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스크랩] 점필재 金宗直의 종택과 도연재(道淵齋)-고령 쌍림면 합가리 (개실 마을)

회기로 2009. 7. 18. 15:56

점필재 金宗直의 종택과  도연재(道淵齋)

 

 위치 : 고령 쌍림면 합가리 (개실 마을)

 

점필재  김종직(金宗直,1431~1492)선생은   성리 도덕의 학문으로 인격을 닦아 인륜의 기강을 바로잡고, 민본의 의리와 고유의 역사 풍토에 근거하여 문명사회의 이상 실현을 추구하였던 조선 초기 사림의 종사였으며 저서로는 "점필재집" . "유두류록" . "청구풍이" . "당후일기" . 등이 있으며, 편저로 "일선지" . "이존록" . "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다.


 

점필재 선생은

" 지조있는 지식인의 비판을 두려워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국가 사회의 운명을 좌우하는 지도자가 가져야 할 미덕이고,

진실을 논하여 올바른 도리를 일깨움으로써 불의를 자행하는 권력자의 오만을 견제하고

사회 정의를 지켜 가는 것은 양심을 가진 지식인의 영원한 책무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명심해야할 대명제라 하겠다.

 

고령 IC를 지나 합천 쪽으로 가다보면 쌍림면 합가동, 속칭 개실 마을이 나온다. 날아갈 듯한 처마곡선이 이마를 맞대고 있는 이 한옥마을은 첫눈에도 유구한 전통과 범상치 않은 인물이 있었음을 짐직케 해준다.

도로변에서 20~30m안쪽으로 솟을 대문이 보이는데 유명한 점필재 종택의 대문채이다. 점필재 김종직은 영남의 사학을 크게 일으켜 김굉필, 정여창 등 수많은 학자를 배출한 교육자로 영남학파를 논할때 그를 일컬어 기둥을 받히는 반석과도 같다 한다.

 

<案帶의 문필봉>

 

이 건물은 선산 김씨문충공파의 종택으로서 안채 1800년경에, 사랑채는 1812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고려 말 정몽주. 길재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학문을 익히면서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계승하였다.
조선 성종때에는 도승지, 형조판서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연산군때 무오사화로 관직이 박탈되고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 뒤 중종반정때 신원되었다.

 

개실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종택은 1800년경에 건립되어 몇 차례 중수하였다.

건물은 마을 뒷산을 등지고 완만한 경사를 이룬 터에 남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안산(案山)의 문필봉(文筆峰)을 向하여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앞쪽의 사랑채와 뒤편의 안채, 좌우의 고방채와 중사랑채가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오른쪽 뒤편에 선생의 불천위 신주를 모신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건물 내에는 점필재 문적. 유품 및 종가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 점필재 종택에는  선생의 17대 종손인 김병식 씨가 가풍을 지키며 살고 있다. 문충세가(文忠世家)라 불리는 종택, 김종직의 불천위가 모셔저 있는 사당, 후학을 양성하여 춘추에 향사를 지내던 도연재 등의 건물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종가 대대로 전해오는 유물 또한 적지않다.

 

종손 김병식 씨가 서장하고 있는 유물들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으로는 옥벼루와 술병이 있다. 필옹옥우(筆翁玉友)라고 음각되어 있는 옥벼루는 점필재 김종직이 형조판사를 지낸 후 낙향할 때, 술병 등과 더불어 성종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인데, 무오사화의 참변으로 잃어버리고 옥벼루와 술병만이 남아 있다.


 

술병은 그때나 지금이나 귀한 것이라 늘 이 집안 종부들의 마음을 졸이게 한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제사를 모실 때 제주를 이 술병에 담았고 아차하는 순간에 술병을 깨트릴 수도 있어 늘 마음을 졸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료로서 가치가 있는 유물도 많은데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당후일기가 있다. 당후일기는 점필재가 성종때 어전회의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해 둔 것이다. 펴보면 "ㅇ 월 ㅇ 일 아침 한명회가 말하기를......" 라고 씌여 있어 먼 역사의 인물이 눈 앞에서 살아나는 듯하다.


 

이밖에도 점필재의 개인적인 유물이 많이 있는데, 1482년 경 부인 조씨가 남편인 점필재에게 보낸 편지와 점필재의 손때가 묻은 매화연, 상아홀, 강경승통 등을 김병식씨의 설명을 들으며 볼 수 있다. 정성껏 한자 한자써 내려갔음직한 조씨 부인의 편지에는 이두식 표기의 흔적이 남아 있어 당시 아녀자들의 의사소통의 소박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또 매화문양이 아름답게 조각된 벼루, 매화연을 보면.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는  " 조의제문 " 을 쓰고 있는 점필재 김종직이 눈앞에 그려진다.


 

무오사화와 임진왜란 그리고 한국전쟁, 종손들은 이 역사의 수난 앞에서 선조의 유물과 그것을 통해 이어져 오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땅에 구덩이를 파 유물둘을 묻어 놓기도 하고, 궤짝에 넣어 늘 지고 다니기도 하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도연재(道淵齋)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1호


 

종택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m 거리를 두고 있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 'ㅡ'자형 맞배 지붕집이다.
이 건물은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학자들이 조선 고종 원년(1886)에 건립하여 유생을 가르치고 제사를 모시는 재실이다.
김종직은 고려 말 정몽주. 길재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학문을 익히면서 조선 시대 도학의 정맥을 계승하였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풀어지게 되었다.-태극풍수학회

 


 

출처 : 하늘이열린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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