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철학사상 ]
1)이기론
율곡은 세계를 이(理)와 기(氣)로 구성되어진 세계로 본다.
‘이’는 무형(無形), 무위(無爲)의 형이상자로서 일체 모든 존재가 그러한 존재일 수 있는 까닭이다.
율곡에 의하면 ‘이’는 기의 주재가 되고,
기는 ‘이’의 탈 바가 된다.
‘이’가 아니면 기가 근저(根?)할 바가 없고,
기가 아니면 ‘이’가 의찰(依著)할 곳이 없다.
또한, ‘이’는 무형한 것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든지 통할 수 있고,
기는 유형한 것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든지 국한된다.
따라서 ‘이’는 보편성을 갖는 것이라면 기는 특수성을 갖는다.
또한 발(發)하는 것은 기이지만 발하는 까닭은 ‘이’이다.
기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할 바가 없다.
이렇게 볼 때, 이와 기는 세계의 존재에 있어 반드시 있어야 할 요소로서 양자는 대등한 가치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나 기 어느 하나만으로는 어떤 존재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전혀 다른 두 개의 독립된 실체가 만사만물을 존재케 한다고 믿는다.
율곡에 의하면 ‘이’ 없는 기도 없고 기 없는 ‘이’도 없어서, 이기는 본래 떨어질 수 없는 하나로 있다.
이기는 본래 합한 것이니 비로소 생긴 때가 있지 않다.
이기는 본래 하나의 존재양상으로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로 있다고 해서 ‘이’가 기이고 기가 ‘이’는 결코 아니다.
이같이 둘이면서 하나로 있고 하나로 있으되 둘인 이기의 관계를 율곡은 이기지묘(理氣之妙)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기지묘는 이기의 묘합이라는 말로 이기가 시간적으로 선후가 없고 공간적으로 이합(離合)이 없는 묘합의 존재구조를 의미하는 말이다.
율곡은 이기가 오묘하게 합해 하나로 있는 그 경지는 보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이 이기지묘처(理氣之妙處), 이기지묘체(理氣之妙體)의 체인(體認)이야 말로 율곡 성리학의 관건이라 하겠다.
그러면 그의 대표적 학설인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과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퇴계는 사단(四端)을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
칠정(七情)을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라 하여 두 개의 존재구조를 설정하고 있지만,
율곡은 ‘이발이기수지’는 그릇된 것으로 보아 오로지 기발이승 하나의 길밖에 없다고 본다.
율곡은 천지의 변화에 이화(理化)와 기화(氣化)가 없듯이 오심(吾心) 또한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의 두 길이 없다고 하여 퇴계의 호발(互發)을 반대한다.
기발이승이란 발하는 기 위에 ‘이’가 올라탄 상하의 존재구조를 말한다.
율곡은 자연세계를 막론하고 일체 존재의 존재구조를 기발이승으로 일관하여 설명한다.
물론 그가 기발이승을 말하는 일차적 논거는 ‘이무위 기유위’(理無爲 氣有爲)라는 이기 개념에 근거한다.
즉 기는 발하는 것이지만 ‘이’는 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그 자신은 발하지 않지만 기발의 원인이 되고 주재가 되는 것이다.
그는 ‘이’의 발을 부정하기 때문에 기발이승으로서 존재구조의 형식을 삼는다.
기가 발함에 ‘이’가 탄다고 할 때 기발과 이승은 동시적인 것이다.
또 공간적으로도 이합(離合)이 없는 것이다.
본래부터 하나로 있는 묘합구조를 기발이승이란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승의 승(乘)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기의 동정(動靜)을 주재하는 ‘이’의 근저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기발이승은 존재 자체의 표현으로 이기지묘의 다른 표현이며 이통기국의 다른 표현이다.
다음은 이통기국설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통기국이란 ‘이무형 기유형’(理無形 氣有形)이라는 그의 이기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가 무형하다는 말은 ‘이’가 시간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보편성을 가졌다는 말이고,
기가 유형하다는 말은 기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 국한성을 가졌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언제, 어디서나 두루 통하는 것이고,
기는 언제 어디에서든지 한계지워지고 국정(局定)된다는 의미이다.
