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와 개화사상>
개화파(開化派)
19세기 중엽 이후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위로부터 부르주아적 개혁'을 실현하려던 정치집단.
개화파를 형성하는 데 계기가 된 사람은 북학파의 거두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와 중인 출신인 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일명 유대치)였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 사건에 대한 조선왕조의 위문사절단의 부사(副使)로 청에 갔던 박규수는 구미 열강의 침략으로 피폐해진 청의 현실을 보고 위기의식 속에서 조선의 문호개방을 통한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한편 역관으로서 전후 13차례나 중국을 다녀왔던 오경석은 구미 열강의 침략과 그에 따른 중국의 현실을 보면서 시대에 뒤떨어진 조선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 그는 서양문물을 소개한 중국의 신서(新書)인 〈해국도지 海國圖志〉·〈영환지략 瀛環之略〉·〈이언 易言〉 등을 국내에 가져와 연구하였다. 그는 자신의 친구인 유홍기에게 그것을 전하고 연구를 권한 뒤, 두 사람은 조선 형세의 위태함을 깨닫고 '일대혁신'의 필요성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은 중인 출신이기 때문에 혁신의 주체를 북촌(서울의 고관양반의 집단거주지)에 있는 젊은 양반자제 가운데서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이들이 주목한 북촌의 양반자제는 김옥균(안동김씨 부사 김병기의 양자)·박영효(판서 원양의 아들이자 철종의 부마)·박영교(박영효의 동생)·서광범(참판 서상익의 아들)·서재필(서광범의 조카)·김윤식·김홍집·홍영식·유길준·어윤중 등이었다. 이들은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과 함께 신서를 익히면서 개화사상과 개화파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개화파는 1876년 개항을 계기로 민씨 정권이 중국의 양무개혁론을 모방, 체제유지의 차원에서 추진한 개화정책에 참여하면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충의계'(忠義契)를 조직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또한 개혁의 수단으로서 당시 서구문물에 관심을 표명하던 고종을 개명화시켜 평화적인 개혁을 추구하려 하였다. 특히 1880년과 1881년의 일본수신사와 신사유람단 그리고 청의 개화문명을 배워오기 위한 영선사 등의 파견은 개화파가 세계정세의 흐름과 새로운 서구문명을 직접 확인하고 배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개화파는 양반의 자제뿐만 아니라 광범한 층의 청년들을 모아 외국에 유학보내어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배우게 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군사사관학교와 경응의숙(慶應義孰) 등에 유학하여 근대적인 군사학과 학문, 사상을 배웠다. 박영효는 1883년 8월 박문국을 설치하여 〈한성순보〉를 발행, 나라 안팎의 정세는 물론 구미의 입헌군주제와 삼권분립의 우월성을 소개·선전하였다. 이런 속에서 개화파는 점차 조선 개혁의 모델로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주목하게 되었다.
개화파의 활동은 점차 정부 안에서 친청수구적인 민씨정권과 마찰하는 가운데 그 안에서도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로 분화되었다. 그것은 개화의 방법과 청에 대한 외교대책의 차이 때문이었다. 김홍집·어윤중·김윤식 등의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한 개화정책을 실시하되 민씨일파와의 타협 아래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개화의 방법도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서양의 근대적인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점진적으로 수행하고, 청과는 종래대로 사대외교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온건개화파의 이러한 개혁입장은 당시 청의 양무론적 개혁을 모방한 '동도서기론적(東道西器論的) 입장'이었다. 반면에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의 급진개화파는 서양의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사상·제도까지 수용해야 하고 민씨일파와는 타협이 아니라 타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개혁의 관건적 문제로서 민씨일파를 지원하던 청에 대한 사대관계의 종식을 우선과제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급진개화파를 이후에 '개화독립당'이라고도 하였다. 급진개화파의 개혁구상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변법적(變法的) 개화'의 입장이었다.
급진개화파는 1884년 5월 안남문제를 두고 청·프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에 있던 청군의 일부가 철수하는 정세변화를 이용하여 정변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당시 조선 침략의 강화를 위해 접근하던 일본의 도움을 약속받고 10월 마침내 정변(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신정부를 구성하고 그들의 개혁이상을 담은 '신정강'을 발표, '위로부터의 부르주아적 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민씨일파의 요청을 받은 청군의 무력간섭과 일본의 배반으로 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홍영식·박영교 등은 청군에 의해 살해되고,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급진개화파는 몰락하게 되었다.→ 개화사상
개화사상(開化思想)
19세기 중엽 이후의 근대 국가·사회 건설을 지향하던 부르주아 개혁사상.
