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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허목

회기로 2010. 1. 24. 19:06

許穆   허목 1595~1682


1595(선조28)년~1682(숙종8)년,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본관 양천(陽天), 자 문보(文甫), 화보(和甫), 호 미수(眉?), 시호 문정(文正), 현감 교(喬)의 아들이며 이원익(李元翼)의 손녀 사위이다.



백과사전 연관이미지

조선 중기 삼척부사를 역임했던 허목선생은 자는 문부 또는 화보, 호는 미수 또는 태령노인이라 했는데 선조 28년인 1595년 한양 창선방에서 현감 교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업에 전념하여 일찍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1626년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의 복상문제와 관련하여 과거를 볼 수 없는 정거의 벌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학문에만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재야의 지도자로 있던 허목선생이 중앙 정계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시작한 것은 효종임금이 돌아가시고 현종임금이 즉위한 1660년 사헌부 장령(정4품)으로 등용되면서부터입니다. 이 때 효종임금의 계모인 조대비가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복상문제로 송시열과 대립하게 되는데, 허목을 비롯한 남인들은 3년설을 주장하고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들은 만 1년설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복상문제가 아니라 현종임금의 왕통의 정당성과 연관된 매우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현종은 효종의 둘째아들인데 형인 소현세자가 죽어 맏이 대신 왕위를 계승했기에 효종을 맏아들로 인정하면 조대비의 복상은 3년이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만 1년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당시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라 맏아들이든 둘째 이하이든 그 어머니는 모두 만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의 주장과 같은 결정이 내려지고, 이러한 복제논쟁 시비로 정계가 소란해지자 현종임금은 허목을 삼척부사로 임명(좌천)했던 것입니다.


삼척부사로 부임한 허목은 향약을 만들어 주민교화에 힘쓰는 한편 척주지 편찬, 척주동해비 건립 등 많은 치적을 남기게 됩니다.

그러다 1674년 효종왕비가 죽자 다시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제기되는데, 경국대전에는 맏며느리의 상일 경우 시어머니는 만1년 ,둘째며느리 이하는 9개월로 규정되었습니다. 이 때 조정의 중심을 이루던 송시열과 서인들은 효종왕비를 맏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9개월복을 주장했으나 현종임금은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되어 만1년복으로 고칩니다.


이로써 송시열과 서인들은 실각하고 남인들의 집권과 더불어 허목은 이조참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유일하게 정승에 올랐습니다.

우의정으로 재임 시 유배 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를 놓고 영의정 허적과 대립하고, 이로 인해 남인은 양파로 갈라지게 되는데, 허적은 송시열의 처벌을 가볍게 하자는 탁남, 허목은 가혹한 처벌을 주장하는 청남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1678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고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념하다가 1682년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허목선생은 그림과 글씨, 문장에 모두 뛰어났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작품으로는 척주동해비와 영상이원익비문. 이성중표문이 있고, 그림으로는 묵죽도가 전하며. 저서로는 [동사] [미수기언] 등이 있습니다.

1688년 관작이 회복되고, 1691년 그의 신위를 봉안하는 사액서원으로 미강서원이 마전군에 세워졌으며, 나주의 미천서원. 창원의 회원서원에도 제향되었습니다. 시호는 문정입니다.


※참고자료 : [삼척시지], [미수허목의 서예연구](삼척문화원,1994), [실직문화] 제3집


기록에 나타난 허목의 모습과 인품

ㆍ 청수한 모습에 홀쪽한 몸, 우묵한 이마에 긴 눈썹...염담하면서도 광대하다....여윈 얼굴 긴 눈썹에다 늘씬하고 출중하여 보기에 신선같았고, 대하면 강직하고 시원스러운 운치가 있었으니 요컨대 세상에 드문 분이었다(기언)

ㆍ 옛날 사람의 풍모와 흰 털이 섞인 눈썹으로 학과 같은 자태가 있었다(숙종실록)