이통기국의 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율곡의 이통기국은 이일분수(理一分殊), 기일분수(氣一分殊)의 사고를 거쳐 창출된 이론이다.
이일분수는 존재를 체용 양면으로 나누어 구별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로 보는 관점이라 하겠는데
다만 ‘이’를 중심으로 하여 본 것이다.
율곡에 의하면 본연자(本然者)는 이일(理一)이고 유행자(流行者)는 분수(分殊)인데
유행지리(流行之理)를 버리고 달리 본연지리(本然之理)를 구하려함도 진실로 옳지 못하고,
만약 ‘이’에 선악이 있는 것으로서 ‘이’의 본연을 삼는 것도 또한 옳지 못하니,
‘이일분수’ 네 글자를 마땅히 체구(體究)해야 한다고 한다.
또 그는 이일분수를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과 각일기성(各一其性)으로 설명한다.
천지인물(天地人物)이 비록 각각 그 ‘이’가 있으나 천지지리(天地之理), 만물지리(萬物之理), 오인지리(吾人之理)가 하나인 것은 ‘통체일태극’인 동시에 이일(理一)이라 함이요,
비록 하나의 ‘이’이지만 사람의 성, 사물의 성, 개의 성, 소의 성이 각각 구별되어 다름은 ‘각일기성’으로 이것이 분수의 측면이다. 따라서, 일본지리(一本之理)는 ‘이’의 체가 되고 만수지리(萬殊之理)는 ‘이’의 용이 된다.
그런데 ‘이’의 체는 하나인데 어떻게 그 용이 만가지로 다른가 하면
그것은 기가 같지 않기 때문에 유행 변화하는 기를 탄 ‘이’는 만수지리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율곡은 정이천의 이일분수를 계승하면서도 또한 이기지묘의 입장에서 이일분수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율곡은 또 기일분수를 말하게 된다.
그는 『천도책』에서 하나의 기가 운화(運化)되어 만 가지로 다르게 되는데,
나누어서 말하면 천지만상이 각각 하나의 기(各一氣)요,
합해서 말하면 천지만상이 같은 하나의 기(同一氣)라 한다.
여기에서 ‘동일기’는 바로 기일지기(氣一之氣)이고 ‘각일기’는 분수지기(分殊之氣)로서 기일분수가 된다.
또한 『수요책』(壽夭策)에서도 합해서 말하면 천지만물이 ‘동일기’요,
나누어 말하면 천지만물이 ‘각일기’라 한다.
그리고, ‘동일기’이기 때문에 ‘이일’이 되고, ‘각일기’이기 때문에 ‘분수’가 되는 것이라 한다.
여기에서도 ‘동일기’는 ‘기일지기’요 ‘각일기’는 ‘분수지기’로서 기일분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일분수는 이기지묘에서 ‘이’를 중심으로 본체와 현상을 아울러 본 것이라면,
기일분수는 이기지묘에서 ‘기’를 중심으로 본체와 현상을 아울러 본 것이라 하겠다.
율곡의 성리학에서는 이일분수든 기일분수든 이기지묘의 관계성을 떠나지 않는 데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이일분수는 ‘이’에 치우쳐 체용관계를 본 것이고,
기일분수는 기에 치우쳐 체용관계를 본 것이고, 기일분수는 기에 치우쳐 체용관계를 본 것이다.
이렇게 이와 기 어느 한면으로 치우쳐보는 관점을 지양하고,
이기지묘의 관점에서 ‘이일’과 ‘기일’, ‘이분수’와 ‘기분수’를 아울러 보고자 한 것이 율곡의 이통기국이다.
이통기국의 연원에 관해서는 그 용어가 불교 화엄의 이사(理事)와 통국(通局)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지만,
그 사상내용을 전적으로 그렇다고 단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율곡의 이통기국 네 글자는 스스로 견득(見得)한 것이라 생각되지만,
혹시 내가 독서가 적어 먼저 이런 말이 있었는데도 보지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한 것을 보면,
오히려 율곡의 이통기국은 이천의 이일분수설이나 ‘이동기이’(理同氣異) ‘이통’(理通) ‘이색’(理塞)의 이론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옳다고 생각된다.
