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8대明堂 순창의 김극뉴(金克뉴)墓所
가 . 조선 8대 말명당 김극뉴(金克忸) 墓所
1 . 위치 :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
선생의 묘를 찾아 88고속도로 순창나들목에서 내려 전주로 가는 27번 국도로 진입하여 10 여km를 가면 21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다. 여기서 조금만 직진하면 좌측에는 인계면사무소가 나오고 우측에는 마흘리로 가는 길이 표지판과 함께 나타난다.
이 길을 따라 산모퉁이를 돌면 우측으로는 용마초등학교가 보이고, 좌측 길로 들어서면 마흘리(馬屹里)다. 이 마을 뒤에는 마치 말머리와 말의 등처럼 생긴 두 개의 금성체(金星體)의 산봉우리가 서로 이어져 우뚝 솟아 있다.
두 개의 봉우리 중 뒤의 약간 더 높은 말의 등처럼 생긴 봉우리를 큰 수리봉이라 부르고, 조금 낮은 앞의 말머리처럼 생긴 봉우리를 작은 수리봉이라 부르는 용마산(龍馬山)이다.
호남정맥의 순창에 위치한 강천산(583.7m)에서 동쪽으로 분맥한 한 지맥이 무리산(557.5m)과 순창에서 임실 가는 27번 도로 갈재를 지나 장덕산(368.4m)을 일으키고, 장덕산에서 다시 분맥한 한 지맥이 크게 과협한 다음 일으킨 산이다.
마흘(馬屹)이라는 이 마을 이름도 용마산이 말 같이 우뚝 솟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선생의 묘는 바로 이 용마산의 작은 수리봉의 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용마산은 선생묘의 주산(主山)이 되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용마산의 작은 수리봉은 현무봉(玄武峰)이고 큰 수리봉이 주산이다.
2 . 形氣論
선생의 묘소는 말머리 모양을 한 작은 수리봉이 비스듬히 내려와 앞으로 쭉 뻗은 능선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작은 수리봉에서 내려온 내룡이 또 다시 작은 봉우리를 만들고 여기서 방향을 90도 가까이 틀어 입수맥(入首脈)을 내려 보낸다. 입수맥은 그 힘을 마지막으로 묶어주기 위해서 결인속기(結咽束氣)를 하고 입수도두(入首倒頭)를 만들었다.
입수도두에는 그의 장인과 장모의 합장묘가 자리하고, 바로 아래에는 그의 부인인 함양박씨(咸陽朴氏) 묘, 부인 묘 아래에 선생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작은 수리봉에서 선생의 묘소로 방향을 트는 작은 봉우리까지 내려온 내룡을 보면 급하게 아래로 쏟아지듯 내려오는데 얼핏 보아서는 용맥이 없거나 무기력한 약룡(弱龍)이나 사룡(死龍)처럼 보인다. 그래서 천하명당은 고사하고 작은 소혈도 결지할 수 없는 곳으로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내룡의 강한 기운을 순화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보이지 않게 은룡(隱龍)으로 들어오기 때문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 오히려 힘이 넘치는 강한 내룡임을 선생의 묘 아래로 형성된 구릉이 증명하고 있다.
선생의 묘 아래에는 특이한 구릉이 형성되어 왼쪽에서 마을 쪽으로 길게 뻗어 내리고 있는데 이는 내룡의 기세가 너무 강력하여 혈을 결지하고도 남은 여기(餘氣)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구릉에는 김희(金僖)묘, 선생의 둘째 아들인 김소윤(金昭胤)묘, 증손 김개(金鎧)묘, 맨 아래에는 선생의 사위와 딸의 합장묘인 동래정씨(東來鄭氏) 정광좌(鄭光佐) 묘 등이 위로부터 차례로 조성되어 있다.
앞에서 보듯이 선생의 묘가 있는 능선에는 선생의 묘 외에도 여러 기의 묘가 있다. 모두가 말의 형상을 한 같은 용마산 아래이고 같은 능선이지만 선생의 묘만 유독 말명당으로 부르고 다른 묘들은 말명당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이유는 풍수의 형국론(形局論, 또는 물형론이라 한다)에서 말은 콧구멍에 기가 가장 많이 응집된 동물이므로 말의 형국에서는 콧구멍에 해당하는 자리를 진혈로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큰 수리봉은 말의 등으로, 작은 수리봉은 말의 머리로 하면 여기서 작은 봉우리까지 급하게 내려온 용맥은 이마에서 코까지 이어지는 콧잔등이 되고, 선생의 묘는 영락없는 콧구멍에 해당하는 자리다.