ㆍ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올바름을 지켜 흔들리지 않기도 오직 허선생이 그랬고, 가당함을 보고서 나아가고 기미를 알아차리고선 곧 물러나와 시종(본말)이 법도가 있게 하기도 오직 허선생이 그랬다. ...초야에 있을 적에는 산수에 취미를 붙이고, 무릎을 포개고 앉아 선왕들의 도를 노래하며 장차 인생을 마칠 듯이 하였고, 임금이 예를 갖추어 초빙함에 미쳐서는 누차 사양하다 나아가서 아름다운 계책을 임금께 말하되, 임금과 백성을 효순 때 처럼 만들 생각이 간절했다 (성호 이익, 신도비명기)

미수 허목의 학사적(學士的) 위치

허목은 위로 퇴계 이황의 학(學)을 이어받고 아래로 성호 이익의 학(學)을 발전시킨 분. 영남의 성리학과 근기의 실학에 가교자적 역할을 한 분. 다시 말해 이황과 정구 그리고 허목으로 이어지는 학풍이 그 후 성호 이익과 이용휴 이가환(1742-1801)부자를




 

 

허목許穆의 시설詩說 

시는 뜻한 것을 말로 표현한 것인데, 마음속에서 충동된 감정이 말로 나타난 것이다.  

시에는 6의六義가 있는데, 첫째는 풍風, 둘째는 부賦, 셋째는 비比,  

넷째는 흥興, 다섯째는 아雅, 여섯째는 송頌이다.  

풍은 바람이란 뜻으로 바람이 물체를 움직이게 하듯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교화를 이루는 것이다.  

아는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상하를 정하고 기쁨을 같이하여 온 천하를 일치되게 하는 것이다.  

아에는 대ㆍ소 두 가지가 있는데, 연향燕享과 조회朝會  

그리고 수희受釐(희는 희禧의 뜻, 수희는 제사를 지내 주고 복을 받는다는 말.)의 차이가 있다.  

송은 형용이란 뜻인데, 덕을 형용하고 공로를 드러내어  

상제上帝와 선왕先王의 교제郊祭(천지에 지내는 제사)와  

체제?祭(제왕이 시조始祖를 하늘에 배향配享하는 제사)에 바치는 음악이다.  

그래서 잘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 것으로는 시보다 더 가까운 것이 없다. 

왕도가 쇠하고 예의가 문란해지자 변풍變風과 변아變雅가 생겼다.  

태사공太史公(사마천司馬遷)이 말하였다. 

 

“시는 산천山川ㆍ계곡溪谷ㆍ조수鳥獸ㆍ초목草木ㆍ빈모牝牡ㆍ자웅雌雄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시는 풍화가 제일이다.” 

 

 

 

호는 미수(眉?), 이름은 목(1595∼1682: 선조 28년∼숙종 8년). 그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학자이자 남인(南人)의 영수로 서인(西人)이던 우암 송시열과 벌어진 예론(禮論) 관련 논쟁으로 유명합니다.  

  

학(學)·문(文)·서(書)의 3고(三古)라 불렸으며, 특히 전서(篆書)는 동방 제1로 칭해집니다. 56세인 1650년(효종 1년)에 처음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1660년 효종의 상에 인조의 계비(繼妃)인 조대비의 복제(服制)로 일어난 제1차 예송(禮訟)에서 송우암의 기년설(朞年說;1년설)에 반대하여 3년 상을 주장하다 서인의 반격으로 삼척부사로 좌천됩니다.  

  

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다시 조대비의 복제가 문제되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9개월)에 반대하여 기년설을 주장한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하여 대사헌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이조참판, 우의정을 지냈고, 송우암 처벌에 강경론을 내세워, 온건론을 편 같은 남인인 허적(許積)과 반목하여 청남(淸南)의 영수가 됩니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煥局)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삭탈관직을 당하고 고향에서 은거하게 됩니다. 저서로는 『동사(東事)』, 『미수기언(眉?記言)』, 글씨로는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가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 등이 전합니다.  