율곡은 이통기국을 설명하기를 “인성이 물성이 아닌 것 이것이 기국이고, 사람의 ‘이’가 곧 물의 ‘이’인 것 이것이 이통이다”라고 한다.
또한 모나고 둥근 그릇이 같지 아니하나 병 속의 공기는 마찬가지라고 비유하고 있다.
따라서 기가 만 가지로 다른데도 근본이 하나일 수 있는 것은 ‘이’의 통함 때문이며,
‘이’가 하나인데도 만 가지로 다를 수 있는 것은 기의 국 때문이라 한다.
이렇게 볼 때, 율곡의 이통기국은 이무형, 기유형의 개념을 통해 이기지묘의 관계성 속에서
‘이’의 체용과 기의 체용을 유기적으로 통찰한 표현이라 하겠다.
율곡 성리학의 구조로 볼 때 이일지이(理一之理)가 있으면 기일지기(氣一之氣)도 있어야 하고,
분수지리(分殊之理)가 있으면 분수지기(分殊之氣)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율곡에 있어서는 ‘이’의 분수든 '기'의 분수든 분수화되는 근거는 기에 있다.
‘이’의 분수라는 것도 이기지묘의 관계성 속에서 기의 분수에 따른 자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율곡의 이통기국은 ‘이'만도 아니고 기만도 아니며,
’이‘의 통과 '기'의 국이 하나로 묘융된 이기지묘의 세계, 이기지묘의 가치를 표현한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율곡의 이기설은 정?주에 충실하면서도 온전한 모방이 아니라 그의 독창이 돋보인다.
이기 개념의 명료화, 이기지묘의 사유체계, 기발이승의 존재구조 설정, 이통기국의 사유 등은
율곡의 창의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기지묘는 회재, 퇴계로 이어오는 ‘이’철학과 화담의 기철학을 조화함으로써 조선조 성리학의 전성기를 주도하였던 것이다.
2) 인성론
인성론이란 인간존재의 내면구조를 철학적으로 구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의 이기로서 분석 설명하는 작업이 된다.
율곡은 천인합일의 관점에서 인성론을 전개한다.
인간은 천지지수(天地之帥:理)를 품수하여 성으로 삼고,
천지지색(天地之塞:氣)을 나누어 형을 삼는다.
오심(吾心)의 발용이 곧 천지의 변화이다.
천지의 변화가 두 근본이 없으므로 오심의 발용도 두 근원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율곡은 천지자연이 기화이승(氣化理乘)이듯이 인간존재도 기발이승의 존재구조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이기지묘가 되는데 그의 성, 정, 심의 기본구조가 모두 이를 근본으로 삼고 있다.
이제 그의 인성론을 기질지성, 칠정(사단), 인심도심의 순서로 살펴보기로 하자.
[기질지성]
성리학에 있어서 성의 설명은 천지지성(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구별하여 설명한다.
율곡이 인간의 성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 하는 문제는 그에 있어서의 대전제,
즉 '이'와 '성'의 개념구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율곡에 의하면 성은 이와 기의 합이다. 대개 '이'가 '기' 가운데 있은 연후에 성이 된다.
만약 형질가운데 있지 않으면 마땅히 '이'라 해야지 성이라 하는 것이 옳지 않다.
다만 형질 가운데에 나아가 단지 그 '이'만을 가리켜서 말한다면 본연지성인 것이다.
본연지성은 기와 섞일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율곡은 성을 이기지합 내지 이기지묘로 보기 때문에 형질 중에서 성을 파악하는 관점에 선다.
형질을 떠나 있는 것은 '이'이지 성이라 할 수 없다.
본연지성이란 단지 형질 중에서 '이'만을 가리켜 부르는 이름으로 기가 배제된 순수이(純粹理)를 의미한다.
이는 율곡이 기질지성 하나만을 성으로 보는 것으로 본연지성의 성을 '이'로 이해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두 성이 아니라 기질상에 나아가 단지 그 '이'만을 가리켜 말해 본연지성이라 하고,
'이'와 기질이 묘합된 것을 기질지성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연지성은 기질을 겸해 말할 수 없으나 기질지성은 오히려 본연지성을 겸할 수 있다.
