안은 듯한 안정된 결구는 마애각자 모두에서 일치되게 발견되는데, 공교롭게도 이곳들은 모두 최치원이 지방관으로 전전하거나 명산대천을 찾아 노닐었던 곳임을 감안한다면 우연치고는 기막힌 우연인 것이다. |
최치원의 ‘사산비명’ | ||
‘진감선사비’는 만수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890년), 초월산 대숭복사비명(886년 이후), 희양산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893년) 등과 함께 ‘사산비명’으로 불린다. ‘사산비명’은 최치원이 당대 고승의 행적이나 신라왕가의 능원(陵園)과 사찰에 관해 기록한 것이다. 시기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앞설 뿐 아니라 다른 전적에서 볼 수 없는 역사사실이 많아 한국학 연구의 필수적인 금석문이다. 4개의 비문 모두 사륙변려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이 쉽지 않아 예로부터 많은 해설서가 나왔다.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8호)는 성주산문의 개조 무염(無染, 801∼888)의 공덕을 기린 묘탑비이다. 무염의 제자들이 기록한 행장을 바탕으로 최치원이 비문을 만들고, 글씨는 최언위가 썼다. 주요내용은 무염의 입적과 비문찬술과정, 무염의 생애와 공덕, 오언고시체 70구가 적혀 있는데, 최치원의 역사의식과 현실참여의식을 볼 수 있다. 지증대사적조탑비(보물138호)는 지증대사 도헌(道憲)의 공덕을 기록한 탑비. 지증은 다른 선문의 개산조들과 달리 당나라에 가지 않고 혜은으로부터 북종선의 법을 이어 희양산문을 이루었는데 882년 입적하였다. 비문의 글씨는 분황사 승려 혜강이 썼다. 초월산대숭복사비는 앞의 세 비와 달리 최치원이 왕명으로 신라 왕실 사찰이었던 대숭복사의 유래를 기록한 것인데, 인정과 효례, 유불의 상통성, 풍수설, 동인(東人)의식을 담고 있다. 헌강왕11년(885년)부터 시작하여 진성여왕때 완성하였다. |
출처 : 해외유학,교환교수,출장자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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