  

  

 

 

집안의 화를 예지했던 허미수 

 

흔히 허미수를 유학자로만 알고있는데 한편으로 그는 도력이 높은 이인(異人)으로도 전해집니다. 

허적1) 의 탄생과 관련하여 허미수의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1)허목과 허적은 같은 양천 허씨로 12촌지간이다. 

  

허미수는 한집안 사람인 허적의 아버지와 한때 절에서 함께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절에서는 매월 보름이면 스님이 한 명씩 없어졌습니다. 허적의 아버지가 살펴보니 이무기가 나타나 스님을 잡아먹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안 허적의 아버지가 이무기를 칼로 죽이자 이무기의 기운인 파란 줄기가 그의 집으로 뻗치고 들어갔습니다. 허미수는 그것이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라고 판단하여 그 집에서 아들을 낳는 족족 없애도록 충고했습니다.  

  

허적의 아버지는 그의 충고를 따라 두 아이를 없앴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태어난 아이가 ‘허적’이었는데, 허미수는 그 아이가 허씨 가문의 멸족을 초래할 것으로 예견하고 죽이려 했으나 허적의 아버지는 더는 죽일 수 없노라며 아이를 살려두었습니다.  

그러나 허미수는 그 아이로 인한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미리 알고 친척간에 파적(破籍)하였다고 합니다. 허적은 아주 뛰어난 신동이었으나 훗날 결국 역적이 되어 허씨 가문에 화를 입히게 됩니다.  

  

  

허적은 허미수와 함께 후에 남인을 영도하여 서인인 송우암을 공격하였는데, 허미수는 강경한 입장을 띤 데 반해 허적은 온건한 입장을 견지하여 둘의 사이가 벌어집니다.  

  

허적과 갈등을 겪은 허미수는 1678년(숙종 4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당시 우의정이던 허적과 그의 아들 허견(許堅)의 실정과 죄상을 논핵하다 왕의 노여움을 삽니다. 이를 계기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허미수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를 볼 때, 허적에 대한 설화는 이무기를 죽이고 나서 그 척(隻)으로 허씨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을 예측한 허미수의 선견지명을 잘 보여줍니다.  

   

  

‘장차 앞으로 큰 해일이 오면 그때는 이곳을 떠나라’ 

 

그런데 허미수의 예지능력은 강원도 삼척시에 있는 영험한 <척주동해비>를 통해서 최근에 더욱 부각되고 있습니다.  

  

당시 삼척은 폭풍과 해일 피해가 잦아서 고기잡이배가 다 부서졌을 뿐만 아니라, 파도 때문에 바닷가에 나가지 못하여 어민들이 굶어죽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였습니다. 해일이 몰려올 때는 오십천(五十川)을 거슬러 올라 바닷가로부터 30리 가량 떨어진 거리에  

있는 동헌마루까지 바닷물이 밀려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에 허미수가 돌에다가 직접 글씨를 써서 바닷가에 비석을 세우자 신기하게도 그 이튿날부터 물이 평소의 3분의1밖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 다음날에는 비석이 묻힌 주춧돌까지만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바닷물의 침수피해를 입었던 곳까지도 백성들이 논밭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허미수가 삼척을 떠난 뒤 반대파인 노론계의 인물이 신임부사로 왔는데, 그는 그 비석의 내력을 듣고 허무맹랑하다고 여겨 비석을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자 다시 풍랑과 해일이 몰려왔고, 당황한 신임부사는 다시 비석을 세우려 했는데 허미수는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또 하나의 비석을 만들어 두어서 그 비석이 오늘날까지 유명한 ‘삼척 동해비’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허미수가 이 비석에 새긴 문장을 일컬어 ‘동해송(東海頌: 동해바다를 예찬한 글)’이라고도 하는데, 육경(六經)에 뿌리를 둔 것으로 도가(道家)적이며 주술적인 비유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편 허미수는 이 비석을 세우면서 ‘지금 같은 작은 해일은 내 비로 막을 수 있지만 장차 앞으로 큰 해일이 오면 내 비석으로도 막을 수 없으니 그 때는 이곳을 떠나라’고 경고하면서 ‘앞으로 불(火)로 난리가 난 후에 물(水)로 큰 난리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5년 전인 2000년 4월부터 강원도 고성, 강릉, 삼척 등 영동지방에 해마다 대형산불이 일어나고 있으며, 최근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났던 초대형 쓰나미가 동해안에서도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허미수는 이미 그러한 일을 예견하면서 비석을 세웠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유학자이자, 전국의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며 도가의 인물들과도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기인으로서 그의 풍모를 보여줍니다.  