그런데 율곡이 이기지합으로서의 기질지성을 성으로 보아 본연지성을 기질지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은
정명도의 성론에서 영향받은 것이라 하겠다.
또한 율곡은 정명도의 "성을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아니하면 밝지 못하다"라는 말을 근거로 성과 기를 아울러 보는 성관(性觀)을 확립함으로써 불비(不備)와 불명(不明)의 폐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정이천, 퇴계의 관점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은 '성즉리'(性卽理)의 입장에서 천지지성, 천명지성, 본연지성만이 참다운 의미의 성이라 하는 것이고,
군자의 입장에서는 기질지성은 성이라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장횡거, 정명도, 율곡으로 이어지는 기질지성 중심의 성론은 '성즉기'(性卽氣)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율곡의 기질지성 중심의 성론은 인간을 천지지리와 천지지기의 묘합체로 이해하는 그의 입장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우주 자연이 그렇듯이 인간 존재 자체를 성과 형, 수(帥)와 색(塞),
이와 기의 묘합적 존재로 파악하기 때문에 기를 떠난 인간의 성을 말하기보다는
이기가 불리지묘(不離之妙)한 성을 일컫게 된다.
아울러 율곡의 이러한 성론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성을 말하는 것이지,
관념적인 성이나 개념적인 성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율곡의 철학이 결코 현실을 떠나지 아니하고 또한 관념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사단칠정론]
다음은 율곡의 사단칠정론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 성리학에서는 그리 문제시되지 않았던 시단과 칠정의 문제가 한국성리학에서는 중요한 논제로 대두되었다.
그것은 퇴계와 고봉의 논변을 거쳐 율곡과 우계의 논변을 통해 더욱 심화되었다.
율곡은 퇴계와 고봉의 사칠논변에 대해 고봉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는 말하기를 “왕복한 만여 언이 마침내 서로 합하지 못하였으니, 나로 말하면 명언(明彦)의 이론이 나의 뜻과 꼭 맞는다.
대개 성 가운데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있고,
정 가운데에는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이 있으니 이와 같을 뿐이다.
오상(五常) 밖에 다른 성이 없고 칠정밖에 다른 정이 없다.
칠정 중에 인욕이 섞이지 않고 수연(粹然)하게 천리에서 나온 것이 사단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율곡은 사단칠정의 구조를 기발이승으로 본다.
사단도 정이고 칠정도 정이다.
율곡에 의하면 성이 기를 타고서 움직인 것이 정이다.
율곡은 퇴계의 사칠론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가 비판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퇴계는 사단과 칠정을 둘로 보는데 율곡은 칠정을 사단 속에 포함시켜 본다.
둘째, 퇴계는 사단의 구조를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 칠정의 구조를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라고 하여
이중의 존재구조로서 설명하는데, 율곡은 사단과 칠정이 모두 기발이승의 존재구조라고 본다.
셋째, 퇴계는 사단을 ‘이발이기수지’라고 표현하는데, 율곡은 이발(理發)을 부정하고
또 ‘이발이기수지’의 표현형식이 시간적 이선기후(理先氣後)를 면치 못하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넷째, 퇴계는 사단을 주리(主理), 칠정은 주기(主氣)하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율곡은 사단을 주리하고 하는 것은 옳지만 칠정을 주기라고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면, 사단칠정과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인심과 도심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율곡에 의하면 사단과 칠정은 본연지성, 기질지성과 같다고 한다.
본연지성은 기질을 겸해서 말할 수 없으나 기질지성은 오히려 본연지성을 겸할 수 있다.
따라서 사단은 칠정을 겸할 수 없으나 칠정은 사단을 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율곡은 기질지성 속에서 본연지성을 보았던 것처럼 칠정 속에서 사단을 이해한다.
그것은 성이 하나이듯이 정도 하나라는 것이요 정은 성의 발용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의 관계를 사단은 오로지 도심을 말하고 칠정은 인심과 도심을 합해서 말하는 것으로 본다.