그런데 많은 풍수가들이 이곳을 말의 형국이라는 데는 일치하나 그 형국명칭은 제각각으로 부른다. 그 형상이 마치 천마가 바람을 가르며 우는 모습과 같다 하여 천마시풍형(天馬嘶風形), 천마가 하늘을 향해 뛰어 오르는 모습과 같다하여 천마등공형(天馬登空形), 북방산의 건장한 말이 바람을 맞으며 울음을 우는 형상이라 하여 호마시풍형(胡馬嘶風形), 목마른 말이 물을 찾는 형상이라 하여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 등으로 부른다.
3 . 理氣論
乾坐巽向을 한 선생의 묘는 맥이 들어오는 맥상에다 둥글고 풍만한 여성의 유방같이 돌기한 형태의 혈장에 자리하고 있어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유혈(乳穴)이다.
유혈은 유두혈(乳頭穴), 현유혈(縣乳穴), 수유혈(垂乳穴)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모양에 따라 혈장이 길게 나온 것을 장유(長乳), 짧게 나온 것을 단유(短乳)라 한다. 또한 혈장의 크기에 따라 큰 것을 대유(大乳), 작은 것을 소유(小乳)라 한다.
주룡이 평평하거나 함몰된 양룡으로 입수하여 볼록한 음혈인 유혈을 결지한다. 유혈은 돌출되어 있기 때문에 용호가 잘 감싸고 입수도두에서 양쪽으로 팔을 뻗어 혈을 품안에 안는 듯한 선익과 혈 앞에는 전순이 있어야 진혈(眞穴)이라 한다. 이곳은 혈장이 길게 나온 장유이고 혈장이 큰 대유이다.
그리고 용호가 잘 감싸고 있고, 결인속기, 입수도두, 선익과 전순 등 혈장의 4요소를 완벽히 갖추었으니 진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묘 아래에는 제법 큰 하수사가 청룡에서 백호쪽으로 돌아 내룡의 행룡을 멈추게 하고 내룡의 생기가 더 이상 앞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혈에 응결(凝結)되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은 주산이 높고 혈장 또한 높은 만큼 혈을 둘러싸고 있는 용호(龍虎)와 안산(案山), 조산(朝山) 할 것 없이 모두 크고 높다. 청룡은 좀 멀찍이서 여러 겹으로 혈을 둘러싸주고, 백호는 가까이서 여러 겹으로 혈을 둘러싸주고 있다. 그런데 백호 쪽 두 번째 능선이 끝을 뾰족하게 하여 혈장을 찌르듯이 들어오고 있는 것은 이곳의 흠결(欠缺)이라 말하나 거리와 높이가 다르니 별문제 아닐 것이다.
안대는 멀리 건지산(300m)에서 뻗은 연봉들이다. 목성(木星)의 문필봉(文筆峰)이나 귀인봉(貴人峰)들과 금성(金星)의 천마사(天馬砂)나 부봉(富峰)들이 높게 혹은 낮게 솟아 이곳 혈을 향하여 서로 이어져 나성(羅城)을 이루었다. 그 모습이 마치 뭉게구름이 피어난 듯 펼쳐져 있어 귀한 자손들을 낳는다는 상운사(祥雲砂)라 할만하다.
혈을 감싸주는 내당수(內堂水)의 흐름은 우측의 백호자락에서 득수(得水)하여 좌측 청룡끝자락의 외당수(外堂水)인 심초천과 합류하여 을(乙)방으로 파구(破口)되어 나가니 좌선룡(左旋龍)에 우선수(右旋水)가 되어 양래음수(陽來陰受)로 길격의 물 흐름이다. 거기다가 멀리 섬진강의 지류인 적성강이 이곳 보국(保局)을 청룡 쪽에서 백호 쪽으로 환포하며 암공수(暗拱水)로 흐르고 있으니 더없이 좋은 물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암공수란 혈장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청룡이나 백호 또는 안산 밖에서 혈을 감싸주고 있는 대강수(大江水)로 보국(保局) 내의 기가 흩어지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풍수지리에서는 혈에서 보이는 형상(形象)만 가지고 화복(禍福)을 논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암공수(暗拱水)와 현무봉 뒤를 감싸고 흐르는 공배수(拱背水)의 경우는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물보다 더 좋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명조불여암공(明朝不如暗拱)이라하는데 암공수나 공배수 모두 용진혈적지면 부귀가 유장(悠長)하다고 한다.