 

 

비 후면 전서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는 강원도 삼척시 정라동 육향산 산정에 있는 높이 175㎝,  넓이 76㎝, 두께 23㎝의 큰 비석으로서 조선 현종 때의 정치가이며 대학자인 미수(眉수) 허목(許穆 : 1595∼1682)선생이 세운 비석이다. 1660년(현종 원년)에 허목이 삼척 부사로 부임할 당시, 동해에는 조석간만에 의한 피해가 극심했다. 조수가 삼척 시내까지 올라와 여름철 홍수 때는 강하구가 막히고 오십천이 범람하여 주민들의 피해가 심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은 신비한 뜻이 담긴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독창적인 전서체로 써서 1661년<을축> 3월 정라진(汀羅津) 앞의 만리도(萬里島)에 비를 세우니 바다가 조용해 지고,거친 풍랑도 이 신비로운 문장의 위력에 감동되어 그 후로 조수의 피해가 없어졌다고 한다.  

 

조수를 물리치는 신비한 비석이라 하여 일명 퇴조비(退潮碑)라고도 불리워졌는데, 원래의 비는 1707년, 풍랑에 파손되어, 1709년에 재차 건립한 것이 지금의 비이다. 

 

 

 

 

 

민족사학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허미수 

 

허미수가 살아가던 17세기의 조선후기는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백성들이 권력을 잡은 유학자들에 대한 정치적 신뢰가 떨어지던 시대였습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서인들을 중심으로 한 주류 유학자들은 망한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의식으로 뭉친 중화주의 이념을 조선사회에 철저하게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유교 근본주의적인 사림들에 의해 주자성리학적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서가 강요되었으며, 성리학의 토착화 과정에서 조선에 중국문화 전한 기자를 성현으로 높여 추앙했고, 기자를 기자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로 이어지는 정통론의 입장에서 그 중심에 놓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수의 신흥 비주류 지식인들은 주체적인 한민족의 민족주의 역사관의 창립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민족주의 의식이 있는 비주류 유학자들은 단군조선을 역사적으로 부각시켜 단군 ·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조선으로 한민족의 정통이 이어짐을 명확히 합니다. 그들은 단군을 요순(堯舜)에 대치시켜 단군조선의 계보를 정립함으로써 단군조선을 요순시대와 함께 존재했던 이상사회로 높이고 조선문화의 기원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주장합니다.  

  

주로 남인과 북인계열의 학자들이 그러한 주장을 했는데, 허미수 역시 1670년대에 『동사(東事)』2) 라는 역사서를 써서 단군조선에 대한 그의 주장을 펼칩니다. 허미수는 그가 당시 정권의 주요 실세였던 남인의 영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주자학적 입장에서 우리민족을 중국과 구별하면서 단군을 민족의 수장으로 내세우는 ‘자주적 단군문화 정통론’을 추구하였습니다. 

 

2)동사는 단군세가 (부여열전, 숙신씨열전, 기자열전, 위만세가, 사군이부, 삼한열전), 신라세가 (가락열전, 대가야열전), 고구려세가, 백제세가 (예맥열전, 말갈열전, 모라열전), 흑치열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서술한 『동사』는 기존의 중화사대주의적인 사서들과는 상당히 다른 세 가지의 서술형태를 보여줍니다.  