퇴계와 같이 사단은 도심, 칠정은 인심에 각각 배속하는게 아니라 칠정은 인심도심선악의 총명(總名)으로 파악하고,
사단은 도심과 인심의 선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심을 사단으로 파악함은 물론 인심 중의 선을 도심과 같은 사단으로 보아
인심을 인욕으로만 돌리지 않는 율곡의 입장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사단을 도심이라 하는 것은 옳지만, 칠정을 인심이라고만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칠정밖에 다른 정이 없는데, 만약 인심만을 가리켜 말한다면 이는 반만 들고 반은 버리는 것이 되어 올바른 파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율곡의 사단칠정론은 고봉의 입장을 계승하고 퇴계와 다른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윤리적 입장에서 이기의 분변과 사칠의 엄격한 분별을 강조하는 퇴계와는 달리,
우주자연과 인간을 기발이승의 구조로 합일시켜 보는 율곡의 철학적 입장과의 차이 때문이다.
따라서 율곡에 있어서는 사단의 선도 중요하지만 칠정의 중절된 선도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현실적 인간의 입장에서는 칠정을 어떻게 ‘이’의 주재에 따라 기가 발하도록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 하겠다.
[인심도심]
다음은 율곡의 인심도심설에 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인심도심에 관한 문제는 율곡 성리학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는 우계와의 논변에서도 인심도심에 관한 것이 많은 양을 차지하였고,
곳곳에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어 주자에 있어서 조차 미진했던 바를 밝혀 한국성리학의 진가를 힘껏 발휘하고 있다.
율곡에 의하면 만약 인심도심에 투철하지 못하면 이기에도 투철할 수 없다고 한다.
이기지묘를 이미 밝게 통견(洞見)했다면 인심도심의 원리를 아는 것과 이기의 원리를 아는 것이 둘이 아닌 하나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천인일체요 천인일관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천이 인간을 통해 내면화되어 있으므로 구체적으로 알게되는 계기는 인간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심오한 천인합일의 경지에서 이기지묘를 체오(體悟)하여 인심도심에 두 근원이 없음을 밝히고,
이는 20대 후반부터 10여 년의 사색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 천백의 웅변지구(雄辯之口)로도 돌이킬 수 없는
확고한 신념임을 우계에게 고백하고 있다.
인심과 도심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율곡에 의하면 인심이나 도심은 결국 하나인데 이름이 다른 것은
심이 어떠한 의지적 정향(定向)을 갖고 작용하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즉 인심과 도심이 비록 두 이름이나 그 근원은 단지 일심인데,
발함에 혹 이의(理義)를 위한 것과 식색(食色)을 위한 것이 있기 때문에 발함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의를 위해 발한 마음은 도심이 되고, 식색을 위해 발한 마음은 인심이 된다.
이처럼 그 근원에 있어서는 일심으로 동일한 것이지만 인심과 도심의 양변으로 대별되는 것이다.
율곡의 인심도심설은 주자설에 영향받은 것인데,
심의 허령지각(虛靈知覺)은 하나이나 인심과 도심이 다른 것은 혹 형기지사(形氣之私)에서 생기고,
혹 성명지정(性命之正)에 근원하여 지각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혹 위태해서 불안하고 혹 미묘해서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주자의 ‘혹생어형기지사’(或生於形氣之私)와 ‘혹원어성명지정’(或原於性命之正)을 놓고,
퇴계와 율곡의 해석에 차이가 있었다.
퇴계는 초기에 성명의 바름에서 근원한 도심은 내출(內出)로 보아 사단이라 하고,
형기의 사에서 생긴 인심은 외감(外感)으로 보아 칠정이라 하였다.
그러나 율곡은 인심도심이 모두 내출인데 그 동함은 모두가 외감에 말미암는 것이라 한다.
즉 율곡은 본원상에 있어서는 인심도심이 하나이지만 주자의 혹생혹원(或生或原)이 모두 기발을 보고 입론한 것으로
여기에서 인심도심이 구별된다고 보는 것이다.
퇴계는 도심과 인심을 각기 내출과 외감으로 보아 이발, 기발의 이원으로 보지만,
율곡은 인심이나 도심을 모두 기발이승일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퇴계도 고봉과의 논변을 통해 “사단 또한 물에 감해서 동한 것은 진실로 칠정과 다름이 없다”고하여
수정해 보았던 것이다.