개요
이 시기는 안으로는 봉건사회의 낡은 틀을 부수고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경제·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개화사상은 이러한 국내의 봉건적 모순을 자각하고 세계 역사발전의 방향에 따라서 내외정치를 개혁하려던 개혁사상이었다.
형성
초기 개화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조선 후기 북학파의 거두였던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와 중인 출신의 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일명 유대치)였다. 박규수는 이미 자신이 체득한 북학의 학풍에다가 북경사신으로 청을 오가면서 경험한 새로운 문물에 대한 견문을 덧붙여 초기 개화사상의 형성에 매개역할을 하였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였던 1860년 이후 두 차례 북경에 가서 본, 자본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된 청의 현실, 그리고 자신이 평안도관찰사 시절인 1866년(고종 3) 직접 경험한 제너럴셔먼호 사건 등은 그로 하여금 조선의 문호개방을 통한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쇄국정치가 기승을 부리던 대원군집권기여서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1869년 이후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오경석·유홍기 등과 함께 양반 자제 가운데 젊고 유능한 청년들을 모아 중국을 통해서 익힌 견문과 서구문물을 소개한 신서(新書)를 가르쳤다.
한편 중인 출신이던 통역관 오경석은 1850년대부터 사신을 따라 13차례나 톈진·베이징 등지를 오가면서 중국에 유입된 서구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또한 서양문물을 소개한 신서 즉 〈해국도지 海國圖志〉·〈영환지략 瀛環志略〉·〈만국공보 萬國公報〉 등을 수집하여 국내에 가지고 왔다. 오경석은 중국을 드나드는 과정에서 자연히 시대에 뒤떨어진 조선 봉건사회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동지이자 친구인 유홍기에게 중국에서 가져온 신서와 보고들은 견문을 전하며 연구할 것을 권하였다. 그뒤 두 사람은 사상적 동지로서 결합, 서로 만나면 조선의 형세가 실로 바람 앞의 등불임을 탄식하고 언젠가는 '일대혁신'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이 생각한 조선의 일대혁신이란 "문호를 개방하여 세계의 추세에 적응하는 정치적 혁신을 꾀하고 서구의 선진문화를 도입하고 상공업을 발전시켜 나라의 부국강병을 꾀하려는 부르주아적 개혁"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은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일대혁신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그 대안으로서 '우선 동지를 북촌(당시 서울에 있던 고관양반들의 집단거주지)의 자제 가운데서 구하여 혁신적 기운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당시 이들이 지목한 구체적 대상은 김옥균(안동김씨 부사 김병기의 양자)·박영효(판서 박원양의 아들이자 철종의 사위)·박영교(박영효의 동생)·서광범(참판 서상익의 아들)·서재필(서광범의 조카)·김윤식·김홍집·홍영식·유길준·어윤중 등이었다. 유홍기는 오경석이 국내에 가져온 신서를 이들에게 전하고 천하대세와 조선 개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에 의해서 싹트기 시작한 개화사상은 이들 청년지식인들에 의해 더욱 풍부해지고 발전하였다. 따라서 개화사상은 1870년대를 전후하여 형성·발전되었고, 이를 통해서 조선의 일대 혁신을 실현하려는 정치세력으로서 개화파도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김옥균을 비롯한 청년지식인들은 박규수·오경석·유홍기의 사상적 영향 아래 신서를 통해서 세계정세의 흐름, 서구사회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여 조선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개화파의 주된 관심은 '서구사회나 일본사회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조건이 무엇인가'하는 데 있었다. 이들은 특히 1876년 개항을 계기로 일본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자연히 일본이 근대화를 이룬 계기가 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주목하게 되었다. 구미 열강의 사정을 아는 데도, 메이지 유신 이래 짧은 기간에 근대적 발전을 이룩한 경험을 알기 위해서도 개화파는 일본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리고 김옥균·박영효·서광범·홍영식, 그밖의 양반 출신의 청년관리와 유홍기를 비롯한 일부 중인 출신의 선진적 지식인은 개항 이후 민씨정권의 개화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조선의 급속한 개화를 위해 활동하였다. 이들은 점차 김옥균을 중심으로 결집, 조선 봉건정부 안에서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해 나갔다. 그런데 이들 개화파는 개화의 방법과 청·일에 대한 외교문제를 둘러싸고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나뉘었다. 김홍집·김윤식·어윤중 등의 온건개화파는 민씨일파와의 타협 아래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서양의 근대적 과학기술문명만을 받아들여 점진적으로 개혁을 하자는 입장이었다. 또한 청과의 외교도 종래대로 사대외교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의 급진개화파는 서양의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서양의 근대적인 사상, 제도까지도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수구반동적인 민씨일파는 타협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었다. 이런점에서 급진개화파에게는 민씨정권을 지원하던 청과의 사대외교 청산문제는 개화 실현의 관건적 문제였다.