  

첫째, 한국사의 첫머리로 단군세가(檀君世家)를 내세워 단군조선이 우리역사의 기원임을 분명히 하고 조선을 중국과는 다른 또 하나의 독립된 천하질서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즉 한민족문화의 시발을 신시(神市)까지 소급시키면서 신시와 단군의 시대는 중국의 제곡, 당우시대와 자웅을 겨뤘다고 주장하면서 환인-신시-단군으로 이어지는 상고사 계통을 확립합니다.  

  

둘째, 그는 숙신, 예맥, 말갈 등 백두산 북쪽의 족속과 부여, 고구려, 백제 등을 모두 함께 단군의 후손으로 인정하여 후에 20세기 초의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에 영향을 줍니다. 이같이 부여계 국가들을 단군의 후예로 보는 시각은 고려말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조선 세조 때 권람의 『응제시주』에만 보이던 것인데, 허미수가 이를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조선조 사서류에서 단군시발의 역사인식을 낳은 선구적인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셋째, 그는 당시 유가들이 신화적인 요소를 황당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배척한 것과는 달리 단군의 신이성(神異性)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단군의 순방한 정치가 1천 년간 지속되었다면서 이상정치의 연원을 요순이 아닌 단군 통치시대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식을 보여주는 허미수의 『동사』는 후에 민족주의 학자들의 역사관의 틀을 잡아주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숙종 말년에 소론 학자 노촌 임상덕(1683∼1719)은 1710년대에 『동사회강(東史會綱)』을 써서 고대 한민족의 강역(江域)과 단군에 대한 사실을 고증하였고, 성호 이익(1681∼1763)은 ‘삼한정통론’을 지지하면서 정통의 시작을 단군으로부터 삼았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제자인 순암 안정복(1712∼1791)에게 전수되어 기자 이전에 단군시대부터 이미 원형의 유교문명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허미수의 영향을 받은 담헌 홍대용(1731∼1783) 이후 북학사상가들은 ‘조선=중화’라는 역사인식을 부정하는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을 표방하고 ‘조선=동이’라는 역사인식을 확립해갑니다. 이에 따라 화이론적인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인식은 부정되고 오히려  

그동안 정통에서 제외되어 연구되지 않았던 발해왕조가 북학사상가들의 연구대상이 되면서 옥유당 한치윤(1765∼1814)의 『해동역사(海東歷史)』에서는 우리나라 왕조 중의 하나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은 다시 근대 민족주의 학자들인 신채호, 정인보 등의 역사인식에 영향을 주게 되고 오늘날 현대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관의 시금석이 됩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유교사대주의에 매몰되었고, 일연의 『삼국유사』는 불교주의에 빠졌지만 허미수의 『동사』는 도가적인 입장에서 우리 역사 고유의 정통성을 복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無可無不可吟  무가무불가음  

         옳은 것도 없으며 옳지 않은 것도 없나니

                                    許穆   허목 1595~1682

一往一來有常數   일왕일래유상수   한번 오고 한번 가는 것이 진리이나니

萬殊初無分物我   만수초무분물아   온갖 사물 처음에 무에서 사물과 나로                                          나누어 진다네