혈 앞의 명당(明堂) 또한 너르고 평탄하다. 이곳을 둘러싼 여러 산자락에서 나오는 물이 모두 이 명당에 모이니 광취명당(廣聚明堂)이다. 사방의 모든 물이 명당으로 모인다는 것은 결국 사방의 산들도 모두 이곳을 향하여 모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이곳은 생기가 충만한 좋은 혈 자리가 될 수밖에 없다.
선생의 묘는 조선의 8대명당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명묘 중 하나다.
나 . 말명당 김극뉴(金克忸)의 履歷
김극뉴(金克忸,1436-1496)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大司諫)을 역임. 좌의정을 지낸 국광(國光)의 장남이다.
그의 이름은 아버지가 좌의정 시절 8개월간 혼자 의정부(議政府)를 맡았는데 이 점을 부끄럽게 여겨 아들이 태어나자 ‘너라도 자라서는 이런 부끄러움을 꼭 이겨내라’는 뜻에서 극뉴(克忸)라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선생의 아버지가 좌의정을 한 것은 성종대인 1570년대로 이 때 선생은 이미 30세가 넘었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다. 아마 초명은 다른 이름이었다가 이 이름으로 개명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풍수가들은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조선조에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이 예학(禮學)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사후에 해동18현(海東18賢)에 추앙되어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정승 5명, 대제학(大提學) 7명, 왕비 1명(숙종비 인경왕후)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신현관을 배출해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가문(家門)으로, 특히 사계선생의 자손이라면 맞선도 보지 않고 딸을 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을 떨친 게 결코 이 묘와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이 묘가 말명당으로 조선의 8대명당에서도 그 이름을 가장 앞자리에 올릴 만큼 천하명당이기 때문에 그 발복에 의하여 선생의 현손인 사계선생을 시작으로 대제학 7명, 왕비 1명 등을 모두 그의 후손에서 배출하여 광산김씨의 영광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 . 전해오는 이야기
이 묘에 전해오는 풍수설화에 의하면 원래 선생이 묻힌 자리는 그의 장인인 함양박씨(咸陽朴氏) 박감찰의 신후지지(身後之地)였다고 한다. 선생의 장인은 삼 형제로 모두 풍수지리에 능통한 도사들이었는데, 이들은 각자 자신들이 죽으면 묻힐 신후지지를 잡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큰형인 박감찰은 이곳의 말명당을, 둘째는 임실 갈담의 잉어명당을, 셋째는 임실 가실 마을 앞의 금계포란형을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박 감찰에게는 외동딸만 있었고 아들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제사를 받들어줄 아들이 없으므로 사위가 좋은 자리에 들어가 외손이 번창하면 자신의 제사는 받들어 줄 것이라 믿고 사위인 선생에게 자신의 신후지지를 양보하고, 자신은 그 뒤의 입수도두 부분에 묻혔다고 한다.
또 다른 설화는 박감찰이 사위에게 양보한 것이 아니라 이 자리가 아주 좋은 자리임을 안 딸이 꾀를 써서 채갔다는 것이다. 박감찰이 죽어 이 자리에 묻으려고 묘를 쓰기 전날 광중을 파 놓았는데, 그의 딸이 이날 밤 광중에 물을 잔뜩 부어 물이 나오는 흉지(凶地)처럼 꾸몄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지금의 자리인 뒤로 올렸다고 한다.
아무튼 이 자리는 외손발복지지(外孫發福之地)로 유명한 곳이다. 그 영향으로 선생의 후손들이 불같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광산김씨가 시제를 지낼 때마다 선생의 장인이었던 함양박씨에게 먼저 감사의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반면에 함양박씨 문중에서는 이렇게 좋은 자리를 그들 문중에서 누구라도 썼다면 광산김씨가 누린 영광을 자신들 문중이 누렸을 텐데 하면서 두고두고 서운해 하고 있다고 한다. -태극풍수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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