그런데 1882년 군인폭동(임오군란)을 계기로 민씨 정권이 친청정책을 강화하고 그나마 실시하였던 개화정책에서 후퇴하게 되자 개화파는 정변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884년 5월 안남문제를 두고 청·불전쟁이 발생하여 서울에 주둔했던 청군의 일부가 철수하고 그에 따라 일본이 개화파에 접근하자, 개화파는 1884년 10월 정변(갑신정변)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변은 청과 민씨정권에 대한 과소평가, 일본의 배신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그들의 개혁사상의 한계로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내용과 성격
개화파가 지향하던 개화사상과 그 구체적 내용은 그들이 정변에 성공 뒤 구성한 새로운 정부의 '신정강'에서 잘 드러난다. 신정강의 내용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김옥균이 남긴 〈갑신일록 甲申日錄〉의 정강을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1884년 10월 19일 개화파가 앞으로 단행할 개혁정치의 골간을 밝힌 14항목의 정강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청에의 조공하례를 폐지할 것,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고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고 간리(奸吏)를 근절하고 빈민을 구제하여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밖의 재정 관청은 폐지할 것,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를 하고 정령을 의정·집행할 것,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처리하도록 할 것' 등이다. 따라서 신정강에 표현된 개혁파의 개혁구상은, 대외적으로는 청에 대한 사대외교의 폐지, 사회신분적으로는 문벌의 폐지와 인민의 평등, 재능에 따른 인재등용과 같은 인민의 자유와 평등 보장, 그리고 왕실과 국가재정의 분리를 통한 국가재정의 일원화, 국왕전정의 폐지와 내각회의의 권한 확대를 통한 입헌군주제의 실현 등의 정치개혁을 추구하였다.
특히 급진개화파는 당시 반봉건문제의 해결을 위한 관건적 문제이던 봉건적 토지소유문제를 '지조법 개정'으로 대응함으로써 자신들의 개혁의 방향과 성격을 보다 분명히 하였다. 당시 해체되고 있던 봉건적 토지소유문제를 어떤 형태로 개혁하는가 하는 문제는 조선사회가 근대적 사회로 나아가는 데 있어 핵심이었다. 이런점에서 개화파는 지주제를 그대로 인정한 위에서 세제개혁의 차원에서만 토지문제를 해결하려 함으로써 지주를 새로이 전개될 근대사회의 건설주체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즉 이들은 구래의 지주적 토지소유를 기본적으로 유지하면서 이를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시켜 나갈 구상이었다.
개화사상의 이러한 측면은 위정척사파와는 질적으로 다른 진보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 문제에 가장 철저한 이해관계를 가진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함으로써 정변이 실패하는 역사적 한계를 갖게 하였다. 또한 지주적 토지소유를 옹호하는 개화사상의 이러한 측면은, 당시 지주제의 존속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사회의 식민지화를 획책하던 구미 열강과 투쟁할 내적 근거를 박약하게 하였다. 때문에 개화파는 서구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구미 열강의 본질인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 정변이 일본을 이용하려던 개화파의 주관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본의 배반으로 실패한 것은 결국 침략자의 본질을 원조자로 잘못 인식한 데 있었다.
개화사상은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의 건설을 지향하던 부르주아적 개혁사상이었고, 또한 당시 세계발전의 역사적 추이를 인식한 선진적인 사상이었다. 그러나 개화파의 대다수가 양반관료이자 대지주 출신이라는 계급적 제한성은 지주적 입장을 옹호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하게 하였고, 그들이 개혁의 모델로 삼은 일본과 구미열강의 침략성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 한계를 가졌다. 정변이 실패한 뒤 급진개화파는 사라졌지만, 개화사상이 지향한 개혁의 방향과 한계는 근본적인 변화없이 갑오개혁과 그후의 독립협회파로 이어졌다.→ 개화파
김옥균(1859-1897)
김홍집(1842-1896)
박영효(1861-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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