此事此心皆此理   차사차심개차리   이 일, 이 마음도 다 이러한 이치일진대

孰爲無可孰爲可   숙위무가숙위가   무엇이 옳으며 옳지 않다 하리요



一往一來有常數   일왕일래유상수

萬殊初無分物我   만수초무분물아

此事此心皆此理   차사차심개차리

孰爲無可孰爲可   숙위무가숙위가



한 번 가고 한 번 오는 것은 정해진 법칙

애당초 온갖 것이 너와 나란 분별 없었네

이런 일 저런 마음 모두가 이 이치인데

어떤 것이 그르고 어떤 것이 옳다하리





人生不如石  인생불여석

□□無崩毁  □□무붕훼

彭□一壽□  팽□일수□

不足爲悲喜  부족위비희




인생이란 바윗돌 같지 않으니

어찌 영원히 변하지 않길 바라겠는가

800년을 산 사람(彭祖)이나 어려서 죽은 사람이나

알고 보면 한바탕 세상이 꿈같기는 다 마찬가지인데 

그 무엇을 슬퍼하고 무엇을 기뻐하리






空階鳥雀下    공계조작하

無事晝掩門    무사주엄문

靜中觀物理    정중관물리

居室一乾坤    거실일건곤


텅빈 뜨락에는 새들이 놀고

해야할 일이라곤 전혀 없어 낮에도 문을 닫아 걸었네

고요한 가운데서 사물의 이치를 관찰하니

내가 있는 이 방이 하나의 건곤일세



無聲無臭極    무성무취극

聖人亦不言    성인역불언

箇中深遠意    개중심원의

無語向誰論    무어향수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지극한 이치는

성인도 그에 대해서는 역시 말을 하지 않았네

그러나 그 가운데 오묘한 뜻을

말이 없다면 누구와 토론할까




倚伏有常數   의복유상수

憂喜聚一門   우희취일문

三復金人銘   삼복금인명

多敗在多言   다패재다언



화와 복은 본래가 정해진 운수가 있으니

근심과 기쁨이 누구의 집엔들 없으랴

말을 조심하라는 금인의 명을 세 번이나 되뇌임은

모든 실패가 말 많은 데 있기 때문이네



僧自白雲山上歸    승자백운산상귀

白雲隨錫來郊扉    백운수석래교비

郊扉亦有無心老    교비역유무심로

身與白雲無是非    신여백운무시비


중이 백운산에서 돌아오니

흰 구름도 중을 따라 초가삼간으로 오는구나

역시 초가삼간에 무심한 늙은이 하나 있어

흰 구름과 함께 세상 시비를 모르네



安居無事足娛虞    안거무사족오우

何處人間有勝區    하처인간유승구

耕鑿自饒忘帝力    경착자요망제력     鑿  뚫을 착

樂生還愛鏡中鬚    악생환애경중수     鬚  수염 수


편안하고 한가하여 즐거움이 족하니

그 어디가 인간이 살기 좋은 곳일까

주어진 생활에 만족하니 나라의 덕도 잊었고

삶이 즐거우니 흰 수염도 오히려 좋구나



分此陰陽□    분차음양□  

以爲善惡人    이위선악인

末流如是遠    말류여시원

其故正由人    기고정유인




음과 양을 나누어서   

선인과 악인을 만들었다

음양의 갈라짐이 이처럼 멀어가니

그 까닭은 바로 사람으로 인함이로세




前山山雪晴    전산산설청

暖日長如春    난일장여춘

淡泊天機靜    담박천기정

書中對聖人    서중대성인



앞산에 눈 개어

따스한 날씨 봄 같네

산뜻한 빛깔 고요하여

글 가운데 성인을 대하도다




言不掩其行         언불엄기행

行不踐其言         행불천기언

徒□□然說讀聖賢   도□□연설독성현

無一補其愆         무일보기건        愆 허물건, 허물다

書諸石以戒後之人   서제석이계후지인


말은 행동을 덮지 못하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하면서

한갓 요란하게 성현의 글을 읽기만 좋아했네

하나의 허물도 보완해 나가지 못했기에 

돌에다 새겨 뒷사람들이 경계 삼도록 하노라





윤선도와 허목


미수 허목 ( 1595-1682)  17세기 붕당정치에 있어서  남인의 핵심인물중 한사람이 허목이다.


그는  소북 계열로서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하자  남인에 편입한 근기남인이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풍류아 백호 임제이다. 그는 서화담과 조식의  학풍을 이어 받았다.


그의 자는 문보 (손바닥에 글월 문자가  새겨져 있다하여 그리 부름) 이며 호는 미수( 눈썹이 눈을 덮을 정도로길어서 붙인 이름) 이다.