율곡도 처음에는 도심을 기와 관계없이 정리(正理)에서 직출(直出)하여 발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후에는 이기지묘의 근본입장에 따라 도심 또한 인심과 마찬가지로 기와의 관계 속에서 발용되는 심으로 고쳐보았다.
심은 이기가 혼융하여 원래 떨어질 수 없는 이기지묘로서,
그 심의 동정 현상은 발하는 기와 그 기발의 소이가 되는 ‘이’로서 가능한 것이다.
도심이 발하는 것은 기이지만 성명이 아니면 도심이 생길 수 없고,
인심의 본원은 ‘이’이지만 형기가 아니면 인심이 생길 수 없어,
인심과 도심이 모두 이기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심과 도심은 모두가 기발이승의 심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율곡이 인심도심을 통해서 이기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며,
인심도심이 기발이승 내지 이기지묘임을 천인합일의 경지에서 우주자연을 통해 체오(體悟)한 것을 의미한다.
율곡에 의하면 인심과 도심은 모두 기발인데 기가 본연지리에 순하면 기 또한 이것이 본연지기이므로
‘이’가 본연지기를 탄 것이 도심이 된다.
또한, 기가 본연지리에 변함이 있으면 본연지기에도 변함이 있으므로
‘이’ 또한 소변지기(所變之氣)에 타게되어 인심이 되니 과불급이 있게 된다
‘이’가 본연지기에 승재(乘載)한 것이 도심이요
‘이’가 소변지기(所變之氣)에 승재한 것이 인심이다.
여기에서 기가 본연지리에 순한다 함은 진실로 기가 발하는 것인데
그 기가 ‘이’에 청명(廳命)하는 것이므로,
중한 바가 ‘이’에 있어서 주리로 말할 수 있고 기가 본연지리에 변한다 함은 진실로 ‘이’에 근원하였지만,
이미 기의 본연이 아니어서 ‘이’에 청명할 수 없으므로,
중한 바는 기이기 때문에 주기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인심과 도심이 서로 시작과 끝이 될 수 있다는 인심도심상위종시(人心道心相爲終始)를 주장한다.
지금 우리의 마음이 처음에는 성명의 바름에서 바로 나오다가도 혹 순할 수 없어서 마침내 그 사이에 사의(私意)가 섞이면,
이것은 도심으로서 시작해서 인심으로서 끝마치게 된다.
혹은 형기에서 나왔으나 정리에 어긋나지 않으면 진실로 도심에 틀리지 않는 것이다.
혹 정리에 어긋나더라도 그릇된 줄 알고 고치어 욕심에 따르지 않으면 이것은 인심으로 시작해서 도심으로서 끝나게 된다.
이와 같이 인심과 도심은 이미 결과한 심이지만 의(意)를 겸한 까닭에,
고정화된게 아니라 인심의 도심화와 도심의 인심화가 가능하다.
따라서 인심도심 상위종시설의 이론적 근거가 ‘의’에 있고, 의지를 중시하는 율곡 철학의 특징이 잘 발휘된 것이다.
율곡에 의하면 도심은 순전히 천리이므로 순선하지만,
인심은 천리와 인욕의 양면을 겸하므로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인심의 절제와 도심의 확충이 요구된다.
도심은 다만 지킬 뿐 아니라 확충해 나아가고,
인심은 인욕에 흐르기 쉬우므로 반드시 정찰하여 도심으로서 절제하도록 하여 항상 인심이 도심의 명령에 좇도록 해야
인심의 도심화가 가능하다.
이렇게 볼 때
율곡은 천인일관의 입장에서 인심도심을 이기설과 일체화시켜 그 논리를 전개하고,
또한 인심도심의 상호가능성을 말하면서 본연지성, 기질지성, 사단 칠정,
나아가 ‘의’에 까지 연관시켜 설명함으로써 율곡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정밀한 이론을 전개한 것은
율곡 성리학의 위대한 공헌이다.
출처: 사단법인 율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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