그는 인조반정이후  산림에서 학문을 하면서 살았는 데 효종의 부름을 받아  그의 나이 63세에 정계에 진출하였다.


그와 윤선도와의 인연은  다음 3가지이다.


하나는 1660년 1차 예송에서  3년 설을 주장하다가 서인에게 패하여 윤선도는 함경도 삼수로 유배를 가고  허목은 삼척부사로 좌천한 것이다.


둘째는  남인 계열  중에서도 강경파 계열이었다. 윤선도 사후에 일어난 제2차 예송(1674년) 에서는  남인이 승리하여 유배를  간 송시열에 대한  처리문제로 그는 강경입장을 견지하여 청남의 거두로  등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허적은 탁남으로 불리운다)


세째는 그는  1679년에  윤선도의 신도비를 지었다. 윤선도의 손자 이후가  비를 지어줄 것을 부탁하여 지었다.


그는 이 신도비에서 윤선도를   의리를 지키는 자로  표현하고 있다. 





미수 허목과 우암 송시열의 일화



조선 숙종조 때, 노론과 남인간의 당파 싸움의 최대 정적이었던 두 사람의 일화이다. 남인의 영수는 미수 허목(許穆) 이고 노론의 영수는 우암 송시열(宋時烈)이였다. 하루는 우암 송시열이 그만 병이 들어 눕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병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아들을 불렀다. “지금 곧 미수대감께 가서 내 병세를 소상히 말씀드리고 화제(약방문)를 좀 얻어 오너라.” 그 말을 들은 아들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아니, 장안에 허다한 의원들을 놔두고 왜 하필이면 미수대감에게 화제를 부탁하십니까? 천부당만부당한 분부이십니다. 만일 화제에 독약이라도 넣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가족들은 한결같이 펄펄 뛰었다. 그러나 우암은 큰아들에게 채근하였다.

“어서 가서 미수대감을 뵙고 오너라.” 아들은 하는 수 없이 미수를 찾아가 우암의 병세를 이야기하고 화제를 지어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미수가 적어준 화제를 보니 약재 중에 독약인 비상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닌가. 설마 했던 일인데 실제로 독약이 들어 있는 것을 본 가족들은 대경실색하였다.

“보십시오. 당초에 저희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는 아버님을 독살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아무리 남이지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암은 가족들이 미수를 성토하는 것을 크게 꾸짖고, 곧 화제대로 약을 지어오게 하였다. 가족들이 나서서 우암의 마음을 돌려보려 하였으나 우암은 끝내 독약이 든 약을 마시고야 말았다. 우암은 가족들의 우려와는 반대로 오히려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우암은 미수가 의술에 밝고 공명정대한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미수는 또한 우암의 덕망과 도량을 믿었기에 화제를 물리치지 않으리라 확신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유림들 사이에는 널리 알려져 전하고 있다.

17세기 남인과 노론의 영수들이 비록 당파는 다르지만 서로의 인품을 인정하고 존중했다는 것은 오늘을 사는 모든 이에게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이다.






육신 의총비(六臣疑塚碑)






세종 명신(名臣)에,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성삼문(成三問)ㆍ유응부(兪應孚)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이 있어 육신(六臣)이라 부르는데, 그 사적은 육신본전(六臣本傳)에 실려 있다. 이른바 육신총(六臣塚)이 서호(西湖)의 노량진(露梁津) 강 언덕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에 사람을 이곳에서 죽였다.’고 한다. 모두 비석에 새기기를 ‘박씨(朴氏)ㆍ유씨(兪氏)ㆍ이씨(李氏)ㆍ성씨(成氏)의 묘(墓)’라고 하였는데 박씨의 묘가 가장 남쪽에 있고 그 북쪽이 유씨의 묘, 그 북쪽이 이씨의 묘, 그 북쪽이 성씨의 묘이며, 또 성씨의 묘가 그 뒤 10보쯤 떨어진 지점에 있는데 성씨 부자의 묘로, 뒤에 있는 것이 성승(成勝)의 묘라고 한다.



아, 육신이 죽었을 때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 지낸 자는 누구이고, 비석을 세워 그 묘를 표지(標識)한 자는 누구인지 알지 못하겠으니, 자취가 다 없어져서 후세에는 알 수 없음이리라. 육신은 친척이 모두 멸족되어 씨도 남지 않았으니, 이는 필시 평소 교류하던 자가 그 의리를 사모하여 화고(禍故)로써 서로 저버리지 않고 몰래 각각 그 시체를 표시하였다가 이처럼 나란히 장사를 지내고, 돌에 새겨 그곳을 표지하되 일부러 그 이름을 숨겨서 마치 부인의 비석처럼 모씨 모씨(某氏某氏)라고 한 것일 터이니, 그의 마음 참으로 가상하도다.

추강 처사(秋江處士 남효온(南孝溫))가 ‘육신 열전(六臣列傳)’을 짓고 또 당시의 현인(賢人)과 절사(節士)의 행적을 썼는데, 기록이 꽤 상세하다. 그런데 육신의 묘소는 말하지 않았으니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모두 당시의 일이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영남(嶺南) 일선부(一善府 선산(善山))에 하씨의 묘는 있는데, 유독 유씨(유성원)는 장지가 없다. 그 전기에 이르기를,



“모의(謀議)가 누설되었다는 말을 듣고, 일이 이뤄지지 못할 것을 알고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니, 관리가 추후에 그 시체를 가져다가 찢었다.”

고 하였다. 그렇다면 처형한 시기가 서로 같지 않고 시신을 찢은 장소도 또 같지 않아서 그 장사 지낸 곳이 다른 것인지, 아니면 혹 불행하여 끝내 장지가 없는 것인지. 아, 모두 알 수가 없도다.

호서(湖西) 홍주(洪州)에 성씨의 묘가 있고, 충주(忠州) 덕면리(德面里)에 박씨의 묘가 있다. 성씨의 외손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성씨의 묘소는 사지 하나만을 매장한 것이다.”

라고 하니, 박씨의 묘소도 또한 그러한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종적이 이미 인멸되었으니 민간에서 전하는 말을 다 믿을 수가 없다.”

고 하니, 그 말이 참으로 옳다. 이는 강상(江上)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전하여 오늘날에 이른 것에 불과할 뿐, 그 처음 누가 보고 누가 기록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지금에 와서는 이미 옛 일로 증거 댈 만한 것이 없으니, 고집해서 꼭 믿을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반대해서 꼭 믿지 못할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지금부터 수백 년 이후에는 세대가 더욱 멀어져 민간에서 더욱 전하지 않을 것인데, 묘소가 오래 변하여 반신반의 속에 사라진다면 지사(志士)의 추한(追恨)이 무궁할 것이다. 하물며 인인(仁人)ㆍ효자(孝子)의 마음임에랴.

박씨(박팽년)의 6세손이며 지금 동궁(東宮)의 좌익찬(左翊贊)인 숭고(崇古)가 묘소를 수축한 다음 그곳에 비석을 세우고 나에게 부탁하여 그 의심된 점과 미더운 점을 갖추어 기록하여 후세에 민몰되지 않게 하려고 하니, 아, 어질도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충신의 무덤은 / 忠臣之埋  (충신지매)

지사가 비통해하는 바인데 / 志士之悲 (지사지비)

민간에서 전하는 말 / 氓俗之傳(맹속지전)   氓 백성 민

백대의 의혹이로세 / 百代之疑(백대지의)

서쪽 사람 눈 우묵하고 수염 많은 이로 / 西之人深目而髥(서지인심목이염)     髥 구레나루 염

그 사실 아는 자 누구인가 / 得其實者伊誰(득기실자이수)  誰 누구수



금상(今上) 3년 신묘년 5월 하지일(夏至日)에 후학(後學) 양천(陽川) 허목(許穆)은 쓴다





출처 : 산의품 보금자리
글쓴이 : 산의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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